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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무관-75화 (75/202)

귀환무관 75화

백서휘가 알기로 검후의 나이는 지천명을 조금 넘었다.

그런데 저 여자는 젊은 걸 넘어 청춘이 가지는 특유의 싱그러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불문(佛門)이고 검문(劍門)인 보타문에서 미용을 목적으로 주안술(朱顔術)을 익힐 리는 없으니 저 여자는 검후보다는 소검후 쪽일 가능성이 컸다.

‘소검후면 검후가 어딨는지 알고 있겠지.’

백서휘는 은형잠종술을 풀고 본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소검후는 뒤에서 갑작스럽게 인기척이 느껴지자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누, 누구냐!”

“네게 물어볼 게 있다.”

백서휘가 남성성이 드러나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남자?”

“검후는 어디를 갔지?”

“나, 남자가 어떻게 여기에…….”

소검후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흔들렸다.

“대답해라.”

최대한 빠르게 사서 장사로 돌아가길 바랐다.

그런데 검후의 행방을 말해줘야 소검후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백서휘는 살짝 짜증이 섞인 얼굴로 여자를 바라봤다.

그래도 아예 맹한 건 아닌지 소검후는 곧 정신을 차렸다.

“본문의 영역에 침입한 이유를 고하세요!”

보타도로 온 이유를 소검후에게 말하지 않으면 싸우게 될 것 같단 느낌을 받았다.

‘다른 문도들까지 쏟아져 나오면 대형 사고야. 조용히 갈 수 있으면 조용히 가는 게 낫겠지.’

비밀로 할 만한 이유도 딱히 없으므로 그냥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선자(先慈)께서 생전에 아끼셨던 반지가 있다. 상황이 좋지 않아 다른 사람한테 파셨는데 그게 주인을 여러 명 거치더니 최종적으로 ‘검후’에 이르렀다. 나는 그 반지를 되사기 위해 검후를 만나러 왔어.”

“겨우 반지를 사려고 금남의 구역에 침입했다고요? 믿을 수 없어요!”

“귓구멍이 막혔어? 겨우 반지가 아니라 어머니께서 생전에 아끼던 거라니까?”

“저, 정말 반지 때문에…….”

“그러니까 피곤하게 굴지 말고 검후가 어디 있는지나 말해. 아니면 네가 나한테 그 반지를 팔던가.”

“제, 제가 어떻게 스승님의 물건을…….”

“그럼 검후가 어딨는지나 말하라고. 내가 지금 검후 어디 있냐고 몇 번 물어보는지 알아?”

소검후가 답답했던 백서휘는 단어 하나하나에 분노를 담았다.

“어, 어떻게 생긴 반지인지 말하면 스승님이 돌아왔을 때 말해볼게요. 그러니 서신을 받을 주소를 남기고 떠나라.”

“반지는 옥으로 만들어졌고 끼었을 때 위로 오는 부분에 꽃 모양으로 되어 있어. 안쪽에는 금이 붙어 있는데…….”

“아!”

“왜?”

“그거라면 제게 있어요.”

“네게?”

“네, 제가 가지고 싶다 하니 생일선물로 주셨어요.”

“그 말이 맞다면 네게 그걸 되사겠다.”

“그건 힘들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절 생각해서 준 선물인데 함부로 파는 건 예의에 어긋난 거잖아요.”

“그럼 검후한테 허락을 받으면 나한테 팔 거야?”

“솔직히 말하면 허락을 받아 와도 팔지는 않을 것 같아요.”

“뭘 어쩌자는……. 후~ 좋아! 너한테 거액의 돈을 주고 보타문에도 통 크게 기부할 테니까 그 반지 나한테 팔아.”

거액을 준다는 것에 혹했는지 소검후가 생각에 잠겼다.

소검후나 보타문 둘 중의 하나는 돈이 아쉬운 상황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둘 다일 수도 있겠지.’

그때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소검후가 입을 열었다.

“……조건을 하나 추가해도 되나요?”

“여기서 조건을 추가한다? 음……. 좋아, 말해봐. 그 조건이 뭔데?”

“제 가문을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가문?”

“보내오는 서신이 오는 게 점점 늦어지고 본문에 정기적으로 주던 기부금이 줄다 못해 없어졌어요.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도울 수 있다면 도와주세요.”

“명확한 문제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도와달라?”

“그쪽이 돈이 많은 것 같아서 추가한 조건이에요. 가문이 자금난을 겪고 있는 거라면 제 몫을 안 줘도 좋으니 가문을 도와주세요.”

돈으로 해결하는 일이라면 지금의 백서휘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니 응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만큼만 도와줘도 되나? 말도 안 되는 액수의 빚을 지고 있는 거라면 나도 힘들 것 같은데.”

“아버지 혹은 오빠에게 도와줘서 고맙다는 이야기가 적힌 문서를 받기만 한다면 얼마를 주든 상관없어요.”

“그 정도 조건이면 좋다. 그쪽과 거래를 하도록 하지.”

“정말인가?”

“정말 거래할 거니까 그쪽 이름이랑 가문의 주요 인물들, 어디에 사는지 알려줘. 내가 믿을 만한 인물이라는 서신도 써주고.”

“제 이름은 한주희이고, 아버님의 이름은…….”

백서휘는 세 시진을 기다렸다가 노인의 배를 타고 항주만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소검후 한주희의 가문이 있는 강서성의 옥산(玉山)으로 향했다.

* * *

옥산은 강서성에서 절강성을 가는 길목에 있어 도착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백서휘는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한가장을 찾았다.

‘이게 한가장(韓家莊)?’

매일 닦는지 현판도 잘 관리되어 있었고, 장원 내에 있는 건물들의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장사로 돌아와 처음 봤던 자하무관의 모습과 비교하면 솔직히 이쪽이 훨씬 더 나았다.

유일하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점이 있다면 문을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아예 사람을 안 받겠다는 건가?’

부딪혀 보면 알게 될 거란 생각에 대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쿵쿵쿵!

듣지 못한 건지 문 너머에서 사람의 반응이 느껴지지 않았다.

백서휘가 다시 한번 두드리니 그제야 누군가 나와 대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장원에 사정이 있어 당분간 손님을 받지 않으니 너른 마음으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한주호는 정중히 인사하고 다시 문을 닫았다.

다시 힘차게 두드렸지만, 대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무슨 사정이 있길래 이러는 거지?”

갑자기 기부금을 보내지 못하고 서신이 늦어지며 손님까지 받지 않는 사정이란 게 뭔지 짐작이 안 됐다.

“사정을 알아야 돕든가 말든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남매가 쌍으로 사람 귀찮게 만드는데 뭐가 있는 것 같았다.

‘진짜 어머니 반지만 아니었으면 이런 귀찮은 일엔 끼어들지도 않는데…….’

백서휘는 한숨을 쉬고는 남창에 있는 하오문 강서성 지부를 찾아갔다.

“오랜만이군.”

“잘 지내셨습니까. 헤헤!”

“들어오는 정보 중에 나랑 관련된 정보는 없던가?”

“있긴 한데 보지는 않았습니다.”

“왜?”

“너무 많이 알면 귀빈께서 기분 나빠하실 것 같아서요.”

“그 자세 계속 유지하면 진급하는 건 어렵지 않겠어.”

“헤헤! 그렇습니까?”

“자, 이제 근황 얘기는 이쯤하고 일을 하자고. 옥산에 있는 한가장에 대한 정보 가져와 봐.”

“네.”

백서휘는 강서성 지부장이 가져온 두루마리들을 빠르게 읽어나갔다.

‘기부금은 세 문파의 계략에 빠져 돈을 써서 그런 거고, 서신이 늦어지는 건 전쟁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 거였군.’

상대는 녹혈문(綠血門), 금응문(金鷹門), 음살문(陰殺門)으로 셋 모두 이 근방에서 큰 힘을 자랑하는 사파 문파들이었다.

‘무림맹이랑 사도련이 휴전 협정을 맺었는데 전쟁을 일으킨다고?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사도련에서 이런 짓 하는 걸 가만 놔두질 않을 텐데?’

백서휘가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니 강서성 지부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의아하신 부분이 있으십니까?”

“이놈들 전쟁을 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무림맹이랑 휴전 협정해서 싸우면 안 되지 않나?”

“세 곳 모두 다 사도련을 탈퇴했습니다. 그러니 사도련 소속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개별 문파 차원에서 싸우게 되는 거죠.”

이런 꼼수가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파에서도 이렇게 간사한 곳은 몇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러면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겠네?”

“무림맹에서 여력도 없고 개별 문파 차원의 싸움이라 끼어들기 힘들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여력이 왜 없…….”

오대세가가 저지른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백상의 팔다리를 자처하는 문파들이 축출되면서 중소 문파 파벌의 힘이 약해졌고 그로 인해 힘의 균형이 무너졌을 것이다.

아마 지금의 무림맹은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이 서로 견제하느라 다른 일에 끼어들 여력이 없을 게 분명했다.

‘답 안 나오는군.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낫겠어.’

백서휘는 다시 옥산으로 돌아와 한가장의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이전처럼 한주호가 나와 문을 열었다.

“손님은 받지 않는다고 저번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동생이 보낸 손님도 그리할 건가?”

“동생이요? 설마! 주희를 말하는 겁니까?”

“그래.”

백서휘는 품에서 한주희가 쓴 서신을 꺼내 한주호에게 주었다.

“……정말로 주희가 보내신 분이군요.”

“그러니까 빨리 안으로 들여 보내줘. 여독을 좀 풀고 싶다고.”

“죄송하지만 그건 힘들겠습니다.”

“다른 문파들이랑 싸우는 거 때문에?”

“어떻게 아신 겁니까?”

“안 들여 보내주길래 조사 좀 했지.”

“그럼 말씀드리기 편하겠군요. 바로 내일이 그들이 통보했던 마지막 날이라 손님을 받을 수 없으니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서신 봤으면 알 거 아니야. 내가 이곳을 도우러 왔다는 걸.”

“그래서 못 들여보내는 겁니다. 손님까지 말려들게 할 수 없으니까요.”

“좋아, 그럼 들여 보내주지 말고 그놈들이 약속했던 시간이 몇 시나 되는지 말이나 해줘.”

“내일 오후 신정시(申正時, 오후 4시30분)입니다. 근데 이건 왜 물으시는 건지…….”

“그건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백서휘는 한주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한가장에서 멀어졌다.

그날 밤.

한가장에 소속된 이들이 모두 마당에 모였다.

다들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에 떨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한주호가 검은 무복에 검을 차고 나타났다.

사람들은 옷차림을 보고 그가 옥쇄할 각오를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러분께 할 말이 있어서 모이라고 했습니다. 시간도 없고 하니 짧게 말하겠습니다. 바로 내일이 세 놈들이 경고했던 날입니다. 그놈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곳을 칠 것이라 확신합니다.”

연무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그럼에도 한주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 그들이 쳐들어오면 대다수는 죽을 겁니다. 소수만이 큰 상처를 입고 겨우 살아가겠죠. 그런데 저는 그게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망치지 않을 예정입니다.”

한주호의 눈빛에서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필사의 각오가 느껴졌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데 어찌 도망을 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장원의 마지막 장주로서 옥쇄를 각오하고 결사 항전할 테니 키워야 할 자식이 있거나, 봉양할 부모가 있다면 뭐라고 안 할 테니 지금이라도 그냥 도망가시길 바랍니다.”

딱 자가 할 말만 하고 한주호는 사라졌다.

연무장에 남은 사람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결심을 굳혔는지 짐을 챙겨 도망갔고, 몇몇은 의리를 생각해 한가장에 남았다.

* * *

한주호는 얼마 전에 있었던 무림맹과 사도련의 전쟁에서 세 문주의 합공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복수도 못 하고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죽어야만 하다니…….’

이대로 절강성으로 도망쳐서 여동생에게 힘을 빌리자는 생각과 그냥 깨끗하게 죽자는 생각이 한주호의 머릿속을 공존했다.

잠시 갈팡질팡하던 그는 확실하게 결정을 내렸다.

‘주희한테 피해를 줄 순 없지.’

일부러 아버지의 부고 소식도 알리지 않았다.

알렸다면 여동생은 모든 걸 포기하고 이곳으로 왔을 거다.

창창한 앞날이 펼쳐져 있는 그녀에게 똥물을 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고 죽을 생각이었다.

복수?

열심히 무공을 배워 검후가 된다면 그때에나 해주길 바랐다.

‘그자에게 편지라도 써서 맡길 걸 그랬군.’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이곳으로 오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찾아볼까?’

모든 게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하긴 했다만 그래도 장원이 휑할 정도로 다 떠날 줄은 몰랐다.

떠난 이들이 아주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침몰하는 배와 함께 죽는 건 선장만이면 족하니까.

그럼에도 마음이 씁쓸해지는 인간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다른 문파들이 그놈들을 노릴 정도가 되려면 몇이나 죽여야 할까? 모르겠군. 그냥 최대한 많이 길동무로 데려가자.’

한주호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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