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지옥(地獄)
"와아! 죽여라!"
"쳐라!"
지옥도가 펼쳐졌다. 초리하 한 가운데서 죽고 죽이는 치열한 살육전이 끊
이질 않았다. 후퇴하던 천마맹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다
시 전열을 정비하여 부딪쳐온 것이다.
저물어가는 태양빛을 만끽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던 갈대들이, 떨어지는 붉
은 피에 몸을 적시며 고개를 숙였다.
"살려줘……! 내 팔……."
수백 평의 대지 위에 널려 있는 조각난 몸뚱이와 팔과 다리들, 그리고 잘
린 목. 자신의 잘린 다리를 붙잡고 울부짖는 사람들과 그 위로 다시 덮쳐드
는 검과 도가 있었다. 지옥은 저승에 있는 게 아니었다. 이곳이 바로 저승
이고 지옥이었다.
땅속 깊숙이 박혀 있는 그들의 검은 아직도 가진 바 살기를 다 토해내지
못하고 동체를 부르르 떨며 울고 있다. 살아남은 자, 죽어가는 자, 누구 하
나 옆 사람의 생사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오직 바닥으로 쓰러지지 않기 위
해서 도를 휘두르고 검을 찔러갈 뿐이었다.
"좌측을 보강하라."
천무맹 후미에서 부하들을 독려하는 제갈장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
방에서는 수십 명의 부하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음에도 그의 얼굴에
는 흔들리거나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오히려 천무맹이 밀린다 싶은 쪽을
향해 병력을 증강시키며 작전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각주님! 보급선에 불이 났습니다."
"뭣이?"
사색이 된 운남천의 보고에 제갈장령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급하게
전장으로 뛰어들다 보니 뒤쪽에 남겨둔 이십여 척의 보급선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피해는 어느 정돈가?"
"접근이 불가능하답니다."
"빌어먹을."
제갈장령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가
장 중요한 것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신념, 공명심, 사기, 군량. 이 네 가지가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요
소다. 이 네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주저 없이 식량을 선택할 것
이다. 단시간에 끝나는 비무가 아닌, 수백 수천의 인원이 벌이는 장기전에
서는 배부른 군대가 승리하게 되어 있다. 정(正)이나 마(魔)라는 신념도 일
단 배가 든든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허기진 상태에서 신념이란 길바
닥에 떨어진 쌀 한 톨보다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지금 양맹의 상태는 눈앞의 적보다 더 위기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당장 오늘 저녁부터 먹을 게 없다.
"문상, 어디 있나! 문상을 불러와라."
"무슨 일이요, 각주!"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문상이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으며 제갈장령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지금 전황은 어떤가."
"우리가 약간 우세하오."
천무맹이 추격하는 입장이었기에 아직은 더 유리한 입장에서 싸우고 있었
다.
"퇴각하라!"
바로 그때, 천마맹 진영에서 퇴각을 알리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들도
이제야 자신들의 모든 식량이 불타버린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각주님, 저희들도 퇴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곁에 있던 운남천이 제갈장령을 쳐다보며 외쳤다. 당장 물러나서 앞으로
일을 상의하는 게 더 시급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군량이 많은 쪽이 전
쟁의 승자가 되게 생겼다.
"문상, 돌격하라. 더 거칠게 몰아쳐라."
그러나 제갈장령은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각주님!"
운남천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갈장령을 쳐다보았다. 지금 몇 명
의 적을 더 죽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흐르는 물줄기는 막을 수 있지만 터져버린 제방은 막을 수 없다네. 자,
가자!"
이번에는 제갈장령이 몸소 앞으로 나서며 천무맹 인물들을 독려하고 나섰
다. 새하얀 백광이 솟아난 검을 휘두르며 무서운 속도로 전방을 향해 뛰어
나갔다. 휘둘러지는 검을 따라 붉은 핏줄기가 허공으로 날렸다.
정녕 가공할 신위였다. 오십 년 만에 뽑아든 제갈장령의 검은 그동안 묻혀
야 했던 한을 풀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사방을 향해 거침없이 검강을 뿌렸
다.
제갈장령의 예상대로였다. 거의 백중지세로 팽팽하던 접전이 급격하게 천
무맹 쪽으로 기울었다. 퇴각하기 위해 몸을 빼는 천마맹 인물들을 향해 천
무맹 무인들이 봇물처럼 밀려들었다. 전열을 정비할 틈도 없이 천마맹 진영
이 무너져 내렸다.
"퇴각하라!"
거의 삼분지 일 이상의 적을 도륙한 상태에서 제갈장령이 퇴각 명령을 내
렸다.
"각주, 계속 밀고 들어가면 끝낼 수 있소이다."
퇴각 명령에 발끈한 문상이 제갈장령 쪽으로 다가오며 소리를 질렀다. 조
금만 더 밀어붙이면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퇴각
이라니…….
그러나 제갈장령의 명령에 의해 무천각 무인들이 썰물처럼 물러나 버리자,
십천각 무인들도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승리가 좋아도 그들
만으로는 천마맹을 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문상, 식량이 얼마나 남았나."
그러나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잔뜩 굳어진 얼굴로 불타는 배를 쳐다보며 식
량에 관해서만 물었다. 십천각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군량의 정도를 묻고
있는 것이다.
"개인이 조금씩 가지고 있을 뿐 식량이랄 것도 없소이다."
문상의 얼굴에 불쾌한 감정이 떠올랐다. 조금 전 전장에서부터 느꼈지만
제갈장령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부하 이하였다. 운남천에게도 반공대를 하
면서 유독 자신에게만은 계속 반말을 하고 있었다. 십천각의 각주는 아니지
만 이곳에서의 신분은 각주 대행이다. 서로 동등한 지위라 할 수 있다는 말
이다.
"좋다. 십천각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식량을 수거해서 모든 부하들에게 공평
하게 나눈다. 그리고 몸이 빠른 자들로 병력을 뽑아라."
"무슨 소리요, 각주. 무천각 일은 무천각이 알아서 하시오. 우리는 끼워
넣지 말란 말이오."
"갈! 문상 네가 정신이 있는 놈이냐? 부하들을 먹여야 될 것 아닌가. 하루
종일 전투에 시달린 부하들을 굶길 참이더냐?"
제갈장령의 입에서 추상같은 고함이 터져나왔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패를
나누려 하는 문상의 행동에 기가 찼기 때문이다. 서로 협조해도 승리하기
가 쉽지 않은 터인데 또다시 그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자
신들이 위에 있다는 자존심.
"잘 들어라, 문상. 이곳 초리하에서는 십천각, 무천각 할 것 없이 전부 나
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을 시에는 항명죄로 즉결 처단할 것이야,
알았나?"
급기야 제갈장령의 몸에서 살기마저 흘러나왔다. 마치 당장이라도 검을 뽑
을 것만 같은 기세였다.
"아, 알았소이다."
제갈장령에게서 흘러나온 엄청난 기세에, 얼굴이 벌게진 문상이 기어 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을 했다. 그러나 문상의 말을 들었음에도 제갈장
령의 살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중되어 문상을 덮쳐들었다.
'으윽!'
온몸을 조여오는 살기에 대항하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리려 했던 문상이 목
까지 튀어나온 비명을 삼켰다. 그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자신의 본산인 청성파 장문보다 훨씬 강했다. 오대 세가 중 무력에서 가장
약하다 하였던 제갈세가였지만, 그것은 오대 세가에 국한되는 상황일 뿐이
었다. 강호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앞에 있는 이 사람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수 있는 실력자였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각주님!"
"좋소. 모든 식량을 배분하고 오십 명을 차출하시오."
'허허, 연륜이란…….'
두 사람의 심리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운남천이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전
장에서 보여주었던 용병술과 지금 문상을 다루고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양쪽 다 식량이 타버린 위기상황에서 후퇴를 명하지 않고 더욱더 거칠게
적을 몰아치는 결단력은 아무나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또한 그때부
터 시작된 문상의 길들이기. 만난 지 한 시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완전
히 굴복시켜버렸다. 비록 마음속으로야 승복하지 않겠지만 지휘체계는 제대
로 확립되었다 할 수 있다.
문상에게 지시를 내린 제갈장령이 자신의 군막으로 돌아왔다. 너무 정신없
이 몰아친 하루였다. 그리고 그 하루 동안 겪었던 일련의 사태들, 무천각
무인들의 도착과 같이하여 혼전이 벌어져 있었고, 양맹의 추가 병력들이 전
장으로 뛰어드는 순간 군량이 실려 있던 배에 불이라니……. 의도적인 게
분명했다.
'누구인가……. 무도 너더냐.'
그들 외에 다른 자들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
다. 강호 공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손녀딸의 의도를 알 리도 없을 터이고,
그들이 처한 상황으로 보았을 때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일이다. 그런데 도망을 가기는커녕 더욱더 달려들고 있다.
'만나봐야 하는가.'
제갈장령을 가장 힘들게 하는 부분이었다. 팽무도를 만나서 그들의 사연을
듣는다 한들, 오십 년 전의 진실을 안다 한들, 지금 와서 뭘 어찌한단 말
인가. 해줄 수 있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아니, 팽무도를 만나서
알게 될 진실이 더 두렵다는 표현이 옳다고 봐야 했다.
그 당시 일어났던 백살마대의 사건이 천무맹 수뇌부에 의해 조작되었다면,
진정 그리되었다면, 그 음모의 주역이었던 천무맹을 기반으로 탑을 세우고
있는, 자신들을 멸망시켰던 원수의 그늘 아래서 성장하고 있단 것밖에 더
되겠는가.
'숙부님! 저 무돕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제갈장령의 귓전을 때리는 한줄기 전음
이 있었다.
"으음! 결국 네가 먼저 왔느냐?"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하고 싶었지만 조카가 먼저
찾아왔으니 만나보아야 할 일이다.
천무맹 군막이 한눈에 보이는 강 건너에 팽무도가 와 있었다. 나중에야 어
찌 될지언정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진정 너였더냐, 정말 무도 너였더냐."
군막을 나올 때만 해도 이런 게 아니었는데, 냉정함을 유지하고자 하였는
데 막상 얼굴을 쳐다보니 그리되지 않았다. 삼십 대의 나이에 떠난 녀석이
팔십이 넘어서 돌아왔다. 이미 저 세상으로 간 자식과 호형호제했던, 자신
에게도 자식이나 진배없는 녀석이 살아온 것이다. 아버지의 검을 가슴으로
받아야 했던 불행한 애들이었다.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즐거워해야
하는데, 하늘을 향해 기쁨의 환성을 질러야 하는데, 답답한 가슴에 눈물밖
에 흐르지 않는다.
"절 받으십시오, 숙부님."
오십 년 만에 처음으로 하는 절이다. 작은아버지라 불렀던 분에게 수십 년
의 세월을 건너뛰고 올리는 절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지난 세월 쌓아두었던 수천수만 가지의 말들이 가슴속을 채우고 목을 막아
버렸다.
"다행이구나, 건강해서."
"숙부님도 정정하시군요."
그게 다였다. 반백 년 동안에 쌓인 사연이 단 두 마디로 끝나버렸다. 손녀
딸이 제거하고자 하는 자, 제자가 없애고자 하는 자, 그리고 조카와 작은아
버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얼굴 한번 쳐다보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선에
서 만족해야 한다.
"집에 돌아가지 않을 테냐, 형님이……."
형님이란 말을 하던 제갈장령이 말끝을 흐렸다. 이제는 형님이 아니다. 몰
락시켜야 할 가문일 뿐이다.
"애들이 있는 곳이 저의 집입니다."
수제인에게도 했던 말이다. 하북팽가는 아버지와 동생들의 가문일 뿐이다.
팽가 때문에 강호에 나온 게 아니다. 자신의 집이 되어버린 광풍대원을 지
키기 위함이고, 아들이 되어버린 백산을 지키기 위함이다. 지금 있는 이곳
이 자신의 가문인 것이다.
"재고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까?"
이번 전쟁에서 빠질 수 없냐는 말이었다. 설가장 인물들이 백산 일행을 공
격할 때 사용했던 진에 대한 대응 방법이 제갈세가에서 나왔다. 타인의 죽
음을 쌓아서 가문을 이루려 하고 있는 것이다.
"시위가 당겨져서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제갈장령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 흐르는 분하를 자신의 손으
로 막으려 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가 버렸다.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아무런 방법이 없다.
"그렇군요……. 제가 다시 강호에 나오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게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제갈장령을 직시하고 있던 팽무도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세가 흘러나왔다.
"다시는 가문을 잃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땅을 뒤집어야 한다면 뒤집을 것
입니다. 산을 허물어야 한다면 허물 것입니다. 저 하늘을 없애야 한다면 없
앨 것입니다."
팽무도의 나직한 말 속에 세상에 대한 분노가 섞여 있었다. 음모였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자식을 죽이게 만들었던 원수들과 힘을 합쳐 가문을 세우려
하고 있다.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제갈장령에게 고개를 숙인 팽무도가 몸을 돌렸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고, 백살대 음모를 밝히고 싶
었던 것도 아니었다. 백산이 없애버린다며 이를 갈아대는 모습을 보자, 불
현듯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를 만나고 난 기
분은 서글픔뿐이었다. 차라리 오지 않았더라면, 보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숙부님! 우린 말입니다, 강합니다. 저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만큼 강해
졌습니다."
"그래, 강해졌겠지. 세상을 태워야 풀릴 한인데……. 그러나 말이다. 역사
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노력이 아니라 피가 필요한 것이다, 많은 피가……."
팽무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갈장령이 쓸쓸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세월 속에 묻혀버린 과거이다. 세월을 파낼 수 있는 도구는 호미나 괭이
가 아니다. 오직 피, 붉은 피만이 과거를 파낼 수 있을 뿐이다. 과거보다
더 많은 피만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낼 수만 없다는
것일 뿐 사라진 역사가 아니었다.
백살마대의 과거를 가지고 있는 팽무도, 그에 의해서 만들어진 광풍대원들
이 무섭게 살겁을 저지르고 있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천무맹 군영을 떠났던 오십여 명의 인물들, 그들의 인
솔자인 운남천이 두 눈을 찢어져라 치뜨며 장내를 노려보았다.
본진을 떠나 십여 리 정도 왔을 때 만난 놈들이 저들이었다.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서 무엇인가를 씹고 있던 놈들, 처음엔 돈을 요구하기에 단순한 산
적이거니 하고 생각했었다. 아울러 참으로 재수도 없는 놈들이라며 불쌍하
게 여겼다. 어디 노릴 사람이 없어서, 그것도 전장에서 막 떠나온 무사들을
노린단 말인가. 더군다나 쉬어야 할 몸임에도 불구하고 차출되었기에 잔뜩
독이 올라 있는 상태의 무사들이었다. 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무천
이란 글자도 알아보지 못하는 놈들이 산도적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워낙 바쁜 상황이었기에 뒤처리를 위해 다섯 명의 무사를 남기고 서둘러
움직이려 했으나, 그런 그들의 동작을 한순간에 멈추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
다.
온몸에 살기를 펄펄 흘리며 다가서던 부하들이 단 일 초 만에 목이 잘린
시체가 되어버렸다. 대단한 무공도 아니었다. 한마디 무언(武諺)도 없이 아
무렇게나 휘두른 도(刀)에 부하들이 목을 들이민 것처럼 보였다.
동료들의 죽음에 경악한 다른 부하들이 자신들의 검을 뽑아 들고 놈들을
향해 뛰어들었으나 그 결과는 처참했다. 사방에 피를 뿌리며 쓰러진 자들은
불쌍하다 생각했던 산적들이 아니라 천무맹의 정예라는 무천각과 십천각
인물들이었다.
"누구냐?"
거칠게 검을 뽑아 들며 운남천이 소리를 질렀다. 절대 평범한 자들이 아니
었다. 무공보다는 경공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들로 구성했다지만 그래도 무
천각과 십천각의 무사들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전력이 절대 아니었다.
결국 저들은 산적이 아니라 이곳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란 말
이 된다.
"산적이라니까 그러네."
달려드는 부하 한 명을 베어내며 덩치 큰놈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으악! 커억!"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가볍게 휘둘러대는 도에 부하들의 몸이 뎅겅뎅겅
잘렸다.
"그 도(刀)는…….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운남천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덩치 큰놈이 들고 있는 도 때문이었
다. 하북팽가의 제일 신도이고 오십 년 전에 사라졌다 하였던 혼원벽력도,
휘두를 때마다 우레음이 난다는 전설의 신도를 들고 부하들을 도륙하고 있
는 것이었다.
"어, 이거 좋은 거야? 어째 잘 든다 했네."
사부의 도를 들고 있으면서도 그 도가 무슨 도인지 알지 못했다. 단지 마
차가 타버리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놈은 망가져버렸는데, 도갑만 사라진
이놈은 멀쩡했기에 대신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사용해보니 대단한
도였다. 내공을 별로 주입하지도 않았는데 상대의 검을 잘라내는 괴력이
숨어 있었다.
"하북팽가의 인물들이냐? 네 놈들이 불을 질렀고?"
"앞은 틀렸고 뒤에는 맞아. 야, 바쁘니까 빨리 와! 임마!"
백산이 무서운 속도로 튕겨나가며 운남천의 가슴을 향해 도를 쭉 밀어 넣
었다.
찌르기도 뭐도 아닌 어정쩡한 동작. 더구나 혼원벽력도는 광풍대원들이 들
고 있는 협도가 아니다. 그보다 폭이 훨씬 넓은 전통적인 곡도였다. 당연히
찌르기 기술을 사용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어찌 이 따위 도법을 펼치는 놈이…….'
운남천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아무리 혼원벽력도가 신도라지만, 곡도
다. 그런 도를 이용한 찌르기라니. 더구나 근처에 다가서지도 못하고 있다.
무공의 기본도 되어 있지 않은 자들에게 부하들이 당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기본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 이미 초식의 경지를 넘어선 자들이란
사실은 극렬한 통증이 시작되고 있는 가슴을 보고서야 알아차렸다.
"도강……?"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런 기세도 없는, 허술한 찌르기라 여겼던 도에서 붉
은 도강이 솟구치며 가슴을 관통해버렸다. 검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너
무나 어이없이 당하고 말았다.
"이 도가 좋긴 좋다. 갖다 대기만 했는데 알아서 죽여주네?"
감탄의 표정으로 혼원벽력도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치 도강을 시전하
지 않았다는 얼굴이었다.
"도강까지 쓰는 고수가……. 왜?"
"멍청한 짓을 하냐고? 빨리 끝나잖아, 임마."
운남천의 허리춤에서 전대를 꺼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빨리 묻어라, 가자!"
나머지 일행들도 모든 작업을 끝냈는지, 대여섯 개의 구덩이를 파서 천무
맹 무사들을 밀어 넣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슴이 관통되어 죽은 운남천의
시체를 던져 넣고 매장을 한 후 객잔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백산 일행이 객잔으로 이동을 하고 있는 그 순간, 천무맹 진영에는 새로운
인물이 도착해 있었다.
백무천.
분하를 따라 내려오던 그가 석산평에서 사라졌던 산동분타원들과 함께 초
리하에 도착한 것이었다.
"허허! 어서 오너라. 그동안 고생이 많았지."
제갈장령이 반가운 얼굴로 백무천을 맞았다. 장차 천하를 지배해야 할 손
녀사위가 드디어 돌아왔다. 제갈세가의 비상을 꿈꾸게 하였던 인물이 백무
천이었던 것이다.
"별고 없으셨는지요."
간단한 포권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백무천의 모습에 제갈장령의 얼굴이 놀
라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백무천의 오만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기도가 엄청났
던 탓이었다. 자신으로서도 감히 측정할 수 없는 초극의 경지였다. 지금껏
수많은 무인들을 겪어보았지만 백무천만큼이나 가공할 기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은 만나보지 못했다. 한마디로 천하제일이었다.
"놀랍게 발전했구나."
"아닙니다, 이제야 저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많이 도와주
십시오."
"허허허! 다 늙은 내가 해줄 게 무에 있겠느냐. 전부 너희들의 몫이지."
정말이지 흡족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공이 약하다 했던 제갈세가의 고
민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쾌거였다. 저 정도 무력(武力)이면 굳이 힘들여 세
력을 모을 필요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추종자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다. 무
인들의 특성인 게다. 힘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 아래로 자진하여 모여든다.
강함을 가지고 있다 함은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그 그늘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매에게 대충 들었습니다, 지금 상황이……."
"그래, 일단 앉아라. 앉아서 이야기를 하자꾸나."
제갈장령으로부터 그동안의 강호정세를 전해 듣고 있는 백무천의 표정은
시종일관 침착했다. 심지어는 화산과 종남파의 멸망 소식도 그에겐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이미 강함의 정도를 넘어버린 자의 여유였다. 사신가의 무공을 익혔다고
하는 노승의 얼굴에서 보았던 그 표정, 세상사 투쟁을 우습게 생각하는 얼
굴이었다. 모든 세속의 일을 달관해버린 득도자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럼 여기서 저들을 치고 바로 섬서로 진격하신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그때가 이 전쟁의 마지막이 될 게다."
"만일 천무맹에 있는 화진악이 패한다면요?"
백무천의 말에 제갈장령의 표정이 흠칫 굳어졌다. 화진악이란 호칭 때문이
었다. 밖에 있는 무천각 무사들이 전부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맹주님이라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제갈장령의 눈길을 대하는 백무천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제갈장령의 굳어진 표정을 보며 담담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은 시기상조 아니냐?"
"절대적인 강함이 있으면 그 무엇도 겁날 게 없습니다. 며칠만 기다리시면
알게 됩니다. 수연에게 연락하셔서 방어에 치중하라 하십시오."
"설마 수연이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얼굴이었다. 자신보다 더 똑똑한 아이가 제갈수연
이다. 그 애가 있는 이상, 천무맹은 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글쎄요,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는 게 얼마 있겠습니까."
천선비도 때문이었다. 분명 음모였다.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양
맹에서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결국 제삼 자가 있을 가능성밖에 없다는 것
이 그의 결론이었다. 그들의 노림수가 이번 전쟁이었다면 나타날 때가 되었
을 터이고, 그곳은 아마 천무맹과 천마맹의 본진이 싸우게 될 섬서성으로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참! 버러지 일행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백무천과 백산 일행의 과거를 모르고 있는 제갈장령이다보니 버러지란 말
을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다.
"냉추렴과 구소운이 있는 일행 말입니다."
'이 아이가 그들과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무천의 표정으로 보건대 결코 좋은 관
계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결국 그들 일행과는 공존할 수 없는 입장인 모양이었다. 좋은 관계라 할지
라도 쳐야 할 판인데, 어쩌면 더 잘됐다 싶었다.
"이곳 어딘가에 있다. 우리의 보급선을 태워버린 자들이고."
"정말입니까?"
백무천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항산에서 출두한 후
처음으로 나타내는 인간적인 반응이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살기가 탁
자와 찻잔을 가루로 만들며 사방을 휩쓸었다.
'우욱!'
제갈장령이 의자에 앉은 채 뒤로 죽 밀려났다. 한때 천하제일가의 가주인
그가 백무천이 내뿜는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다. 가히 경악스럽
다는 표현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크! 하하하! 으! 하하하!"
자신이 내뿜는 살기에 해쓱하게 변한 제갈장령이 모든 내공을 이용하여 끓
어오르는 기혈을 진정시키고 있다는 것도, 천막이 찢겨 날리고 있다는 것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 얼굴을 쳐든 채 앙천광소(仰天狂笑)를 터뜨렸다.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 있을 수가 없다. 신무를 수습하고 강호에 발을 내딛
는 첫 제물로 버러지 놈을 쓸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천하를 가지라는 하
늘의 계시가 아닐 수 없었다.
'이곳에 있기만 하면 찾는 것은 시간문제지.'
이제는 급하게 할 필요가 없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정말 벌레를 잡아 죽
이는 것처럼 그렇게 없애버릴 것이다.
"철목승은 어떻습니까?"
백무천이 유일하게 관심권에 두고 있는 두 사람 중의 한 명이 철목승이다.
화룡파천비공을 익히면서 알게 된 반신오가의 무공, 그중 최고였다는 마신
가의 무공인 천마심공이 그가 익히고 있는 무공이었다. 조천영이 익히고 있
는 빙천수라마공도 신가의 무공이었지만, 과거 그녀와의 비무를 생각해보면
고금오천무의 수준밖에 되지 않았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철목승은 다르다.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천하제일인이란 말을 들었
던 자이고, 그와 비무를 해본 적이 없기에 어느 정도의 경지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가장 근접한 추측은 자신처럼 신가의 무공을 익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감숙성에서 나오질 않고 있다."
제갈수연이 예상한 대로 철목승은 감숙성에 박혀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
다. 제자인 냉추렴이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쯤 알고 있을 터임에
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오게 해야지요, 나와서 제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백무천의 눈동자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신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다는
천역의 힘을 흡수했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금신가의 무공을 익혔다. 인간의
감정이 남아 있으면 신무를 대성할 수 없다 하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은 인간이 더 좋았다. 신무를 십이 성 대성한 것보다, 야망을 꿈꾸고
성취하는 데 기뻐할 수 있는 인간이길 바랐다. 그래서 화룡파천비공을 완성
하지 않았다. 지금 정도의 무공만 해도 천하를 지배할 수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터였다.
"지금은 너무 이르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아직은 아니지요. 강호를 접수한 후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