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60화
백서휘가 팔짱을 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도련의 무사들이 출진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사흘.
그 사흘 안에 사도련에 잠입한 간자를 잡아내고, 뒤에 있는 암중단체를 추적해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정사대전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내가 실패하게 되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천근을 짊어진 것처럼 무거웠다.
‘정신 차려!’
자신은 이 땅을 지키는 수호문의 당대 문주였다.
무슨 일이 있다 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서서 등 뒤에 있는 수많은 사람을 지켜내야만 한다.
그것이 수호문주로서의 의무이고, 하늘이 내린 소명이며,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목적이었다.
백서휘는 어금니를 부서질 듯 악물고, 주먹을 부러질 듯 강하게 움켜쥐었다.
‘지킨다. 지켜낸다.’
백서휘의 눈빛이 이글이글하게 타올랐다.
전투태세에 들어가자 기분 좋은 긴장과 함께 전신의 근육들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머릿속은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하는지가 빠르게 떠올랐다.
‘암중단체의 농간으로 벌어진 일이란 걸 밝히려면 사도련주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마침 종리혁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한 좋은 방법이 있었다.
백서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종리연을 바라봤다.
종리연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무림맹과의 전쟁도 불사하려는 걸 보면 종리혁은 종리연을 무척 아끼는 게 분명해.’
친인 혹은 그만큼 친했던 사람을 잃어 슬픔 속에 있는 종리연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은 긴급 상황이었다.
냉정하다 욕을 먹을지라도 해야 할 일은 해야만 했다.
백서휘는 중원에 사는 절대다수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냉혈한’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작게 하고 종리연에게 말을 걸었다.
“그쯤 하는 게 어때?”
“흑흑흑! 네?”
“그만 울라고.”
종리현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이 더 굵어졌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우염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적살문만이 아니라 다른 곳도 멸문하길 원해?”
종리연이 목놓아 울다가 멈춰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날 도와.”
“……어떻게 도우면 되죠?”
“사도련주와 만나주기만 하면 돼.”
“흑막이 제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떡해요? 돌발 행동을 할 수도 있잖아요.”
“몰래 만날 거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아빠 아니, 아버지의 협조를 구한 후에 흑막을 찾으려는 건가요?”
“그래.”
“제가 관주님을 따라가면 되는 건가요?”
“그게 고민이야. 네가 사도련을 은밀히 들어갔다가 나올 정도의 은신술을 익히지는 않았잖아.”
“그러면 약속 장소를 정해서 몰래 만나면 어때요?”
“음……. 좋아, 이 객잔 뒤편에 있는 공터에서 만나야겠다.”
공터는 객잔 쪽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하오문의 지부이기도 하니 정보통제에 용의할 것 같았다.
“이제 사도련주의 일정만 알면 되는데…….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네.”
백서휘는 객실을 빠져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너 이리 와봐.”
“저, 저 말입니까?”
1층 구석에 앉아 있던 점소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무, 무슨 일로 부르신 건지…….”
백서휘가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객잔에 손님이 꽤 있었다.
그냥 육성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전음으로 말하는 편이 보안에 더 좋을 것 같았다.
『사도련의 구조도랑 순찰 경로, 오늘 밤에 사도련주에게 예정된 일정이 있는지 알아 와.』
『그, 그건 다 특급 정보인데요?』
『셈은 반드시 치를 테니까 최대한 빨리 정보를 가져와.』
『……알겠습니다.』
점소이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주방으로 뛰어갔다.
백서휘는 다시 2층의 객실로 돌아갔다.
종리연이 아버지를 만나면 어떤 식으로 말할지 얘기하고 있는데, 객실 문밖에 달린 자그마한 종이 울렸다.
“누구냐!”
“접니다.”
“정보 가져왔어?”
“가져왔습니다.”
“그럼, 문 열고 들어와.”
“네.”
점소이가 두루마리들을 여러 개 들고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종리연이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면사를 쓰려 했다.
“이미 저놈한테는 다 들켰어.”
“그, 그러면 하오문 쪽에서 저에 대해 알게 되잖아요? 다른 사람이 제 정보를 사면…….”
“그런 일 있으면 저놈부터 죽이기로 했으니까 하오문에 알릴 일은 없을 거야.”
종리연이 안심한 표정을 짓는 것과 다르게 점소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두루마리들 내놔 봐.”
백서휘가 턱짓을 하자 점소이가 슬쩍 종리연의 눈치를 봤다.
“네가 눈치를 볼 사람은 얘가 아니라 나야.”
“죄, 죄송합니다. 지금 드리겠습니다.”
점소이는 사도련의 순찰 경로와 내부 구조도가 그려진 두루마리를 백서휘에게 건넸다.
“련주의 일정은?”
“련주님은 술시초에 사도련의 주요 인사들과 마지막 작전 회의를 가질 예정입니다.”
기밀 중의 기밀이어야 할 자료를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걸 보며 종리영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보료는 얼마지?”
“지부장님께서는 금자로 두 냥을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금와전장에 내 이름 대면 돈 줄 거니까 거기다 청구해.”
“그, 그래도 되는 겁니까?”
“되는 거니까 이렇게 말하지.”
“지, 지부장님한테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전하겠습니다.”
“그래. 가봐.”
백서휘는 순찰 경로와 구조도를 참고해 이동 경로를 짰다.
‘여기로 들어가서 이리로 빠져나오면 되겠군…….’
그날 밤.
달이 하늘 높은 곳에 걸렸을 때, 백서휘는 객잔을 아주 조용히 빠져나왔다.
“가보실까.”
은형잠종술을 쓴 채 사도련의 총단으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쳐 갔지만 백서휘가 곁에 있다는 걸 알아차린 자는 없었다.
‘저기인가.’
수십 채의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이 모여 있는 곳이 보였다.
백서휘는 정문과 거리를 둔 채 고개를 치켜들었다.
현판에는 거칠고 힘이 넘치는 필체로 ‘사도련(邪道聯)’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현판만 봐도 어떤 조직인지 바로 알 수 있겠어.’
백서휘는 설렁설렁 달려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바로 옆으로 그가 지나갔는데도 위사들은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만 해댔다.
바로 밑으로 담장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소리 없이 착지한 백서휘는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없군.’
백서휘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서는 회의실이 보이는 전각 중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다.
두 눈에 내력을 주입하니 안력이 증폭되며 한참 먼 곳에 있는 회의실이 훤하게 보였다.
‘회의는 언제 시작하려나.’
회의실엔 하인들이 돌아다니며 다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시작해야 하는데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잘못된 정보를 전해준 점소이를 욕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특별한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일이 틀어진 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너무 늦……. 됐다.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하는군.’
사도련의 주요 인사들은 술시초가 아니라 술시정이 되어서야 하나둘씩 모였다.
‘사도련도 글렀어.’
전쟁을 앞둔 놈들이 시간관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때 회의실 안으로 검은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른 미중년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사도련주군.’
종리연과 닮은 부분이 많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딸과 만나고 싶다면 오늘이 지나기 전에 청수객잔 뒤편에 있는 공터로 혼자 와라.』
전음을 날리고 객잔으로 돌아온 백서휘는 종리연과 함께 종리혁이 오기를 기다렸다.
‘언제 오려나.’
최대한으로 넓혀 놓은 기감에 종리혁이 잡혔다.
자신만 못해서 그렇지, 종리혁은 무관을 운영하기 시작한 이래 본 사람 중에 가장 강했다.
“준비해.”
백서휘가 나직하게 말하니 종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공터로 들어오는 어귀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생각보다 더 강한 것 같은데?’
호사가들 사이에서 괜히 중원 제일이라고 손꼽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빠!”
“여, 연아!”
종리혁과 종리연은 뼈가 부서지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힘껏 서로를 껴안았다.
‘나이 차이가 아주 많이 나는데도 되게 친밀하게 구네.’
백서휘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종리 씨 부녀(父女)를 바라봤다.
그는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을 기다렸다가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이야기를 좀 나눴으면 좋겠는데.”
“이야기라……. 이야기 좋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종리혁이 포옹을 풀며 종리연에게 물었다.
“그게…….”
가출로 인해 일이 커지게 된 터라 종리연으로서는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무섭게도 종리혁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녀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련 내에 갇혀 지내는 게 너무 답답해서 처음에는 그냥 잠시 마실만 나가자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종리연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마실?”
“죄송해요, 아빠.”
종리혁은 한숨을 크게 내쉰 후 종리연을 바라봤다.
“납치가 아니라 가출이었다?”
“네.”
“중요한 질문이니 다시 묻겠다. 정말 납치가 아니라 가출이었느냐?”
“네.”
종리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년은 왜 그런 말을…….”
“그년이요?”
“네 시녀 말이다. 향단이. 그년이 끊어진 목걸이를 가져와서 네가 납치됐다고 했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일이 이렇게 커지지 않았을 텐데…….”
“지, 진짜 향단이가 제가 납치됐다고 그랬어요?”
“그래.”
종리연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몸을 돌려 백서휘를 쳐다봤다.
“그년이 끄나풀이었군.”
“끄나풀? 그게 무슨 말이지?”
종리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나? 무림맹과 사도련의 사이가 나쁘긴 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더 자세히 설명해봐라.”
“무림맹과 사도련이 싸우도록 상황을 만든 흑막이 있어. 나는 그 흑막의 끄나풀로 지금 그 향단이란 여자를 의심 중이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 향단이란 여자가 증거랍시고 끊어진 목걸이를 가져온 건가?”
“그래, 납치됐다는 증거로 그 목걸이를 가져오고, 몸에 상처를 크게 입어서 납치가 맞다고 확신했다.”
“겨우 그거로?”
백서휘가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종리혁을 바라봤다.
종리혁은 꼼짝없이 믿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이후에 조사했을 때 그 목걸이 말고도 여러 가지 증거가 더 나왔다. 무림맹 소속 문파의 독문무공 흔적과 일정 경지에 오르면 문파 내에서 주는 수실 같은 것들 말이다.”
“그 향단이란 여자는 어떻게 됐지?”
“상처 치료를 끝내고 방에 연금 중이다.”
“연금?”
“상전을 제대로 못 모신 벌을 주려고 가둬둔 건데 가둬두길 잘했군.”
“그 여자를 봤으면 하는데?”
“보여주는 대신 질문에 대답을 좀 해줘야겠어.”
종리혁이 승냥이처럼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백서휘를 노려봤다.
“무슨 질문?”
“올해 춘추가 몇이나 되길래 나한테 반말을 하는 거지? 나처럼 반로환동하기라도 한 건가?”
“나는 나보다 약한 사람한테 존댓말 하는 게 어렵더라고.”
암중단체 관련된 일을 원활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기선 제압을 좀 해놓을 필요가 있었다.
백서휘는 일부러 종리혁의 화를 돋우었다.
“내가 약하다? 하하하하! 웃기는 놈이군.”
종리혁은 참지 않고 바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딸 앞에서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 검 뽑지 마.”
강호 12대 명검 중 하나인 탈명검(奪命劍)이 검집을 빠져나와 종리혁의 손에 쥐어졌다.
“뽑았다. 이제 어떡할 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