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63화
“장로급 이상이면 누구를 말하는 거예요?”
“무림맹에 도착하면 그때 이야기해줄게.”
“지금 말해주시면 안 돼요?”
“안 돼.”
“왜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백서휘의 단호한 거절에 종리연이 입술을 오리처럼 삐죽 내밀었다.
“오늘은 일단 객잔으로 돌아가자.”
“련에 계속 있지 않고요?”
종리혁이 사라진 방향에서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들렸다.
“앞으로 이런 소리가 끊이지 않고 날 거야. 그런데도 여기 계속 있고 싶어?”
종리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자.”
두 사람이 객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걸은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객잔에 도착했다.
“어?”
건물 앞에 우염상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나와 있어?”
“걱정돼서 나와 봤다.”
“우 노괴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어. 일도 나름 잘 풀렸고.”
“나름 잘 풀렸으면 이번 일에서 손을 떼고 다시 도주하는 데 집중할 수 있겠구나.”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야. 아직 들를 곳이 남아 있어.”
“어디로 가야 하는데?”
“내일 련주랑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후에 무림맹으로 떠날 거야.”
“무림맹에 꼭 가야 하나?”
“정파와 사파 간의 전쟁을 막으려면 반드시 가야 돼.”
우염상이 신음을 흘렸다.
“왜?”
“너도 알잖아. 내가 그쪽에 불편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거.”
“이번만 참아줘.”
“끄응, 알았다. 참아보도록 노력하마.”
“좋아, 이제 객실로 돌아가자.”
종리혁이 밤새 사도련의 내부를 정리하는 동안, 세 사람은 각자의 객실에서 잠을 잤다.
다음 날.
마부석에 앉은 백서휘는 사도련을 향해 마차를 몰았다.
우염상과 종리연은 짐칸에 틀어박혀 어제 있었던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혼자서 회의실로 가버렸다고?”
“네.”
“저러다 나중에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백서휘는 우염상이 타박하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곧 사도련이니까 다들 내릴 준비나 해둬.”
“나는 마차를 지키고 있으마.”
“사도련도 불편해?”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강호 12대 명검 중 한 자루인 탈명검을 만들어주긴 했지만, 우염상과 종리혁은 썩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서로 데면데면한 관계였기에 사도련을 방문하는 일 역시 우염상에겐 불편한 일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이야기하고 나올게.”
“그래.”
백서휘와 종리연은 문을 지키는 위사가 없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사도련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군.’
전각의 외벽부터 시작해서 내부의 바닥까지 이곳저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지난밤에 자신들이 자는 동안 사도련에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어디 있을 것 같아?”
“누구요?”
“누구겠어.”
“밤새 싸웠을 테니 지금쯤이면 피곤해서 자고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럼 침실로 안내해봐.”
“네.”
두 사람은 빠르게 종리혁의 침실로 이동했다.
종리연의 예상은 반만 맞았다.
종리혁이 침실에 지친 얼굴로 있는 건 맞지만 잠들어 있지는 않았다.
“무슨 일로 왔지?”
“인사도 안 하고 갈 수는 없잖아.”
“떠난다고? 어디로?”
“무림맹으로.”
“그럼 혼자 오지 왜 둘이……. 설마 연이를 데리고 같이 떠나려고?”
“그래.”
“이놈! 그렇겐 안 된다!”
종리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한 번 더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검 집어넣어.”
“연이는 데려갈 수 없어!”
“안 되겠네.”
백서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검을 뽑아 종리혁의 목에 겨누었다.
‘이, 이놈이 고수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차이가 클 줄이야.’
너무 놀란 종리혁은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때 그의 뇌리에 아주 괜찮은 생각이 지나갔다.
‘저놈이랑 연이랑 결혼하면 어떨까?’
비록 사위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사도천하(邪道天下)를 이룩하는 건 꿈도 아니었다.
“……여, 연이를 그냥 보내주겠다. 대신 나랑 연이랑 마지막 대화를 나눌 시간을 줘.”
“오래는 못 줘.”
“알았다.”
종리혁은 종리연을 방 안으로 데려간 후 전음을 날렸다.
『너 저놈이랑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전음으로 나한테 얘기해봐.』
『가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자객들에게 죽을 뻔한 적이 있어요…….』
종리연은 종리혁에게 백서휘와의 첫 만남부터 있었던 일까지 모두 말해주었다.
『……저놈을 유혹할 수 있겠느냐?』
『유, 유혹이요?』
『어떻게든 유혹해서 아이를 가지고 결혼을 해버려라.』
『제, 제가 그런 걸 어떻게 해요.』
『사도천하를 이룩하고 종리 씨가 계속 사도련을 지배하려면 반드시 저놈과 결혼해야 돼!』
종리현은 아버지가 백서휘를 사윗감으로 점찍어놨다는 게 좋으면서도 부담스러웠다.
『……노력은 해볼게요.』
『노력만 하지 말고 결과를 가져와! 알아들었느냐?』
『네.』
『저놈을 유혹하는데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나한테 요청하고.』
『……그럴게요.』
『가라.』
백서휘는 처음과 다르게 시원시원한 모습을 보이는 종리혁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를 했어?”
“별 이야기 안 했어요. 무공 수련 열심히 하고, 위험한 일은 하지 말고, 어려운 일 있으면 도움을 청해라. 뭐, 이런 대화했어요.”
“다 끝난 거 맞지?”
“네.”
“그럼 가자.”
“아빠한테 인사만 하고 갈게요.”
종리연은 종리혁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백서휘와 함께 사도련 밖으로 나왔다.
“다 끝났느냐?”
“응.”
“더 볼일 없지?”
“없지.”
“그럼 출발한다?”
“우 노괴가 마차를 몰게?”
“짐칸에 누워만 있는 것보다는 이게 더 몸에 좋을 것 같아서.”
“힘들면 바로바로 말해. 자리 바꿔줄 테니까.”
“알았으니까 마차에 타라.”
백서휘와 종리연은 훌쩍 뛰어올라 짐칸에 탔다.
“네 자리가 이쪽인가?”
“네.”
“그러면 내가 반대편에 앉는 게 낫겠네.”
“제 자리에 앉으셔도 돼요.”
“아니, 여기 앉을게.”
백서휘는 팔짱을 낀 채로 눈을 살포시 감았다.
종리연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를 힐끔힐끔 몰래 봤다.
‘아빠는 괜한 얘기를 해서…….’
좁은 공간에 둘이 있으려니 괜히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럼 출발한다.”
“그래.”
우염상이 무림맹이 있는 호북성으로 빠르게 마차를 몰았다.
* * *
마을이나 도시에 들를 때마다 말을 교체해가며 달린 덕분일까?
호북성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일찍 진입했다.
“우 노괴! 잠시 마차 좀 멈춰봐.”
“왜?”
“생각 좀 할 게 있어서.”
“알았다.”
우염상은 다른 이들의 통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마차를 관도 밖으로 천천히 몰았다.
“뭐가 문제인 거예요?”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그래. 사도련은 수직적인 조직이라서 련주만 설득을 하면 됐는데 무림맹은 그게 아니거든.”
“아! 아빠한테 들어봤어요. 무림맹은 수평적 조직이라 뭔가 일을 진행하려고 하면 항상 늦다고.”
“그래, 그 문제 때문에 지금 고민인 거야. 나 혼자서 무림맹에 소속된 모든 문파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거든.”
“그러면 도움을 받으면 되잖아요?”
“도움? 누구한테?”
“이 동네에 아는 사람들 없어요?”
“아는 사람들이 없……. 아니, 있긴 하네.”
호북성의 융중산 근처에는 제갈세가가 있었다.
제갈세가는 대대로 무림맹의 군사를 맡은 가문이라 영향력이 남달랐다.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다른 문파들을 설득하는 건 일도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제갈세가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인데…….’
다짜고짜 무림맹 내부에 간자가 있다고 하면 자기들을 놀린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그럼 어쩌지?’
그때 제갈진천에게 받은 신패가 떠올랐다.
부피가 크지 않고 귀한 물건이라 항상 가지고 다녔다.
백서휘는 품속을 뒤져 제갈진천에게 받은 신패를 꺼냈다.
‘이걸 써야 하나?’
사리사욕을 채워주는 것도 아니고 공익을 위해 쓰기에 아깝긴 했다.
‘한 번 설득해봐서 안 되면 신패를 써야겠다.’
백서휘는 무림맹의 본단이 있는 무한으로 가는 게 아니라 융중산으로 갔다.
거쳐 가는 마을마다 사람들의 얼굴에 수심이 쌓여 있었다.
전쟁이 코앞까지 가까워졌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는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사대전을 막는다.’
백서휘는 속으로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며 제갈세가의 대문 앞에 섰다.
“소속된 곳과 방문하신 목적을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위사가 친절한 목소리로 백서휘에게 물어봤다.
“소속은 자하무관, 목적은 제갈진천과의 대화.”
“소가주님과 약속을 하고 찾아오신 겁니까?”
“아니.”
“따로 받은 배첩도 없으십니까?”
“이건 있어.”
백서휘는 품속에서 신패를 꺼내 위사에게 보여주었다.
“어, 어쩌다 이걸 소유하게 된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소가주를 크게 도와주고 받았다.”
위사들이 서로를 마주 본 채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다 오른쪽에 있는 위사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가주님에게 이걸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백서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위사는 신패를 가져가 제갈진천에게 보여주었다.
“은인이 방문하셨다는 겁니까?”
“예.”
“은인이 무슨 일로 세가에 방문한 건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소가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게 목적이라고 말하긴 했습니다.”
“음……. 은인을 이리로 데려와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위사는 다시 정문으로 돌아와 백서휘에게 신패를 건넸다.
“받으십시오.”
“소가주가 나랑 만나겠대?”
백서휘가 신패를 챙겨 품속에 다시 넣으며 물었다.
“예, 만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가자고.”
“세가 안에 있는 모든 것의 배치를 오행과 팔괘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진과 같은 효과가 납니다. 길을 잘못 들면 큰일 날 수 있으니 제 뒤를 잘 따라오셔야 합니다.”
“죽지는 않겠지?”
“죽지는 않습니다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이 클 겁니다.”
“졸졸 따라가는 수밖에 없겠군.”
위사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자 세 사람이 종종걸음으로 그를 쫓아갔다.
“오셨습니까?”
제갈진천이 환하게 웃으며 세 사람을 반겨주었다.
“오랜만이야.”
“남궁유운 그 친구랑 보고 그 이후로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처음 맞을 거야.”
“그 친구는 잘 지냅니까?”
“마지막으로 볼 땐 잘 지냈어.”
“마지막으로 볼 때라면…….”
“장사를 떠나온 지 좀 돼서 아주 최근의 일은 몰라.”
“장사를 왜 떠난 건지 그 이유에 관해 물어도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그걸 말하려고 그랬어. 북경과 숭산에서 일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조양에 들르게 됐는데…….”
백서휘는 정파와 사파의 싸움을 목격했던 일부터 혈루단에 대한 이야기까지 모두 제갈진천에게 말해주었다.
“……그럼 은인께서는 무림맹에 소속된 문파들을 설득해 간자들과 그들에게 매수된 놈들을 잡길 원하는 겁니까?”
“그래.”
“잠시 생각 좀 하겠습니다.”
백서휘는 제갈진천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품속에 넣은 신패를 만지작거렸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저는 은인의 이야기를 믿지만 다른 사람은 그러지 않을 겁니다.”
“사도련은 내 말을 믿고 다 정리를 끝냈는데?”
“무림맹의 입장에선 혈루단의 간자를 죽인 건지, 내부에 있는 불만세력을 싹 쓸어버린 건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백서휘가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제가 무림맹 내에서 미관말직도 없다는 겁니다. 거기다 이런 큰 건을 다루려면 아버님이 나서야 하는데, 아버님은 확실한 증거 없이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신패를 쓰면?”
“제갈세가의 명예가 달린 일이니, 그때는 아버지께서도 어쩔 수 없이 나서시겠죠.”
“간자가 누구건 상관없이 말이지?”
“갑자기 그 말은 왜……. 설마, 간자의 정체가 거물이기라도 한 겁니까?”
종리연과 우염상이 귀를 쫑긋 세웠다.
제갈진천은 고요한 눈으로 백서휘를 바라봤다.
“그래.”
“누굽니까?”
“무림맹 맹주 하백상.”
모든 사람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백서휘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