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62화
“유석이 누군지 얘기했으니 이제 너도 내 질문에 답변을 해줘야겠다. 유석은 왜 찾는 거지?”
“그놈이 무림맹과 사도련을 싸우게 만든 원흉 중 하나니까 그러지.”
“정말이냐?”
“그래.”
종리혁은 어금니를 악물고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에게 유석은 양아들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놈이 날 배신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내가 그놈을 배신할 순 있어도 그놈이 날 배신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종리혁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진정해.”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 하겠다. 당장 가서 그놈 멱을 따버려야겠어.”
“그놈을 죽이면 사도련에 남아 있는 간자들은 어떻게 찾을 건데?”
“그건…….”
종리혁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왜 죽이면 안 되는지 알았으면 그놈이 지금 어디 있는지나 말해줘.”
“내가 없는 상황에서도 회의를 계속 진행했다면 회의실에 있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묵룡전(墨龍殿)에 있을 거다.”
백서휘는 잠입 전에 본 구조도를 바탕으로 회의실과 묵룡전으로 향하는 길을 떠올렸다.
‘지금 있는 곳에서 더 가까운 곳은……. 회의실이군.’
백서휘가 회의실 쪽으로 방향을 잡고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유석을 잡으러 가는 거냐?”
“그래.”
“나도 가도 되나?”
“안 돼. 내가 간자들 이름이 적힌 목록을 가져올 때까지 당신과 종리연, 다른 무사들은 여기 있어야 해.”
백서휘는 단호하게 말하고 유석이 있을 거라 추정되는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 가까워지니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가자!’
빠르게 달려가 문에 발차기를 달렸다.
쾅!
문이 굉음을 내며 회의실 안쪽으로 날아갔다.
백서휘는 뚫린 문을 저벅저벅 걸어 통과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순간에 그에게 집중되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회의실 안에 있던 사도련의 무인들이 무기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백서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삼뇌서생 유석 맞지?”
“그건 왜 묻는 것이오?”
“질문에 대답이나 해. 유석 맞아?”
“맞소. 그러는 그쪽은 정체가 뭐요?”
“너 잡으러 온 저승사자.”
“저승사자는 2인 1조로 다닌다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닌가 보오.”
“나 혼자로도 널 잡는 데는 충분할 것 같아서 말이야.”
유석이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하였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곳은 중원제일무력단체인 사도련의 회의실이오. 그리고 사도련에 강하다는 사람은 다 여기에 모여 있지.”
“그게 어쨌다는 거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쪽이 날 잡는 건 힘들 거란 소리요.”
“잡을지 못 잡을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백서휘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사도련의 무인들이 동시에 손에 무기를 쥐었다.
“공격!”
사도련 무인들이 살기 등등한 눈을 한 채 백서휘에게 달려들었다.
날아드는 무기의 종류는 굉장히 다양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검과 도, 창부터 쓰는 사람을 찾기 힘든 기문병기까지.
진짜 별의별 무기가 다 있었다.
‘감상은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 움직이자.’
백서휘는 구천현현보를 밟아 공격을 피한 후 가까이에 있는 놈의 목을 자르려고 했다.
그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놈들 죽이면 안 되지 않나?’
선대 수호문주들의 노력 덕분에 정파와 사파의 전력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지금 같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사파의 힘이 사라지면 말도 안 되게 밀릴지도 몰랐다.
‘최소 한 세대 이상은 사파가 고개를 들기 힘들어질 거야.’
사건이 해결된 이후를 생각하면 귀찮더라도 이놈들을 제압만 하는 쪽이 모두를 위해서 좋을 듯싶었다.
백서휘는 천강무극검법의 초식 중 환검(幻劍)에 해당하는 천탈기백(天奪旗魄)을 펼쳤다.
그의 검이 기기묘묘하게 움직이며 다수의 혼을 쏙 빼놓았다.
‘이제 검면으로 내려치기만 하면…….’
그때 다수의 무인이 등뒤 쪽을 노렸다.
백서휘는 그들의 공격을 구천현현보로 피하며 넋이 나간 놈들의 머리를 검면으로 일일이 내리쳤다.
열 명이 넘는 수의 무인이 제압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머지 반도 비슷하게 제압하면 되겠지.’
백서휘는 이번에도 천강무극검법의 초식 중 환검에 해당하는 초식을 펼쳤다.
‘천선지전(天旋地轉)!’
백서휘의 검이 천변만화(千變萬化)한 움직임을 보였다.
상대는 혼란스러운 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렇게 안 되지.’
눈이 현혹되니 손의 움직임이 꼬이고 발이 멈추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상대의 배에 난화만천수를 작렬시켰다.
퍽!
찰진 소리와 함께 상대의 몸은 회의실 끝으로 날아갔다.
“부, 부련주님이 당하시다니…….”
“엄청난 고수다.”
“련주님이 있었더라면 이렇게 당하지 않을 텐데…….”
누군가의 말이 유석에게 실마리가 되었다.
유석은 회의실을 빠져나가 종리혁을 데려오려고 했다.
백서휘는 전력으로 구천현현보를 밟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는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유석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유석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우, 우리 같은 약자들 말고 련주님이랑 싸우는 게 어떻겠소?”
“나는 강자와 싸우는 게 목적이 아니라 널 잡아가는 게 목적이라니까.”
“도, 도와주시오. 내가 여기서 죽으면 사도련의 미래는…….”
유석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지만, 모두가 시선을 피했다.
그때 남은 사도련의 무인 중 가장 늙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
“유석만 데려가면 되는 거요?”
“그래.”
“그럼 데려가시오.”
“더 방해 안 하겠다는 건가?”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더 방해하지 않겠소.”
“좋아, 유석만 조용히 데려가겠다.”
유석의 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래졌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미안하외다. 그래도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소.”
“마, 말도 안 돼.”
유석은 겁 먹은 얼굴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뒷걸음질했다.
그러다 무언가 결심한 표정을 짓더니 품속에서 판관필을 꺼내 들었다.
“나도 무공을 배운 몸이오. 당신에게 호락호락하게 잡히지는……. 헉!”
백서휘가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유석이 당황한 얼굴로 판관필이 든 손을 쭉 내뻗었다.
당황해서 급하게 공격한 것치고는 판관필에 담긴 힘이 제법이었다.
하지만 그 힘도 공격을 맞았을 때나 의미가 있는 법.
백서휘는 가볍게 유석의 공격을 피한 후 훈혈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탁!
가벼운 피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유석은 그대로 기절해 앞으로 고꾸라졌다.
‘가자.’
백서휘는 그를 둘러업고 종리혁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진짜 잡아 왔군.”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종리혁은 크게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속으로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 녀석을 어떻게 할 셈이지?”
“고문을 해야지.”
“음…….”
“이따 보자고.”
백서휘는 시녀를 연금했던 방에 유석을 끌고 들어갔다.
한 시진이 조금 넘게 지났을 때 안쪽에서 들리던 비명이 멎었다.
“끝났나 봐요.”
“그런 것 같구나.”
잠시 후, 백서휘가 피칠갑을 한 몸으로 밖에 나오더니 종리혁에게 종이 뭉치를 건넸다.
종이 뭉치에는 사도련에 잠입했거나 매수된 놈들의 이름과 직위, 했던 일들이 적혀 있었다.
“……여기 있는 놈들만 잡으면 되는 거냐? 더 잡을 놈은 없고?”
“그래.”
“나는 이놈들을 잡으러 가야겠다.”
“그러든지.”
종리혁은 무사들을 이끌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시녀를 연금했던 방 앞에는 백서휘와 종리연만 남았다.
“유석 오라버니는 왜 그랬대요?”
“복수하려고.”
“복수요?”
“설명하자면 길어.”
“그래도 설명해주시면 안 돼요?”
“들으면 네 맘이 안 좋을 것 같아서 말 안 하는 거야.”
“……그래도 저는 들어야겠어요.”
“후회하지 마.”
“안 해요.”
종리연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석……. 그러니까 강유석의 부모는 객잔을 크게 운영했대.”
“아, 오라버니에게 객잔을 운영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것 같아요.”
“그럼 뭐 자잘한 건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어느 날 련주가 객잔에 손님으로 찾아왔다가 정파의 무인과 크게 싸웠다고 해. 그 때문에 객잔은 무너지고 많은 사람이 다쳤지. 유석의 부모는 용기를 내서 배상금을 달라고 했는데 련주는 그게 마음에 안 들었나 봐. 유석의 부모를 단칼에 죽여버렸대.”
부모의 악행을 듣는 건 확실히 좋은 일은 아니었다.
종리연의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졌다.
“부모를 잃고 유리걸식하던 유석은 련주를 우연히 만나게 됐고, 운이 좋았는지 그 밑으로 들어가게 됐지.”
“그럼 그때부터 하나하나 다 준비했던 거예요? 무림맹과의 싸움을?”
“그건 아니야. 련주를 암살하는 게 아니면 죽이는 게 불가능하단 생각이 들었을 때 ‘혈루단(血淚團)’이란 곳에서 찾아왔다더군.”
“혈루단이요?”
“무림인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복수하기 위해 만든 단체라고 소개하더래.”
종리연은 설명을 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다 돋는 걸 느꼈다.
“복수하기 위한 단체요? 그럼 지금 무림맹과 사도련 뒤에 있는 흑막이 그 혈루단이란 거예요?”
“그래.”
“그러면 적살문을 멸문시킨 게 무림맹이 아니라…….”
“혈루단 놈들이 한 짓이야. 물어보니 무림맹에도 비슷한 일을 했다더군. 최종적인 목적은 무림을 없애는 거라는데…….”
여러 암중단체를 상대해봤지만, 무림을 이 세계에서 완전히 없애려는 건 또 처음이었다.
“자, 잠깐만요.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왜?”
“무림맹에도 혈루단 소속의 간자가 있을 거잖아요.”
“그거 때문에 내가 지금 미치겠다. 학무관도 빨리 열어서 관원들을 모집하고 해야 하는데…….”
“무림의 평화를 위한 일이잖아요.”
“그 ‘평화’가 뭔지 잘 모르겠어. 무림이 존재하면 제2, 제3의 혈루단은 계속 만들어질 텐데…….”
자신은 언제나 중원에 사는 절대다수의 생존과 안녕을 위해 움직였다.
지금 혈루단이 벌이는 일은 명백히 그 절대다수를 위한 일이었다.
“애꿎은 피해자를 양산하지 않으려면 무림을 없애고 무공을 익힌 자를 없애는 게 맞지 않을까?”
“사람을 죽일 때 칼을 쓴다고 해서 칼이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도구를 잘못 쓰는 사람의 문제이지 도구의 문제는 아니다?”
“네, 칼은 요리할 때도 쓰고 사람을 해치는 맹수를 잡을 때도 쓰잖아요.”
“음…….”
백서휘는 입을 조개처럼 앙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종리연은 실수했나 싶어 조마조마하며 그를 바라봤다.
“……내가 너한테 배우는 게 있을 줄은 몰랐다. 언제나 사람이 문제였는데 그걸 내가 잊고 있었네.”
“그럼 이제 무림맹으로 출발할 거죠?”
“련주한테 말은 하고 가야지.”
“그, 그랬다가 아빠가 날 못 보내겠다고 하면요?”
“내가 약속했잖아. 빼낸다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진짜 걱정 안 할게요. 아!”
“왜?”
“저 걱정되는 게 한 가지 더 있어요.”
“어떤 건데?”
“무림맹에서도 지금처럼 움직이실 거예요? 지금처럼 움직이면 제가 무공이 그렇게 강한 게 아니라 위험할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예요.”
“당연히 지금처럼 움직여야지. 여기 계속 있다가 네가 납치당하기라도 해봐. 그러면 종리혁은 어쩔 수 없이 정사대전을 일으킬 수밖에 없어.”
“아!”
“거기다 네가 있으면 말에 설득력이 실려서 무림맹을 좀 더 쉽게 설득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안전 문제는 내가 책임지고 널 보호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믿을게요.”
“자, 그럼 해결된 거지?”
“네.”
“그러면 이제 고민할 게 하나가 남았는데 이게 문제네. 무림맹에 잠입한 인물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지? 음…….”
“얼마나 거물이길래 일 처리 방식을 고민하시는 거예요? 구파일방의 장로급 정도 되는 인사예요?”
“그 이상.”
“무, 문주급이라고요?”
“너 꽤 상상력이 빈곤하구나.”
백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