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77화
상연하는 반드시 죽이겠다는 각오로 검에서 검강을 뽑아냈다.
연꽃 빛에 휘감겨진 검이 백서휘의 등을 노렸다.
백서휘는 공격을 이미 예상했기에 코웃음 치며 피할 수 있었다.
“불자의 검이라기엔 너무 살기 넘치는 거 아닌가?”
“악업을 쌓인 자를 죽이는 검이니 살기가 넘쳐도 석존(釋尊)께서 인정하실 거다.”
“내가 무슨 악업을 쌓았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네.”
“반지를 강탈했잖으냐!”
보타문에는 다른 문파에 절대 꿇리지 않는 두 개의 물건이 있었다.
하나는 개파조사 때부터 내려온 검으로 지금 검후가 들고 있는 것이기도 한데, 그냥 문파의 역사가 담긴 검이 아니라 강호 12대 명검 중 하나라 가치도 말도 안 되게 뛰어난 검이었다.
다른 하나는 개파조사의 정인이었던 사내가 선물한 것으로 벽사(闢邪)의 힘이 담긴 반지였다.
착용한 사람에게 사이한 것을 하루에 한 번 부술 수 있게 해준다.
상연하는 지금 벽사의 힘이 담긴 반지를 백서휘가 강탈해갔다고 여기고 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돈을 주고 샀어.”
“도, 돈을 주고 샀다고?”
제자가 문파의 신물을 팔았다고 생각한 상연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안 판다고 그래서 내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백서휘가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 거짓말하지 마라! 주희는 그럴 아이가 아니야!”
“거짓말 같으면 위로 올라가서 당신 제자한테 물어보던가.”
“말도 안 돼. 주희가 어찌…….”
“딱 한 번만 더 봐준다. 여기서 더 공격하면 사정 안 봐주고 바로 죽여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둬. 난 간다.”
백서휘가 검을 납검하고 돌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가려면 반지를 내놓고 가라!”
“돌겠네. 남의 반지를 왜 내놓으라는 거야.”
“남의 반지?”
“그럼 돈 주고 샀으면 내 거지.”
“뭐, 뭐라고! 이놈이!”
상연하가 화가 난 얼굴로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진짜 손에 피 묻히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묻혀야겠네.”
백서휘는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꼭 이길 것처럼 말하는구나.”
“이길 거니까 이길 것처럼 말하지.”
“네가 든 그 검으로 말이냐?”
“중원 제일의 검수라는 하백상도 검으로 때려잡았는데 검후 정도야 가뿐하지.”
“나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자를 네깟 놈이 잡는다고? 우습구나. 우스워.”
“못 믿겠으면 덤비던가.”
백서휘는 푸른빛 검강이 감싸진 검을 까딱거려 도발했다.
검강을 본 상연하의 눈빛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무림맹은 하백상이 죽었다고만 밝히고 사인이 무엇인지는 발표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죽은 게 맞다면 진짜 백서휘가 범인일지도 몰랐다.
이러한 생각을 하니 자연스럽게 검병을 움켜쥔 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만만치 않은 놈이다. 주도권을 주면 위험해질지도 몰라. 내가 먼저 공격해서 주도권을 잡는다.’
상연하는 숨을 참으며 전력으로 보법을 밟았다.
순간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눈앞에 나타났다.
챙!
이미 예상했기에 백서휘는 가뿐하게 공격을 막아냈다.
‘반격한다.’
푸른 검강이 담긴 검을 있는 힘껏 휘둘러 상연하를 후려쳤다.
두 사람의 검이 부딪히며 귀청을 때리는 굉음을 만들어냈다.
콰아앙!
반격하리란 건 예상했지만 위력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상연하가 빠른 속도로 뒤로 날아갔다.
그래도 그녀는 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라고 다른 평범한 무인들과 다르게 반응했다.
그녀는 천근추를 펼쳐 순식간에 균형을 회복하고 반격을 준비했다.
이어서 공격하려던 백서휘는 쫓아가는 걸 멈추었다.
타닥!
무사히 착지하는 데 성공한 상연하는 힘을 잔뜩 주어 땅을 박찼다.
다시 초근접거리까지 붙은 그녀는 보타문이 자랑하는 쾌검식을 연이어 날렸다.
백서휘의 한쪽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정신없이 몰아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상연하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였다.
‘누가 더 빠른지 한번 보자고. 경천신뢰!’
하늘을 놀라게 할 정도로 빠른 검이 상연하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당황한 그녀는 출수했던 팔을 다시 회수해 백서휘의 검을 막아냈다.
백서휘는 멈추지 않고 상연하가 손해볼 만한 초식을 계속 날렸다.
‘주도권은 내가 가져간다. 광풍번천!’
미친 바람이 되어 일정 공간 안에 있는 모두를 죽이는 초식.
보통 다수의 적이 덤빌 때 쓰지만 지금처럼 한 사람에게 써도 상관없었다.
카카카카카카캉!
여러 사람이 하나씩 받아야 할 공격을 혼자 감당해내야 하는 건 못할 짓이었다.
그런데 상연하는 지금 그 ‘못 할 짓’을 하고 있었다.
백서휘는 계속해서 그녀를 몰아갔다.
‘정신없을 때는 환검이 최고지.’
하늘이 넋을 빼놓듯 상대의 혼을 빼는 천탈기백.
천지가 팽팽 도는 것처럼 느끼게 해 정신을 어수선하게 하는 천선지전.
두 초식을 섞어서 쓰니 검후의 몸에 상처가 계속해서 늘어났다.
‘결정적인 한 방은 역시 무거운 게 좋겠지. 발지의천(拔地倚天)!’
땅에서 빼어나 하늘에 닿듯 백서휘는 거력을 품은 중검을 아래에서 위로 거세게 올려 쳤다.
콰아아앙!
태초에 있었을 법한 빛이 주변으로 퍼지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리가 났다.
상연하는 입에서 선혈을 한 양동이보다 조금 적게 토해냈다.
‘내, 내가 이런 애송이한테 검에서 밀리다니…….’
무림인은 빠르면 불혹, 늦으면 지천명일 때 최전성기를 맞는 경우가 많았다.
육체는 하향 곡석을 그리지만, 기술은 완숙해지고 내공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지금 상연하의 나이는 지천명을 조금 넘었다.
기술과 내공이 최고점을 찍은 시기였고, 본인 스스로 지금이 최전성기라 자화자찬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에 반해 상대는?
그녀가 추측할 때 백서휘는 20대 중반에서 후반 사이.
육체의 능력은 좋을지라도 기술은 미숙하고, 내공 역시 일천해야만 했다.
그런데 현실은?
백서휘는 육체 능력도 능력이지만 펼치는 기술이 엄청나게 뛰었다.
검후가 가장 자신하는 쾌검식을 같은 쾌검식으로 압도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없는 틈을 타 환검을 전개하는 것도 좋았고, 마지막에 중검으로 내리쳐 상대의 방어를 꿰뚫는 것도 최고의 선택이었다.
검을 그냥 휘두르는 걸 넘어서 어떤 식으로 운용을 하면 가장 좋을지를 아는 자라고 할 수 있었다.
‘검후’라는 허명에 취해 더는 수련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원통하구나. 더 수련하고. 더 열심히 검술을 연구했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잘 싸웠을 텐데…….’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보니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져도 이길 거라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버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상연하는 한 번 더 땅바닥에 피를 또 한 바가지 토했다.
“그러게, 그냥 가게 놔뒀으면 됐잖아.”
백서휘는 목을 칠 생각으로 상연하 쪽으로 다가갔다.
“……본문의 신물을 가져가는 데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냐?”
“신물? 개똥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내가 언제 신물을 가져갔어?”
“제자한테서 신물을 샀다고 그랬잖느냐.”
“반지를 샀다고 그랬지. 신물을 산다고 했던 적은 없는데?”
“그 반지가 본문의 신물이다.”
“미친 소리 하지 마. 우리 어머니가 끼던 반지가 무슨 보타문의 신물이야.”
“어머니가 끼던 반지라고?”
“그래, 아버지가 결혼 약속할 때 어머니께 준 반지야.”
“저, 정말이냐?”
백서휘는 품에서 반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 이건!”
“신물 아니지?”
“어…….”
“상황이 안 좋아서 내다 팔았는데 그게 당신 거쳐서 소검후한테 갔다고 하더라고.”
“선물로 준 반지는 맞는데…….”
“그래, 당신이 선물한 걸 내가 당신 제자한테 산 거야. 그것도 거액의 돈을 주고.”
“그, 그러면 신물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당신 제자한테 물어봐야지.”
그때였다.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를 들은 한주희가 후다닥 돌계단을 내려왔다.
“스승님!”
“주희야!”
한주희와 상연하는 서로를 끌어안고 잠시 있었다.
백서휘는 불편한 심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아! 어떻게 된 일이에요? 커다란 소리는 뭐고, 스승님은 왜 이렇게…….”
“너희 스승이 날 오해해서 죽이려고 했거든.”
“오해요?”
“너한테서 신물을 가져갔다나 뭐라나. 진짜 내가 고수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거야.”
한주희가 상연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자가 한 말 사실이에요?”
사람이 살다 보면 인정하기 싫은 일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을 상연하는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맞다.”
“인정했으면 사과부터 해야지. 그렇게 모가지 뻣뻣하게 계속 있을 거야?”
“미, 미안하다.”
“그게 사과야? 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대에게 몹쓸 짓을 했어. 오해가 풀렸으니…….”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고, 눈에서 물이 나와야 사과지. 이건 사과가 아니야. 아,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뭘 하는 건지.”
백서휘가 땅이 꺼져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배, 배상을 바라는 거냐?”
“그래, 배상해야지. 내가 하수여서 칼질을 조금만 못 했어봐. 그럼 죽었을 거 아니야.”
“보, 본문에는 돈이 없어서 그대에게 배상할 수가 없다. 내가 잠시 보타문을 비운 것도 돈을 융통하기 위해서야.”
“그럼 다른 거로 배상을 해.”
“배상…….”
자금난에 빠져 있어 보타문의 재산은 줄 수 없었다.
그러면 다른 걸 줘야 하는데 상연하의 머릿속에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다 조금 전에 백서휘가 어머니의 반지를 사러 온 거라고 말했던 게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딱 좋은 걸 그대에게 주겠다. 아마 그대 마음에도 들 거야.”
“뭔데?”
“그대에게 보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진언을 알려주려고 한다.”
“진언이라면 나도 많이 알아. 그러니까 반짝이는 걸 내놔.”
“어머니를 만날 수 있어도 그렇게 말할 텐가?”
“뭐, 뭐라고?”
“올바르게 기를 운용하며 이 진언을 읊조리면 그대는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뭐?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심상세계를 구축하는 진언이다. 원래 보타문 제자들이 정신수양을 하거나 깨달음을 얻으려 할 때 쓰는 주문인데…….”
“진짜로 만나는 게 아니라 심상세계라고?”
“그래.”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진언이 아니라 심상세계에서 볼 수 있게 하는 진언이란 사실에 백서휘는 살짝 실망했다.
‘잠깐, 이거 엄청나게 귀한 거잖아?’
주술사가 아닌 무인이 심상세계를 구현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이 진언으로 진짜 심상세계의 구현이 가능하다면 써먹을 무기 하나를 더 얻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거 안 먹히면 어쩔 거야?”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날 찾아와서 보타문의 두 신물을 가져가라.”
“좋아.”
“그럼 지금부터 진언을 알려주겠다. 옴 바사라 게르 니라…….”
“다 외웠어.”
“그, 그걸 한 번에 외웠다고?”
“딱히 어렵지는 않던데? 빨리 진언을 읊으면서 기를 운용하는 방법이랑 주의사항이나 알려줘.”
“그, 그러지.”
백서휘는 상연하가 알려주는 기의 운용법과 주의사항도 한 번에 외웠다.
“더 알아야 할 건 없는 것 같으니 난 이만 가볼게.”
“잘 가라.”
백서휘는 보타도에 들어왔을 때처럼 노인의 나룻배까지 등평도수로 갔다.
그걸 본 상연하와 한주희는 그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