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무관 31화
콰아아앙!
백서휘는 혈염지옥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면서 검사가 깃든 검으로 반격까지 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적우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혈염지옥이 통하지 않으면 버티면서 싸우는 수밖에 없어.’
계속 시간을 끌고 백서휘가 지치는 걸 유도했다.
이상한 건 몸이 풀리기라도 하는 건지 백서휘의 공격이 점점 매서워진다는 것이었다.
‘왜 내가 계속 밀리는 것 같지?’
진이란 건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법.
그런 진법의 도움을 받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계속 손해만 보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초절정의 경지일지라도 말이다.
‘어째서 이런 거야! 절정의 끄트머리에 있는 내가 밀리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백서휘는 자신과 진하승, 식객 무리도 상대하고 있으면서도 밀리는 모습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때 적우현의 뇌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상대가 초절정의 경지가 아니라 더 높은 경지의 무인이라면?’
초절정보다 높은 경지는 화경 이상의 경지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화경 이상은 전설 속의 존재나 오를 수 있는 경지였다.
‘저 나이에 초절정의 경지도 말이 안 되는데,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고? 말이 안 된다! 말이 안 돼!’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와중에 진하승의 표정을 우연히 보게 됐다.
그도 적우현과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스각!
맞붙어서 공격만 교환했을 뿐인데 홍염방도 둘의 머리가 잘렸다.
그에 반해 백서휘는 내력을 조금 소모했을 뿐, 몸 상태는 처음 싸울 때랑 다른 게 없었다.
‘염병할! 왜 저놈은 타격을 입지 않고 나랑 부하들만 입냐고!’
부하들을 모조리 이곳으로 끌고 왔을 때는 그 수가 쉰 명을 넘었었다.
그런데 이제 남은 건?
지금 빠르게 세어보니 스물일곱밖에 되지 않았다.
‘진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은 스물다섯. 여기서 세 명이 더 죽게 되면 그때는 이나마 싸우는 것도 불가능해지겠지.’
검사가 일렁이는 검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학살을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건 나를 포함한 모두가 후유증을 각오하고 역기충혈대법(逆氣保血大法)를 쓰는 것뿐이다.’
몸 성히 살아갈 생각을 하는 건 이제는 그만두어야 했다.
무언가를 주더라도 혹은 잃게 되더라도 이곳에서 도망가야만 했다.
‘어쩔 수 없……. 잠깐, 부하들만 역기충혈대법을 쓰고 시간을 끌게 하면 나 혼자는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이 문제지 살아나가기만 하면 부하들은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었다.
적우현은 부하들을 제물로 던지고 도망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모두 역기충혈대법을 써라!”
“바, 방주님 그걸 쓰면 저희는…….”
“몸 성히 살아갈 방법은 이제 없어! 나도 쓸 거니까 너희들도 신호에 맞춰 써라!”
“네!”
“셋, 둘, 하나!”
몸 안에서 돌고 있는 진기를 억지로 역으로 틀어버린 후에 특정 혈도를 자극했다.
그러자 선천진기의 일부가 격발되며 온몸에 진기가 충만해지고 지쳤던 몸에 힘이 돌아왔다.
“그르르륵!”
두 명의 부하들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했지만, 아직 스물다섯이 남아 있어서 괜찮았다.
“다시 한번 혈염지옥을 쓴다!”
“네!”
“셋, 둘, 하나! 혈염지옥!”
적우현은 부하들에게 억지로 혈염지옥을 쓰게 한 후 본인은 진에서 벗어났다.
그가 도망가려 한다는 걸 눈치챈 백서휘가 소리쳤다.
“이야! 도망치는 거야? 목숨보다 소중하다던 적상현의 행방이 궁금하지 않은가 보네.”
“제기랄! 이 개자식!”
“이쯤 됐으면 뭐, 알려줘도 되겠지.”
“내 동생 어디 있어!”
“황천 갔지. 어딜 가.”
“주, 죽었다고?”
“어떻게 죽였는지 알려주지. 하하! 네 동생은 사지의 근맥이 다 잘리고, 단전까지 깨진 후에 아무것도 못 하는 무력한 상태에서 목숨을 구걸하다 내 손에 죽었다!”
“개자식! 가만두지 않겠다! 혈염지옥을 한 번 더 써라!”
홍염방의 방도들은 자기를 버리려고 한 적우현의 명령을 듣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도망치려 했다.
백서휘는 마교의 무학을 익힌 모두를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던 차였기에 그들의 도주를 허용치 않았다.
“홍염방에서 남은 건 이제 너뿐이다. 어떡할 거지?”
“이이이익!”
“동생을 죽인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계속 눈치만 볼 건가?”
백서휘는 진하승과 식객 무리를 상대하면서 계속 적우현을 도발했다.
“싸우려면 얼른 싸우고 도망치려면 얼른 도망쳐라! 겁쟁아!”
책임자이자 지휘자로 함께 왔던 진하승이 일갈하자 적우현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네 동생도 그렇게 눈치보다가 죽었지.”
“가만두지 않겠어! 가만두지 않는다고! 으아아아아!”
적우현은 역기충혈대법을 쓴 채로 백서휘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검엔 불완전한 형태의 검사가 감겨 있었다.
그걸 본 백서휘는 본신의 실력을 드러내 다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적가의 방계 주제에 제법이네. 검에서 검사까지 뽑아내고.”
“적가의 방계? 너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을 것 같아?”
“너 설마…….”
“그래, 그게 나다!”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 달려들었던 적우현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어졌다.
백서휘는 검에 공력을 한껏 불어넣었다.
푸른빛을 띤 구슬이 검신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감싸기 시작했다.
뭘 하려는지 알아차린 진하승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서, 설마 그건…….”
“네가 생각하는 거 맞아.”
“모, 모두 피해!”
“늦었어.”
백서휘는 회심의 미소를 지은 후 모여 있는 적들에게 강환을 날렸다.
강환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가 적들을 공격했다.
콰아아아앙-!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와 눈을 부시게 했다.
그러더니 버섯구름이 멀리서 봐도 보일 정도로 크게 피어올랐다.
땅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며 곳곳에 기둥과 구멍, 틈 등이 생겼다.
이윽고 강력한 충격파가 백서휘를 덮쳤다.
“휘유!”
살아 있던 적우현, 흑염방의 방도들, 진하승, 식객 무리도 사라졌고, 시체가 되어버린 것들도, 잘 깔려 있던 관도도 흔적 없이 소멸했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이 지워졌다.
“너무 날뛰었나.”
관도가 없어져 사람들이 고생할 걸 생각하니 조금 양심에 걸렸다.
“모르겠다.”
금녹상단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무력 수단을 없애버렸으니, 이제 창고에 불을 지를 때가 되었다.
백서휘는 동굴에 숨긴 말과 마차 짐의 상태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후, 남창으로 돌아갔다.
* * *
달이 하늘에 걸렸을 때 남창에 도착했다.
백서휘는 객잔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를 고민했다.
‘그렇게 피로하지는 않은데 그냥 일부터 처리할까?’
마차를 끌고 가야 하는 터라 올 때보다 돌아갈 때 시간이 더 걸린다는 걸 생각해야만 했다.
‘뭐든 해야 할 일을 처리한 이후에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백서휘는 객잔에 들어가지 않고 남창의 외곽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곽에 도착하니 금녹상단 소유의 창고들이 보였다.
‘끝도 없군.’
괜히 대형 상단이 아니라는 듯 창고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백서휘는 은형잠종술을 쓰고 창고단지 안으로 숨어들었다.
사람들을 피해 걷다 보니 비어 있는 창고를 발견했다.
그곳으로 들어간 백서휘는 본인을 중심으로 기감을 넓혀 나갔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뭐 이렇게 넓어?’
기감의 범위를 최대한 크게 넓혔음에도 창고단지 모두를 감지할 수 없었다.
‘절반씩 해야겠군. 일단은 이곳 정보부터…….’
창고 건물의 수는 어차피 불을 지를 거기에 일부러 세지 않았다.
백서휘가 센 건 순찰하는 경비병력과 우물의 숫자였다.
‘경비병력의 수가 여기에 70명 정도 있다는 건 반대편에도 70명 정도가 있다는 건데…….’
진짜 곳곳에 있어서 모두를 찾아가 죽이는 건 효율성 면에서 그리 좋지 않았다.
동선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보이는 경비병력만 죽이는 게 나을 듯했다.
‘빈틈은……. 내가 있는 곳이 빈틈이었군. 어쩐지 병력이 별로 없더라니.’
비어 있는 창고 쪽은 순찰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쪽에서부터 불을 지르는 게 좋겠어. 문제는 불을 크게 키울만한 게 없다는……. 어? 술독이 있잖아?’
백서휘는 술이 있는 창고로 바로 직행했다.
싸구려 화주는 하나도 없고 금존청이나 여아홍 같은 고급술만 있었다.
‘어차피 사라질 것들이니 한 잔은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생겼다.
‘아까워도 안 돼.’
여기까지 와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백서휘는 얼굴을 굳히고 창고 하나에 명주 하나를 뿌리는 식으로 불이 잘 타게 만들었다.
마지막 명주를 창고에 뿌리고 있는데, 넓어진 기감으로 경비병력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어디서 맛있는 냄새나지 않냐?”
“아무리 봐도 술 냄새 같은데.”
“그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
퍽!
백서휘는 정권을 쥔 손을 빠르게 뻗어 한 놈의 머리를 수박처럼 터뜨렸다.
“갑자기 왜 말을 하다……. 읍읍!”
다른 한 놈의 입을 틀어막으며 심장에 내가중수법의 묘리가 담긴 장을 날렸다.
‘이제 남은 건 우물을 막는 일인가.’
막는 건 쉬워도 필연적으로 소음이 동반될 일이었다.
은밀히 작업하는 건 포기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다.
‘창고에 불을 지르고, 화재로 경비병력들이 정신없을 때 우물을 부수는 게 좋겠어.’
백서휘는 삼매진화의 수법으로 명주를 묻힌 창고에 불을 붙였다.
확실히 독주라 그런지 창고가 빠르게 불이 탔다.
매캐한 검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자 경비병력들이 화들짝 놀라며 달려왔다.
백서휘는 그들이 없는 곳들 위주로 돌아다니면서 우물을 막아버렸다.
“불이야!”
“불이 났다!”
“모두 우물……. 헉! 우물이 막혔어!”
“뭐라고?”
우왕좌왕하는 경비병력을 보며 백서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금녹상단은 이제 끝이군.’
다들 화재가 일어난 곳만 신경 쓰는 게 눈에 보였다.
백서휘는 기감이 닿지 못했던 곳으로 넘어가 똑같이 작업했다.
인화성 물질을 창고에 묻히고 불을 지르니 경비병력들이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 이거 대방께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다들 눈치만 보고 있을 때 40대쯤 되어 보이는 경비병력이 손을 들며 말했다.
“내가 보고하고 올게.”
중년의 경비병력이 보고하러 사라지고 나머지는 다들 불을 끄려고 노력했다.
불이 난 지 한 식경이 지났을 때, 갑자기 저 멀리서 사두마차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
백서휘는 마차에 타고 있는 자가 구명학이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어떻게 행동하려나.’
어둠 속에 숨어서 구명학이 보이는 반응을 관찰했다.
“우물에 있는 물을 길어다 불을 끄라고 멍청한 놈들아!”
“대, 대부분의 우물이 막혔습니다.”
“그러면 저 물은 뭐야?”
“거리가 좀 있는 곳에서 길러온 물입니다.”
“마, 맙소사. 그러면 저 불은……. 아아아아…….”
구명학이 갑자기 목덜미를 손으로 잡더니 눈을 까뒤집고 혼절했다.
“구, 구 대방님!”
“의원! 의원을 불러라!”
경비병력은 불을 끄는 걸 포기하고 구명학을 의방으로 데려갔다.
‘저놈이 죽으면 유산은 어떻게 되려나. 비자금 같은……. 잠깐! 비자금? 금고 같은 거 숨겨두지 않았을까?’
백서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금녹상단의 본단이 있던 남창 중심으로 향했다.
한 식경이 조금 안 됐을 때, 백서휘는 은형잠종술을 쓴 채로 금녹상단의 본단에 잠입했다.
‘집무실은 어디 있는 거지?’
돌아다니다 만복상단의 본단과 구조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곳 집무실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으려나.’
예상이 맞았다.
구명학의 집무실은 심처 중의 심처에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었다.
만복상단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모를 뻔했다.
몇 번 방문한 경험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기감으로 안쪽을 살폈다.
‘아무도 없군.’
백서휘는 집무실로 들어가면서 벽면부터 살폈다.
‘그림이 있네?’
정말 획기적으로 숨기는 게 아닌 이상, 금고의 위치는 대동소이했다.
그림의 뒷면이나 책장 뒤, 탁자 밑 등에 금고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구명학의 집무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림을 치우고 벽을 보니 색깔이 옆에 있는 것과 미세하게 달랐다.
‘찾았다.’
백서휘는 벽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안에 공간이 있을 때 날 법한 소리가 들렸다.
‘따로 금고가 없고 그냥 비밀 공간을 만들어서 숨겨둔 건가 보네. 이걸 여는 게……. 이거겠군.’
단추 비슷하게 생긴 걸 누르니 벽이 양옆으로 열렸다.
드르르륵!
6평이 조금 안 되어 보이는 방이 나타났다.
방 안에는 그림을 비롯한 장식용 물건, 돈, 두꺼운 장부, 엄청난 양의 서류가 있었다.
‘가져가도 마땅히 쓸 데가 없으니 장부랑 서류는 그냥 두고 가는……. 잠깐만, 이거 만복상단에 팔아먹을 수 있지 않을까?’
무려 경쟁상단의 대방이 금고에 보관해둔 장부와 서류 뭉치였다.
지금 만복상단에겐 이것만큼 맛있는 게 없으리라.
‘무조건 챙기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너무 양이 많아. 어떻게 챙기지?’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침상이 있는 게 보였다.
구명학이 업무를 보다 잠깐씩 잠을 자던 침상 같았다.
‘침상에 있는 이불을 보자기처럼 써서 장부랑 서류들을 챙기면 되겠다. 금자랑 금원보도 챙기고……. 전표는……. 전표는 어쩌지?’
구명학이 그대로 죽으면 써도 상관없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나게 되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귀찮은 일이 일어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냥 두는 편이 맞았다.
백서휘는 전표를 제외한 물건 중 현금화하기 용이한 것들을 챙겨서 금녹상단의 본단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