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3/84)

제2장 제갈장령

 갑자기 백산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흑색지안이 발현

되었을 때 보여주었던 그 춤을 이번에는 아무런 기세 없이 그저 추어대는

것이었다. 이어서 흘러나온 구성진 노랫가락.

 이상히도 생겼다. 맹랑하게도 생겼구나.

 송아지의 말뚝에서 물줄기가 웬 말이냐.

 이놈이 그놈인데 어찌 저리 다를쏘냐.

 한 줄기는 천 리 가고 한 줄기는 만 리 간다.

 "흐윽!"

 순간 백산의 주변을 돌고 있던 여인들 사이에서 격렬한 움직임이 일며 반

라 여인들의 형상이 희미해졌다. 색정요마무를 펼치던 요마가 백산이 부르

는 노랫가락의 의미를 알아차린 것이다. 백산이 읊고 있는 노래는 조금 전

그녀의 수치스러운 행동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얍!"

 심리적인 동요 때문에 약해졌던 내공을 더욱 세게 끌어올렸다. 결국 내공

대결로 승부를 결정지어야 할 것 같았다. 그 또한 그녀가 바라는 바였다.

그녀가 가장 내세울 수 있는 게 내공이었다. 구마 중 제일이라 자부하고 있

고 모두들 인정하고 있는 바였다. 나이도 몇 살 먹지 않은 애송이에게 질

리가 없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더욱더 강하게 끌어올린 그녀의 내공과는 상관없이 백산의 노랫소

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사상에 숭어던가, 꼬챙이 구녁 완연하고.

 뒷절에 중이던가, 민대가리 둘이구나.

 예절도 바르구나, 꼬박꼬박 절은 한다.

 계속해서 춤을 추는 백산의 몸에서 붉은 혈무가 뿜어져나와 구성진 노랫가

락을 타고 흘렀다. 갈수록 농밀해진 혈무는 사방으로 더욱 퍼져나갔고, 요

마에 의해서 만들어진 환락무가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요

마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 별것 아닌 애송이라 생각했는데 내상(內傷)

을 입고 말았다.

 "환락색정무!"

 요마의 입에서 다시 한 번 고함소리가 터져나오자 모든 여인들이 옷을 벗

어 던지며 나체로 춤을 추었다. 요마의 최후 절초인 환락색정무, 자신의 모

든 내공을 동원하여 펼친 색공이었기에 그 위력 또한 엄청났다. 폭발적인

힘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색을 알고 있는 남자에게는 그만큼

 강한 위협으로 다가온다는 말이었다. 백산도 견디기 힘들었는지 그의 노랫

가락이 더욱 커졌다.

 아이고 어쩔거나, 아니고 어쩔거나.

 물을 보니 목마르고, 알밤 두 쪽 먹고 싶네.

 아이고 어쩔거나, 아니고 어쩔거나.

 마시려니 물이 없고, 먹으려니 밤 떨어졌네.

 에라, 하릴없다.

 오장군만 경사 났네.

 "커억!"

 백산의 마지막 노랫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요마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소리

가 터져나왔다. 이어 울컥울컥 핏물을 토해냈다.

 노랫소리 때문이었다. 내공을 이용해서 귀를 막아도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 그 노랫가락은 스스로 욕망을 채우려 했던 치욕스런 행

동을 선명하게 떠올리게 하였다. 온몸을 잠식해오는 수치심 때문에 지금 내

공대결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순간적으로

균형이 무너졌고, 그곳을 통해서 놈의 내공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처

음 당했던 옆구리를 또 한 번 강타당해 버렸다.

 그러나 이번의 공격은 처음 당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신의 몸을 바

스러트릴 정도의 엄청난 내공이었다.

 "누구냐?"

 조금 전에는 형식적으로 물었지만 지금은 진정 알고 싶었다. 비록 야비한

방법을 이용했지만 나이도 몇 안 되어 보이는 자가 자신보다 월등한 내공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궁금했다.

이름도 없는 무명에게 패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죽을 때도 이름 있는 자에게 패해야 명예가 지켜진다고 생각하는 무인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코웃음 치며 비웃었는데, 그 입장이 되어보니 이해가 되

었다. 자존심을 지키며 죽고 싶다는 의사표현인 거였다.

 "천하제일도의 제자."

 "혈마도 네가 죽였더냐?"

 죽음이 임박해서인지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백

살대의 대주 정도 되니까 저 정도의 인물을 키워냈을 것이다.

 "지금 죽여줄 수 있겠느냐?"

 혈마도 죽였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적을 향해 부탁을 했다. 추악한 늙은이

의 모습으로 죽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요마 요추추로 남고 싶었고 요추추

의 얼굴로 죽고 싶었다.

 "알았소."

 대답과 동시에 백산의 도가 움직였다.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과거 팽무

도의 애도인 그 도가 붉은빛을 뿌리며 요마의 목을 갈랐다.

 "저승에 가거든 부디 욕심 부리지 말고 사시오."

 과거 객잔에서 음양쌍마의 늙어가는 모습을 보았기에 그녀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 하는 순수한 욕심이었기에 원하는 대

로 해주었다.

 "어이구, 급하다 급해! 빨리 가야겠다."

 춘약(春藥)에 중독되어 아래쪽으로 힘이 쏠리는 느낌이 강해지자 서둘러

몸을 날렸다. 운기를 해서 몰아내면 못할 리도 없겠지만 마누라가 셋씩이나

 있는 놈이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백산이 떠난 자리에는 하체가 벗겨진 요마의 몸뚱이만 남았다. 또 한 명의

 야망자가 백산의 손에 의해서 죽어갔다. 아울러 사부인 팽무도의 복수도…

….

 "어? 자네……."

 객잔의 문을 거칠게 밀고 들어온 백산을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서문천이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상태를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서 대협, 누님 좀 불러주시오. 어서.'

 서문천에게 전음을 보낸 백산이 재빨리 객잔 아래쪽에 있는 빈집으로 몸을

 날렸다.

 "거참! 별것 아닌 줄 알았는데 독하네."

 일부러 이런 상황으로 몰아갔지만 요마의 춘약은 생각 외로 독했다. 이미

혈액 속으로 녹아들었는지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졌다. 또한 자꾸만

떠오르는 미녀들의 환영이라니.

 이런 면이 색정요마공의 무서움이었다. 춘약에 의해서 생기는 욕정은 두말

할 나위도 없고, 더더욱 무서운 점은 머릿속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미녀들의

 환영이었다. 분명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이러한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끼이익!

 밖에서 문을 여는 소리에 백산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어서 와요, 어? 추렴이네?"

 '백 공자, 세상은 공평해야 하네. 특히 밤일은 더더욱…….'

 서문천이 전음을 남기며 멀어져갔다.

 '쩝! 장가도 안 간 사람이 남녀관계에 대해서 뭘 안다고…….'

 하긴 서문천의 말이 맞긴 맞는 말이다. 세상사에서 가장 공평해야 할 일이

 남녀관계인 것이다. 특히 많은 여자를 거느린 남자일수록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공연히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이 있는 게 아닐 터였다.

 가정이 편안해야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남자가

 더 피곤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백산의 그런 마음을 알지 못하는 냉추렴은 그의 이상한 모습

에 기겁을 했다.

 "오라버니, 왜 이래요? 온몸이 불덩이 같으니."

 벌겋게 달아 있는 백산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순

간 훅 끼쳐드는 여인의 향기가 들끓고 있던 백산의 몸에 기름을 붓고 말았

다.

 "하악!"

 거칠게 자신의 허리를 잡아끄는 백산의 손길에 화들짝 놀란 냉추렴이 부지

불식간 신음을 내질렀다. 순간 덮쳐드는 두툼한 입술 하나, 기분이 아득해

지며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또 기습이야, 그때와 똑같아……."

 용지에서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때도 자신의 허리를 잡아끄는 백산의 손

길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고, 그 순간 입술을 도둑맞았는데.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마음가짐이 달랐다. 그때는 자신의 남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어색했지만 지금은 내 남자인 것이다. 당당하게 이 사람을 사랑한

다고 말할 수 있는 내 남자.

 "헉!"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움직임에 비명을 삼킨 냉추렴이 붉어진 얼굴

을 감추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백산의 행동에 동조해나갔다. 이미 과년한 처

녀인데 자신의 하체를 찌르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님

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은 님에게 자신이 필요하

고 자신도 님이 필요할 뿐이다.

 투박한 백산의 손이 냉추렴의 온몸을 더듬었다. 보름달 같은 엉덩이를 끌

어당기던 손길이 허리를 지났고 팽팽하게 솟아 있는 두 개의 육봉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아! 살살!"

 옷 위로 만지는 것임에도 아픔이 밀려왔다. 그러나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분홍빛 쾌감은 아니었지만 님의 손길이 자신을 만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포근함이었다. 안락함이었다. 다만 조금만 더 부드럽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옷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위에서부터, 급하지만 능숙한 손길로 냉

추렴의 옷들을 제거해나가던 백산이 눈부신 듯 그녀의 몸을 쳐다보았다.

 부끄러운 듯 살짝 가리고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정녕 환상이었다. 어떤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여도 그녀의 몸에 대해선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 옷을 전부 입고 있을 때도 백산을 쏠리게 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모든 껍질을 다 벗어버린 냉추렴의 모습은 백산의 머릿속에 있던 열두 명

의 미녀를 전부 태워버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춘약의 기운보다 더한 갈망

이 온몸 가득 밀려왔다. 여자를 안고 싶다는 욕정이 아닌, 사랑을 품고 싶

다는 열망이었다.

 "사랑해……."

 서둘러 자신의 옷을 벗어버린 백산이 냉추렴의 귓가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으며 밀어를 속삭였다.

 "저도 사랑해요, 백랑……."

 마주잡은 두 손에서 애명환이 울어대며 사랑하는 이들의 뜨거운 밤은 깊어

만 갔다. 몸도 마음도 하나가 되는 의식. 한순간의 유희가 아닌 영원히 하

나가 되는,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성스러운 의식인 것이다.

 백산의 입술이 냉추렴의 이마에서부터 천천히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두

눈을 지나고 코를 지나고 양쪽 귀로 가서 뜨거운 입김을 쏟아내며 그녀의

몸을 달궜다.

 다시 귀로 돌아온 그의 입술이 이번에는 앵두같이 붉은 그녀의 입술을 점

령하고 그녀의 모든 것을 빨아 당기듯 깊숙하게 흡입해들었다. 마치 입 안

에 있는 모든 것을 관찰하려는 듯 그의 혀는 입 안 곳곳을 헤매고 다녔고,

이에 대응이라도 하듯 그녀의 혀가 마중을 나와 백산의 혀를 꽉 붙잡아버렸

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족하지 못한 백산의 입술은 다시 아래쪽을 향해 내려갔

다. 목에서 간지럼을 태우던 그것이 이번에는 우뚝 솟아 있는 가슴을 향해

질주해나갔다. 깊게 패인 골에서 물이라도 찾는지 한참 동안을 음미하던 입

술이 이번에는 등정을 시작했다. 덩달아 투박한 손길도 그녀의 가슴을 쓰다

듬으며 더욱더 높은 봉우리로 만들어버렸다.

 "하악!"

 가슴 끝에서 느껴지는 묘한 느낌에 주체할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

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님의 머리를 감쌌다. 그의 머릿속에 손을 밀어 넣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혀로 굴리고 이로 깨물고 이쪽저쪽을 부지런히 오가던 님의 입술이 이번에

는 아래쪽으로 이동을 해나간다. 아래쪽으로 다가갈수록 팽팽한 긴장감이

밀려오고 복부가 울렁거리는 것 같다.

 "백랑……!"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님과 자신밖에는 아무도 없는 방인

데 왜 이리도 얼굴이 붉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평생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그곳을 향해 님의 입술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어떤 기분일까, 하늘을 날아갈 듯한 기분일까, 아니면 다른 곳을 만질 때

와 같은 기분일까. 자신이 만질 때는 별 느낌이 없는데 님의 입술이 다가가

고 있다고 생각하니 발끝에 힘이 모아지는 것 같다.

 긴장을 풀어야 한다고,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중얼거려 보지만 온몸

은 님의 입술을 기다리는 기대감으로 꽉 들어찼다.

 오히려 너무 늦은 것 같아서 애가 달았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님의 머리를 밀어 내리고 말았다.

 냉추렴의 적극적인 행동에 백산이 깜짝 놀랐다. 입맞춤을 할 때도 느꼈지

만 그녀는 상당히 예민했다. 자신의 조그마한 손길에도 격렬한 반응을 보이

는 것이었다.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체모를 헤치고 급격히 경사진 둔덕을

향해 입술을 내리눌렀다.

 사랑은 정성이다. 비록 그것이 격렬한 쾌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열과 성을 다하고 마음만 통한다면 그 어떤 것보다 훌륭한 사랑이 되는 것

이다.

 "하악! 하하!"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무엇인가 느낌이 올

것 같은데 정확한 실체를 잡을 수 없었다. 안타까움이었다. 조금만 더 있어

주면 그 기묘한 느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님은 고개를 들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대신 이번에는 님의 투박한 손길이 그곳에 머물렀다

.

 "백랑! 사랑……."

 갑자기 격렬한 느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이 느낌이었다. 님의 손길

이 닿는 곳에서부터 조금씩 밀려오는 쾌감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님이 자신의 손을 잡아서 쥐어주는 것,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로 화

들짝 놀랐다.

 언제나 상상 속으로만 그렸던 그것이었다. 님의 상징, 맥동하는 그것이 손

안에 가득 잡혀졌다. 소운에게 언뜻 듣기에는 위아래로 쓰다듬어주면 님이

좋아한다 했다.

 "허억!"

 이번에는 백산의 입에서 숨넘어갈 듯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서툴렀지

만 그녀가 자신의 그것을 만져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즐겁게 해주려 하

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 백산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지경이 왔다. 첫

경험인 그녀를 위해서 춘약의 기운을 억지로 참고 있었는데 한계치에 다다

른 것이다.

 "사랑해……."

 냉추렴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며 천천히 허리를 눌러갔다. 갑자기 느껴지는

 고통에 냉추렴이 인상을 찡그리며 백산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천천히 한다고 하고 있으나 처음인 그녀에게는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기

에 미안함이 앞섰다.

 "계속해요."

 백산의 엉덩이를 천천히 앞으로 당기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언젠가는 겪어

야 할 아픔인 것이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다. 자신을 최대한 배려했기에

 이제야 들어오려는 것 아닌가.

 "학! 허억!"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터져나오며 하나가 되었다. 사랑이란 이

런 기분인 것인가. 껴안고만 있어도 좋았다. 그 사람이 내 속에 있고 내가

그 사람을 감싸고 있다. 이젠 진정 내 것이라는 소속감까지 생겨나는 것 같

았다.

 "좋아요."

 쾌감이 생겨서 좋다는 말이 아니었다. 편안함과 포만감과, 그리고 안정감

이 좋다는 말이었다. 사랑하는 님의 품속은 그 어떤 곳보다 넓었다. 자신이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춘약을 해소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단지 그것은 핑계에 불과할 뿐,

사랑하는 사람들의 약속을 위한 행위였다.

 두 사람의 행위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주변에 있는

 수백의 적도, 다가오는 수천의 적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

간만큼은 두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었다.

 "일어났어? 우리 잠깐 나갈래?"

 으스름한 새벽 공기에 눈을 뜬 냉추렴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사랑스런 눈길

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님의 얼굴이었다. 간밤의 일이 꿈이었나 했는데

아니었다. 알몸으로 님의 품에 안겨 있지 않은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와아!"

 밖으로 나온 냉추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둠을 박차고 오른 붉

은 덩어리가 그녀의 시야 가득 들어왔다. 구름 사이로 내려 비치는 수천의

투명한 빛줄기에 호응이라도 하는 듯, 강물이 반짝이며 꿈틀거렸다.

 환희였다.

 자연이 만들어낸 위대한 아름다움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

랑하는 님의 품에 안겨서 처음으로 맞아보는 아침이다. 너무나 넓어 보이는

 님의 품속이어서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인지, 반짝이는 물결 속에 생명

의 환희가 느껴졌다.

 "백랑은 태양이에요, 태양.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태양."

 "아니야, 태양은 당신들이야. 나는 저 강물이고. 추렴과 천영, 그리고 소

운이 내려주는 저 빛줄기를 받아야만 살아나는 강물."

 "강물 오라버니, 나도 목말라."

 서로의 사랑에 심취되어 있는 두 사람의 공간 속으로 뚱한 소성이 끼어들

었다. 조천영과 소운이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이쿠, 뜨거워라! 태양이 세 개나 있으니 몸이 더워지네."

 어색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짐짓 너스레를 떨며 두 사람도 품 안으로 끌어

들였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전쟁을 시작해야 하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사람들, 이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것이리라.

 "근데 저놈은 왜 안 사라지고 계속 있는 거야."

 "우리를 질투해서 그래."

 태양 한쪽을 가리고 있는 검은 구름을 보면서 소운이 소리를 지르자, 백산

이 빙긋 웃으며 그녀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     *     *

 "어떻습니까."

 "괜찮았다. 성과도 좋고."

 분주객잔으로 돌아온 백산이 간밤에 기습하러 나갔던 남궁세우와 팽무도를

 향해 진의 효과에 대해서 묻자 남궁세우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반 시진 그리고 십 장, 이것만 주의하면 될 것 같다."

 귀식대법과 함께 모든 대원들이 한 몸처럼 움직이기 위해서는 평소에 쓰던

 진력의 수배가 소모되기에 강기의 경지에 들어선 고수들이라 할지라도 쉽

지가 않았던 터였다. 더구나 요마나 비마 수준의 초극 고수에게는 십 장의

거리를 두더라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 남궁세우의 말이었다.

 "이제는 비마만 조심하면 되겠군요."

 "그래, 천무맹에는 그 정도의 고수가 없더구나."

 간밤에 백산이 요마를 제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울러 대견한 마

음뿐이었다. 자신들의 복수를 해준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지금 가장 필

요한 것은 대통진을 알아볼 만한 고수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비마까지 제거

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천마맹이 너무 밀릴 것 같아서 그대로 두고 있

는 것이었다.

 구화산에서 벌였던 일을 이곳에서도 추진하려 하고 있었다.

 "형님, 작전이 먹힐까요?"

 "당연하지, 저놈들은 우리보다는 서로가 더 신경 쓰이는 존재들이거든."

 일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백산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구화산에 비하면

지금의 상황은 일도 아니다. 아직도 자신들을 노리고 있지만 지금은 서로에

게 더 관심이 많다 할 수 있다. 어떤 계기만 만들어주면 서로가 죽음을 불

사하고 싸우게 될 것이고, 그 계기를 제공하는 게 자신들의 할 일이다.

 "가자! 오늘도 천마맹이다."

 이번에는 백산과 팽무도 두 사제지간이 광풍대원과 함께 객잔을 나섰다.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천마맹의 진지에서 비마 상남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간밤에 당했던 기습 때문에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해 있는데 아침이 되자

요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거였다. 잠시 어디 갔겠거니 하고 기다렸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자 급기야 수색조를 내보냈으나 여태껏

별다른 소식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전주님!"

 그때 비마를 찾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수가……."

 부하들이 장포로 싸들고 온 시체를 본 비마의 얼굴이 급속하게 굳어졌다.

목과 몸뚱이가 따로 분리된 요마의 시체였다. 구마 중 최고의 내공을 지니

고 있다는 그녀가 하체가 발가벗겨진 채 목이 잘려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하체가 발가벗겨졌다 함은 그녀를 능욕하려 했다는 뜻일진대 색공의 달인인

 그녀가 당했다는 것 또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마가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볼일을 보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그가 어찌 알 수 있으랴.

 "묻어줘라."

 "으악! 적이다."

 더 이상 조사해봐야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다고 느낀 비마가 매장을 지시

하는 순간, 또다시 부하들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또란 말이냐!"

 경악스런 표정을 지은 비마가 전력의 경공을 전개하여 비명소리가 들린 곳

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종료된 뒤였다. 간밤의 상황과 똑같

이 부하들의 시체만 사방에 뒹굴고 있었다.

 "누구 본 사람 없느냐?"

 비명소리를 듣고 나온 부하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 보았으나 자신보다 늦게

 나온 자들인데 보았을 리가 없다. 비마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살아

생전에 처음 보는 괴사였다. 자신의 무공이 여타 구마들에 비해서 약하다고

는 하지만 강호무림의 최고 반열에 올라 있는 사람이다. 그런 실력으로 흔

적조차 발견할 수 없는 적이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비마가 넋을 잃고 서 있는 그 순간, 백산과 광견조 일행은 그에게서 십여

장 정도 떨어진 뒤쪽에서 또 다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지금 비마가 서

있는 곳은 사부인 팽무도가 있는 조에서 만든 작품이고 자신들은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 도(一刀)만 휘두르고 신속하게 빠진다, 죽여!"

 백산의 명령에 따라 순식간에 진이 해체되며 사방으로 몸을 날린 광견조원

들이 자신의 도에 붉은 혈광을 만들어냈다. 이번에는 거의 비명도 없었다.

요마의 시체가 있는 곳과 동료들이 당했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귀신같이 움직이는 적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뒤쪽에서 은

밀히 접근하는 광견조원들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커억!"

 단 한 명만이 목을 감싸며 나직한 비명을 내질렀다.

 "누구냐?"

 부하의 비명소리에 고래를 돌린 비마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목이 잘린 부

하들이 피를 쏟아내며 넘어지는 광경이었다.

 "썩을……."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등 뒤에서 적이 나타났는데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광전비를 이용하여 순식간에 사방을 휩쓸었으나 그 무엇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살수들의 움직임도 아니었다. 주변에 은신해 있는 살수의 짓이라

면 분명 흔적을 잡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은신하고자 해도 은폐물이

없는 갈대밭. 정녕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돌아간다."

 비마의 모습을 지켜보던 백산과 광견조원들이 은밀하게 몸을 움직여 뒤쪽

으로 물러났다. 이제는 물러갈 때인 것이다. 후퇴를 할 때도 바로 객잔으로

 가는 법이 없다. 객잔 뒤쪽으로 나 있는 조그마한 동산을 돌아 움직였다.

적에게 발견될 경우에 대비해서 취하는 행동이었다. 객잔에 도착하자, 먼저

 돌아온 팽무도와 나머지 일행들이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고 있었다.

 "어서 와라! 앞으로는 어쩔 거냐?"

 남궁세우가 백산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의 수가 너

무 많았다. 또한 이곳이 발견되는 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이다. 양맹에서 인원수로 들이닥치면 오십 명 정도의 광풍대원으로는 견딜

재간이 없는 것이다.

 "야! 화인걸, 여기 차."

 그러나 백산의 얼굴은 태연했다. 오히려 별걸 가지고 걱정한다는 투로 남

궁세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짓고 떠나야지요."

 "네가 말한 적당한 선이 어느 정도냐."

 남궁세우가 답답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구화산에서 벌인 이야기를 들었다.

 단 한 명도 살려주지 않았다고 하였다. 지금은 그때보다 살기가 더욱 강해

졌을 터인데 어중간하게 처리하고 가지 않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 있

는 자들이 다가 아니다. 지금 분하와 황하를 타고 올라오는 자들까지 합치

면 오십여 명의 광풍대원들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스물두 개의 광천뢰와 광풍대 오십 명, 그리고 대통진……."

 "너!"

 남궁세우가 놀란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또다시 전멸을 원하고 있다

. 서로가 싸워서 양패구상을 당하지 않더라도 전부 없애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인상 펴, 임마! 그렇게 우중충한 상판으로 음식을 만들면 맛이 나겠냐?"

 남궁세우의 놀란 표정엔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가져온 화인걸에게 딴죽을

걸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광견조원들에게 맞아서 퉁퉁 부은 얼

굴을 보고 인상을 쓰고 있다며 욕을 해대는 것이었다.

 결국 남궁세우의 물음에 아무 소리 안 하는 것은 이곳에 오는 양맹의 인물

들을 전부 다 죽이겠다는 말이다.

 "더 이상 뒤통수에 적을 달고 다니지는 않을 것입니다."

 죽여야 한다면 죽일 것이고 피를 봐야 한다면 피를 볼 터이다. 더 이상 쫓

아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당한 것은 한 번이면 되었다. 두 번 다시 저번처

럼 그렇게 당하는 일은 없게 할 것이다.

 "뭐해, 새끼야! 안 꺼지고."

 옆에 가만히 서 있는 화인걸을 쳐다보며 백산이 소리를 팩 질렀다.

 "개자식……."

 주방으로 돌아온 화인걸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의

성정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인지, 아니면 그동안 겪었

던 고초 때문인지는 몰라도 성격이 거칠게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자네가 말하고 있는 것도 듣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도 거친 욕설을 쏟아내는 화인걸을 쳐다보며 패웅이

물었다.

 화인걸도 그렇고 저들도 재미있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시키는 일은 하면서도 입에 욕을 달고 다니는 화인걸과, 시킨

일을 하지 않으면 주먹을 날리면서도 욕설을 뱉어내는 것을 그냥 두고 있는

 저들. 지금껏 겪어본 바에 의하면 저들의 성격상 욕을 해대는 화인걸의 행

동을 웃어넘길 사람들이 절대 아니었다. 화인걸과 광풍대원들간의 진행 상

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알도 없는 놈!"

 그런 패웅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화인걸이 씹어뱉듯 말을 건넸다. 어찌 저

런 자가 흑기철기병의 단주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자신의

 이름에는 당당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천하를 지배하는 곳에 소

속된 자가 포로가 되었다고 자존심마저 버린 채 적에게 알랑거리는 꼴이라

니.

 "괜히 자존심이라고 세워봐야 자네와 같은 꼴이 될 텐데……. 젊은 자네야

 괜찮지만 나 같은 늙은이는 더 힘들어진다네, 차라리 배알 없이 얼굴 깨끗

한 게 더 낫지."

 화인걸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패웅의 표정은 태연했다. 현실을 빨리 인정해

야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은 고향인 해남도에서부터 이미 배웠던 사항이다.

검 대신 창을 선택했을 때 경험했던 문파인들의 멸시, 결국은 창을 배운다

는 핑계를 달고 중원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선택했던 철마궁

도 해남도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산다는 것은 어디를 가나 항상 같았다.

굽힐 때는 굽히고 펴야 할 땐 확실하게 펴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인생철

학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굽힐 때인 것이다.

 내공만 금제당했고 주방에서 나갈 수 없다 뿐이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

았다. 도망도 치지 못할 것이고 나가봐야 갈 곳도 없을 터인데 차라리 주방

이 더 낫다는 생각뿐이었다.

 "저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나. 아마 천마맹과 천무맹 인물들을

공격하고 있을 걸세. 배알이 남아 있는 자네나 한번 빠져나가 보지, 그런가

."

 패웅도 광풍대원들이 하고 있는 일을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깨어났을

때 해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들의 뒤를 쫓던 자들이 이곳에 와 있을 가

능성이 가장 컸다. 아울러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되지도 않은 인

원으로 그들을 칠 생각을 하고 있는 그들의 용기가 부러웠다. 자신 같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인 게다.

 "그게 정말이오? 천무맹 인물들이 와 있다는 게?"

 화인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쩌면 맹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생길

 수도 있음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혈도를 뚫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혈도만 풀리면 도망치는 것쯤이야 전보다는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놈들이 바빠지고 있는지 감시의 눈길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 천무맹으로 돌아가면 자네를 받아줄 것 같은가? 전 병력을 다 잃어버

린 패장을……."

 패웅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곳에 빨리 적응한 이유이기도 했다. 궁주인

고인엽은 흑기철기병을 다 잃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에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는데 흑기철기병의 전멸은 그에게 그럴싸한 빌미

를 제공해줄 것이고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다.

 "당신네 마도와 우리 정도와의 차이가 바로 그거야."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패웅에게 이죽거리고는 있으나 화인걸의 내심도 그

와 다를 바 없었다.

 이미 자신의 미래는 끝났다. 혹시 이곳에 있는 자들의 목이라도 들고 가면

 실추되었던 명예는 되찾을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과거의 지위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산서성 전투로 해서 천무맹에 있던 모든 지지기반을 잃

은 것이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계속 잡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백산이란 놈의

 표정을 보건대 결코 살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잡아두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 때문에 마지못해서 살려두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탈출은 자네 몫이니 일이나 하자고. 아침 준비를 미리 해놔야지 안 굶지.

"

 자리에서 일어난 패웅이 식량 창고에 가서 자루 가득 들어 있는 야채를 들

고 나왔다. 주방에서 패웅과 화인걸이 하는 일은 야채 다듬는 것과 식후의

설거지였다.

 그런데 패웅의 행동도 이상했다. 왼손엔 식도를, 오른손에는 조그마한 나

무 막대기를 들고서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내공을 운용하지 못하는 상태에

서도 무공연마를 하고 있었다.

 요리를 하기 위해 움직이던 광풍대원들의 행동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무공이란 별도의 시간을 내서 연마하는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일상생활 속

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마음가짐.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가 무공

을 연마하는 장소라 생각하면 그곳이 곧 연공관이 되는 것이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작은 나뭇가지는 그의 애병인 묵창이었다.

 "저 친구들도 대단하지 않은가. 천무맹과 천마맹이라는 거대 단체에 맞서

면서도 전혀 두려움이 없으니 말일세."

 "큭! 그게 가능하리라 보는가. 상대는 강호 전체야, 지금 있는 자들이 다

가 아니라고."

 "저놈 말이 맞네, 백 소협. 지금 양쪽 강을 따라서 두 맹의 정예가 올라오

고 있네."

 "그러니까 더욱 열심히 움직여야죠, 도착하자마자 바로 투입될 수 있도록.

"

 석두가 서문천의 말을 받았다. 백산과 그가 노리는 바였다. 지금 오고 있

는 자들에게도 쉴 틈을 주지 않고 한꺼번에 전장으로 들어오게끔 유도하는

것, 광풍대원들이야 눈에 보이지 않으니 계속해서 싸우도록 유도하면 되는

것이다.

 "놈들은 언제 도착할 것 같소."

 "내일 오후 정도."

 "좋군요. 석두야, 애들 푹 쉬게 해라. 내일은 하루 종일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저 아래쪽에도 진을 설치해둬라."

 백산이 냉추렴과 사랑을 나누었던 곳에 있는 십여 채의 집을 두고 한 말이

었다. 지금 있는 분주객잔이 발각될 경우에 아래쪽으로 옮겨서 시간을 벌어

야 하기 때문이었다.

*     *     *

 "경계를 철저히 서라!"

 분주객잔 서쪽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천무맹에서 흘러나온 외침소리였다

. 청성파 인물인 풍뢰검객 문상이 수하들을 독려하며 핏발 선 눈으로 전방

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게 오십여 명의 부하들이 목숨

을 잃었다.

 천마맹에 대해 감시조를 보내기도 전에 기습을 당했기에 더욱 당혹스러웠

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격을 해야 한다

. 맹에서는 무천각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 하였으나 그럴 수가 없다.

 무천각주가 오게 되면 그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당당한 구대문파의 정예

가 일개 세가 집합체인 무천각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여야 하다니. 절대 있

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이 오기 전에 지금 와 있는 천마맹

의 인물들을 제거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무천각주와 동등한 지위에

서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버렸다. 이곳에 자리를 잡기도 전에 기습을 당했고, 천

마맹을 공격할 생각도 못한 채 경계만 서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장 대협, 그쪽은 어떻습니까.'

 '아무런 조짐이 없습니다. 너무 조용합니다.'

 문상이 점창파의 장일권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기습을 당한 지 하루가 지

났지만 더 이상 다른 징후가 없었다. 아마 자신들이 촉각을 세우고 있는 줄

 알고서 자중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군요. 잠시 후에는 해가 뜰 테니 그때 좀 쉽시다.'

 설마 벌건 대낮에 기습을 해오는 바보는 없으라는 게 문상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경공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낮에는 흔적이 더 쉽게 발견될 것이 아닌

가. 주변이 점점 밝아오면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던 문상이 기지개를

 펴며 몸을 돌렸다.

 거의 이틀 동안의 밤샘이 무공으로 단련된 심신을 피곤하게 하였던 것이다

. 거처로 돌아온 그가 검을 풀어서 놓는 순간, 또다시 기습을 알리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악! 적이닷!"

 "이런, 빌어먹을."

 거칠게 검을 집어 든 문상이 몸을 날렸다. 다시 똑같은 상황이었다. 이번

에도 정확하게 열네 명의 부하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적에게 살해되었다.

 "장 대협, 보았습니까?"

 그러나 장일권도 곤혹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은 문상보다 멀

리 있었기에 처소로 돌아가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 비명소리를 듣고 곧바

로 달려왔으나 죽어 있는 부하들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으악! 아악!"

 "헉!"

 두 사람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광경 하나, 막 쏟아지는 태양빛을 받으며 허공으로 사라

지는 희미한 인물들이었다.

 "웬 놈들이냐?"

 사라진 놈들이 있던 곳으로 무서운 속도로 내달린 두 사람이 거칠게 검을

휘둘렀으나 그 무엇도 걸리는 게 없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

이었다.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무공이라니.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귀신이야! 귀신……. 그렇지 않으면 어찌 형체도 없이 다니는가."

 이번에 새로 영입된 무사들 사이에서 겁먹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육파의 제자들이야 자파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 자신들의 체면도 있기에 겁

을 집어먹어도 감히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외부에서 영입된 자들은

 달랐다. 적을 발견해야 그들을 물리치고 공을 세울 터인데, 적은 고사하고

 동료들의 죽음만 보고 있으니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귀신이 어디 있나. 한 번만 더 그딴 소리하면 즉

결 처분할 것이야, 알겠나?"

 문상의 입에서 내공을 가득 담은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동요하는 부하들

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었지만 그의 놀라움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철저히 경계하라. 움직임이 빠를 뿐 사람이다, 알았나?"

 부하들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본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실력으

로도 상대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한 당혹스러움이었다.

 '침착해라, 문상. 잡을 수 있다. 네가 흥분했을 뿐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전방을 노려보는 그의 눈에 십여 장 밖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일단의 무리들이 보였다. 마치 그림 같았다. 태양을 등지며 허공

속에서 걸어나온 십여 명의 인물들이 부하들에게 일 도를 날린 직후 뒤쪽으

로 멀어지면서 다시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쫓아라!"

 그러나 이번에는 문상만 본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천무맹 무인

들이 보았고 문상의 명령보다 앞서 달려나가고 있었다.

 "와아! 죽여라!"

 천마맹이 있는 곳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인물들이 빛살 같은 속도

로 백산과 광견조 일행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앞서나가며 백산

 일행을 쫓아가는 인물, 비마 상남이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부하들의

죽음에 극도로 분노한 그가 광전비(光電飛)를 극성으로 펼치며 도망치는 인

물들을 무섭게 뒤쫓았다.

 "감히 나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더냐?"

 사정권에 들어온 놈들을 향해 자신의 절기중의 하나인 천풍만화류(天風滿

花流)를 펼치려는 순간, 그의 눈에 엄청난 광경이 목격되었다.

 팟!

열댓 명의 인물들이 동시에 사라진 것이다. 마치 증발해버린 것처럼 그들의

 존재감이 지워져버렸다.

 "이럴 수가……."

 비마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

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눈이 잘못되었다 싶었다. 자신의 있

는 곳 바로 오 장 앞에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비마 상남이 넋을 잃고 있을 때 백산 일행 또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진

을 구축함과 동시에 최대한의 속도로 몸을 뺐기에 망정이지 자칫 했으면 암

기세례를 받을 뻔했다.

 암기를 막는 것이야 큰 문제가 아니지만 혹여 쫓아오는 저들과 섞이게 되

면 혼전이 벌어지게 될 수도 있음이다. 그 또한 바라는 바가 아닌 것이다.

 "와아! 와아!"

 "저건 또 뭐야?"

 백산과 광견조원들이 은밀하게 몸을 빼내고 있을 때, 화인걸과 패웅이 나

타났던 곳으로부터 수백의 인물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패잔병들이었다.

 냉무기가 이끌고 있던 제마각 무사들과 그들을 쫓고 있던 흑기철기병의 잔

여 인원들이었다. 그러나 겉보기만 쫓고 쫓기는 모양새였을 뿐, 서로 앞서

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달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행색이었다.

 그 강함을 자랑하던 흑마와 철갑을 어디로 버렸는지 자신들의 무기였던 장

창만 꼬나쥐고 제마각 무사들을 뒤따르고 있었다. 서로 간에 계속적인 혈전

으로 인하여 양쪽 다 절반의 인원밖에 남아 있질 않았다.

 "잘됐네, 뭐! 후퇴한다."

 두 세력이 서로 엉기는 것을 쳐다보던 백산과 광풍대원들이 몸을 날려 객

잔으로 사라졌다. 이제 전쟁은 남아 있는 자들의 몫일 뿐이었다.

 "쳐라!"

 비마의 입에서 포효 같은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자신들을 기습했던 놈들

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가득 메우며 나타나는 천무맹의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원래 자신들을 기습했던 자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천무맹의 정예라

 할 수 있는 십천각 인물들이 대거 나타났고, 결국 전쟁은 그들과 벌이는

것이다.

 자신의 손이 스쳐간 자들의 생사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죽어갈

자들이기에. 이 혼전의 와중에 살아 있는 자도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울진대

 하물며 부상을 당한 자가 무슨 수로 버텨가겠는가.

 "천풍만화류(天風滿花流)!"

 무서운 속도로 몸을 날리던 비마로부터 통렬한 외침이 흘러나오고 전방에

있는 인물들을 향해 죽음의 꽃이 뿌려졌다.

 태양빛에 번쩍거리는 암기는 아름다운 꽃이었다. 살기를 머금은 사화(死花

)였다. 단 일수에 십여 명의 인물들이 쓰러지고 그 공간 속으로 또 다른 인

물들이 들어찼다. 물러나고 싶어도 물러설 수가 없다. 뒤쪽에서 밀어붙이는

 동료들 때문에 무작정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전진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검과 도와 창이 얽히고 붉은 핏물이 허공에 번진다. 너무도 하찮은 게 인

간이런가. 죽고 죽이는 살육 속에는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은 없었다. 다

만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노력만이 있을 뿐이었다.

 "계속 밀어라! 전진하라! 움직여라!"

 풍뢰검객 문상의 입에서도 거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어차피 출병한 목

적이 바로 이들이다. 천마맹을 치기 위해서 출병했지, 미끼를 잡기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의 애병(愛兵)인 풍뢰검(風雷劒)에서 거친 바람소리와 살기가 섞이고,

천마맹 인물들이 죽어나갔다.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를 살리고 할 틈이 없었

다.

 앞에 적이 있는가 싶으면 옆에서 적이 나온다. 모든 무인들이 서로 뒤섞여

 죽음을 휘둘렀다. 남보다 조금 강한 내공도, 남보다 조금 우세한 몸놀림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단지 약간의 시간만 더 벌어줄 뿐, 죽음에 이른다

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쓰러진다.

 살아 있는 인간으로 방금까지도 생동감 있게 숨을 쉬던 몸뚱이가 차디찬

바닥으로 몸을 누인다. 왜 쓰러져야 하는지, 왜 등에 칼을 맞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함인지 부릅뜬 눈을 감지 못한다. 자신의 눈앞에 흐르

고 있는 붉은 물이 곧 자기 피라는 걸 인식하지 못한다.

 무너진다.

 인간의 존엄성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성이 철저히 무너졌다. 팔이 잘

려서 허둥거리는 놈의 목을 치고 검에 찔려서 울부짖는 놈의 허리를 갈라버

린다. 내 동료였는지, 아니면 적이었는지 구분할 수도 없고, 또한 구분하고

 싶지도 않다. 한순간 멈칫거림, 그것이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에,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사라진다.

 죽고 죽이는 환각 속에서 동료가 사라지고, 팔이 사라지고, 목이 사라진다

. 인륜이 사라지고, 도덕이 사라지고, 생명이 사라진다.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 가운데 살아 있는 유일한 것은 붉은 피였다. 모두가 죽어가는 시체들

속에서, 역동하는 샘처럼 힘차게 솟아오르는 피만이 살아 있었다. 검게 변

해가는 시체들의 수효가 점점 늘어갔고 죽은 자를 따라서 같이 쓰러지던 검

과 도가 대지 위에 꽂혔다.

 서로가 살기 위해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순간에 더 이상의 삶을 포기한 자

들이 있었다. 제마각 무사들과 흑기철기병 잔여 인원이었다. 혼전의 와중에

서 가장 먼저 목숨을 잃어간 자들이 그들이었다. 거의 십여 일 이상을 그들

이 섭취한 것은 물이 전부였고 같은 기간 동안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만

을 벌였다. 더 이상 쫓을 힘도 도망칠 힘도 없을 때가 되어서야 도착한 초

리하였건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었다. 검을 들어올리지도 못

하고 창을 찔러보지도 못한 채 전부 쓰러져갔다.

 그들의 시체 속에는 다섯 개 이상의 검이 꽂혀 있는 냉무기의 시체도 포함

되어 있었다. 용문산에서 시작된 전투에 참가했던 제마각 인물 중 화인걸을

 제외한 마지막 죽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 전쟁은 시작일 뿐이었으니…….

 초리하 동쪽 끝에 백여 척의 선박들이 정박하면서, 그곳으로부터 쏟아져나

온 검은 복장의 무사들이 벌떼처럼 전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의 전신

에 흐르는 기운은 적을 죽이겠다는 살기였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이미 적들이 도착했다."

 철권 고인엽이 부하들을 독려하며 최전방에서 몸을 날렸다. 조급한 심정이

 앞섰다. 천마맹 인물들의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수적으로 십천각에 밀리고 있었다. 비마로 보이는 자가 사방을

 휩쓸며 분전하고 있지만 저대로 계속 두면 결국 패하게 될 것이다.

 천마맹의 혈마궁과 철마궁의 병력들이 전장을 향해 몸을 날리는 그 순간,

초리하 서편 선착장에서도 분하를 타고 내려오는 급한 발걸음이 있었다.

 "각주님, 초리하에서 벌써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무슨 소린가. 대기하라고 했는데, 설마……."

 제갈장령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분명 맹에서 무천각이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했었다. 그럼에도 전투가 벌어졌다 함은 십천각

에서 선제공격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미끼로 쓰고 있던 자들이 두 세력을 도발시키기에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자신들의 숨을 공간이 없는데 두 세력을 상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는 초리

하였기에.

 "이런 바보 같은 놈! 무작정 달려들면 다 죽는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제갈장령의 얼굴에 분노의 표정이 어렸다. 십천각 수뇌들의 어리석음에 화

가 났음이다. 모름지기 많은 수가 참여하는 전쟁을 치를 때는 병법에 따라

야 한다. 상대를 읽고 거기에 맞추어 대응해나가야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

면서 적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한꺼번에 떼로 덤벼서 혼전을 치르면 이

긴다 하더라도 과연 몇이나 살아남겠는가. 그것은 승리가 아니다. 양패구상

일 뿐이다.

 "각주님, 어떻게 할까요."

 "진격은 안 된다. 궁수를 준비시키고 십천각이 있던 곳에 진영을 구축한다

."

 진격 여부를 묻는 말에 제갈장령은 냉정하게 명령을 내렸다. 같이 휩쓸리

다보면 이길 수 있는 전쟁도 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조금 희생이 따르더라

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일을 풀어야 함이다.

 "빨리 움직여라, 조금이라도 서둘러야 승리할 수 있다. 십천각이 승리를

거머쥐게 놔둘 것이냐?"

 제갈장령의 한마디에 무천각 인물들의 행동이 기민해지기 시작했다. 그들

의 눈에 드러나는 감정은 투지였다. 십천각 인물들에게 질 수 없다는 투지.

 "이봐, 뭐해? 서두르지 않고. 십천각 놈들이 승리하는 것을 두고 볼 텐가?

"

 십천각이란 한마디에 무천각 인물들이 투기를 내뿜고 있었다. 제갈장령의

무서움이었다. 이 급한 와중에도 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오직 무천각

인물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지니고 있는, 십천각에 대한 자격지심을 자극하

여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응, 저게 뭐지?"

 초리하를 바라보던 제갈장령의 눈이 한곳으로 고정되며 의아한 표정을 지

었다. 그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은 환상미로진으로 그 실체를 감추고 있

는 초리하의 언덕, 백산 일행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운장주!"

 "네, 각주님."

 강서 운가장(雲家莊)의 장주인 유운도(流雲刀) 운남천(雲南天)이 머리를

조아리며 제갈장령의 곁으로 다가왔다.

 "수하들 중에 최근 이곳을 와본 적이 있는 자를 찾아보게."

 "무슨 일로……."

 운남천이 의아한 표정으로 제갈장령을 쳐다보았다. 이미 초리하의 지형에

대해서는 전부 숙지가 되어있는데 새삼스럽게 이곳을 알고 있는 자를 찾으

라는 지시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찾아보기나 하게, 이유는 천천히 말해주겠네."

 말을 마친 제갈장령이 다시 초리하의 선착장이 있는 언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고 보면 알겠지…….'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알 수가 없었다. 고개

를 갸웃거리던 제갈장령이 이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부하들을 향해 고개

를 돌렸다. 가문의 진로에 대해서 고민했던 게 언제였냐 싶을 정도로 그의

분위기는 돌변해 있었다.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늙은 노안

에 잠깐씩 보이던 망설임의 표정도 사라지고 없었다.

 "꿈은 꿈으로 끝내는 거야, 현실을 직시해야겠지……."

 바로 이것이었다. 지난 밤 고민하면서 내린 결론, 모든 강호인들이 인정하

고 추앙받는 가운데 최고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일단 최고가

 되고 나서 그 다음 일을 걱정하기로 했다. 어차피 역사라는 것은 승자의

편에 서는 것이기에.

 "각주님! 모든 진영이 갖추어졌습니다."

 "좋다, 십천각에 퇴각신호를 보내라."

 오십 년 세월 속에 묻혀 있었던 제갈장령의 목소리가 초리하에 울려 퍼졌

다. 천하를 호령했던 그 목소리였다. 붉게 상기된 그의 얼굴에 새로운 인생

을 시작한 인간의 환희가 가득했다.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생동감이었다.

 "천무맹 쪽에 엄청난 인물이 왔구먼?"

 죽엽객잔에서 천무맹 진영을 주시하고 있던 서문천의 입으로부터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보통 무인들 같으면 지금처럼 혼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했을 때, 자신의 동료를 지원하기 위해서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게 될 텐

데 지금 천무맹을 지휘하고 있는 자는 그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궁수를 배

치시키면서 퇴각 준비를 시키고 있다.

 궁수들의 수도 엄청났다. 백여 장 정도 반원을 그리며 활을 든 인물들이

전체 인원의 절반 정도 되어 보였다.

뿌우! 뿌우! 뿌우!

 세 번의 나팔소리가 초리하에 울려 퍼지자, 한창 싸우고 있던 십천각 인물

들이 뒤쪽으로 몸을 빼기 시작했다. 달려드는 적을 피해 퇴각하는 것도 쉽

지가 않았지만 일단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온 힘을 다해서 물러서

고 있었다.

 "빌어먹을……. 왔으면 이곳으로 와서 도와줄 일이지, 퇴각나팔이나 불어?

"

 거친 욕설을 뱉어내며 문상도 뒤쪽으로 몸을 빼냈다.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었다. 처음에는 수적인 우세로 인하여 적을 밀어붙일 수 있었으나 천마

맹의 수가 늘어나면서 계속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후퇴하라! 전력으로 후퇴하라."

 "돌격하라! 마도천하가 눈앞에 있다."

 퇴각하는 십천각 무인들을 쳐다보던 고인엽의 입에서 승리의 포효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대로 계속 밀어붙이면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 것 같았다. 견

디다 못해 적이 후퇴하는 것이 아닌가.

 퇴각하는 천무맹 인물들을 보며 사기충천한 천마맹 인물들이 무섭게 뒤쫓

았다.

 "아-아악! 으-악!"

 도망치는 적은 더욱 사냥하기가 편했다. 뒤따르며 검만 휘두르면 끝난다.

십천각 인물들의 시체가 점점 늘어나며 그들의 피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고 궁주! 너무 추격하는 것 아닙니까?"

 혈마궁주인 귀궁 척단세가 우려 섞인 표정을 지으며 고인엽 쪽으로 다가왔

다. 그도 적의 퇴각 나팔소리를 들었다. 피해가 너무 커서 퇴각하는 것이면

 모르되, 어떤 함정이라도 준비되어 있다면 큰 낭패를 당할 수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천무맹의 무천각도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특별히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

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부하들입니다."

 고인엽이 적을 쓰러뜨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부하들을 가리켰다. 최고의 사

기라는 말이다. 개개인의 비무가 아니고 지금과 같은 집단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공의 고하보다는 집단 전체의 사기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

감만 있으면 자신보다 강한 상대라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희생이 좀 나더라도 한 번에 휘저어야 합니다."

 "고 궁주 말이 맞네, 폭풍처럼 몰아치고 빠지면 될 거네."

 어느새 비마 상남이 두 사람 뒤쪽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고인엽과 척단

세의 표정이 흠칫 굳어졌다. 비마가 다가오는 것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가 구마 중 일인이라 하지만 자신들도 한 문파를 이끌

고 있는 궁주들이다.

 '역시 경공 하나는 엄청나군…….'

 "경황 중이라 인사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상 선배."

 "아닐세, 이 바쁜 와중에 인사는……. 서두르세, 부하들에게 공을 빼앗기

면 되겠나."

 두 사람을 쳐다보던 비마가 전방을 날려 몸을 날렸다. 정녕 가공할 경공이

 아닐 수 없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와 봐라, 이건가. 늙은이?'

 "갑시다, 척 궁주."

 비마의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고인엽이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날렸다.

 비마의 도발에 기분이 상했음이다. 너희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구마의 수

준에 도달하려면 멀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고인엽의 불편한 심기를 대

변해주듯 그의 몸이 지나는 곳마다 조각난 갈대들이 떨어져 내렸다.

 "전원 준비하라!"

 뒤쪽을 돌아볼 틈도 없이 쫓기고 있는 십천각 인물들과 무서운 속도로 그

들의 뒤를 쫓는 천마맹 인물들의 쫓고 쫓기는 광경을 무심한 눈빛으로 지켜

보던 제갈장령의 입에서 나지막한 일성이 흘렀다. 그런데 무심한 얼굴 표정

과는 달리,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은 듣는 이

의 착각이었는지.

 "이래서 모두들 야망을 꿈꾸는 것인가……."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제갈장령이 혼자만의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목

소리가 떨려나왔던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흥분하고 있는 그의 심정을 대변

한 울림이었다.

 심장 뛰는 속도가 무섭게 빨라지며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온 뜨거운 피가 온

몸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간다. 이미 늙어버려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 같았던 근육들이 아우성치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의 몸으로 느

끼는 이 현상은 무엇인가. 오십 년 동안 잠들었던 투지였다. 살아 있다는

외침이었다. 죽어버린 몸이 다시 살아나면서 외쳐대는 생명의 소리였다.

 자신을 고뇌하게 했던 손녀딸도, 언제나 미안해했던 큰아들의 얼굴도 떠오

르지 않았다. 지금 벌이고 있는 전쟁의 의미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잘려진 십천각 무인의 목에서 솟구쳐 오르는 피가, 고통스러워 내지르는 처

절한 비명소리가 몸을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였다.

 "쳐라!"

 "와-아-아!"

 붉게 상기된 제갈장령의 입에서 새롭게 태어난 자가 발하는 환희의 외침

같은 일성이 터져나왔다. 순간, 갈대밭에 은신하고 있던 이백여 명의 궁수

대가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고, 동시에 당기고 있던 시위를 놓았다.

 "장창대 전진!"

 "무천찰!"

 "검수대 전진!"

 "무천격!"

 "으아악! 아악!"

 무수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단 세 수 만에 수백의 천마맹 인물들이 목

숨을 잃은 것이다.

 "이럴 수가……."

 천마맹 수뇌 삼 명이 경악스런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시체, 시체들

. 순식간에 천마맹 인물 삼백여 명이 목숨을 잃어버렸다. 단순한 화살공격

에 의해서…….

 "어떻게 화살로……."

 자신들은 일반 병사가 아니다. 적어도 날아오는 화살을 쳐낼 수 있는 무인

들이 아닌가. 그런 무인들이 그까짓 화살공격에 의해서 무더기로 죽임을 당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창에 의한 찌르기, 화살공격에 의해서 당황한 부

하들이 움찔한 틈을 타서 무자비하게 찔러 들어왔다.

 더욱 경악할 사실은 그 다음이었다. 창기병의 머리를 타 넘은 검수들이 천

마맹 인물들을 향해 일검을 휘두르고 물러나 버린 것이다.

 제갈장령의 무서움이었다.

 무인들에게 화살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

나 그는 화살이 통하게 만들었다.

 그의 작전의 시작은 십천각 무인들의 퇴각에서부터였다. 십천각 무인들을

쫓는 자들도 매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작전을 수

행했다. 도망치는 적을 치면서 쫓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경공보다 배나 많은

 힘이 들어가게 된다. 그런 상태로 전력을 다해 달려온 적을 향해 매복하고

 있던 궁수들이 일어서면서 지른 고함소리는 순간적으로 그들을 멈칫하게

만들었고 그 틈을 화살이 파고 든 것이었다. 검이나 도를 이용해서는 그 미

세한 순간을 공략하는 것에 무리가 있지만 화살만큼은 가능한 방법이었다.

아주 고수가 아니라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창과 검의 공격, 진식을 이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한

 용병술로 전세를 역전시켜버렸다.

 "쳐라!"

 이번에는 제갈장령의 입에서 공격을 알리는 명령이 터져나왔다.

 "물러서지 마라, 우린 천마맹이다."

 "이런!"

 제갈장령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천마맹도들이 물러나야 이번 작전이 마

무리가 되는데 오히려 더욱더 달려들고 있었다.

 이번에는 천무맹 진영에서 혼전이 벌어졌다. 귀궁 척단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두세 명의 천무맹 인물들이 쓰러졌고 비마의 신형이 떠도는 곳에는

어김없이 시체가 쌓였다.

 그러나 수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기가 꺾인 천마맹은 승기를 회

복하지 못했다. 천무맹 인물들이 쓰러지는 것에 비해 더 많은 수의 천마맹

무인들이 죽어나갔다.

 "후퇴하라!"

 결국 견디다 못한 비마의 입에서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퇴

각은 십천각 인물들처럼 일방적인 도주가 아니었다. 방어를 하면서 자신들

의 진지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두 맹의 무사들이 처음 혈전을 벌였던 곳으로 움직이며 치열한 접전을 하

고 있는 그 시간, 분주객잔에서는 새로운 작전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천무맹의 수뇌로 제갈세가의 사람이 왔을 거라, 이

 말인가?"

 천무맹이 방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서문천이 내린 결론이었다. 누가 왔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정도의 용병술은 아무나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이 아

니었다. 강호 경험이 많은 노련한 사람임은 물론이고, 진에도 뛰어난 사람

만이 보여줄 수 있는 대응인 것이다.

 "엄청난 사람이 왔습니다."

 서문천이 굳어진 표정으로 일행을 쳐다보았다. 우려하던 일이 발생하고 말

았다. 제갈세가의 인물이 온 게다. 이곳에 진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

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광풍대원들의 활동에 제약이 생기게 되었다.

 "설마 그 양반이 왔단 말인가?"

 남궁세우와 팽무도의 입에서 경악스런 외침이 터져나왔다. 과거 자신들이

숙부라 불렀던 인물, 제갈장령이 이곳에 왔다는 말이 아닌가.

 "그 양반이 무천각주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산서성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 그자 때문에 우리가 힘들어진단 말이오?"

 제갈장령은 백산도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던 자였다.

 독령곡에서 만났던 사람. 무인들의 주머니를 뒤지고 있을 때 자신을 꾸짖

던 신선 같은 풍채의 노인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만 보았을 때는 사부보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던데?"

 분명 그때의 느낌으로는 결코 야망이나 명예를 탐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

지 않았었다. 자신의 헛소리 한마디에 천선비도를 포기하고 갔던 사람이 아

니었던가.

 "본 적이 있는가?"

 "독령곡에서 만난 적이 있었소."

 "지금은 상황이 그때와 달라졌네,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제갈세가

는 천하제일가가 되는 걸세. 남궁세가와 팽가를 뒤로하고……."

 "그까짓 천하제일가라는 간판 때문에 백 살이나 처먹은 노인네가 전쟁터에

 나와? 아예 관을 짜 가지고 다니지."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저리 발버

둥을 치는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천하제일이면 뭘 어쩐단 말인가. 기껏

해봐야 자신에게 굽실거리는 놈들이 한두 놈 더 늘어나는 것밖에 없는데,

그깟 목에다 힘 좀 더 주고 다니기 위해서 최고가 되고자 하는 자들의 속내

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에게 천하제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나? 자네가 조 소저

나 구 소저, 그리고 추렴이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네. 그들의 모든

것이고 수백 년을 내려온 꿈."

 "그들의 꿈을 위해서 죽어가는 저들은 뭐요. 저 들판에 죽어 있는 놈들은

꿈이 없는 놈들이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꿈이 있겠지. 높은 자리라든가, 아니면 강한 무

공이라든가. 그 꿈에 대해서는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네. 그들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선(善)이니까……."

 단순한 사람이 단순한 머리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말이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생각하고 있는 백산이나 광풍대원들에게는 머리 좋고

뛰어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이니 꿈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 것이다. 세 끼 밥 먹는 것은 짐승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

는 사람들의 사고를 무슨 수로 이해하겠는가.

 "좋다고……. 지들은 지들 꿈을 꾸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 꿈을 꾸면 되는

것이지, 뭐. 그러니까 그 늙은이가 문제가 된다, 이거 아뇨."

 "산아……."

 백산의 몸에서 풍겨나는 살기를 읽었는지 팽무도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자신에게 숙부 되는 사람을 백산이 죽이려 하고 있다. 만나봐야 아무런 해

결책이 없다는 현실이 더 안타까웠다. 제갈장령의 신분 때문이었다. 제갈세

가의 가주 신분이 아닌 무천각주로 와 있으니 그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

없을 터이다.

 제갈세가는 이미 생사의 도박을 시작해버렸다. 전쟁에 이기면 천하제일가

요, 지면 멸문이라는 도박을……. 자신이 나서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사부! 그자의 가문 때문에 살우의 팔이 없어졌소. 그자들 때문에 마을 사

람들이 전부 죽었소. 그자들 때문에 애들이 죽었던 말이오. 자신들의 욕심

밖에 모르는 무림인들 때문에……."

 백산의 몸에서 무섭도록 차가운 살기가 흘러나왔다. 고향인 칠성리와 똑같

은 화전마을이었다. 마냥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

들을 죽게 만든 자들이 제갈세가다. 마을 사람들을 인질로 하라 부추긴 자

들이 바로 그들이다. 남의 인생을 마음대로 짓밟고 그 위에 자신들의 꿈을

세우려는 자들이다.

 분노가 서린 백산의 말에 팽무도가 입을 다물었다. 그도 백산의 한을 알고

 있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진정하세요, 백랑.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 되는 거예요."

 백산이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뛰어온 조천영이 재빨리 그를 진정시키며

 나섰다. 이제는 조그마한 변화에도 백산의 상태가 걱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

 "너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다, 다만……."

 팽무도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더니

그 말이 너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형님! 우리 가문은 여기 있는 이 애들입니다. 천하제일도와 신수신룡은

오십 년 전에 죽었습니다."

 남궁세우의 입장도 팽무도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과거의 인연일

뿐이다. 과거에 형제였던 자들이 자신들을 치려 했었고, 지금도 치고자 하

는 것이 아닌가.

 막아야 할 것이다.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할

가문인 것이다. 과거보다 미래의 삶이 더 중요한 일이기에 해야만 하는 일

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남궁세우가 서문천에게 앞으로의 일을 물었다. 아직 적들이 다 도착한 것

도 아니고 전쟁의 양상이 장기전으로 돌입할 것 같아서 더욱 걱정이 되었다

.

 "글쎄요, 천무맹에 그 양반이 있으면 쉽지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서문천으로서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계속해서 양편을 혼전으로

몰고 가려 했는데, 제갈장령이라는 거물 때문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병법을

 알고, 진을 알고 있는 자가 아니던가. 자신들의 의도가 먹히지 않을 것임

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참, 그 양반 답답하네. 굶기면 되지, 뭘 걱정하오."

 "무슨 소린가?"

 "이 세상에 굶고 싸우는 놈 있으면 나와보라 하쇼. 내가 굶어라 했는데도

저 자식들은 날고기를 먹고 옵디다."

 백산의 말에 소살우와 광견조원들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모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전부 알고 있었던 거였다. 사실 사냥꾼이었던 백산이 날고기

를 먹었다 해서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스스로 깨닫도록 두었을 뿐이었다.

 "알고 있었소? 개코네."

 소살우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래, 임마. 내 직업이 사냥꾼이란 걸 몰랐냐?"

 "이보게……."

 서문천이 황당한 표정으로 백산을 불렀다. 적들을 굶긴다 해놓고 소살우와

 딴소리만 하고 있는 백산의 태도가 내심 답답했다.

 "참, 그 양반도. 그 정도 이야기했으면 됐지……. 저기 양쪽에 있는 게 뭐

요?"

 "그야 배 아닌가."

 "그럼 왜 지금까지 안 떠나고 있겠소."

 "그래!"

 백산을 쳐다보던 서문천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쳤다. 군량이었다.

양편이 전부 급하게 전장에 뛰어드느라 보급품을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었

던 것이다.

 "먹을 게 없다고 저놈들이 서로에게 잘 가라 하며 떠날 수 있소?"

 "없지!"

 서문천이 흥이 나는지 백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천무맹이나 천마맹이나 이곳 산서성은 가장 중요한 거점이다. 먹을 양식이

 없다 해서 퇴각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 아니다. 어느 편이든 하나만 남아

야 하는 곳이 이곳 산서성이다. 당연히 바빠질 수밖에 없다.

 "자네 머리는 보면 볼수록 신기해."

 서문천이 감탄해하는 바였다. 보통 때는 별생각 없이 사는 것 같아도 자신

의 생존 문제에 접하면 무섭도록 치밀해진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자신과 석두는 제갈장령에 대응할 방법만 생각하고

있었지, 군량은 염두에 두질 않았다. 그런데 백산은 그것을 집어낸 것이다.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고 먹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서요. 가자, 불꽃 놀이

하러."

 광풍대원들이 두 패로 나뉘어 객잔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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