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76화
녹혈문, 금응문, 음살문의 문주가 약속했던 시간까지 남은 시각은 일각.
한주호와 함께하기로 한 자들은 내일이 또 올 것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쿵쿵쿵!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문을 바라봤다.
“비겁한 놈들 약속한 시각마저 어기다니…….”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대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긴장하며 허리춤에 있는 무기로 손을 가져갔다.
“어? 뭐야? 열려 있었네.”
백서휘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한주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누구냐!”
“그쪽 도와주러 온 낭인.”
“낭인?”
다들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을 때 한주호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신 것 아니었습니까?”
“소검후의 서신을 읽었으니 알겠지만, 그쪽을 도와야 내가 반지를 살 수 있거든.”
“주희에게 드릴 서신은 제가 지금 써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콰앙!
귀청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대문이 날아갔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대문이 있던 쪽으로 향했다.
세 문주가 차례대로 한가장의 안으로 들어왔다.
뒤이어 그들 휘하의 문도들이 뒤따라왔다.
백서휘는 날카로운 눈으로 세 문파에서 온 모든 이들을 훑어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세 문파가 이끌고 온 병력이 적었다.
‘병력을 숨긴 건가?’
문주와 허수아비 병력들로 시선을 끄는 사이에 본대가 뒤라도 치면 큰일이었다.
백서휘는 기감을 최대한도로 발휘했다.
그러자 주변 모든 것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없군. 그럼 저들은 왜 저렇게 적은 인원을……. 한가장을 우습게 봤군.’
셋이 힘을 합친 것이라 적게 데려와되 된다고 여긴 것 같았다.
‘한가장을 도우려면 이놈들만 잡고 끝내면 안 되겠네.’
녹혈문, 금응문, 음살문을 찾아가 멸문시켜야 한가장이 안전할 듯싶었다.
‘일단은 계속 지켜본다.’
백서휘가 존재감을 감추고 한가장 사람들의 틈으로 들어갔다.
한가장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비겁하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세 문주에 분노하고 있었다.
“약속했던 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지 않았소!”
“아버지 곁에 일찍 보내주려고 온 거니까 우리한테 고마워해야지. 안 그러오?”
“그렇소.”
음살문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주호는 손톱이 파고 들도록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세 문주는 비겁하게 합공으로 아버지를 죽였던 이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아버지를 언급하며 도발까지 하니 한주호로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는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은 뽑아서 뭐 하려고 그러나? 설마 우리를 죽이려고?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냥 접싯물에 코 박고 죽는 게 나을 거다.”
“맞다. 가당치 않은 생각을 하려거든 그냥 자진하거라. 그게 너와 한가장에 좋은 일일 거다.”
“모두를 위해 그냥 죽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아니냐.”
어디 사파 아니랄까봐 세 문주의 혀는 간사하고 거칠었다.
“이이이익!”
분기탱천한 한주호는 검을 든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거봐라. 아무것도 못하지 않으냐.”
“그냥 죽으라니까.”
“이러지 말고 빨리 정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벌써요?”
“밤에 술 약속이 잡혀 있어서 최대한 빨리 끝냈으면 합니다.”
백서휘는 어이없단 얼굴로 음살문의 문주를 바라봤다.
음살문의 문주는 자기가 죽을 거란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은 듯했다.
‘내가 죽여주는 수밖에 없겠어.’
백서휘가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는데도 세 문주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백서휘와 그들 사이에 무력 격차가 크게 났다.
“저도 빨리하고 문파로 돌아가는 쪽이 좋습니다.”
“그럼 치도록 합시다. 모두 공격!”
세 문주의 명령에 뒤에 도열해 있던 무인들이 한가장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백서휘는 선두에 있는 한주호보다 더 앞으로 치고 나왔다.
“손님?”
“서신 쓸 준비 하고 있어.”
“네?”
백서휘는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묻는 한주호에게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확실하게 반지를 받아내려면 내 대단함을 보여주는 게 낫겠지.’
앞을 보니 세 문파의 문조들이 악귀 같은 얼굴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백서휘는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그들에게 던졌다.
의미 모를 그의 행동에 아군과 적군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대한 화려하게.’
검이 날아가는 속도가 점진적으로 증가하더니 엄청나게 빨라졌다.
쐐애애애액!
녹의를 입은 무인의 목을 꿰뚫고 지나가고 뒤에 있는 흑의와 황의를 입은 자들의 목을 쳤다.
푹! 서걱! 서걱!
세 문파의 무인들은 어검술에 대처를 조금도 하지 못했다.
보고도 못 막을 정도로 무인들이 약한 걸 보며 백서휘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중원 문파의 한계인가.’
세 문파는 저항다운 저항이 없었다.
검기고 검강이고 없이 그냥 검만 움직이는 데도 그랬다.
“사, 사술이다. 모두 도망…….”
푹!
“주술은 시전자를 죽이면 된다고 그랬어. 저놈부터 먼저 죽…….”
푹!
두 명의 목을 꿰뚫었음에도 뭔가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더 빠르게 해야 하나?’
궁금증을 가지고 슬쩍 뒤를 돌아봤다
한주호가 넋이 나간 얼굴로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었다.
눈동자의 움직임을 보니 그는 겨우겨우 지금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 같았다.
‘이것보다 조금 느리게 조종해야겠다.’
백서휘는 검이 날아다니는 속도를 살짝 떨어지게 한 후 가만히 서 있었다.
“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오! 뭔데 저들을 도와주는 거요!”
“오늘만 특별히 도와주기로 한 낭인이야.”
“내, 내가 아니, 우리가 더 돈을 드릴 테니 이리로 넘어 와주시오.”
금응문의 문주가 애원하듯 말했다.
“돈이라면 넘치도록 많이 있어.”
“그럼 여자는 어떻소? 내 딸은 이곳 절강성에서도 손에 꼽히는 미모를 지니고 있소!”
“호북성 무한에 있는 청아루의 루주보다 예쁜가?”
지금 청아루의 루주는 중원제일미란 말을 붙여도 손색이 없는 여자란 평을 듣고 있었다.
“그 청아루면…….”
녹혈문의 문주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닫았다.
“고슴도치처럼 무조건 예뻐한 쪽은 아닌가 보네. 하하.”
“원하는 게 뭔지 말씀해주시오! 최대한 맞춰드리겠소!”
음살문의 문주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백서휘는 팔짱을 끼고 한참 동안 고민하는 척했다.
세 문주가 기대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는 내가 원하는 걸 못 줄 것 같다.”
“마, 맞춰준다고 그러지 않소.”
“아냐, 못해. 그러니까 잘 가.”
백서휘가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그러면 자비를 베풀…….”
푹!
“사, 살려…….”
서걱!
“도망쳐라! 도망…….”
서걱!
세 문주는 모두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었다.
나머지 문도들이 항복하려했지만 백서휘는 받지 않았다.
나중에 자신이 사라졌을 때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다려라. 마무리하고 올 테니까.”
백서휘는 손을 뻗어 검을 잡고는 전력으로 응룡비천신법을 펼쳤다.
목적지는 녹혈문, 금응문, 음살문이었다.
‘복수의 싹이 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밟아놔야지.’
가장 먼저 간 곳은 독을 쓰는 녹혈문이었다.
그들은 독을 미친 듯이 하독하여 백서휘를 제거하려 했다.
만독불침인 백서휘에게 독은 색다른 느낌을 주는 것에 불과했다.
‘잘 가라고.’
녹혈문의 나머지 문도들은 조금의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
‘남은 건 금응문과 음살문인가.’
금응문에서 매의 발톱처럼 날카로운 조를 휘둘렀지만, 더 날카로운 백서휘의 검에 모두가 죽었다.
음살문 역시 비슷했다.
나머지 문도 중 가장 강한이가 정면으로 도전했지만, 생채기도 내지 못했다.
이후로는 학살극의 시작이었다.
염살문에 소속된 모든 이가 죽자 백서휘는 한가장으로 돌아왔다.
장원 안엔 한주호와 끝까지 남은 이들이 시체를 정리하고 있었다.
백서휘는 한주호를 찾아가 손을 내밀었다.
“내놔.”
“서, 시신이요? 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한주호는 지필묵을 가져와 일필휘지로 서신을 적어 백서휘에게 건네줬다.
“확인해도 되지?”
“……네?”
“아니, 고맙다는 얘기랑 반지 팔라는 얘기가 없으면 여기 또 와야 해서 그래.”
“아! 확인하셔도 됩니다.”
백서휘는 개인적인 부분이 적힌 내용은 건너뛰면서 빠르게 서신을 읽어내려갔다.
“이 정도면 되겠군.”
“혹시 원하시는 게 있으시면…….”
“없어.”
백서휘는 무심하게 말하고는 절강성을 향해 응룡비천신법을 펼쳤다.
* * *
“받아.”
백서휘는 서신이 담긴 봉투를 툭 하고 한주희에게 던졌다.
“이게…….”
“네 오빠가 쓴 서신이다. 빨리 읽고 반지 가져와서 돈이나 받아가.”
“네.”
한주희는 봉투에서 서신을 꺼내서는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백서휘는 느리게 읽는 그녀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한시가 급한데 말이야.’
어느 순간부터 한주희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백서휘는 그녀가 뭐 때문에 저러는지 생각해봤다.
개인적인 부분을 넘어가며 읽던 도중, 서신에서 아버지의 부고를 알리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본 적 있었다.
아마 그것 때문에 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해는 하는데……. 빨리 좀 읽어!’
염원이 통한 건지 한주희는 나머지 내용은 금방 읽어냈다.
“다 읽었어요.”
“그럼 팔아야 한다는 걸 알겠지?”
“네.”
“그럼 빨리 가져와.”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시면 제가 반지를 가져올게요.”
한주희가 잠시 사라졌다가 옥반지를 가지고 나타났다.
“여기요.”
백서휘는 옥반지를 받아 꼼꼼히 확인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모양이라 어머니가 아끼던 반지란 걸 단번에 아랑봤다.
“받아.”
백서휘는 사람 머리통만 한 주머니를 한주희에게 건네줬다.
“네 몫이랑 보타문에 기부할 돈을 같이 넣었어. 확인해봐.”
한주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머니 속 내용물을 확인했다.
“헉! 이렇게 많이 주셔도 돼요?”
금원보와 금자는 일의 심각성을 고려해도 너무 과한 것 같아서 은원보와 은자를 섞어 넣었다.
백서휘의 입장에서도 이 돈이 살짝 크긴 하지만 주는 것에 부담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싫으면 내놓던가.”
“아, 아니에요.”
“그럼, 난 가본다.”
“잘 가세요. 감사했어요.”
“흥! 평생 감사하며 살아.”
“그럴게요.”
백서휘는 빠른 걸음으로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탁탁탁탁!
돌계단을 밟고 내려가고 있는데 어둠속에 있던 정체 모를 누군가가 그에게 검을 날렸다.
‘뭐야.’
괴물 같은 반응속도로 피했지만 놀란 건 감출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이어지는 공격.
적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아무렇지 않게 검을 막아냈다.
카캉! 채채채채챙!
백서휘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연격을 막아내며 상대를 확인했다.
사십 대가 막 된 듯한 중년 여인이 그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백상과 비슷한 경지.’
이곳에 있을 만한 사람 중에 이런 실력을 가질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역사 깊은 불문이자 검문인 보타문의 정점!
“검후 성연하?”
“이 무도한 놈아! 내 제자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
“무슨 짓을 했냐니?”
“제자와 내가 머무는 곳에서 지금 내려온 거잖느냐!”
“받을 물건이 있어서 들린 거니까 이쯤하고 꺼져. 좋은 날인만큼 특별히 봐줄 테니까.”
“받을 물건? 무슨 물건을 말하는 거지?”
“그걸 알아서 뭐하게.”
“밝히는 게 네 신상에 좋을 거다.”
“반지 받았다. 됐지?”
그때 성연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물건이 있었다.
‘설마 그 반지를……?’
백서휘는 다시 터덜터덜 돌계단을 내려갔다.
“이놈! 가만두지 않겠다!”
성연하가 악귀와 같은 표정으로 검을 내리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