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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무관-33화 (33/202)

귀환무관 33화

평범한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벌지 못할 금액의 돈이 주머니에 들어왔다.

백서휘는 그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를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학무관을 짓는데 투자할까?’

충분히 많이 투자해서 지금 더 돈을 집어넣는다고 해서 더 공사가 빨라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니면 무관 시설을 더 좋은 거로?’

지은 게 바로 얼마 전이라 시설과 수련 도구 모두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금태풍이 보낸 것들이 모두 최고급이라 더 좋은 걸 사는 건 돈낭비였다.

‘누나네는 이미 집을 사줬으니 됐고…….’

계속 머리를 구려보지만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백서휘는 장시간의 고민 끝에 뜻 깊은 결정을 내렸다.

후대를 위해 구명학의 금고에서 나온 금자와 금원보를 금와전장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다음 장문인이 제대로 돈을 썼으면 좋겠네.’

이제 나머지 돈을 고민해봐야 할 때였다.

만복상단에 팔아 치우고 받은 돈을 모두 합친 탓에 나머지 돈의 액수가 제법 컸다.

‘금원보를 일부만 쓰더라도 좀 괜찮은 곳에 썼으면 하는데, 쓸 곳이 마땅히 안 떠오르네. 그냥 가지고 있는 게 좋으려나.’

언젠가 닥칠지 모르는 위기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호기를 위해서 돈을 좀 가지고 있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백서휘는 천장에 방의 금원보를 숨기고는 하던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준비를 했다.

‘이거 하나만 있어도 되겠지.’

피풍의나 삿갓은 그대로 누고 주머니가 많이 달린 혁대만 허리에 찼다.

그 상태로 밖으로 나오니 하늘엔 달이 걸려 있었다.

‘깔끔하게 끝내주지.’

학무관이 지어질 예정인 부지로 천천히 걸어갔다.

부지 근처에 도착하니 집들이 자리 잡은 게 보였다.

그 집들은 거의 모두 비어 있었지만, 딱 한 집만은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었다.

백서휘는 아직 사람이 사는 집으로 가서는 문을 쿵쿵 두드렸다.

“누구야!”

집주인이 문을 활짝 열며 소리쳤다.

“오늘은 돈 좀 많이 가지고 왔나?”

“이딴 집에 억만금을 쓸 곳은 중원 어디에도 있지 않아.”

“그럼 그쪽은 이곳에 짓고싶은 걸 지을 수가 없을 텐데?”

“아니, 상황이 바뀌어서 짓고 싶은 걸 지을 수가 있어.”

백서휘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연락 못 받았나?”

“무슨 연락?”

“금녹상단에서 말 안 해?”

“그, 금녹상단이랑 나랑 무슨 관계인데?”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구명학이 쓰러졌거든.”

“대방께서? 헉! 아니, 금녹상단 대방 아, 아니 그 구명학인지 뭔지가 쓰러진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말실수한 집주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상관있지. 네 뒤를 봐줄 사람이 이제는 없다는 소리니까.”

“뒤, 뒤를 봐주는 사람? 그런 거 없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되지도 않는 연기로 속이려 한다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백서휘는 허리춤에 달린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스르릉!

소름이 돋는 소리가 들리자 집주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 죽어가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보자고.”

백서휘는 살기를 투사하며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싸울 용기도 없으면서 그동안 그렇게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었던 거냐?”

백서휘가 목소리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담아 일갈했다.

더는 안 되겠다고 여겼는지 집주인이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그 자세가 저잣거리에 나도는 육합권의 자세와 같았다.

백서휘는 가만히 멈춰서서는 진심이냐는 듯한 눈빛으로 집주인을 바라봤다.

‘너무 어이가 없으니까 웃음도 안 나오는군. 겨우 육합권으로 나를 상대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건가?’

누군가 고치기 전의 원전이라면 모를까.

현기(玄機)가 사라진 지금의 육합권으로는 자신을 절대 상대할 수 없었다.

진짜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지 집주인의 얼굴엔 공포가 어려 있었다.

‘뭐, 좋아. 무공을 익혔으니 죽여도 되겠지.’

아무것도 익히지 않은 양민이라면 다른 방법을 썼겠지만, 상대는 일초 반식이나마 무공을 배운 자였다.

눈앞에 있는 자가 어떻게 죽어도 관에서는 나설 명분이 없었다.

‘무림인 대 무림인’으로 싸워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나?”

“사, 살려…….”

백서휘는 집주인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었다.

피부를 뚫고 들어가 심장을 찌르는 느낌이 오른손에 전해졌다.

백서휘는 바로 검을 회수해 검집에 납검했다.

‘혹시 모르니 흔적을 지워야겠지.’

혁대에 달린 주머니 중 하나에서 화골산을 꺼내 집주인의 시체에 뿌렸다.

그러자 집주인의 시체가 흐물흐물해지더니 완전히 녹아 사라졌다.

남은 옷가지에 삼매진화로 불을 붙인 후 바닥에 던졌다.

나무 바닥에 불이 붙으며 사방팔방으로 번져갔다.

집 밖으로 나온 백서휘는 불 타오르는 집을 한동안 바라봤다.

“잘 타네.”

* * *

“여기에 장원이라도 지으시려는 겁니까?”

거간꾼이 돈을 품에 챙기며 물었다.

괜한 말로 학무관의 정보를 유출하고 싶지 않았던 정하진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러려고 생각 중이긴 하네.”

“사고 없이 지어지길 기원하겠습니다.”

“고맙네.”

“그럼 저는 돈도 챙겼고 계약도 끝났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거간꾼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백서휘가 도착했다.

“계약 다 끝나셨습니까?”

정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가 유출될 일은 없겠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네. 정보가 샐 만한 질문엔 대충 대답을 했거든.”

“잘하셨습니다.”

“공사의뢰는 하고 왔는가?”

“무관 증축할 때 의뢰했던 홍 씨 부자에게 이번에도 일을 맡겼습니다.”

“확실히 그 사람들이라면 믿을 수 있지.”

“그 자들 말로는 공사가 대규모라 기간이 꽤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동안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사범들을 섭외하는 게 좋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일전에 말했던 장우량을 섭외하겠네.”

“글과 시를 가르칠 분으로 섭외한다는 그분 맞습니까?”

“그러네, 같은 스승 밑에서 수학한 동기이기도 하지.”

“음……. 그러면 저는 음악과 그림을 가르칠 사범으로 괜찮다고 말씀하셨던 남궁유운이라는 자를 섭외하도록 하겠습니다.”

“쉽지 않을 테니 미리 각오를 해두는 게 좋을 걸세.”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설득하기 어려울 수 있네. 그야말로 다 가진 자 아닌가.”

백서휘가 침음성을 흘렸다.

“확실히 그 부분은 생각 못 했던 부분입니다.”

“아마 그 부분만 해결되면 설득엔 문제없을 걸세.”

백서휘는 사범과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눈 후, 개방의 호남성 분타로 향했다.

“나겁개!”

다리 위에서 소리치니 나겁개가 기겁하며 달려왔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요?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느라 바쁜 거로 아는데…….”

“새로운 사업? 그 이야기 어디서 들었지?”

“추측했소.”

“어쩌다 그런 추측을 한 건지 그 근거를 대.”

“태극무관과 그 주변 부지를 계속 매입하는 걸 보고 추측한 거요. 반응을 보니 새로운 사업을 한다는 내 추측이 맞았나 보구려. 그 사업이 어떤 사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새로운 사업을 진행한다는 건 하오문에서도 알고 있을 거요.”

반응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보여주는 행보를 보고 추측하다니, 방심하지 말아야겠어.’

백서휘는 앞으로 일을 진행할 때는 더 조심스럽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건지 안 알려줄 거요?”

부탁할 게 있어서 온 거라는 사실을 눈치챈 걸까?

아니면 요즘 너무 잘해줘서 그런 걸까?

나겁개는 짝다리를 짚고 새끼손가락으로 코를 파며 살짝 건방진 모습을 보였다.

“선을 넘는 걸 조금씩 허용해주면 어느 순간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려 하는 게 검은 머리 짐승이라는 걸 내가 잊고 있었다.”

“그, 그게…….”

“요새 내가 너무 잘해줬지?”

백서휘의 나직한 말이 나겁개의 고막에 깊숙이 박혔다.

나겁개는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미, 미안하오. 자다 일어나서 바로 온 거라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소. 이, 일부러 그러려고 한 게 아니니 용서해주시오. 사죄의 의미로 특급 정보를 알려주겠소.”

“특급 정보? 어떤 건데?”

“그, 그 천으로 온몸을 칭칭 감은 자가 항주에 나타났다고 하오.”

“그게 특급 정보야?”

“그, 그렇소.”

“그놈의 소재는 하오문을 통해서 이미 다 파악하고 있어. 내게 해를 끼치지 않아서 아직은 내버려 두고 있는 것뿐이야.”

“그, 그랬구려.”

“그냥 달게 벌을 받아.”

“아, 알겠소.”

“벌은…….”

심각한 실수는 아니니 신체를 자르는 건 너무 과한 처사였다.

그렇다고 정상참작해주기엔 걸리는 점이 많았다.

백서휘는 고민하다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좋아, 손으로 정수리 부분의 머리카락을 잡아봐.”

“머, 머리카락은 왜?”

백서휘가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인상을 썼다.

나겁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수리 부분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해, 했소이다.”

“조금 전처럼 의문을 품거나 내 말을 바로 행하지 않으면 그때는…….”

“자, 잘 알겠소.”

“좋아, 그럼 그대로 그 머리를 뽑아내. 중앙 부분을 하나도 남김없이.”

“도, 독두(禿頭, 대머리)로 만들려고 그러는 거요?”

“발을 자르는 것보다는 낫잖아.”

지금 여기서 머리카락을 뽑아내지 않는다면 발목을 자르겠단 경고였다.

그 사실을 바로 알아차린 나겁개는 망설이지 않고 머리카락을 다 뽑았다.

“너무 많이 남아 있네. 비어 있는 게 보일 정도로 다 뽑아.”

“아, 알겠소…….”

나겁개가 중앙 부분에 머리카락을 완전히 다 뽑고 나서야 백서휘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벌을 받았으니 네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걸 말해주마. 나는 한 사람에 대해 알려고 이곳에 왔다.”

“자주 가던 하오문을 가지 왜 여기를…….”

나겁개가 들리지 않게 중얼거린다고 했지만 백서휘의 귀는 웬만한 짐승보다 뛰어났다.

“나머지 머리도 다 뽑히고 싶어?”

“히이익! 아, 아니요.”

나겁개가 손사레치며 말했다.

“입 조심해.”

“아, 알겠소이다.”

“다시 말해주자면 한 사람에 대해 알려고 왔는데, 그 사람이 남궁가의 사람이다.”

나겁개는 그제야 왜 이곳에 온 건지 이해했다.

정파에 관련된 정보를 알려면 필연적으로 개방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하오문은 사파의 존재라 정파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데 지장이 많기 때문이었다.

“남궁가의 누구를 알고 싶은 건지…….”

“남궁유운.”

“남궁유운이라면 화화공자(花花公子)로 유명한 그 남궁유운을 말하는 거요?”

“화화공자라고?”

“송옥(宋玉)과 반안(潘安)에 비견되는 얼굴에 그림도 잘 그리고, 악기도 잘 다루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소.”

“그자를 어딜 가면 만날 수 있지?”

“무슨 일 때문에 그를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만나서 직접 대화하는 건 힘들 거란 말을 하고 싶소.”

“왜지?”

“바람 같은 사내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기에 그렇소. 남자랑 대화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하고.”

“소재가 불분명하고 남자랑 하는 대화를 꺼린다?”

“그렇소.”

“뒤에는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됐고 소재가 어딘지나 말해.”

“마지막으로 들은 정보에 의하면 남궁유운은 죽마고우를 만나기 위해 이번 용봉지회에 참가한다고 들었소.”

“죽마고우는 누구고 용봉지회가 뭔지나 말해.”

“죽마고우는 제갈세가의 소가주 제갈진천이고…….”

제갈진천이면 한빙단의 비용을 치르면서 자기 목숨값엔 부족하다며 신패를 준 자였다.

“용봉지회는……. 음……. 설명하기 전에 약속 하나만 해주시오.”

“무슨 약속?”

“용봉지회를 망치지 않을 거라는 약속 말이오.”

“어떤 건지도 모르는데 약속할 수는 없어.”

“당신이 용봉지회를 망치면 나는 죽을 수도 있소.”

“나중이 아니라 지금 죽을 수도 있지.”

백서휘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나겁개는 한숨을 내쉬고는 용봉지회에 대해 설명했다.

“용봉지회는 오대세가와 그들의 영향권에 사는 문파들이 한곳에 모이는 모임을 말하오. 이번 용봉지회는 제갈진천이 오랜 지병을 완치한 기념으로 호북성 무한의 황학루(黃鶴樓)에서 모임을 주최한 것으로 아오.”

“그래?”

“문제는 용봉지회가 열리는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거요.”

“얼마나 남았는데?”

“열사흘밖에 안 남았소.”

백서휘는 머릿속으로 호남성 장사에서 호북성 무한까지의 거리를 가늠해봤다.

‘설렁설렁 가도 일주일이면 갈 것 같은데?’

집으로 돌아가는 대로 짐 챙겨서 당장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겁개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새처럼 날아가거나 무영신투(無影神偸)보다 빠르다면 도착하는 게 가능하겠지만 아니라면 그냥 포기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요.”

“가능할 것 같은데?”

나겁개는 백서휘가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저, 정말이오?”

“그래.”

백서휘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나겁개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 재밌는 농담이었소.”

“무한에서 들릴 소식을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백서휘가 짧은 말을 남기고 무관으로 돌아갔다.

“에이! 무영신투도 힘든 걸 저 개자식이 어떻게 해. 저게 되면 내가 머리를 다 뽑고 진짜 독두가 된다.”

나겁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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