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74화.
복면을 쓴 남자가 문 앞에 달린 작은 종을 울렸다.
타오를 듯한 적발의 여자가 머리를 빗다 말고 문에 대고 소리쳤다.
“누구냐?”
“현명님 휘하에 있는 여토복이라고 합니다.”
“여토복이라면 현명의 정보통 아니냐? 네가 어쩐 일로 나를 찾았느냐?”
“축융님께 보고드려야 할 사항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직속상관도 아닌 내게 보고를 할 사항이 있다고?”
“예.”
축융은 자개로 만든 보석함에 빗을 넣고 문 쪽을 마주 바라봤다.
“들어오거라.”
여토복이 조심스럽게 축융이 머무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보고할 사항이란 게 무엇이냐?”
“축융님 휘하의 익화사가 죽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나는 그런 농담을 싫어한다.”
“농담이 아닙니다.”
여토복은 눈빛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러면 정말 화사가 죽었다는 말이냐?”
“예.”
경쟁자의 부하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축융은 눈물을 참기 위해 두 눈을 감았다.
축융과 익화사의 관계가 어떤지는 명성교 내에서 유명했기에 여토복은 침묵하며 눈치를 봤다.
반의반 각이란 시간이 흘러가고 나서야 축융은 감정을 추스르고 두 눈을 떴다.
“화사가 어쩌다 죽었는지 알고 있느냐?”
“수호문의 문주가 이공간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갱’ 현상이 나타난 걸 보면…….”
천갱은 붕괴하는 이공간에 지반이 같이 빨려 들어가 지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는 현상이었다.
이공간을 만든 주술사가 사망했을 때만 나타나기에 익화사의 ‘사망’은 확정적이었다.
“되었다. 거기까지만 들으마.”
“이만 물러나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좋다. 현명에게 소식을 알려줘서 고맙다고 꼭 좀 전해다오.”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여토복이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 후 밖으로 나갔다.
축융은 장사가 있는 방향을 원독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네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불살라 주마.”
* * *
몇 달 전부터 질질 끌던 무림맹과 사도련의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두 세력은 소속된 문파들에 더는 싸우지 말 것을 지시했다.
지시를 어길 수 없었던 문파들은 어쩔 수 없이 싸우는 걸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진작 좀 하지. 그랬으면 입관식을 열었을 텐데…….’
아직 두 세력 사이에 감정의 앙금이 크게 남아 있어 정파와 사파 양쪽에서 관원을 받기에 애매했다.
당장 학무관의 입관식을 여는 것보다는 다른 큰 무관들이 관원을 뽑는 시기에 같이 뽑는 편이 좋을 듯 싶었다.
‘문제는 그 전에 학무관에 대해 알려야 하는 건데…….’
새로운 형태의 교육 기관인 만큼 홍보 작업이 필요했다.
어떤 식으로 홍보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는데 문 위에 달아둔 종을 누군가가 울렸다.
“누구야?”
“나야.”
백은하의 목소리가 들리자 백서휘는 문을 열어주었다.
백은하는 커다랗게 부른 배를 내밀며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
“무슨 부탁인데?”
“하나는 올해만이라도 아버지, 어머니 생신에 생신제를 지내자는 거고.”
“생신제?”
“돌아가시고 사는 게 힘들어서 두 분 첫 번째 생신제를 못 지냈어. 그래서 여유가 있는 지금 생신제를 지내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부모님 앞에 죄인인 자신이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겨우 홍매검 하나 찾아왔다고 효자인 척 굴었다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
“괜찮은 생각이네.”
“정말?”
“정말로 좋다고 생각해.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시니 아시겠지만, 내가 다시 돌아왔다는 걸 정식으로 아버지와 엄마한테 보여드리면 좋을 것 같아.”
“그럼 생신제 지내는 거 찬성인 거 맞지?”
“응.”
“생신제 지낸다고 하니 하는 말인데, 부탁 하나만 더 할게. 아버지 생신제 때는 홍매검을 같이 올리면 되는데, 어머니는 아직 그런 물건이 없잖아.”
“엄마 물건을 되찾아와달라는 거야?”
“응.”
“최대한 노력해볼게.”
“고마워.”
“내가 더 고맙지.”
“그럼 이만 나는 가볼게.”
백은하가 기뻐하는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백서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돌아서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랑 엄마한테 제대로 된 생신 선물 하나를 못 해드렸네.’
집안이 부유해 어린애치고는 용돈을 많이 받았다지만 그래도 코 묻은 돈 수준이었다.
적은 돈과 어린애라 안목이 좋지 않아서 부모님께 좋은 걸 사드리지 못했다.
‘두 분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살아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백서휘는 한숨을 내쉬고 한참을 자책했다.
‘땅 파고 들어가는 건 이쯤에서 끝내고, 어머니 제사상에 올릴 물건이나 떠올리자.’
옛 기억을 떠올리며 고민하니 금방 답이 나왔다.
아버지가 결혼을 약속할 때 선물했다던 가락지.
그 가락지를 되찾아서 선물하면 어머니도 좋아하실 것 같았다.
‘이번에도 만복상단에 부탁해보자.’
백서휘는 금태풍에게 사례를 약속하며 가락지의 행방을 알려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쏜살처럼 빠르게 2주란 시간이 지나갔다.
백서휘는 초조한 마음으로 가락지 소식을 기다렸다.
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리며 금태평이 안으로 들어왔다.
“형이 관주님한테 부탁한 가락지를 찾았다는 말 전해달래요.”
“고맙다.”
“예?”
예상치 못한 백서휘의 감사 인사에 금태평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백서휘는 그를 뒤로하고 만복상단의 본단에 있는 금태풍의 집무실로 직행했다.
“가락지 지금 누가 가지고 있어?”
“오셨군요.”
“어디있는지 빨리 말해줘.”
“말씀드리기 전에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데?”
“고생을 좀 많이 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어디에 있는지, 누가 가진 건지 알려줘.”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락지는 절강성 항주만에서 배를 타고 좀 더 가야하는 주산군도에 있습니다.”
“군도면 섬이 여러 개란 거잖아?”
“네, 그 여러 섬 중에 보타도라는 섬이 있는데…….”
“잠깐만, 보타도면 보타문(普陀門)이 있는 그곳을 말하는 건가? 금남의 구역이라는.”
“금남의 구역이라서 고생하실 거라고 미리 말씀드린 겁니다.”
“보타문의 누가 가지고 있는데?”
“보타문 문주가 가지고 있습니다.”
“보타문 문주면 ‘검후(劍后) 성연하’를 말하는 거지?”
“예.”
이번엔 진짜 고생하겠단 생각이 팍하고 들었다.
“고마워. 덕분에 수고를 덜었어.”
“하하.”
금태풍도 백서휘의 반응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가볼 테니까 다음에 보자고.”
“네!”
* * *
백서휘는 갑옷을 제외한 모든 장비를 챙겨 항주만으로 떠났다.
거리가 있다 보니 최소한으로 쉬고 달렸음에도 항주만에 도착하니 보름이 지나 있었다.
‘사람이 있으려나.’
가뜩이나 날이 저물어서 어둑어둑한데 하늘에서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날이 궂은 만큼 포구에 나와 있는 사람은 몇 안 되리라 예상됐다.
백서휘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내리는 비를 뚫고 포구까지 걸어갔다.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포구에는 사람이 꽤 많이 존재했다.
한참 동안 백서휘는 돌아다녔지만 수확은 없었다.
다들 근방의 바다까지 금남의 구역이라 보타도로는 갈 수 없다고만 말했다.
나룻배라도 구해서 혼자 가야 하나 싶었을 때, 낚싯대를 든 노인이 백서휘를 불러 세웠다.
노인의 눈빛은 형형했고 몸의 균형이 잘 맞아 있었다.
‘무인이군.’
백서휘는 왜 불렀냐는 듯한 얼굴로 노인을 바라봤다.
“보타도로 가고 싶나?”
“그래.”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백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가 되어 있는 것 같으니 말하겠네. 내게 돈을 주면 보타도로 가는 두 가지 방법을 알려주겠네.”
“얼마나 주면 되지?”
“하나는 은자 다섯 냥, 다른 하나는 은자 열 냥에 추가 요금이 있는 대신, 무조건 보타도에 도착할 수 있다.”
“두 방법에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방법만 알려주는 것과 도와주기까지 하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럼 후자가 무조건 낫겠군. 스무 냥을 낼 테니 날 도와라.”
“따라오게.”
백서휘는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
“수영할 줄 아나?”
“못하지는 않아.”
“곤란할 뻔했는데 다행이군.”
노인이 비를 맞으며 낡은 나룻배를 바다에 띄웠다.
“일단 여기서 돈을 일부 정산하겠네. 은자 열 냥을 내게 주게.”
백서휘는 노인이 사기꾼인 것 같아 잠시 고민하다 은자를 내주었다.
노인이 타고 뒤이어 백서휘가 나룻배에 올라탔다.
“이제부터 보타도 쪽으로 갈 건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게. 자칫 잘못하면 풍랑으로 배가 뒤집힐 수도 있으니까.”
“그러지.”
노인은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배를 몰아 보타도 부근까지 갔다.
“자, 이제 선택해야 한다네.”
“어떤 선택을 말하는 거지?”
“여기서 저기까지 알아서 가면 공짜라네.”
“돈을 더 주면 어떻게 되는데?”
“얼마 주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은자 열 냥이면 남은 거리의 반만큼 더 가겠네.”
“생각 좀 해도 되나?”
“너무 길게는 하지 말게.”
백서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생각에 잠겼다.
등평도수(登萍渡水)를 발휘하거나 수영해서 가면 보타도까지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나올 때다.’
일이 잘못돼서 탈출해야 하면 항주만까지 갈 수단이 필요했다.
백서휘는 시선을 노인 쪽으로 잠시 옮겼다.
노인은 돈을 받은 만큼 확실하게 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약속했던 시간에 와주는 거나 여기서 내가 올 때까지 대기하는 것도 가능한가?”
“그런 건 해본 적이 없어서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군. 음…….”
고민하던 노인의 입은 한참 후에야 열렸다.
“대기하는 건 기상이 좋지 않아 불가능하고 약속했던 시간에 오는 것 가능할 것 같군.”
“항주만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세 시진이 지나면 여기로 와서 대기하고 있어. 이 정도는 되지?”
“충분히 돈만 준다면야…….”
“원하는 액수를 말해.”
“보타도에서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공범이 되는 일이니……. 은원보 하나를 줬으면 좋겠군.”
돈만 받고 안 올 수도 있지만, 지금은 달리 도리가 없었다.
백서휘는 주머니에서 은원보를 꺼내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명심해. 지금으로부터 세 시진 후야. 그때 안 오면 어떻게든 내가 탈출해서 당신 목을 썰어버릴 거야.”
“반드시 오겠네.”
“그럼 난 저기로 가보겠어.”
백서휘는 노인에게 자신의 경지가 높은 걸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등평도수로 보타도로 갔다.
파바바바박!
물을 밟고 미친 듯이 달려와 보타도에 오는 것에 성공했다.
‘적이나 감시자는……. 다행히 없군.’
달려온 거리가 꽤 되었기에 앉아서 잠시 휴식했다.
지친 것도 잠시 뿐.
몸이 워낙 좋다 보니 금방금방 회복이 되었다.
백서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산이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보타산 입구에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은신에 신경을 써야겠어.’
사실 대놓고 가도 상관없긴 했다.
보타문 소속의 사람 전원이 싸워서 백이면 백번 다 이길 자신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러면 상대의 감정에 상처를 주게 된다.
화가 나서 가락지를 안 팔기라도 한다면 백서휘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물론 무력으로 강탈하라면야 얼마든지 강탈할 수 있지만,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부끄러워할 만한 일인 만큼 자제할 생각이었다.
‘제삿상에 올릴 물건이니 피가 묻으면 안 좋겠지.’
백서휘는 되도록 순리대로 일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산을 올랐다.
빠른 속도로 오른 덕에 얼마 지나지 않아 ‘보타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기하군.’
보통의 문파에는 문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자들이 존재했다.
그런데 이곳은 본인들밖에 없어서인지 문지기도 없고, 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잠입하는 건 문제가 없겠고……. 라? 여기 불문(佛門) 아닌가? 왜 이렇게 글씨체가 살벌해?’
상당히 옛날에 적은 현판으로 보이는데 필체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살성이 살기를 꾹꾹 글씨에 눌러 담으면 이렇게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일단은 검후부터 찾자.’
문주인 만큼 일반적인 문도와 대우가 다를 거라 예상했다.
보타문 안으로 들어간 백서휘는 사찰과 문파의 일반적인 건물 위치를 떠올리며 어디 있을지 추측했다.
‘저기일 가능성이 제일 커.’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 검후로 추측되는 사람이 안에 있는지 확인했다.
‘건물 안에는 없고 뒤에 하나가 있네. 검후 맞겠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건물을 반 바퀴 돌아가 검후의 얼굴을 확인했다.
‘저게 검후?’
백서휘가 미심쩍은 눈으로 수련 중인 여자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