귀환무관 120화
“……제가 아는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럼 널 살려둘 이유가 없는데?”
백서휘가 무감정한 눈으로 손태호를 내려다봤다.
“그, 그래도 중원에서 천마의 유물에 대해 저만큼 많이 아는 자는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찾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
“예.”
“중원에 사는 사람이 수백, 수천만 명은 될 텐데 그중에 천마의 유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정말 하나도 없을까?”
“그, 그자가 협조하지 않을 수도 있잖습니까.”
“협조?”
스릉!
백서휘는 보이지 않는 속도로 검을 뽑아 손태호에게 겨누었다.
손태호는 목에서 따끔따끔한 느낌과 함께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이러면 다 협조하게 되어 있어.”
백서휘는 검을 회수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이래도 네가 협조하지 않겠냐는 듯한 표정으로 손태호를 바라봤다.
따끔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커지자 손태호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고 싶으면 아는 것들을 빨리 말해. 지금처럼 시간을 질질 끌지 말고.”
“처, 천마의 유물이 잠든 곳으로 가기 위한 실마리를 얻으려면 지남침(指南針, 나침반)과 장보도가 필요합니다.”
“지남침이랑 장보도?”
“제, 제 품속에 있습니다.”
백서휘는 손태호의 품속을 뒤져 검은색 지남침과 가죽으로 된 장보도를 꺼냈다.
“이건가?”
“예, 그것들을 드릴 테니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이미 내 손에 들어왔는데 널 안 죽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지, 지남침과 장보도의 사용법은 저만 알고 있습니다.”
“지남침은 나도 쓸 줄 알아. 장보도는 그냥 보면 되고.”
“지남침과 장보도가 제 역할을 하려면 특별한 방법을 써야만 합니다.”
백서휘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지남침과 장보도를 살펴봤다.
지남침의 침은 어떤 한 방향을 가리키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장보도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아 어디에 뭐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특별한 방법을 쓰면 어떻게 되는데?”
“지남침은 과업이 기다리는 곳을 가리킬 겁니다.”
“과업?”
“지남침이 수행하라고 일러주는 과업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완수하면 지남침 옆에 달린 볼록한 부분 중 하나에서 빛이 나면서 장보도에 특정 장소를 가리키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너는 그럼 그 과업을 하나도 행하지 못한 거야?”
“……한 개 수행했습니다.”
“근데 왜 장보도엔 아무것도 안 그려져 있지? 나한테 사기 치는 거야?”
“빛이랑 장보도에 그려진 그림은 과업을 수행한 자의 눈에만 보입니다.”
“신기하네. 그래서 그 특별한 방법이 뭔데?”
“그, 그건 저를 살려주신다면 그때 알려 드리겠습니다.”
“음…….”
백서휘는 팔짱을 끼고 턱을 만지작거렸다.
‘지남침이랑 장보도 둘 다 술법이 담긴 물건 같은데…….’
상식적으로도 이 추측이 맞는 것이 그냥 평범한 물건으로는 손태호가 설명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없었다.
무조건 술법이 담겨야만 조건부로 힘을 내는 귀물을 만드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이 추측이 맞다면 손태호의 도움은 크게 필요치 않았다.
목인걸을 이용해 술법을 발동시키는 법을 알아내면 그만이었다.
‘풀어주면 나한테 복수할지도 모르는 손태호보단 목인걸이 나아.’
목인걸은 괴력난신의 서에 봉인되어있는 데다 아들의 목숨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어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유물에 대해서는 이쯤 물어보고 이놈들이 어디 숨어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백서휘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다른 분야의 질문을 던졌다.
“너희 가문이 숨어 사는 곳이랑 나머지 네 가문이 어디 있는지 말해.”
“처, 천마의 유물에 대해서나 다른 것들이라면 알려드릴 수 있지만 가문 사람들만큼은…….”
“두 번의 기회를 더 줄게.”
“그 두 번 다 말하지 않을 겁니다.”
“네가 죽는다고 해도?”
“……예.”
손태호는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그럼 죽어야지, 뭐.”
백서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손태호의 목을 잘라 버렸다.
눈을 부릅뜬 채 죽은 손태호의 머리가 땅을 굴러다녔다.
‘지남침이랑 장보도 말고는 천마의 유물과 관련된 물건은 더 없는 건가?’
다른 물건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수색을 해봤지만 특별한 건 찾지 못했다.
‘이놈한테서 빼먹을 건 다 빼먹은 것 같으니 이제 손운산을 끌어내야겠다.’
백서휘는 손태호의 몸을 빨래 널듯 나무에 걸었다.
그다음 검을 사용해 나무에 짧은 글을 새겨 넣었다.
파천권마 손운산의 손자.
손태호.
겁쟁이로 죽다.
여기서 다른 말을 더 새겨 넣으면 이쪽이 우스워질 것 같았다.
백서휘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는 다시 마차 지붕에 올라탔다.
“출발!”
백서휘 일행이 탄 마차와 당가의 마차들이 다시 무한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 * *
백서휘 일행이 탄 마차와 당가의 마차들이 무림맹 본단 앞에 정차했다.
문을 지키는 하급 무사들이 신분 확인을 위해 다가오다 ‘당가(唐家)’라고 적힌 마차를 보고 멈춰 섰다.
하급 무사 중 하나가 쪽문을 통해 무림맹 안쪽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나머지 하급 무사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가라고 적힌 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당가의 마차를 수색하겠다고?”
뒤쪽에 있는 마차에서 당진우가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일갈했다.
“위에서 떨어진 지시라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위가 누군데?”
“말단인 저희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당진우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누가 명령을 내린 건지 추측해 봤다.
“수색하겠습니다?”
“……그래.”
하급 무사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당가의 마차들과 백서휘 일행이 탄 마차를 수색했다.
“수색 끝났으면 문이나 빨리 열어.”
백서휘 앞에서 당가의 위세를 보여주지 못하고 체면만 구겼다는 생각에 당진우는 짜증을 냈다.
하급 무사들이 흠칫 놀라며 커다란 문을 열었다.
마부 역할을 맡은 이들이 마차를 무림맹 안쪽으로 몰았다.
이전의 여정과 다르게 당가의 마차들이 먼저 가고 백서휘 일행이 탄 마차가 그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가의 마차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심복이 먼저 나와서 마차의 문을 잡았다.
당진우는 그다음으로 나와서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매무새를 단정하게 가다듬었다.
백서휘와 오룡단도 그들을 보고 마차에서 내렸다.
오룡단 중 몇몇은 무림맹에 와본 적이 없기에 신기해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낯선 사람 앞에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당기준마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진우가 그를 보며 피식 웃자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백서휘는 심드렁한 얼굴로 이쪽저쪽을 보다 질문을 던졌다.
“바로 중진들을 만날 수 있나?”
“곧바로 만나는 건 힘듭니다.”
“그러면 언제 만날 수 있는데?”
“다들 무림맹 내부에 있긴 하지만 맡은 분야가 다 달라서 다른 전각에 있습니다. 이들이 완전히 모이려면 반 시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백서휘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냈다.
당진우는 그가 혹시라도 사고 칠까 싶어 가슴을 졸였다.
“여기 계속 있을 순 없으니 일단 들어가자고.”
“예.”
백서휘는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갔다.
오룡단이 그의 뒤를 바삐 따라가려는데 당진우의 심복이 제지했다.
“여러분들은 저와 함께 다른 곳에서 대기하셔야 합니다.”
“다른 곳?”
백서휘도 걸어가다 말고 당진우의 심복을 쳐다봤다.
“중진들과 나누는 이야기는 관계자 외에는 들을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네. 다들 사고 치지 말고 있어.”
백서휘가 당진우와 함께 다시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오룡단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우리가 지금 가는 곳이…… 응? 저것들은 뭐야?”
“아니, 저들이 왜……?”
“누구길래 그래?”
“십익입니다.”
“십익이라면 그때 마두 잡았을 때 그놈이 말했던 그거 아니야?”
“맞습니다.”
“그놈들이 뭐 하는 놈들인데 눈알을 부라리면서 이리로 오는 거지? 그것도 길을 막고서?”
“십익은 명목상으로는 구파일방을 사문으로 둔 ‘젊은 무인’들의 친목 단체입니다.”
“명목상으로 그러면 실제로는 어떤데?”
“구파일방의 ‘늙은이’들이 나이와 배분, 처한 상황, 체면 때문에 할 수 없는 일과 말들을 젊은 혈기란 명분을 대가며 대신해주는 곳입니다. 사도련과의 전쟁을 주장하기도 하고, 지금처럼 자기들 권위에 도전했다고 생각한 자에게 몰려가서 항의하고 무력을 행사하기도 하지요.”
“……항의라기엔 너무 살기가 진한데? 무력을 행사하려고 그러는 건가?”
“쌓이고 쌓였던 게 그 마두를 두고 다퉜던 일로 터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쌓이고 쌓인 일은 내가 한게 아니잖아? 그리고 마두는 내가 잡은 거니 내 맘대로 해도 상관없는 거였고.”
“저들 생각은 관주님과 다른가 봅니다.”
백서휘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십익의 선두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선두엔 막 이립을 넘은 듯한 남자가 눈에 불을 켜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그래.”
당진우가 앞으로 나와서는 백서휘 앞을 가로막았다.
“뭡니까?”
“금과 은보다 귀한 걸 가로채 간 사람이 여기 있다고 들어서 이렇게 왔소.”
“옥진 도장, 도경(道經)처럼 빙빙 돌려 말씀하지 마시고 정확하고 분명하게 뭐 때문에 이러는 건지 말씀해 주시죠.”
“그 마두에게 복수할 기회를 왜 가로챈 거요?”
백서휘가 당진우의 어깨를 툭툭 치며 나오라고 신호를 보냈다.
당진우는 그의 선택이 그리 맘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옆으로 나왔다.
“못 잡아서 애먹고 있는 걸 대신 잡아줬으면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백서휘가 어깨를 펴고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힘으로도 잡을 수 있었소!”
사람들 틈 사이에 있던 청룡단 소속의 무사가 소리쳤다.
“그래, 잡을 수 있었겠지. 수많은 사람을 희생하면서 말이야.”
“그런 일이 벌어져도 당신은 마두를 잡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뒀어야 하오.”
“아무것도 모르는 이 돌대가리들이랑 계속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
백서휘가 당진우를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돌대가리?”
“이놈!”
“십익을 도대체 뭐로 보고 그딴 망발을……!”
“뭐로 보긴. 상황 파악 못 하는 머저리로 보이지. 너희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 지금도 봐봐. 내가 누군지, 왜 여기 온 건지도 모르잖아.”
사도련과의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쓸데없는 희생을 하며 마두를 잡던 놈들이다.
정의를 논하기 전에 생존부터 걱정해야 할 것들이 멍청하게 행동하는 걸 보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자, 잠깐! 저자는?”
자신을 알아본 사람이 누군가 싶어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얼굴에 검은 때가 묻어 있고 낡은 옷을 입은 거 보니 개방도로 보였다.
“개방은 여기서 빠지겠소!”
“빠지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옥진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정도무림이 처한 상황도 그렇고 저자는…….”
개방도는 옥진에게 전음으로 백서휘에 대해 알려주었다.
“말도 안 되오! 어찌 사람이 그런 일을 행할 수 있소!”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마시오. 아무튼 개방은 여기서 빠지겠소.”
개방도는 포권을 하고 부리나케 장내를 빠져나가려 했다.
“저자가 도대체 누구길래 그러는 거요?”
개방도가 가다가 멈칫하고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백서휘의 정체를 궁금하는 자들에게 간략히 그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행했는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저자가 그자였다니…….”
“저, 저자가 그자였소?”
이마에 계인이 그려진 소림승과 소매에 매화가 그려져 있는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덤빌 것 아니라면 그쪽들도 어서 피하시오. 위험한 상대요.”
“알고 있소.”
“그럼 개방은 이만 가보겠소.”
“옥진 도장 미안합니다. 소림도 이만 빠져야겠습니다!”
“화산파도 여기서 빠지겠소!”
태산북두의 소림과 검파(劍派)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화산파 마저 빠져나갔다.
그러자 남은 십익 소속의 인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옥진은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십익인지 뭔지를 이끄는 놈마저 저러니…….’
사도련과 종전 협정을 맺으러 갔을 때 놈들의 세력을 좀 깎아놓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을 셌는데 남아 있으면 그때는 내가 뭔 짓을 할지 모른다. 하나, 둘, 셋…….”
구심점이 될 옥진이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니 십익들은 자파(自派)의 사람끼리 이리저리 흩어졌다.
“가자.”
백서휘와 당진우는 옥진을 지나쳐 무림맹의 대회의실로 향했다.
대회의실엔 오대세가와 구파일방, 그 외 중소문파들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구파일방의 무인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그들 중엔 십익에 속할 정도로 젊은 무인이 하나도 없었다.
제일 젊어 보이는 자도 불혹(不惑)쯤인 것 같았다.
무공을 배우면 노화가 느려진다는 걸 생각하면 실제 나이는 다들 지천명(知天命)을 넘었을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반 시진은 걸린다더니 되게 빨리 모였네. 사안이 사안이라 그런가.’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오대세가는 불만이 없는데 반해, 구파일방과 중소문파 쪽 사람들은 불만이 좀 있어 보였다.
“내 자리는 어디지?”
“저기 앉으시면 됩니다.”
제갈중헌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 빈자리를 가리켰다.
백서휘는 그곳에 가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전에 보지 못한 모용중광이 그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자, 지금부터 사도련과의 종전 협정에 관한 안건으로 긴급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긴급회의? 회의 다 끝나고 어떻게 사도련주를 설득할지 그 작전에 대해 듣는 거 아니었나?”
백서휘의 말에 제갈중헌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관주님을 못 미더워하는 분도 있고 작전을 맘에 들지 않아 하는 분들도 있어서 일단은 회의로 의견을 모아…….”
“그럼 의견 다 모으고 정할 거 다 정해지면 그때 날 깨워.”
백서휘는 팔짱을 낀 채 눈을 살포시 감았다.
구파일방 쪽과 중소 문파 쪽 인물들이 그를 미친놈 보듯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