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32화
백서휘는 남창을 떠나 말과 마차를 숨겨둔 동굴로 달려갔다.
꽤 긴 시간 못 봤던 터라 말과 마차의 상태가 살짝 걱정됐다.
속으로 ‘더 빠르게’란 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응룡비천신법을 펼쳤다.
발로 땅을 내디딜 때마다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전력으로 달린 덕분인지 금방 동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백서휘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말과 마차를 살폈다.
‘괜한 걱정을 했군.’
말의 경우엔 대량으로 놔둔 먹이를 폭식한 탓에 살이 조금 올라 있었고, 마차는 만들 때 좋은 원목을 썼는지 습기 찬 곳에 계속 있었음에도 별 이상이 없었다.
“가볼까.”
말들과 마차를 조심스럽게 동굴 밖으로 빼냈다.
말들이 오랜만에 햇빛을 보고 놀라 이리저리 날뛰었다.
일반적인 사람이었으면 발에 치일까 무서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겠지만 백서휘는 아니었다.
무공을 익힌 그는 살기를 살짝 뿜으며 다가갔다.
언제 날뛰었냐는 듯 순식간에 순해지는 말들.
백서휘는 그들을 마차에 묶고 폴짝 뛰어 마부석에 올라탔다.
‘가볼까.’
동굴을 떠나고 하루가 지났을 때 서류와 장부의 가치도 모르고 만복상단과 거래에 임할 순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 성격을 아니 후려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가치를 알고 있는 편이 좋을 거야.’
상업에 대한 지식이 없어 시간이 좀 걸렸지만, 결국 장부와 서류 뭉치들을 읽고 이해하는 데 성공했다.
서류와 장부는 말 그대로 금녹상단의 ‘모든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나 상단과 맺은 비밀스러운 계약에 대한 정보부터 뇌물을 먹인 관리의 이름과 받은 액수 등등
정말 모든 것이 장부와 서류 뭉치에 담겨 있었다.
‘이 모든 걸 넘기면 만복상단은 쉽게 금녹상단을 먹어 치우겠지.’
그 돈 냄새 잘 맡는 금태풍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싸게 팔 수 있겠어.’
백서휘는 흐뭇한 표정으로 시선을 전방으로 옮겼다.
전방에는 악록산이 돌아온 그를 반기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장사겠군.’
최대한 빨리 장사에 가고 싶다는 욕망이 말에 채찍질하게 하였다.
화들짝 놀란 말들이 네 발을 바삐 놀렸다.
속보에서 구보로 바뀌니 마차가 달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 덕분에 일다경쯤 흘렀을 때, 장사에 진입할 수 있었다.
‘드디어……!’
감격한 것도 잠시.
백서휘는 마차를 잠시 멈추고는 사합원과 무관, 만복상단 셋 중에 어디를 갈지 고민했다.
세 가지 선택 모두 장점이 있었다.
그리웠던 가족들을 볼 수 있는 사합원.
여독도 풀고 자신이 없는 사이에 어떤 식으로 일이 돌아간 건지 파악 가능한 무관.
마차부터 서류 뭉치까지 가지고 온 모든 걸 팔 수 있는 만복상단.
차가운 이성으로 고민하니 답은 바르게 나왔다.
‘해야 할 일을 모두 처리한 후에 마음 편히 쉬는 편이 좋지.’
백서휘는 마차를 만복상단 쪽으로 몰았다.
이동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사람이 계속 지나다녀서 관도처럼 마차를 빨리 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미리 위사에게 말을 해둔 덕에 금태풍과의 만남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오랜만입니다.”
금태풍이 먼저 깍듯이 인사했다.
백서휘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없어.”
“다행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서 보자고 하신 겁니까?”
“거래하고 싶어서.”
“귀금속과 장신구들의 현금화는 제가 아니라 도방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그 도방을 불러 올테니…….”
“그것도 그건데 다른 걸 거래하려고 여기로 불렀다.”
“다른 거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나한테는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너에겐 전가의 보도가 되어줄 물건이다.”
“실마리를 더 주시면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스무고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냥 이리로 와서 봐. 너라면 이것들의 가치를 알 거야.”
금태풍은 마차의 짐칸 쪽으로 걸어왔다.
호위무사들이 따라 움직이자 그가 가만히 있으라는 뜻으로 손짓했다.
백서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계산하고 행동한 것일까?’
만약 맞다면 그게 더 호감이었다.
자신이란 사람의 가치를 알고 머리를 굴렸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군으로서는 바보보다는 영악한 쪽이 더 좋았다.
“이 정도로 두꺼운 장부라면 확실히 검이 되주긴 하겠지만 전가의 보도까지는 안 될 것 같은데요.”
“그 장부의 내용도 보고, 쌓여 있는 종이들도 어떤지 한번 봐봐.”
금태풍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장부와 맨 위에 올라와 있는 서류 하나를 차례대로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래졌다가 다시 작아졌다.
그러다 장부와 서류가 가진 가치를 알게 된 이후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신없이 다음 서류를 읽으려는 금태풍에게 백서휘가 한 마디를 던졌다.
“거기까지만 해.”
“예?”
“견본은 맨 처음에 봤던 그것뿐이야. 다음 장부랑 서류부터는 돈으로 사서 보라고.”
“다른 서류들도 다 이것처럼 중요한 정보들이 적혀 있습니까?”
“없는 게 없지. 이것들만 있으면 금녹상단을 꿀꺽하는 건 일도 아니야.”
백서휘가 히죽 웃으며 말하자 금태풍이 침을 꼴딱 삼켰다.
“갖고 싶으면 네가 생각하는 서류의 가치만큼의 액수를 불러. 맘에 들면 팔도록 하지.”
“잠시만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하루면 됩니다.”
“그러면 그동안 금붙이나 장신구 이런 것들을 현금화해줄 수 있나?”
“그건 저번에 봤던 송 도방에게 부탁해놓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장부와 서류들을 제외한 모든 걸 현금화해줘. 말이랑 마차까지 포함해서.”
“그러도록 하죠.”
“견본 두고 갈 테니까 보면서 액수를 잘 생각해둬.”
백서휘는 장부와 서류 하나씩 두고 무관으로 떠났다.
다음 날, 서류 뭉치와 장부의 가격을 결정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들은 소식을 전하면서 고급스럽게 생긴 마차를 보냈다.
‘내 환심을 사려고 작정을 한 것 같네.’
백서휘는 피식 웃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어제까지 마부석에서만 계속 있다가 이렇게 승용칸에 타니 기분이 이상했다.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마차가 덜컹덜컹하거나 갑자기 멈추며 관성으로 몸이 튀어 나가는 일이 없었다.
마차의 안정성과 마부의 솜씨에 감탄하는 사이, 어느새 만복상단에 도착했다.
정문에서부터 깔린 빨간 융단 위를 걸어 회의실로 향했다.
상단 소속 사람들이 융단의 양옆에 늘어서서 그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하루 만에 이런 준비를 했다는 게 놀라웠다.
‘황제도 이런 대접을 받지 못하겠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자 다른 곳에서라면 목에 힘주고 다닐 도방급 이상의 인사들이 깍듯이 인사했다.
무표정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계속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중원을 몇 번이나 구했는데도 이 정도로 대접을 받은 적이 없는데…….’
딱 한 번 황궁을 전복하려는 걸 막아서 거나하게 대접받긴 했지만, 비밀리에 이루어졌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장부와 문서의 가치가 대단할지 모르겠어.’
백서휘는 상단의 대방인 금태풍보다 상석에 앉았다.
“더 할 게 남아 있다면 이쯤에서 그냥 끝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그러죠.”
준비한 것들이 많은지 분위기가 정리되기까지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
“자, 이제 금액을 말해봐.”
“장부들은 금원보 25개, 서류들은 금원보 35개에 매입하고 싶습니다.”
백서휘는 팔짱을 끼고 회의실에 모여 있는 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다들 상계에서 오래 굴러먹어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려치는 건지, 제대로 값을 쳐주는지 감을 못 잡겠네.’
거액이긴 하지만 만복상단의 유보금에 여력이 더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현금동원력이 이십대 상단의 말석인 백오상단에 맞먹는 곳이야. 훨씬 더 있긴 할 거야. 대신, 다른 곳에 써야 하니 나한테 더 줄 수는 없는 거겠지.’
한계가 맞다는 가정하에 추가할 만한 조건이 있을지 생각해봤다.
‘현금이랑 지분을 섞어서 받으면 어떨까?’
만복상단이 금녹상단을 먹어치우면 금오상단보다 조금 더 커지게 된다.
이십대 상단 중 하나의 자리가 바뀌는 것이다.
상계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금태풍의 능력이라면 그 변화에 제대로 된 대처를 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매년 마다 만복상단이 주는 배당도 쏠쏠하다고 하고, 학무관이 망했을 때를 대비해 안정적인 소득이 필요하니, 지분과 현금을 섞어서 받는 게 좋을 것 같아.’
백서휘의 생각이 길어지니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들의 표정들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났다.
금태풍도 초조한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관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백서휘는 계속 말하라는 듯 턱짓을 했다.
“액수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아서 조건을 하나 추가하고자 합니다.”
“어떤 조건?”
“장부와 서류를 인도해주신 이후에 저희가 관주님의 아버님이신 군자검 백상후 대협께서 팔았단 물건 중 하나를 찾아 관주님께 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조건이었다.
자신의 목표는 무관을 흥성하게 하는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의 유품을 되찾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관 자리를 잡는 것에 급급해서 신경을 너무 못 썼어.’
백서휘는 진심으로 반성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 마음에 들어. 어떤 걸 찾아줄 생각이지?”
“하나를 정해주시면 그걸 목표로 되찾도록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백서휘가 침음성을 흘리며 어떤 걸 찾을까 고민했다.
그때 얼마 전에 있었던 그에게 있었던 일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마차에 있는 물건을 팔아서 번 돈으로 홍매검을 사기로 했었지.’
백서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홍매검을 되찾아줬으면 하는데, 가능하겠나?”
“홍매검의 특징과 언제 팔았는지만 알면 찾는 건 문제없습니다.”
“그 정보는 내가 알아보고 주도록 하겠다.”
“그럼 이제 그 문서들과 장부들은 저희 것이…….”
“조건을 하나만 더 추가하고 싶다. 아니, 변경이라고 봐야지. 이건.”
“어떤 조건이죠?”
“거래 대금을 현금과 지분을 섞어서 받고 싶다.”
“지분 문제는 민감한 문제라 도방들과 상의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러지.”
백서휘는 회의실에서 한참 떨어진 접객실로 가 결과가 나오길 기다렸다.
‘민감한 문제가 맞긴 한 모양이군.’
두 시진이 넘어가는데 결과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내일 알려 달라고 하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을 때, 금태풍이 접객실로 들어왔다.
“결과는 나왔나?”
“예.”
“어떻게 됐지.”
“지분 오 푼과 금원보 30개가 저희가 제시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입니다.”
“마차로 가지고 온 물건의 대금까지 지분으로 받으면?”
“그건 또 협의해야겠지만 아마 지분이 늘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 대금을 금원보로 받는다면 얼마나 되지?”
“10개로 알고 있습니다.”
“좋아, 그러면 오 푼의 지분과 금원보 40개, 물건 인도 후에 홍매검을 받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금태풍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내가 더 고맙지.”
백서휘가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이전까지 금태풍과 계산적으로 친해진 것이었다면 지금은 달랐다.
진심으로 금태풍에게 호감을 품게 되었다.
그만큼 홍매검을 찾아준다는 금태풍의 말이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