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106화
“……제 욕망은 하나입니다. 가문에 속죄하는 것.”
“가문으로 돌아가길 원하나?”
“그걸 바랄 정도로 제가 양심이 없지는 않습니다.”
제갈선우의 목소리에서 진한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럼 도대체 뭐 때문에 속죄하기를 원하는 건데?”
“가문에 남아 있는 아버지가 고개를 들고 사셨으면 합니다. 어머님의 무덤에도 성묘하러 가고 싶고요.”
“이런 욕망이 있으면서 왜 없다고 한 거야?”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 생각했기에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관주님의 명을 따르려면 저는 성만 ‘제갈’ 씨지, 제갈세가 사람이 아니어야 하니까요.”
여기서 자신이 명령을 거둘 수 있단 가능성을 보인다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제갈선우의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겠지.’
커진 욕망은 그 무엇보다 강한 동기부여가 되어 원래 도달했을 시간보다 더 빠르게 제갈선우를 고수로 만들게 되리라.
“그 명령이 영원히 유효하지는 않아.”
단념하고 있던 제갈선우의 마음에 백서휘는 돌을 던졌다.
제갈선우의 마음에 파문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 명령을 거두실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처음 명령을 내렸을 때부터 거둘 생각을 하고 내린 거야. 천하제일인의 금분세수도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한 데, 그보다 못한 너희들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 그러면 언제쯤 명을 거둬주실 건지 알려주시면…….”
“네가 강해져서 혼자서 모든 위협을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오고, 그 일로 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때 명령을 거둬줄 거야.”
“위협을 해결한다는 건…….”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싹 다 죽여서 전초제근(剪草除根)을 하거나,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줘서 감히 덤빌 생각을 못 하게 만들면 돼.”
제갈선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같은 가문 사람에게도 전초제근을 하는 건 좀 심한 것 같습니다.”
“그건 네 자유야. 전초제근을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면 안 해도 돼. 대신, 나랑 내 가족에게 너로 인해 생긴 위험과 손해를 끌고 오지 마.”
“정말로 그거면 제 바람을 이뤄도 되는 겁니까?”
“그래, 내가 말한 것만 지키면 너는 가문에 ‘속죄’할 수 있다.”
백서휘는 제갈선우가 확신하도록 결정타를 날렸다.
‘지금보다 더 고수가 되면 꿈꿔왔던 걸 이룰 수 있어!’
마음속에 꺼져 가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자 제갈선우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전에 보여줬던 그의 눈빛이 식은 차 같았다면, 지금은 펄펄 끓는 쇳물 같았다.
“무조건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 더 남아 있지 않다면 일월안을…….”
“쉬는 시간 안 필요해?”
“안 필요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일월안을 가르쳐도…….”
“됩니다.”
제갈선우는 무공을 배우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 모습이 웃겼던 백서휘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일월안을 익히기 전에 알아둬야 할 정보를 전달하지. 설명했다시피 전장의 모든 정보를 빠르게…….”
“질문 있습니다.”
“뭔데?”
“일대일의 대결에서는 소용이 없는 겁니까?”
“소용 있지. 그런데 일월안이 최대 효율을 보이는 건 다대다의 상황에서야.”
“그렇군요.”
“아무튼, 그 전장의 정보를 빠르게 습득하게 해주는 안법인데 이것도 무공이라 수련이 좀 많이 필요해.”
“얼마나 많이 필요하길래 그렇게 강조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알아둬야 할 정보를 전달하면서 했던 말 기억해?”
“전장의 모든 정보를 빠르게…… 아!”
제갈선우는 백서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설마 아주 작은 정보 하나까지 다 머릿속에 들어온다는 겁니까?”
“그건 네 능력에 따라 달렸어. 네가 머리가 좋고 정말 전장의 ‘모든 정보’를 얻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데,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큼직큼직한 정보들만 네 머릿속에 새겨질 거야.”
“둘 중 더 좋은 건 역시 전자 쪽인 겁니까?”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고,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달라. 능력이 되고 작은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면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면 되는 거고, 아니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음……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설명에 들어간다.”
“네!”
“일월안에서 눈 말고 가장 중요한 건 뭘 것 같아?”
“기운을 어떻게 운용하는지가 가장 중요할 것 같습니다.”
단번에 정답을 맞히는 걸 보면 확실히 제갈선우의 눈치와 오성은 뛰어났다.
“이유는?”
“관주님이 말씀하신 걸 보면 일월안을 쓰면서 습득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을 조절할 수 있는 것 같은데…….”
백서휘는 이론적 설명과 이해를 돕는 문제들을 섞어가며 제갈선우를 가르쳤다.
눈치가 좋고 똑똑한 학생이라 이론과 관련된 부분에서 막힘없이 진도를 뺄 수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풀벌레와 부엉이가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무시할 만큼 작은 소리가 아닌 데다 점점 커져만 갔다.
그 탓에 두 사람의 삼매경이 한순간에 깨졌다.
“아…….”
제갈선우의 입에서 아쉬움 가득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어라?”
산중에 밤이 일찍 찾아온다는 걸 알지만 이렇게 빠르지는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초저녁에 지펴놓았던 모깃불이 어느새 꺼져 있었다.
백서휘는 고개를 치켜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휘영청 밝은 달과 흐드러지게 많은 별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이쯤에서 수업을 마쳐야겠어.’
날도 어두워졌고 이론적인 부분에 관해 설명도 다 했으니 끝내도 무방하리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어.”
“더 배울 수 있습니다.”
제갈선우의 눈은 이글거렸고, 백서휘 본인도 열의에 가득 찬 학생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음…….”
빨리 고수가 되고 싶었던 제갈선우는 간절한 눈빛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백서휘는 팔짱을 끼고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여기서 끝낸다.”
“관주님.”
“앞으로 남은 건 실제로 일월안을 익히고 사용해 보는 건데 지금처럼 집중력이 고갈된 상태로는 힘들어.”
제갈선우가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혼자서 일월안을 익히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왜 그래야 하는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앞을 못 보게 될 수 있거든.”
“그러면 저는 다음 수련 시간이 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겁니까?”
“그런 시간 낭비를 내가 두고 볼 것 같아?”
“아니요.”
“잘 아네. 네가 할 일은 간단해. 시야각 안에 보이는 모는 걸 10초 동안 기억한 후 나중에 그것을 제대로 기억해 내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는 수련을 하는 거야.”
“아! 그러면 나중에 일월안을 익혔을 때 확실히 큰 도움이 되겠군요.”
“처음에는 정지된 물체, 이를테면 산이나 나무 같은 거로 시작하고, 점점 익숙해질수록 움직이는 물체가 추가되는 쪽으로 난도를 높여가면 된다. 알았어?”
“네!”
“가봐.”
제갈선우가 꾸벅 인사를 한 후에 잠을 자는 곳으로 돌아갔다.
백서휘는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겼다.
‘남궁민과 모용진은 어떠려나.’
* * *
“어떻게 이걸 못 버텨? 이건 거력금강신의 기초 중의 기초 부분이야!”
백서휘가 사자후에 버금가는 소리를 내질렀다.
“죄, 죄송합니다.”
“이것도 못 하면 너는 첫사랑이랑 이뤄질 가능성이 없어!”
“저, 정말요?”
“네가 말한 여자애의 할아버지가 천하 이십대 상단 중 하나의 대방이라며?”
“네…….”
“성에서 이름을 날리는 고수도 비벼볼 가능성이 없는데 그조차 안 되는 수준으로 그 애랑 결혼한다고? 꿈 깨는 게 좋을 거다.”
“저, 정말 가능성이 없어요?”
“사람들이 너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알지?”
모용진이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는지 알면서 그런 삶을 살았다고? 허! 얘도 진짜 만만치 않은 꼴통이네.’
백서휘는 질렸다는 듯 탄식을 흘렸다.
“그런 평가를 받는 놈한테 딸 혹은 손녀를 주려면 그만한 이점(利點)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근데 너한테 지금 이점이 있어?”
“……없어요.”
“가문과 연도 끊어졌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네가 잘생긴 것도 아니잖아? 지금 너를 구원해 줄 건 무공밖에 없어.”
백서휘는 상황이 변했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는 모용진이 안타까워 진심 어린 조언을 했다.
“좋아, 조금 전에 얘기한 거는 딱 봐도 그냥 듣고 잊어먹을 것 같으니까 확실한 반대급부를 제시할게. 너 내가 만복상단 대방이랑 친한 거 알지?”
“네.”
“너 열심히 수련하면 그 대방 통해서 그 여자애랑 만나는 자리를 만들어줄 수도 있어.”
“저, 정말요?”
“거기서 네가 잘해서 그 할아버지랑 여자애한테 호감을 심어놓으면 나중에 결혼 상대를 찾을 때 더 유리하겠지?”
“아…….”
아무것도 이뤄진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모용진은 결혼식을 치르는 사람처럼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자, 이제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겠지?”
“수련!”
“오늘은 여기서 끝낼 테니까 내가 하라는 거 열심히 하고 이따 보자. 알았어?”
“네.”
“아! 그리고 가다가 남궁민 보면 나한테 오라고 해. 잠깐 얘기 좀 하자고.”
“알겠어요.”
춤을 추며 걸어가는 모용진을 보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에휴, 저놈 진짜…….
백서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잠시 후, 남궁민이 헐레벌떡 그를 향해 뛰어왔다.
“부, 부르셨어요?”
“여기 앉아봐.”
“네.”
남궁민이 백서휘 앞에 있는 자그마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네 욕망이 돌아가신 할아버지처럼 검성이 되고 싶다는 거였지?”
“네.”
“그 욕망을 좀 고민해 봤는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아.”
“어떤 선택이요?”
“남궁혁에게 모든 걸 맡기던가. 아니면 너 스스로 노력해서 ‘검성(劍聖)’에 도전하든가.”
남궁민이란 인격이 주 인격으로서 지위를 상실하는 것과 본인 스스로 노력하는 것.
백서휘는 이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건 별로 어려운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궁혁과 남궁민은 서로를 같은 사람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있고, 전투나 감정이 격한 상황을 제외하면 주 인격은 남궁민이었으니 당연히 스스로 노력하는 길을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다.
‘충격 요법으로 좀 괜찮은 것 같군.’
백서휘는 스스로의 교수법에 감탄했다.
그때 남궁민은 그의 예상과 다른 답을 내보였다.
“그것들 말고는 할아버지처럼 검성이 될 가능성이 없는 거예요?”
남궁민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없다.”
“왜죠?”
“겁쟁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
백서휘는 단언하듯 말했다.
“……절대로요?”
“그래, 겁쟁이는 절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그러니까 네가 정말 바란다면 선택해야 돼. 이제부터라도 남궁혁에게 모든 걸 맡기던가. 남궁혁에게 의지하지 않고 너 스스로의 힘으로 검성이 되던가.”
“왜 이제 와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검성이 되고 싶다며? 그게 네 욕망이라며? 그렇게 큰 꿈을 꿨으면 포기하는 것도 하나쯤은 있어야지.”
백서휘가 냉정하게 말하자 남궁민이 입을 꾹 닫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니까 선택해. 남궁혁에게 모든 걸 맡기던가. 아니면 검성이 되기 위해 너 스스로 노력해 보던가.”
“……선택할게요.”
“그래.”
백서휘는 이번엔 용기를 내서 스스로의 힘으로 검성이 되는 것을 선택할 거라 생각했다.
“……저는 남궁혁에게 모든 걸 맡기겠어요.”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남궁혁에게 모든 걸 맡기겠다니?”
“관주님도 인정하셨잖아요. 저보다 혁이가 더 낫다고.”
정곡을 찔린 백서휘는 바로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는 다른 건 몰라도 무공에 한해서는 남궁혁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 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시도조차 안 하고 포기하면 어떡해?”
“저도 도망만 가지 않았어요. 수십, 수백 번을 도전해봤다고요! 그런데……. 그런데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럼 진짜로 남궁혁에게 모든 걸 맡기겠다는 거야?”
“네.”
“그럼 우리의 만남은 이게 마지막인 건가?”
“……지켜보고는 있을 거예요.”
“그래, 그럼 그 속에서 지켜봐. 네가 한 선택이 불러온 결과들을.”
“네, 그럴……. 뇌룡보의 한계 속도를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남궁민이 들어가고 남궁혁이 바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백서휘는 씁쓸한 표정으로 남궁혁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뇌룡보의 한계 속도를 올리려면 진기의 이동을 더 빠르게 해야 한다. 문제는 혈맥과 혈도가 단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억지로 속도를 끌어올릴 때 발생하는데…….”
남궁민은 장막 뒤에서 남궁혁과 백서휘가 무공 수련하는 걸 침울한 기분으로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