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구화산
구화산(九華山).
안휘성 청향현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아미산(峨嵋山), 오태산(五台山),
보타산(寶唾山)과 함께 불교 사대성지의 한 곳이다.
주봉(主峰)인 십왕봉(十王峰)을 기준으로 삼백 척 이상인 봉우리만도 삼십
여 개가 넘고 각 봉우리마다 관음상, 석불, 나한상 모양으로 서있는 바위들
은 불교의 성지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그 장엄함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
자비를 근간으로 하며, 살생을 가장 큰 죄악으로 여기는 불교의 대본인 구
화산, 그곳에 한겨울의 차가운 삭풍(朔風) 같은 살기가 온 산을 뒤덮고 있
었다.
백산 일행을 둘러싸고 무림삼천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한판 승부를 벌이
려하는 곳이 바로 이곳 구화산이기 때문이다.
일반 마차의 두 배 이상 되는 커다란 마차와 이십 명 남짓한 흑의의 인물
들, 구화산을 넘기 위해서 객잔을 출발한 백산일행이었다.
석두와 광견조원 모두가 마차를 둘러싼 채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주시하
고 있었고 그 안에는 네 명의 여자들이 촉각을 세우며 긴장된 표정으로 앉
아있었다.
긴장되기는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석두와 광견조원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도
집은 마차에 실어두고 새하얀 백광을 흘리는 도만을 오른손에 쥔 채 온 몸
에서 살기를 풍기며 천천히 전진하고 있다.
관도(官道).
마차가 다닐 정도로 넓은 길이다. 광견조의 연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평
소에는 길이 없는 곳을 골라서 다니던 백산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에 의해
서 마차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가장 선두에 있는 소살우를 비롯한 광견조 전원이 입을 오물거리며 무엇인
가를 씹고 있었다.
구화산을 오르기 전 잔뜩 준비한 육포였다. 산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얼마
나 있어야 구화산을 넘을지 알 수 없기에 상당한 분량의 육포를 준비한 모
양이었다.
"이거 맛있는데 왜 형님은 싫어하죠?"
"다 배가 불러서 그런 거야, 임마. 사흘만 굶어봐라 육포가 아니라 여기
요 말라비틀어진 쪼가리도 없어서 못 먹을 거다. 그나저나 정말 맛있다 이
거."
마차 앞에서 경계를 하며 걷고 있던 소살우와 섯다의 대화 내용이다. 언제
어디서 암습을 당할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한가롭게 노닥거리고
있는 광견조원들의 여유에 남궁지우와 석숭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
들었다.
석숭이야 지금까지 겪어온 놈들이라 그래도 좀 덜한 편이지만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남궁지우에게 있어서 이들 일행의 행동은 놀람의 연속이었다.
거의 상하관계가 없는 것 같이 자유롭게 행동을 하고 있지만 다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마치 사전에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짜 맞춘 듯한 모습을 보여주
고 있다.
복종의 개념이 아니다. 자신이 해야 된다는 당위성을 스스로 부여하여 그
대로 행동하고 일단 하고자 하면 마지못해서 하는 것은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짜내는 것이었다. 수평적인 관계인 것 같으면서도 위계질
서가 서있는 이들의 모습은 조직에 있어서 가장 바람직한 모습인 것이다.
상관에 대한 위화감이나 거부감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즉 언제나 최고의
사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이상적인 조직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다.
남궁세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본 그로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오르막길을 올라온 후 약간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멈춰선 순
간 첫 기습이 있었다.
맨 처음 공격은 길 양쪽에서 번개처럼 마차로 뛰어드는 열 명의 복면인들
로부터 시작되었다. 한쪽에 다섯 명씩 짝을 이뤄 빛살 같은 속도로 일행을
덮쳐왔다.
그러나 마차 위에 있던 백산과 갈태독은 이미 적의 매복을 눈치채고 일행
에게 알린 상태인지라 달려드는 흑의인들을 향해서 미리 준비한 자신들의
절기를 유감없이 쏟아냈다.
"혈파(血波)!"
갈태독이 나직한 외침과 함께 다섯 명의 흑의 복면인을 향해서 양손을 뿌
리고 그와 행동을 같이하여 모사와 뱁새의 도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남
궁지우와 석숭이 지키고 있는 오른쪽에서도 구화산을 일깨우는 외침소리가
터져나왔다.
"구룡신공(九龍神功)!"
"제왕출현(帝王出現)!"
"이-얍!"
네 사람의 검, 도, 장이 흑의인을 향해서 무섭게 공격을 해갔고 석숭의 옆
에 있던 금령 두 사람의 검도 복면인들을 향해서 백색의 빛을 발했다.
"커억!"
"크윽! 컥!"
마차 양쪽에서 동시에 터지는 단발마의 비명소리, 구화산 바닥에 복면인들
의 몸으로부터 쏟아져나온 핏방울이 뿌려지고 양쪽에서 기습하던 열 명이
순식간에 땅바닥에 몸을 눕혔다.
일차 기습을 막아내고 한숨 돌리고 있는 순간을 이용해서 마차 옆에 있던
거의 오 장 크기의 나무 위에서 여섯 명의 복면인들이 거꾸로 떨어지는 형
상으로 검을 아래로 향한 채 몸을 날려 공격을 감행해 왔다.
아마도 한 번의 암습 후에 해이해진 틈을 이용해서 세 사람은 백산을 노리
고, 나머지는 마차 안을 노린 듯 약간의 시간차를 두면서 달려들고 있는 것
이었다.
그러나 백산일행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도외시한 채 공격해오고 있는 그들을 향해서 일장 정도 떠
오른 백산의 입에서 묘한 괴음이 터져나왔다.
"캬악!"
그의 몸에서 열두 개의 핏빛 비도가 튀어나와 마차 위에서 춤을 추었고, 마
차를 향해 돌진해온 복면인들 앞쪽으로 붉은 강기막을 형성하며 솟구쳐 올
랐다.
광풍노산(狂風努山), 풍뢰곡(風雷谷)에서 이십 장 크기의 절벽을 평평하게
다듬었던 그 무공이고, 갈태독과의 비무 때 선보였던 그 절기가 처음으로
살아있는 인간을 향해 죽음을 목표로 펼쳐졌다.
차라락!
주렴이 흔들리는 듯한 미약한 소음이 들리며 붉은 피와 잘려진 인육이 사
방으로 튀었다. 아래쪽으로 내려 꽂히던 여섯 명의 복면인들이 처음 내밀고
있던 검부터 잘리기 시작하여 마지막 발까지 분해되는 것으로 하여 꺼지듯
허공에서 사라져버렸다.
광풍노산, 진정 두려운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엄청난 철벽이었다.
순식간에 열여섯 명의 복면인들이 고혼이 되어 사라졌고, 그중 여섯은 시
체도 보존하지 못하고 분해되어버렸다.
"살우! 오 장 앞 땅속."
백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살우의 몸이 날더니 길바닥을 향해서 자
신의 도를 힘차게 박아넣었다.
자신의 손에 뼈가 잘리는 느낌이 들었는지 환한 웃음을 머금은 소살우가
그 자리에서 도를 회전시키며 거칠게 뽑아냈다.
그러자 땅속으로부터 물이 솟아오르듯 피가 새어나오며 주변을 붉게 적시
고 있었다.
구화산에 와서 처음으로 당한 암습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것은 시작에 불
과할 뿐이라는 것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강호 무림의 모든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무림삼천이 구화산에서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느 구석에 박혀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피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마차가 붉은 피에 젖어도 계속해서 전진해야만 한다. 명예나 탐욕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적들이 원하는 대로 죽어줄
수 없기에 그들보다 더 빨리 죽여야한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하는 사활을 건 혈투. 그 끝을 알 수 없는 혈투
의 막이 올랐다.
"불안하니?"
"네, 언니. 우리들 때문에 저들이 다칠까봐 그것이 더 불안해요."
마차 안에서 나는 대화소리였다. 자신의 죽음이 불안한 게 아니었다. 미안
한 마음뿐이다.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자신들 때문에 목숨을 걸고 사
투를 벌이고 있다.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죽음의 혈투를 시작하고 있는 것
이다.
조천영의 보호라는 명목으로 자신들도 마차 안에 있지만 그것이 조천영을
더욱 위험하게 하고 있다는 것은 그녀들이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자신
과 소운을 숨기기 위해서 짜낸 방법이라 하지만 조천영과 남궁미령마저 위
험 속에 노출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들도 고수이고 귀가 있으니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마차 위에서 무엇인가 후드득거리며 떨어지는 소리. 인간의
피와 살점일 것이다.
"마음을 굳게 먹어라. 우리는 가족이다."
가족이라는 말. 자신들만 살겠다고 누구 한 사람 버리고 갈 수 없다는 말
이고 미안해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가족간이니 미안하다거나 죄송하다는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당연히 지켜
야할 의무일 뿐이다. 전쟁터로 나가는 이들이 나라에 충성하기 위해서 또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나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그 깊숙한 내면에는 사랑하는 가족 때문에,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향
해 가는 것이다.
결코 거창한 이념이나 신념 같은 것은 없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는 것,
그것하나면 족하다.
일행을 태운 마차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산자락을 따라서 천천히 굴러가
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다섯 무리의 눈동자.
"대주, 저들은 너무 강합니다. 제갈 군사가 뭔가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제갈수연이 키웠다는 구가대(求家隊). 방금 백산 일행을 공격했던 이들이
었다. 백산 일행의 마차로부터 백여 장 떨어진 곳에서 자신들의 선발대 전
원이 당하는 것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죽어도 해야만 하오. 우리 황보세가를 구해주었고 가문의 재건을 약속했
소. 이것은 가문을 위한 일이오."
황보세가(皇甫世家). 과거 오천맹의 일원으로 천하를 지배했던 세가로, 삼
십 년 전 봉문상태에서 의문의 멸망을 당했다고 알려진 오대세가중 하나이
다.
대주 황보천(皇甫天), 가문의 혈겁에서 살아난 황보세가의 마지막 핏줄이
다. 모든 것을 잃고 강호를 전전하던 그들에게 제갈세가에서 손을 내밀었고
동행을 하게 되었다. 서로의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과거의 동지가 또다시
뭉쳤는데…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공격하고 있는 저 일행이 과거
자신들의 동지였던 가문의 후예들의 제자였고 또 남궁세가의 전대가주도
있다는 것을.
"일단 저들을 떠보는 것은 이 정도면 되었소. 저들의 행로로 보았을 때 용
지(龍池)정도 가면 해가 저물 것이오. 전부 용지로 이동하시오."
팔십여 명 정도의 구가대 인물들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들로부터 오십여 장 떨어진 곳, 사라지고 있는 구가대를 바라보고 있는
수백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무면마룡 암사월, 천마맹 비마군주인 그와 삼백여 명의 부하들이 은신한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이 소걸영 구소운을 암살하기 위해서 파견된 자들인가? 멍청한 놈들
너희들의 실력으로 저들 속에서 소걸영을 암습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가 본 마차를 몰고 있는 일행은 강했다. 특히 백염의 노인과 마차 위에
있는 털옷을 입은 청년.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게 나타난 수십 개의 병기.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 병기에 의해서 만들어진 붉은 강기의 막은 멀리
떨어져있는 자신이 보기에도 섬뜩한 공포가 밀려올 정도로 엄청났다.
"양성진! 우리도 이동한다. 조금 전 그 멍청이를 따라서 조용히 이동해라.
그리고 몇 명을 보내서 이곳 구화산을 살펴라. 얼마 정도의 세력들이 와있
는지 철저히 확인하도록,."
"네! 군주님!"
소걸영 구소운을 보호하라는 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곳에 와있는 비마군
도 구가대의 뒤를 따라서 소리 없이 그곳을 떠났다.
'으음! 저 정도였나? 그래서 부 맹주가 저들 속에 두고 온 것인가?'
혈마군의 군주인 혈수마룡 진세개의 침음성이었다. 이곳에서 저들의 실력
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
군사인 궁유의 말을 들었을 때는 놀라기도 했었고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었다.
맹의 실권을 쥐고 있는 구마전에서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 더구나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이라니.
냉추렴의 죽음이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잔인
하게 처리하라 하였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냉추렴에게 청혼했다 거절당했던 그 치욕
을… 강제로 취하려 덤비다 냉추렴의 검에 상처를 입었고 무욕십대고수인
독안랑에 의해 죽을 뻔했다. 그나마 부맹주의 용서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것
이다. 냉추렴의 검에 의한 흉터가 낙인처럼 얼굴에 남아있다. 그녀를 생각
할 때마다 그 흉터에서 고통이 밀려오며 온몸의 피가 더워진다. 굴욕감이다
. 힘으로 여인을 정복하려다 실패한 사내의 치욕이었다. 더구나 인생이 불
쌍해서 목숨만은 살려준다 하였던 철목승의 말과 그에 대해서 고맙다는 말
을 연발했던 자신의 비굴한 모습.
'냉추렴! 이년, 이번에는 네년이 당할 차례다. 반드시 죽여줄 것이다. 알
몸으로 살려달라고 비는 네년의 모습을 보고 싶군, 크크큭!'
변태적인 생각을 하는지 호흡이 거칠어지며 붉어진 두 눈에 광기가 번들거
리고 있었다.
냉추렴에 대한 생각 때문에 그녀가 포함되어있는 일행이 강하다는 생각은
마음속 저 깊은 곳에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았다.
"순무, 오늘밤 기습한다. 다 죽여라! 단 냉추렴만 생포해라. 냉추렴만. 알
았나? 용지로 이동한다."
소걸영은 손대지 말고 냉추렴만 죽이라 했던 맹의 명령은 이미 잊어버렸는
지 냉추렴을 제외한 전원을 없애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난전 중에 죽었다 하면 그것으로 끝이야. 어차피 전쟁이야 일어나는 것이
고 서로가 피 터지게 싸우면 그만인 것이야. 피 터지게….'
천마맹의 혈마군이 사라지는 곳에 나타나는 검은 인형들이 있었다. 천무맹
의 백의대 대주인 백의천룡 화인걸과 안휘분타주인 다비천검(多飛千劍) 정
철(鄭哲)이었다.
"정 분타주님 진세개가 우리의 일을 대신해 주려고 하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는 저놈만 감시하면 될 것 같습니다."
화인걸을 향해서 빙긋 웃어 보이는 이 사람. 한때 무당의 속가제자였던 다
비천검 정철이란 자로 무당을 버리고 검신 화진악의 심복이 된 자다. 맹주
의 신뢰를 바탕으로 천무맹에서 가장 가까운 안휘성의 분타주를 맡고 있으
며 검법 또한 남궁세가의 검법과 견줄 정도로 대단하다고 알려져있는 인물
이다.
"그렇습니다. 진세개 저놈을 감시하고 있다가 냉추렴의 시신만 탈취하면
됩니다."
살아있건 죽어있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일단 냉추렴의 육신을 가지고
철목승을 협박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는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때는 어차피 천무맹의 세상일뿐이다.
"갑시다, 분타주님."
두 사람도 진세개의 뒤를 따라 은밀하게 사라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을 스치며 그들의 흔적을 지워버리려는 순간 그들이 떠난 자리 옆 나
무에서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 일렁이더니 붉은 옷의 인형이 얼굴 가득 미소
를 담고 소리 없이 나타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조용히 피 터지게 싸워야지.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서 너희들이 이곳
에 왔지만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 이곳 구화산은 전쟁의 시발점이라고….
"
혈의의 인물이 천천히 공간 속으로 사라져 갔다. 처음엔 다리가, 그 다음
엔 몸통이, 마지막으로 얼굴 부분이 사라지며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만족스
러운 미소였다.
백산 일행을 둘러싼 구화산의 무림인들. 무림삼천의 모든 인물들이 서로를
노리는 가운데 구화산의 태양은 그 자태를 흐리며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
다.
"왜 가만히 있는 거죠?"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용지 쪽으로 마차를 몰고 있는 백산 일행이었다. 단
한 번의 기습이후로는 더 이상 공격을 해오는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밤을 기다리는 거겠지. 암습이란 밤에 해야 제 맛이 아니겠나."
아직은 여유가 있는지 얼굴에 약간의 미소까지 띠며 석숭이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상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과거 춘추전국시대에 천하를 두고
싸웠던 구룡천가(九龍天家), 그 천가의 가주인 무인으로 바뀌어있었다.
용지(龍池).
운봉(云峰)과 마공령(摩空嶺) 사이에 있는 협곡. 협곡이라 하지만 그 폭은
칠십 장 이상이나 되고 저 깊은 협곡의 끝까지는 거리는 오백 장이 넘는
거대한 크기로, 협곡의 중앙을 타고 흐르는 물이 모여서 형성되어진 삼십여
장 크기의 연못이 바로 용지이다.
물의 흐름소리가 우레와 같고 용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라 하여 용지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하였고 흐르는 물 또한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은 곳
이다.
"오늘밤 이곳에서 야영을 한다. 움직일 때는 반드시 삼인 이상 움직여라.
절대 개인행동은 안 된다. 볼일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마차 안에 있던 여자들은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며 몸을 풀고 있고 나머지
는 주변의 나뭇가지를 주워와 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든다며 부산하게 움직
였다.
'영감, 우리 뒤쪽 좌우로 해서 백 장 밖, 그들 중앙, 그리고 앞쪽에 한 무
리 맞소?'
지금 그들은 용지를 쳐다보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런 것 같다.'
'석두, 살우, 섯다, 모사, 듣기만 해라.'
갈태독과 전음을 나누던 백산이 광견조원들에게 무언가를 지시를 내린 후
곧이어 일행은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소운이 주저주저하며 백산을 불렀다.
"왜?"
"우리 저쪽에 좀 다녀와야겠는데…."
소운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하루 종일 마차 안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못
했던 여자들은 모두 볼일이 급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아무도
모르게 살짝 다녀올 수도 없는 일이다. 언제 기습을 해 올지도 모르는데
볼일 본다며 개인행동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랑 같이 가."
"무슨 소리예요, 오라버니. 우리도 넷이라고요."
소운이 기겁을 하며 백산을 쳐다보았다. 여자들이 볼일을 보러 간다는데
따라가겠다 한다. 자신과 조천영이야 이미 그의 여자라 했으니 그나마 덜
부끄럽겠지만 남궁미령과 냉추렴은 완전히 남이고 처녀들이다.
아무리 강호 무림인들이고 일반 여염집 처자들과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자인 것은 분명하다. 옆에 남자가 서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데 볼일이나 제대로 볼 수 있겠는가.
"빨리 안 갈 거야?"
그러나 백산은 막무가내 벌써 저만큼 가고 있었다.
"언니!"
막막한 표정으로 소운이 조천영을 불렀으나 그녀 또한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다. 자신들의 안전을 걱정해서 그런 것인데 뭐라 한단 말인가.
"어쩔 수 없잖니 이 정도 불편은 우리가 감수해야지."
조천영은 순순히 백산을 뒤쫓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나오자 어쩔
수 없이 나머지 세 명의 여자들도 어기적거리며 백산의 뒤를 따라가고는 있
으나 그 폼은 완전 똥마려운 강아지 꼴이다.
어떻게 볼일을 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참느라 급한 것도 있
었지만 그녀들과 삼 장정도 떨어진 곳에서 백산이 두 귀를 쫑긋거리고 서있
을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바지를 내릴 수가 없었다.
그녀들의 부끄러움을 덜어주려는지 조천영이 제일 먼저 바지를 내리고 볼
일을 보았고 나머지도 일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힘차게 나왔다. 소리를 줄여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 보았으
나 그게 마음대로 조절 할 수 있는 것이던가, 또 하루 종일 참았던 덕에 그
양은 또 얼마나 많은지.
조천영을 제외한 나머지 여자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온몸이 화끈거
렸고 고개를 어디다 둘지를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나쁜 인간이 소운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얼굴을 관찰하듯이 쳐다
보는 것이었다.
"세 번째가 누구였지?"
세 여자를 관찰하던 백산이 느닷없이 물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왜
모르랴. 소운이 백산을 향해서 소리를 팩 내질렀다.
"또 무슨 소리를 하고 싶어서 그래요?"
"별일은 아니고… 소리가 제일 컸어."
"오라버니!"
말을 마치고 도망을 가는 백산을 향해서 소운이 고함을 지르며 주변에 있
는 돌을 주워 던지기 시작했다.
"엉덩이도 제일 컸고."
이제는 세 명의 여자가 동시에 돌을 던져댔다. 바위 뒤쪽에서 등을 돌리고
볼일을 보았는데 엉덩이까지 보았다면 근처까지 왔다는 소리다.
"어이쿠!"
정통으로 맞았는지 백산이 그대로 앞으로 넘어졌다.
"냉 언니, 그렇게 세게 던지면 어떡해요.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소운이 냉추렴을 향해서 눈을 부라리며 쳐다보았다. 자신이야 미워서 던진
것이 아니라 냉추렴이나 남궁미령이 부끄러워할까봐 하는 소리였는데 냉추
렴이 생각보다 세게 던져버렸던 것이었다. 그것도 정확하게 백산의 뒤통수
를 겨냥해서 던진 것이 아닌가.
"저 친구 긴장 푸는 방법도 절묘하네 그려."
석숭과 남궁지우와 갈태독이 모여서 그들의 노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팽팽한 긴장 속에 있던 이들과 여자들에게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게 하려는 백산의 씀씀이였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야, 너희들도 긴장했냐?"
"에이 형님도 저기 숨어있는 저 새끼들 때문에 긴장을? 웃기지 마쇼.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구먼."
열심히 입안에 먹을 것을 쓸어넣으며 광견조 일행이 하는 소리였다. 결코
자신들이 어떻게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는지 아니면 사방에 얼마만
큼의 적이 있는지를 몰라서인지 태평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주변의 정경과는 아무 상관없이 백산 일행은 그렇게 노닥거리고 있었고,
천명의 넘는 인원이 매복을 하고 있는 용지 주변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
용하기만 했다.
묘한 진영이었다. 네 명의 여자들과 찍새를 가운데 두고 뒤쪽에는 백산과
광견조 두 명, 앞에는 갈태독과 광견조 세 명, 왼쪽에는 석두와 광견조 네
명, 오른쪽에는 석숭과 남궁지우, 금령 그리고 소살우와 광견조 한 명이 철
통같이 에워싸고 사방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다.
"백 공자, 저들을 그것으로 날려버릴 텐가?"
백산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광견조원들에게 전음
으로 지시한 것이 바로 그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럼 안 되네. 저들 중 두 무리는 우리를 돕는 입장에 있는 자들이네. 그
들까지 쳐서 자극시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냉추렴과 구소운의 암살을 막기 위해서 온 무리를 먼저 공격하여 적으로
돌려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암살을 하러 온 자들이나 막으러 온 자들
이나 공개적으로 이곳에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밀을 안다고 해도 최고 책임자나 알고 있을 뿐 부하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상관의 지시만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 아니요."
네 곳의 무리가 있다는 것만 파악될 뿐 어디서 온 놈들인지는 알 수가 없
다.
무공 수준까지 비슷비슷해서 어디가 천마맹이고 천무맹 인물들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마저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질 않는가.
"이제부터 찾아내야지. 낮에 우리를 공격했던 자들의 흔적은 알 수 있겠나
?"
뭔가 복안이 있는 듯 석숭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백산을 쳐다보았다.
"그렇소. 우리의 전방 오른쪽에 있소. 한 팔십 명 정도? 아니면 그 이상.
백은 안 되오."
용지를 등지고 있기에 이제는 자신들의 앞쪽에 포진되어있는 모양새가 되
어있었으며 황보세가 무리는 인원수가 가장 적었고 무공수위가 낮았기 때문
에 쉽게 발견되었다.
"아마 그들은 정파 쪽의 인물들일 걸세. 우리를 공격할 때 보니까 정파무
공이더군."
"그것이 맞을 것이다. 소운이를 노리는 놈들일 게다. 내가 느끼기에도 마
기가 없어 보였으니까."
갈태독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주변에 무림인들이 너무 많
았다. 아무리 은신하고 있다지만 갈태독의 이목을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다. 족히 수백이 되어 보이는 인원들이 숨죽이며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 그
들 전부와 싸울 수는 없는 일이기에 적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최대
한 이용을 해야 함이다.
"그럼 천마맹에서 냉 낭자를 암살하러 온 자를 찾아야 되겠군. 냉 낭자 혹
시 원한 살 만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이번에는 냉추렴을 쳐다보며 석숭이 물었다.
"글쎄요… 아! 진세개."
"그자가 누군데?"
이제는 아예 냉추렴에게도 반말이다. 엉덩이까지 보았으니 가릴 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손만 만져도 마치 지 여자가 된 줄 알고 막 대하는 인
간들이 대부분인데 하물며 달덩이 같은 엉덩이까지 자세히 관찰했으니….
"저에게 청혼했다가 죽을 뻔 했어요. 독안랑 숙부에게요. 그리고 저의 검
에 얼굴도 베이고요."
"그 자식 못생겼구나? 남자라면 적어도 나 정도는 되어야지."
"백 공자보다 훨씬 잘생겼는데 좀 음흉해요."
"자네 좀 그만하고! 그럼 냉 낭자를 암살하기 위해서 그 친구를 보내는 것
이 가장 좋겠구먼."
천마맹의 맹도를 살해하려는 일이다. 아무나 보낼 수 없음이다. 냉추렴을
암살하고도 입을 닫을 정도의 인물을 골라서 보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
야 뒤탈이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예리한 지적이었다. 장사치답지 않게 이곳의 모든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돈만 있어서 황실의 인물이 된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었다.
"그놈이 이곳에 왔다고 칩시다. 그런데 저 구석에서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 아뇨."
석숭의 그런 행동이 답답하다는 듯, 백산의 입에서 뚱한 목소리가 흘러나
왔다. 설사 진세개가 이곳에 와 있다 한들 전부 숨어있는 저곳에서 무슨 수
로 찾아낼 것인가. 나오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일이지 않는가.
"나에게 방법이 있네."
석숭이 빙그레 웃으며 백산을 쳐다보았다.
"뭐요, 그 방법이라는 것이?"
백산도 궁금했다. 자신의 무공으로도 파악이 안 되는 저 무리들 속에서 원
하는 놈만 찾아낸다면 그로서도 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놈을 찾아서 광천뢰를 날려버리면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고 자
신들이 방어하는데도 수월할 것임에 분명하다.
"자네가 냉 낭자를 껴안고 입을 맞추든지 해서 진세개란 놈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이면 되네."
청혼을 할 정도였으면 지금까지도 사랑을 하고 있던지 미워하고 있던지 반
응을 보일 것이라는 이야기고 그때 발산되는 기파(氣波)를 잡아내면 된다는
것이 석숭의 의도였다.
역시 세상살이란 머리만 좋아서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머리와 인생의
경험이 충분한 사람에게서만 훌륭한 계책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거 아주 좋은 방법이네."
백산의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암살하려는 자들에게 혼동을 주기 위해서
복면마저 벗어버린 냉추렴의 얼굴은 화용월태(花容月態) 그 자체였다. 열
여자 마다할 남자 없다고 가장 즐거운 놈은 백산일 수밖에 없다.
"읍! 으흡!"
기습이었다. 적이 기습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백산의 입술 공격이 기습적
으로 먹혀들었다. 석숭과 갈태독이 옆에 있고 모든 여자들이 보고 있는데서
기습적으로 입맞춤을 해버린 것이었다.
"오라버니!"
소운의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울려퍼지고 석숭과 갈태독은 웃으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하면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진세개가 보아야
효과가 있을 터인데 모든 광견조에 의해서 시야가 차단되어있는 이곳에서
아무리 입술을 더듬는다 한들 진세개가 볼 리가 없질 않는가. 당연히 백산
만 공짜 입술 한번 먹은 꼴 밖에 되지 않았다.
공연히 입술을 도둑맞은 냉추렴은 고개를 푹 숙여버렸고 불빛에 비친 그녀
의 목은 모닥불보다 더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것 보게, 저쪽에서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진세개가 반응이나 보
이겠는가. 저기가 좋겠구먼. 불빛도 밝게 비추고 저쪽에서도 환하게 보일
것 같으니 말일세. 우리는 모른 척 하고 있을 테니까 은밀하게 움직이게.
청춘 남녀가 밀회를 하러가는 것처럼. 그리고 냉 낭자의 행동이 중요하네.
적극적으로 아주 적극적으로 좋아하는 행동을 보여주어야 하네."
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아예 중매쟁이로 나서기로 했는지 두 사람의 행
동요강까지 세세하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구화산을 오르기 전에 냉추렴의
꿈꾸는 눈빛을 보았던 석숭이 두 사람을 엮어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둘이나 있는데 한 사람 더 간다고 해서 그다지 흉이 될 것 같지도
않았고 또 백산의 성격이 한번 인연을 맺으면 절대 배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추진해버린 것이었다.
마중제일화란 말을 들을 정도로 예쁘게 생겨서 마음만 먹으면 백산보다 훌
륭한 신랑감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지만 자신이 좋아하지 못하면 아무리
뛰어나고 좋은 가문의 신랑이라 할지라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
소위 상류가문이라 말하는 북경의 권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실이지
않던가. 자식의 불행을 발판 삼아 출세하려는 자들과 자신의 권력을 지키
려하는 자들을 많이 보아왔기에 행복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소운의 입이 한자나 튀어나오든지 말든지 두 사람은 조용하게 움직였다.
먼저 백산이 광견조원들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더니 은밀하게 바위 뒤쪽으
로 돌아가고 뒤를 이어 냉추렴이 주춤거리며 뒤를 따르고 있었다.
뒤쪽으로 슬금슬금 돌아나온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 무안한 듯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기습을 할 때야 대범하게 했지만 막상 다시 한번 하
려고 하니 어색한 마음이 앞섰다.
'이것 보게, 백 공자. 이럴 때는 남자가 대범해야 하네.'
석숭의 전음이었다. 진세개가 있는 곳을 밝히려는 것보다 두 사람을 맺어
주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지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냉추렴의 얼굴이 조금 전 입맞춤 때부터 붉어져서 풀리질 않고 있었다. 과
연 자신이 백산이란 이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 그러나 알 수 없었다. 소운이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했
었고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있을 때면 자신이 소운의 자리에 있었으면 하
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또 구화산을 오르기 전에 백산이 자기 것이라 칭했을 때는 기쁘기도 했었
다. 물론 그 말은 자신을 염두에 두고 한 말도 아니었고 그런 의미도 아니
었지만 행복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였다.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벌써 두
명이나 되는 부인이 있는 남자이다.
그때 갑자기 자신의 허리를 잡아끄는 손이 있었다.
"아!"
깜짝 놀란 냉추렴의 입이 벌어지고 그 순간 남자의 입술 하나가 그녀의 작
은 입술로 덮쳐왔다. 이번에도 기습이었다.
마음의 준비도 못했는데 기습적으로 입술을 점령당한 것이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석숭이 좋아하는 시늉을 하라고 했던 말도,
진세개가 보고 있다고 했던 말도,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고 온몸이 아
늑해지고 다리가 풀려버렸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팔을 들어올려 백산을 안았고 자신의
입안에 무엇인가가 헤집고 다니고 있는 것 같았으나 무엇인지 알 수가 없
었다.
잠시 후 그것이 이 남자의 혀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추하다거나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달콤하다는 생각과 함께 어떤 맛일까 하는 것
이 더 궁금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빨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정신없이 빨아먹었다. 놓
고 싶지 않았다. 엉덩이 쪽에서 아릿한 통증이 몰려오며 온몸이 불덩어리처
럼 달아올랐다.
이 사람이 자신의 엉덩이를 쥔 것 같았다. 그리고 허리를 타고 오른 손이
가슴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진세개 때문이야. 진세개를 잡기 위해서 이러고 있는 것이야….'
애써 진세개 때문이라 자신을 달랬으나 자신도 모르게 이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악!'
가슴으로부터 밀려오는 짜릿한 느낌에 내심 비명을 토해내며 더욱 더 세게
껴안았다. 그리곤 자신의 입안에 있는 그것을 정신없이 빨아 당겼다. 그렇
게 해야만 이 목마름을 해소될 것 같았다.
좀더 오래 그대로 있고 싶었다. 아직 갈증이 해갈되려면 멀었다는 생각과
함께 입안에 있는 그것의 맛을 음미하듯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세게 빨아보
았다. 묘하게도 그때마다 맛이 달랐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렸고 오직 이 사람과 자신밖에 없었다. 이 사람의
손길이 가슴을 더듬고 자신의 입술이 이 사람의 입안을 더듬는다. 사랑, 그
동안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다.
바로 이 느낌이 사랑이었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이 사람의 손길
이 싫지 않은 이 느낌, 바로 사랑인 것이다.
"아!"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그 달콤했던 것은 빠져나가고
입과 가슴이 허전해졌다. 마치 맛있는 유과를 먹다가 빼앗긴 것처럼 아쉬웠
다.
"석 대인, 나 아무것도 못 느꼈소. 다시 한번 해야겠는데요?"
짐짓 놀란 미소를 지으며 냉추렴의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약간
의 장난기를 가지고 시작했던 입맞춤이 너무나 열정적으로 반응해 오는 냉
추렴 때문에 임무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와 입맞춤을 하면서 진세개의
위치를 찾아야 했는데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고 그녀의 풍만한 엉덩이와 가슴을 만지고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아차 했으나 냉추렴을 반응을 보고 바로 그만 둘 수도
없고, 미안하다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그제야 그도 냉추렴의
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찾았대요."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였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냉추렴이 백산을 쳐
다보던 눈빛이 자신과 똑같았다는 것을… 그러나 자신이 먼저였지 냉추렴이
먼저가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 도련님!"
"네! 형수님."
눈치하면 제일가는 소살우가 소운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광천뢰 두 개를 주고 다시 마차로 가더니 한 개를 더 건네는 것이었다
.
"이거 세 개 다 던져도 괜찮지요?"
그래도 형수라는 말에 약간 기분이 풀렸는지 약간 누그러진 얼굴로 너무
많지 않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 있는 개자식들 콱 죽여버리십쇼. 부족하면 하나 더 가져올게요. 하
나만 더 있으면 능글맞고 색마 같은 형님까지 보내버릴 수 있습니다. 형수
님."
소살우의 표정 또한 무척 진지했다. 소운이 하지 않으면 자신이라도 그리
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광천뢰를 소운에게 내밀었다.
"여기 세 개만 던질게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나머지 일행들이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자 이번
에는 좀 더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저 색마 때문이 아니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칠까봐 그런 거라고!"
"…?"
"정말이라니까!"
일행을 향해 고함을 내지른 소운이 신경질 적으로 갈태독이 가리킨 곳을
향해서 광천뢰 세 개를 던져버렸다.
'나쁜 놈! 나에게 먼저 해주면 어디가 부러진대?'
백산일행이 있는 곳에서는 소운이 잔뜩 화가 나있었고, 활활 타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혈수마룡 진세개. 백산일행이 환히 보이는 곳에 은신하고 있던 진세개의
눈에 열정적으로 입맞춤을 하고 있는 냉추렴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다 격정에 못 이겨서 하는 입맞춤으로 보였다. 남자의 손이 엉덩이
를 더듬대도 가슴을 움켜쥐어도 더욱 가슴속으로 파고들고 있는 그녀의 모
습에 피가 머리끝으로 몰렸다.
"저런 화냥년 같으니. 요조숙녀처럼 굴더니 강호에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
고 그새 남자를 만들어? 그런 년이 나를 거부해?"
석숭의 예상대로였다. 극도로 흥분한 진세개가 저들을 치러왔다는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린 채 소리를 질렀다.
"죽여버린다. 냉추렴이고 뭐고 전부다 죽여버린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광기에 찬 눈을 하고 있는 진세개의 몸에서 자욱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질투였다. 자신을 거부하고 다른 남자와 어울리는 냉추
렴에 대한 질투가 살기로 바뀌어 사방으로 퍼져갔던 것이다. 이래서 남자의
질투는 여자의 그것보다 무섭다고 했는가.
"순무! 준비해라. 다 죽여라.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죽여버리란 말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보는 순간 자신들을 향해서 날아오는 검은
물체 세 개가 보였다.
쭈뼛!
무인의 본능인가. 거의 이성을 잃고 있는 상태에서도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한이 밀려왔다.
"피해랏!"
재빨리 몸을 날리며 은신한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한발 늦
고 말았다.
콰앙! 콰앙! 콰앙!
다섯 번의 폭발음이 구화산에 울려퍼지고 그들이 있던 곳과 또 다른 한 곳
에서 붉은 화마(火魔)와 함께 피를 동반한 인육이 튀어오르며 처절한 비명
소리가 따랐다.
"으악!"
"으아악! 살려줘…."
떨어진 팔다리가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떨어지고 뜯겨진 목이 튀어 올랐다.
그들이 있었던 곳이 순식간에 피 비가 내리는 아비규환 참상으로 변해버렸
다.
'이럴 수가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었기에….'
진세개가 망연자실 넋을 잃었다. 이곳에 은신해 있던 백여 명의 혈마군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사지를 잃고 허우적거리는 인물들, 앞을 보지 못하
고 우왕좌왕하는 자들, 자신을 믿고 따랐던 자랑스러운 혈마군의 정예가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군주님! 절반정도가 당했습니다."
참담한 얼굴을 한 순무의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로지 절반
이라는 말만 생생하게 들려왔다. 치욕스러움이다. 무인이 무공에 의해서 패
한 것이 아니라 폭약에 의해서 검을 놓고 말았다.
"갚아주어야지. 아주 철저하게… 인원을 모아라!"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자신이 흥분했기에 위치를 들켰고 그것이 지
금의 사태를 불러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진세개였다. 지금 이곳에 자신들 말
고도 세 개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두
곳에만 폭약이 날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저들이 자신을 찾기 위해서 그런
일을 벌였고 어이없게 자신이 걸려들었다는 뜻이 된다.
순무가 인원을 소집하고 있을 때 또 다른 곳에서는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자신들이 숨어있던 자리를 이탈하여 백산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서 움직여갔
다.
구가대(求家隊).
황보세가의 마지막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처지도 진세개의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두 개의 광천뢰가
그들이 은신해있던 곳에 터졌고 순식간에 육십 여명 이상이 고혼이 되어 사
라졌다. 이제 남은 선택은 두 가지 밖에 없다.
형제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도망을 쳐서 다음을 도모하느냐 아니면 모든 것
을 버리고 이미 저승으로 간 형제들과 같은 길을 가느냐 하는 것이다.
"여러분, 그동안 수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각자의 길로 가십시오."
한숨이 흘러나왔다. 철이 들 무렵부터 같이해온 이들이다.
이미 멸망해 버린 가문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삼십 년 동안 모든 노력을
다했다.
성도 이름도 모두 버리고 오직 구가대 일원이라는 것 하나만 가지고 있었
다. 소걸영 구소운의 암살이 옳지 않을 일인 줄 알면서도 가문을 위해서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도의마저 져버리고 말았다. 건너지 말아야 강을 건너
버렸음이다.
"더 이상 가문이라는 것 때문에 여러분을 희생시킬 수 없소."
이제는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다섯이란 나이에 가문을 잃었고 서른 다
섯이 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더라면
무엇인가를 이루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루
어 번듯한 가문으로 시작하려 한 것이 강호상에 하루라도 빨리 황보세가가
살아있음을 알리려 했던 것이 문제였다.
자신들이 암습을 가했고, 또 다시 암습하려던 불빛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복면도 벗었다. 죽을 때만큼은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천으로 죽고 싶었다
.
그의 뒤를 이어서 남아있던 이십여 명의 인원이 황보천과 같이 복면을 벗
어던지며 따랐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혈마군주인 진세개도 황보세가를 막기 위해서 와
있던 비마군도 천무맹의 화인걸도 용지만 쳐다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들 이십 명의 실력으로는 마차에 있는
인물들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숨기고자 했던 신분마저 드러내며 나서
고 있다 함은 이미 죽을 결심이 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인으로 마지막 가는 길을 방해하기가 싫어서인지 아니면 저들의 실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는지는 자신들도 알 수 없지만 무엇인지 모를 감정
이 나서려는 것을 막고 있었다.
"황보천이요. 오늘 하루였지만 여러분들께 미안하게 되었소."
이미 각오를 했는지 검집도 버리고 백산 일행의 삼 장 앞에 멈추어 서며
입을 열었다.
"황보세가의 후예인가? 왜 이런 짓을 했나. 누가 지시를 했는지 말해줄 수
있는가."
석숭이 백산일행을 대표해서 나섰다. 황보천이란 말을 듣는 순간 황보세가
의 후예임을 알 수 있었고 백산일행과 오천맹의 관계를 알기에 이들을 구해
주고 싶었다.
"비겁한 짓을 했지만 무인으로 죽고 싶소이다."
모든 것을 버린 눈동자였다. 더 이상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사라진 공허한
눈빛이었다. 비록 더러운 짓을 했지만 자신들을 보살펴준 제갈세가에 대한
의리만은 지키고 싶었다. 그것만이 자신이 무인(武人)이었다는 것을 증명하
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취익!
"무인이라고 했나? 너희들 무인은 다 그런 놈들인가. 자신과 아무런 관련
도 없는 사람을 죽이려 이렇게 떼거지로 몰려왔다가 동료들이 다 죽어가니
까 이제야 무인이 되고 싶다고 하는 거냐. 너희들이 말하는 무인이란 그런
것이냐? 무슨 짓을 해도 마지막 죽을 때는 멋있게 죽고 싶은 것인가."
또다시 화가 난다. 도대체 무림인이란 놈들이 무엇인가. 온갖 야비한 짓은
다 해놓고 그게 안 되니까 이제 와서 무인이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런 것이
명예라 생각하고 있는 족속들이다.
"너의 부하들이 저곳에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놈들처럼 많이 남아있다면
그래도 이렇게 나왔을까?"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소이다. 잘못되었다고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나있었고."
"아니야. 너는 말을 잘못하고 있어. 잘못했다고 생각했을 때 모든 게 끝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끝나니까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뿐이야
. 가문? 웃기지 마. 그것은 핑계일 뿐이야. 다 너희들을 위해서 네놈들의
영달을 위해서 그런 것뿐이야. 네놈들은 무인도 뭐도 아니야. 가라! 죽이지
는 않으마. 허나 다음에 또 보면 그때는 죽인다."
백산의 몸에서 엄청난 살기가 쏟아져나왔다. 먹고살기 위해서 도둑질을 하
고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하는 것은 그나마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과 저기서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자들은 뭔가, 힘이
있는 자들이다. 어찌 보면 더 이상 부러울 것도 없는 자들이 아닌가.
열 개를 가진 놈들이 조금 더 가지기 위해서 아옹다옹 아귀다툼을 하는 것
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석숭이 황보세가의 후예라 했기에 살려주는 것이다. 사부와 장 노인이 겪
었던 그런 아픔을 겪었다고 생각했기에 동정심도 생겼다.
"맞소이다. 세우고 싶었소이다.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그런 가문을 세
우고 싶었소이다. 그것만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소.
그것만이…."
황보천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저 청년의 말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럴싸한 가문을 세우겠다는 욕심이, 과거의 영화를 다시 찾겠다는
욕망이 그를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다.
결코 가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스
스로에게 증명하는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유일하게
자아를 찾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그 모든 것이 결국 자신, 바로 황보천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새로이 주신 목숨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 보겠습
니다."
황보천의 뒤에 있는 노인 한 명이 머리를 깊숙이 조아리며 울먹였다.
"갑시다. 가주님! 다시 시작합시다. 처음부터 하나씩 해봅시다."
황보천을 부축하며 그들이 멀어져갔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세상에서 잊혀진 황보세가의 운명처럼 검집 없는 검만이 나뒹굴
고 있었다.
"이제 우리의 빚만 해결하면 되나?"
그러나 황보세가가 떠나갔다 해서 백산일행의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백산일행이 있는 곳의 오 장 정도 떨어진 곳에 혈수마룡 진세개가 자신의
남은 수하들을 이끌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이 가 있는
곳은 일행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인 백산이 아니었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냉
추렴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받았던 것을 돌려주기만 하면 된다. 비록 기습에 의해 백 오십이
희생되었지만 남은 인원이면 저들을 충분히 처리하고도 남는다. 백 명은 뒤
에 있는 놈들을 경계하고 냉추렴이 있는 저들은 자신과 오십의 인원이면 충
분하다고 생각했다.
"냉추렴! 내 앞에서는 요조숙녀처럼 굴더니 강호에 나오니까 본색이 나오
더냐? 화냥기 말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냉추렴만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을 차버리고 기껏 잡은 놈이 저런 놈이었다는 사실이
더욱더 화나게 하고 있었다.
생긴 것도 없고 무공도 별로 인 것처럼 보이는 털옷을 입은 놈, 낮에 보여
주었던 것은 저놈이 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착각했던
터였다.
그리고 그 정도는 자신도 얼마든지 해 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
취익!
"언니, 저 새끼야? 언니를 괴롭혔던 놈이?"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무엇인가에 잔뜩 기분이 나빠 있던 소운이 백산이
하는 모양새를 그대로 따라하며 진세개를 향해 살기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
었다.
아직도 미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는지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냉추렴을 쳐
다보던 소운이 일행이 뒤로 넘어갈 폭탄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살우! 저 새끼는 내 밥이야. 누구든지 건들면 죽어. 알았어?"
"혀, 형수님!"
모든 일행의 입이 뜨악하게 벌어졌다. 소살우의 입에서 나왔을 때 가장 어
울리고 또한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던 그 말이 소운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은 소운의 기분을 알고 있고 냉추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서가 문제였다. 그 원인 제공자가 바로
앞에 있으니 소운이 화가 날만도 했다.
그러나 저 말투며 하는 행동이란. 원래 건달이었던 광견조원들을 질리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하등의 이상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소걸영 구소운, 한마디로
개방의 거지다. 아무리 여자라고 하지만 거지들 틈에서 자랐고 무공도 배
웠다. 보는 눈도 있고 해서 그동안 조신하게 지냈을 뿐이었지 그녀의 성격
도 한가락 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이쿠, 여협 나셨군. 소걸영 구소운? 너도 그것을 알아야지. 천무맹에서
너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저기 숨어있는 놈도 마찬가지일걸? 몸조심하라
고."
구소운이 자신에게 하는 말에 어이가 없었는지 진세개가 황당한 표정을 지
으며 쳐다보았다. 도대체가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이곳
에 그녀를 구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같은 편인 천무맹에서조차
죽이려 나와 있지 않은가. 그러한 와중에도 저리 당당할 수 있다는 게 참
으로 신기해 보였다.
"좌우지간 네놈은 나에게 죽어. 그리만 알고 있으면 돼, 새끼야!"
챙!
허리의 연검을 뽑음과 동시에 소운의 몸이 앞에 있는 진세개를 향해 번개
같이 퉁겨나갔다. 순식간에 오 장여 거리를 단축하며 진세개의 목을 노리며
일검을 휘둘렀다.
얼굴 가득 비웃음을 담은 진세개가 자신의 검을 들어 거칠게 소운의 연검
을 쳐갔다. 몸과 함께 단숨에 갈라버리려는 심산이었다.
느닷없는 소운의 행동에 깜짝 놀란 백산이 뛰어나가려 하자 조천영이 백산
의 팔을 잡아끌며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지금은 그냥 둬요, 백랑. 저 애도 화풀이하고 싶을 대상은 있어야죠. 평
소에 잘해 주었으면 동생이 저렇게 하지 않잖아요."
"나야 뭐… 누님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제가 아무리 잘해주어도 백랑만 하겠어요? 지금만 해도 그래요. 동생의
무공수준도 모르고 있잖아요."
조천영의 말은 전혀 틀린 게 없었다. 소운은 팽무도가 복용시켰던 마령호
내단을 갈태독의 도움으로 이미 녹여서 자신의 것으로 내공화 했다. 거의
삼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내공면으로는 석두나 광견조보다 위라는 소리였다.
게다가 갈태독에게 배운 것은 의술뿐만이 아니었다. 무공도 전수 받고 있
었다.
소운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던 것은 백산뿐만 아니라 진세개도 마찬가지였
다. 만상투인루에 가기 전의 구소운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카앙!
진세개의 검과 소운의 연검이 부딪쳤으나 불꽃만 튀었을 뿐 진세개의 의도
대로 잘리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진세개의 검이 밀리고
있었다. 내공이 소운보다 낮은 것이다.
"너는 내 밥이라 했잖아, 짜샤."
팽팽하던 소운의 연검 끝이 그대로 구부러지며 진세개의 얼굴을 향해서 퉁
겨졌다.
"억!"
얼굴에서 오는 극렬한 통증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진세개의 신형이
뒤로 밀렸다. 손을 들어 얼굴 왼쪽을 만져보았다. 살이 있어야 할 부분에서
뼈가 만져졌다. 냉추렴에게 당해 흉터가 있던 부분의 살점이 움푹 떨어져
나가 광대뼈가 드러나보였다.
"이익!"
"그것은 언니를 욕한 벌이야, 임마. 이제 나의 빚을 갚아!"
소운의 검에서 백색 검강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거의 일장 길이의 완전
한 검강이 튀어나와 진세개의 목을 향해 겨누어졌다.
"소운아 그만, 그만해라. 남편 있는 아녀자가 손에 피를 묻히면 되겠냐?"
백산이 뒤에서 소운을 껴안으며 말렸다.
"놔! 저 자식 죽여버릴 거야…."
소운의 말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백산이 소운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
다.
"읍! 으읍!"
"일단은 이 정도만. 나머지는 나중에, 응?"
소운이 얼굴을 가리고 조천영 곁으로 도망쳤다. 그것 때문에 화가 났지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창피하다는 생각
보다 기분이 더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백의 적이 있는데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저 녀석 바람둥이가 다 되었구먼?"
갈태독의 말에 그곳에 있던 일행 모두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웃지 못 할 백산의 행동에 일행을 감싸고 있던 무거운 분위기가 다소 해소
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목전의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공격해라! 다 죽여.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전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진세개가 소리쳤다.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그의 눈에서 오직 죽이고 말겠다는 살기만이 감돌았
다.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 여겼던 개방의 거지에게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당한 꼴이지 않는가.
주변에 있는 수백의 무리들이 자신의 그런 모습을 다 보았을 것이다. 천마
맹의 혈마군 군주인 진세개가 하찮은 것들에게 당해서 물러났다는 소문이
강호상에 퍼져나갈 것은 분명한 일이다. 결국 명예를 회복하는 길은 저들을
다 제거하는 길밖에 없다.
애초에 그리 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더욱 절실해져버린 것이다.
오십 명의 혈마군이 일제히 몸을 날리며 백산 일행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그런 혈마군을 바라보고 있던 백산일행의 진영도 이상한 형태로 변하고 있
었다.
마차를 중심으로 해서 혈마군이 날아오는 최전방에 갈태독이, 그의 양옆
삼 장씩 떨어진 곳의 약간 뒤쪽으로 석두와 소살우가 자리를 했으며 갈태독
과 일직선으로 용지를 등지고 백산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사이로 두 명씩의 광견조원들이 배치되어있고 내부에 있
는 마차 양옆으로 두 명씩 들어있었다.
마치 쌍모진(雙眸陣: 마름모꼴진)을 옆으로 뉘어놓은 모양이었다.
"갈 선배님, 곤(坤) 방향으로 이 보(二步)."
백산 일행이 어떤 진식을 구축했는지 진의 중심에서 남궁지우의 음성이 흘
러나왔다.
남궁지우의 한마디에 일행 전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전방에 있던 칠
명의 장과 검 그리고 도에서 일제히 그들만의 무공이 펼쳐졌다.
천장지옥마공의 '혈파'가 앞으로 달려들던 흑의인 다섯 명을 가루로 만들
고 석두의 창궁혈해탄이 전방의 공간과 함께 흑의인을 찢어발겼다. 더불어
오른 쪽에서는 소살우의 '혈극참'과 석숭의 '구룡신공'이 달려드는 흑의인
을 향해서 뿌려지며 허공에 피 무지개를 그려내었다.
피비(血雨)가 내리며 전방에서 달려들던 혈마군의 선두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이진(二陣) 휴문(休門)과 사문(死門) 교대!"
이번에는 낭랑한 음성이 진(陣) 내부에서 흘러나왔다. 남궁미령이었다. 남
궁 부녀 두 사람이 진(陣)의 가운데서 조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절대 사문을 형성하고 있는 네 부분의 모서리를 제외한 나머지
광견조원 전원이 자리를 바꾸었다.
"삼재현신(三才現身)!"
다시 남궁지우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중간에 있던 광견조원들이 앞에 있
는 사람들의 사이사이로 끼어들며 일곱 개의 삼재진을 만들어낸다. 적의 이
인 합격술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차륜전을 쓰려는지 혈마군들이 두
사람씩 조를 이루어 죽음을 도외시 한 채 달려들었다. 앞사람의 죽음을 발
판삼아 뒤쪽에 있는 자가 동시에 검을 찔러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만의 헛된 몸부림일 뿐이었다.
맨 앞줄에 있던 광견조원 한 명이 먼저 들어오는 혈의인을 베어냄과 동시
에 옆으로 빠지고 그 공간을 뒤에 있던 다른 광견조원이 도를 휘두르며 메
우고 있었다.
완벽한 조화였다. 이곳에 와서 잠시 가르쳤던 검진을 광견조원들이 완벽한
호흡으로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광견조원들의 무서움이었다. 진의 모용
을 완벽하게 살릴 수 있는 운용은 불가능했지만 한 곳에 고정되어있으면서
적을 방어하는 기술은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이른바 조직력이다. 언제
나 같이 행동하고 생활했던 이들이었기에 한 마음으로 움직여야하는 일은
너무 수월하게 해내고 있었다.
"사문 발진!"
남궁지우의 입에서 커다란 외침이 터지고 전방에 서있던 일행의 입에서 거
대한 함성이 뒤따랐다.
"멸파!"
"창궁혈해탄!"
"혈극참!"
또 한 번 앞에서 달려들던 십여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엄청난 광경
이 아닐 수 없었다.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자신들의 위치만 조금씩 바꾸며
인원으로 밀어붙이는 혈마군의 공격을 막아낼 뿐 아니라 일장 앞으로만 다
가오면 그대로 도륙하고 있는 것이다.
진세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하찮은 무지렁이로
보았던 놈들이 전부 도강을 구사하는 고수였다.
그제야 저들이 보여주었던 무공이 생각났다. 냉추렴 때문에 잠시 잊고 있
던 사실. 자신과 비교했을 때 결코 낮은 무공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
다.
"순무! 경계인원 전부를 앞으로 돌려라!"
다른 곳의 기습에 대비해 뒤쪽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혈마군 모두가 백산
일행이 있는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놈들…! 끝장을 본다. 이 진세개가 누구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마. 전부
죽여버린단 말이다.'
강한 자들이지만 결코 자신이 지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천마맹의 정
예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자들에게 진다는 것은 있을 수도, 일어날 수도
없는 사실인 것이다.
두 편의 혈전을 지켜보고 있던 인물들 중에 진세개보다 더 놀라는 인물이
있었다.
백의천룡 화인걸이었다. 용지 건너에서 그들의 싸우는 모습을 직시하고 있
던 그의 놀라움은 진세개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그가 노리는 인물들이 펼치고 있는 검진 때문이었다. 모양은 쌍모진(雙眸
陣) 이었지만 내부에 별도의 삼재진(三才陣)을 형성하고 있는 독특한 진식,
전면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삼재진을 이용해서 강화시켜주고, 서로 서로
교차하면서 상대를 격살하고 있는 저 진식은 무공을 배울 때 무수히 많이
들었던 어느 한 가문의 독문검진이었던 것이다.
"저것은 청풍검진(淸風劍陣)? 어떻게 저들이 남궁세가의 청풍검진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경 오십 년 동안을 봉문해 있었고 과거 오천
맹의 일당이었던 남궁세가의 검진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그가 배운 청풍검진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구축되었을 때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한다고 했고 약점은 허리 부분이라 하였다. 그러나 저 검진은 서책으로
배운 것과는 너무 달랐다. 맹에서 배울 때의 청풍검진은 중간에 삼재진 하
나만 들어가는 형식이었는데 지금 있는 것은 한 면에 세 개의 삼재진이 만
들어져있다.
즉, 가장 약점이라 했던 허리 부분을 더 강하게 보강하는 강력한 힘을 새
로이 창조해낸 것이다. 내부에서 꾸준히 형성되고 있는 삼재진이 검진의 약
점이었던 부분을 강점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남궁세가의 검진을 보고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저들을 격살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가 아닌가.
"군무해! 맹에 전서를 보내라. 남궁세가의 검진이 출현했다고."
대 사건임에 틀림없기에 맹에 서둘러서 전서를 보내야한다. 다른 곳도 아
니고 남궁세가의 검진의 출현이다. 어쩌면 이 싸움보다 더 중요한 정보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강지(馬鋼智), 내말 들어라. 잠시 후 전면적인 공격을 시도한다. 임무
는 알고 있겠지?'
화인걸이 대주로 있는 백의대는 전원이 속가제자로만 구성이 되어있는 조
직체이고 열정적으로 맹주를 지지하는 자들이다. 전부 오 조로 구성되어있
으며 각 조장 휘하 백 명씩, 총 인원 오백이다. 그중 육합검자(六合劒子)
불리는 마강지는 삼 조의 조장을 맡고 있었다.
'네, 대주!'
전음으로 오간 대화였지만 사전에 지시가 되어있었는지 즉각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구소운의 추살과 냉추렴의 납치가 그들의 주요 임무였던
것이다.
"공격하라! 목표는 천마맹의 혈마군이다."
화인걸의 명령에 따라서 백의대 소속 오백여 인물들이 일제히 몸을 날리며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군주님, 어떻게 할까요? 천무맹인물로 보이는 자들이 전권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무면마룡 암사월의 진영이었다. 그들이 위치한 곳은 황보세가와 혈마군 사
이로 천무맹의 백의대와는 일직선으로 마주 보이는 지점에서 은신하고 있었
다.
그런 그들의 눈에 진세개가 있는 혈마군의 진영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는
수백의 인물들이 보였다.
암사월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스런 얼굴로 장내를 쳐다보았다. 저 무리들
속에 같은 동료라 할 수 있는 혈마군이 포함되어있다. 그 속에서 적을 찾
아서 죽인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임무는 소걸영 구소운의 보호다. 저 검진에 있는 자들을 제외하고
는 전부 적일 수밖에 없다. 공격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마음을 굳혔는지 암사월의 입에서 공격을 알리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쳐라!"
암사월의 외침과 함께 삼백여 명의 비마군이 달려오는 천무맹의 인물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뛰어나갔다.
난전(亂戰), 혼전(混戰). 피아(彼我)를 구분하기 힘든 어둠 속에서 천무맹
과 천마맹 두 세력 천여 명의 흑의인들이 서로 엉키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죽이려는 자들과 살리려는 자들 간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여기 살고자하는 자들이 있었다.
자신들의 양쪽에서 날아오는 무수한 인물들을 보고도 환한 미소로 응수하
고 있는 자들. 중앙에 모닥불을 하나 두고 남궁세가의 청풍검진을 구축하고
있는 백산과 광견조 일행이었다.
"지휘할 수 있겠느냐?"
남궁지우가 딸을 쳐다보며 하는 소리였다. 조천영을 가운데 두고 냉추렴
구소운 그리고 남궁미령과 찍새가 사방 한 방위씩을 맡고 있었다. 그들이
해야할 일은 단 한 가지 조천영의 보호였다.
"걱정 마세요, 아버님. 저도 남궁세가의 여식입니다."
백산일행과 같이 오면서 전염이 되었는가, 천여 명에 가까운 적들이 몰려
오고 있는데도 별로 긴장한 표정이 아니었다.
"좋다. 우리는 이보다 더한 일도 겪었다."
형제의 가슴에 검을 박았던 자신들이었다. 적을 죽이는 것은 너무 쉬운 일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궁지우가 백산이 있는 뒤쪽의 약한 부분으로
이동을 하여 후위를 보강하고 이제 진의 지휘자가 된 남궁미령이 뒤쪽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쳐다보았다.
"후위, 휴문을 사문으로 전환."
남궁미령의 지시가 떨어지자 전면에서 삼재진을 형성하며 움직이던 네 명
의 광견조원들이 재빨리 후위로 물러나며 후방 삼재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중앙의 백산 쪽을 제외하고 두 사람 사이로 한 명씩 서서 삼각형을 만들고
또한 백산의 뒤쪽에는 남궁지우가 서서 약해지는 부분을 보강하는 여섯 개
의 삼재진이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전방을 향해 그 살기를 뿜어냈다.
"사문(死門), 회진(回陣)!"
또다시 남궁미령의 지시가 떨어지고 중앙의 백산과 양끝의 석두와 소살우
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이 회전을 하면서 전방을 향해서 도강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떨어진 인육이 난무하고 그 사이로 피 무지개가 모닥불 빛에 반사되어 퍼
지고 있었다.
소살우 옆에서 진을 구축하고 있던 금령의 검이 한 인형의 목을 잘라가며
곧바로 진의 안쪽으로 몸을 옮기고 안쪽에서 움직이고 있던 송곳이 전방으
로 나오며 다른 상대를 베어내고 있다.
찌르기는 필요 없다. 오로지 움직이는 방향을 향해서 칼을 휘두르며 적을
베고 있었다.
여섯 개의 붉은 비도가 춤추고 있었다. 육 촌 정도의 비도에서 솟아나온
일 장 크기의 도강들이 허공을 유린하였다.
'광풍노산' 시뻘건 도강의 벽이 다가오는 흑의인들의 모든 것을 절단해내
고 있다.
무기와 육신을 구분하지 않는다. 달려드는 것은 무엇이든지 토막을 내버린
다.
"카악!"
한 무더기의 분노가 뱉어지고 여섯 개의 비도에 솟아있던 도강들이 하나씩
분리되며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사라진다.
붉게 변한 공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잘려진 육신의 비가 내렸다
. 하늘에서 내리는 물줄기만이 비가 아니었다. 인간의 육신도 잘게 잘리니
비처럼 떨어지는 것이었다. 한 여름에 내리는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한천팽무도법의 이 초인 혈극폭.
몸과 연결되어있는 뇌룡사 때문에 이기어도가 안 된다며 백산이 만들어낸
도강의 폭풍. 비도 앞에 솟아나와있는 각각의 도강을 절단하여 상대방을 향
해서 쏟아내는 잔인한 무공. 그 무공이 첫선을 보이며 천무맹의 인물들을
주살하고 있었다. 도강기보다 한 단계 위라 할 수 있는 도탄기와는 또 다른
경지였다.
육합검자 마강지,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고 있었다. 나머지 네 개조는
천마맹의 인물들을 주살하기로 되어있었고 자신들의 임무는 검진 속에 침투
하여 여자들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오판이었고 자신들만의 생각이었다는 것이 금방 드러났다.
세 명이 돌아가면서 움직이는 삼재진, 두 개를 만드는데 여섯 명이 필요한
삼재진을 다섯 명이 형성하여 하나로 묶고 그것들이 회전을 하며 자신들
앞으로 다가오는 천무맹의 인물들을 무슨 물건을 치우듯이 베어내고 있다.
두 번의 칼질도 하지 않는다.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부하들을 잘라내며 진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중앙에서 이상한 것을 휘두르고 있는 저 자. 그에 대한 첫 느낌은
공포였다. 하나의 검에다 강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엄청난 고수라 칭하는데
일장 크기 여섯 개의 붉은 도강이 허공을 난무하며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잘
라내고 있다.
어도술도 아닌 도강의 폭풍 이건 아예 도살이다.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저들의 앞에 시체가 쌓이고 그 시체의 벽을 만
들고 있는 자들이 바로 자신의 부하들이다.
그러나 한번 내려진 명령은 천명, 속가제자의 한을 풀기 위해서는 해야한
다. 반드시 해내야만 한다.
"전원 공격하라!"
마강지를 비롯한 백의대 삼 조 잔여인원 오십여 명이 후위진을 향해서 육
탄으로 돌진해 들었다. 이미 정의니 뭐니 하는 신념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
었다.
죽음이라는 것도 하나의 광기의 발산일 뿐이다.
죽어가는 동료들의 몸을 보고 찢어진 얼굴을 보며 더 이상의 이성이라든가
감성이라는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복수, 오직 복수라는 한마디만을 간직
한 채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무작정 뛰어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연못에서 무엇인가 번쩍 하는 것이 백산 일행을 향해서 날
아들었다. 암습이었다. 백의대 오십 명이 몸을 날린 순간 그들 사이의 조그
마한 틈을 타고 비도가 날아든 것이다.
"윽! 억! 큭!"
네 마디의 비명소리와 함께 금령 한 명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으며 모사
, 도치, 송곳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우뚝 섰다. 찰나의 순간에 회진하던
삼재진이 멈춘 것이다.
"후위 사진(死陣) 전방 멸(滅), 출(出)!"
그것을 보고 있던 남궁지우의 입에서 다급한 일성(一聲)이 터지고 진 안쪽
에 있던 나머지 금령 한 명과 세 명의 광견조가 앞으로 튀어나오며 검과 도
를 전방으로 날렸다.
이어서 터지는 통렬한 외침.
"혈극폭!"
하나의 검과 세 개의 도가 하늘을 비상하고 있었다. 어검술과 어도술이었
다. 검을 쥔 자, 도를 쥔 자, 손에 무기를 든 자라면 누구나 원하는 경지.
꿈의 경지라는 어도술과 어검술이 이 이름 없는 자들에 의해 펼쳐지며 오십
명의 천무맹 무인들을 잘라가고 있었다.
붉은 강기를 머금고 있는 세 개의 도와 백색으로 빛나는 하나의 검이 사방
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백의대를 도살하며 날았다.
육합검자 마강지가 본 것은 새하얀 강기에 휩싸인 검이었다. 막아보기 위
해서 자신의 검으로 내리쳤으나 그것마저 잘리며 정신이 아득해 져 왔다.
'이들은 너무나 강해. 우리가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마강지가 그렇게 죽어가고 있을 때, 백산이 몸은 번개같이 움직이며 한 명
의 목을 틀어쥐었다.
흑립, 흑면, 흑의로 대변되는 흑객. 천사맹의 청부를 받아들인 흑막의 살
수인 영객(影客)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절대적인 순간에 비도를 발출 했고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나 두 번째 비
도는 날리지 못했다. 중앙에 있던 놈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자신을 덮
쳤기 때문이었다.
"네놈 때문에 지금껏 저곳에서 죽치고 있었던 거야."
흑객의 목을 틀어쥐면서 내뱉는 소리였다. 갈태독을 최전방에 두고 백산이
후위로 왔던 이유였다. 뭔지 모를 이질감이 뒤통수를 때리고 있는데도 좀
처럼 위치를 잡아낼 수가 없었다.
백산에게 경각심을 줄 정도로 최고의 은신술이었다. 달려드는 상대를 주시
하면서도 모든 감각을 개방한 채로 끊임없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도와 함께 나타난 흑의인, 지체 없이 달려들면서 그의 비
도를 쳐냈고 목을 잡았다. 그리고 입이라 생각되는 부분에 반쯤 들어가 있
는 붉은 비도하나, 박히지는 않고 입안에서 그대로 떠 있었다. 왼손에 있는
비도중의 하나인 풍천비였다.
"괜찮냐?"
비도를 맞은 광견조와 어검술과 어도술을 날리고 입가에 피를 흘리 채 힘
겨워하며 쓰러져있는 나머지 광견조원들과 금령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어도술과 어검술이 무리인지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로 힘
들어하고 있었다.
백산도 비도가 날아오는 것을 감지했다. 그러나 비도가 아래쪽을 노리고
있었기에 약간은 방심한 면도 없지 않았다.
은신술의 대가인 살수를 잡기 위해서는 한쪽을 포기해야 했고 광견조의 실
력이면 비도에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흑객을 먼저 덮친 것이
었다.
그러나 영객의 노린 수가 바로 그것이었다. 장애물은 죽여서 제거하는 것
이 아니라 최종목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만큼 자리만 이동하게 하면 되는
거였다.
다리 쪽으로 날아오는 암기를 피하기 위해 움찔하는 그 순간 회전하던 삼
재진이 멈출 것이고 그 사이로 비도를 날리려 했었다. 장애는 최소한의 힘
으로 목표는 최대한의 힘으로 하는 것이 살수의 기본이다.
장애물을 치우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오늘 그의 할 일인 목표물에 비도를
날리지 못했다.
왼손으로 자신의 목을 틀어쥐고 있는 바로 이자 때문이다. 그리고 복면을
뚫고 입안에 들어와 있는 붉은 색의 비도 하나, 온몸에서 힘이 사라져버렸
다.
"네놈에게는 물어볼게 좀 있으니 저쪽에 처박혀있어야겠다."
차가운 백산의 말과 함께 영객의 입안에 있던 풍천비에서 붉은 바람이 일
더니 순식간에 모든 이빨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이어서 그의 발이 단전을
향해 나아갔다.
"으으윽!"
살수의 임무는 무조건 죽음과 연결이 되어야한다. 목표물이 죽던지 노출되
었을 경우 자신이 죽던지, 특히 노출되었을 때 자신이 죽는 것이 더 중요하
다. 비밀 유지 때문이다.
살수란 무엇인가, 청부업자란 말이다. 요컨대, 돈을 받고 다른 사람들을
죽여주는 살인 청부업이 직업인 자들을 가리킨다. 돈 때문에 원수를 만든다
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이다. 자신들의 본거지를 비밀로
해야하고 청부를 했던 사람의 신분에 대해서도 비밀로 해야하는 그야말로
철저한 신용이 있어야 무림이란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영객에게는 그런 신용을 지킬 시간이 없었다. 자신의 목을 틀어쥐
고 있는 놈이 순식간에 내공의 파괴시켜 버리고 이빨을 가루로 부셔버림으
로써 자결할 기회마저도 박탈해버린 것이었다.
"남궁 대협, 이 자식 좀 잡고 있으쇼."
"백랑!"
남궁지우 앞으로 영객을 집어던지는 백산을 조천영이 불안한 눈빛으로 쳐
다보고 있었다. 다시금 분노해버릴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알았어요, 누님! 참으라 이거죠? 찍새야, 도 좀 줄래?"
비도를 쓰지 않으려 함인가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자신의 도를 찾고 있었다
. 도를 받아든 백산이 갈태독 등이 있는 전방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그곳은 아직 살육의 잔치가 끝나지 않았다. 앞에 쌓여있는 시체들로 인하
여 움직이기 힘든 상황임에도 천마맹의 혈마군들은 계속해서 육탄으로 밀고
들어왔다.
엄청난 피의 향연 속에서 이성을 잃어버렸음이다. 죽음이라는 단어도 생각
하지 못한 채 자신의 앞에 있는 적을 향해서 검만 휘둘러 대다 그렇게 죽어
갈 따름이었다. 혈마군의 뒤쪽에서는 천마맹의 비마군과 천무맹의 백의대가
무수한 사상자를 내면서 밀고 밀리는 난전을 거듭하며 치열한 접전을 벌이
고 있었다.
죽어간 육신들에서 나온 피가 용지로 흘러들어 그 맑음에 의해 바닥까지
보인다던 용지의 물이 떠오르는 태양 빛과 함께 붉게 물들어버렸다.
석두의 검에서 붉은 검강이 솟아나오며 자신의 동료의 몸을 밟으며 뛰어오
르는 놈의 허리를 양단하고 소살우의 도가 또 하나의 흑의인의 목을 쳐내고
있다. 소살우의 도법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도를 가지고 찌르기를 하고
있었다. 단순하게 찌르는 것이 아닌 상대의 목 옆으로 가볍게 도를 밀어
넣은 다음 당기는 힘으로 목을 절단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검술에 있어서 극쾌의 찌르기와 도의 베기가 연결된 동작, 자신만의 도법
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저 미친놈에게 가볼까.'
백산이 미친놈이라고 하는 자. 자신의 부하들 뒤에서 넋을 잃고 있는 혈수
마룡 진세개였다.
그가 본 백산 일행은 미친 살귀들이었다. 무슨 진을 만들고 있는지 자신의
위치에서 거의 움직이지도 않은 채 부하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미친놈들이
었다. 살인에 굶주린 미친 살귀들이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데도 그 꿈이 깨질 않는
다.
"네놈이 아까 내 부인들을 괴롭힌 놈이 맞지?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하얗게 웃으며 나타나는 털옷을 입은 놈. 자신을 향해 다가오면서 부하들
을 가볍게 베어내고 있다. 두 번의 손도 쓰지 않는다. 마치 짚단을 베어내
듯이 좌우로 휘두르는 도에 자신의 부하들이 몸을 맡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
다.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공포가 밀려들고 문득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뒤를 돌
아보았다. 치열하게 싸우던 두 세력이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이봐, 진세개. 네 동료들, 아니 부하들이 기다리잖아 빨리 가야지."
놈의 일행을 공격하던 부하들도 다 죽었다. 용지에 남아있는 사람이라곤
저놈의 일행과 자신밖에 없었다. 모두 일렬로 앉아서 이쪽을 쳐다보며 무엇
인가를 씹고 있었다.
문득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싶다는 욕망
이 불쑥 고개를 들었는지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목전에 죽음이 다가와 있는데 식욕이 생기다니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
다.
이런 것이 죽기 전에 생기는 본능의 욕구인가. 웃음이 터져나왔다.
"큭큭! 푸 핫핫핫! 그래, 이 진세개가 철저하게 졌다. 사랑에서도 싸움에
서도 그러나… 혼자 가지는 않는다. 크어엉!"
허탈한 웃음을 짓던 진세개가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방어는 일절 생
각하지 않는 공격 일변도의 동귀어진의 수.
차앙!
검과 도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멈추어 서있
었다.
목을 향해 베어가던 진세개의 검이 백산의 도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
하고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이었다.
"이익!"
진세개의 얼굴이 붉어지고 검이 조금씩 옆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별 것
아니었다. 자신의 내공에 놈의 도가 밀리고 있다. 진세개의 얼굴이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까지였다. 계속 나아가던 검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
의 가슴 앞에 검과 도가 비스듬히 걸쳐진 채 서있는 것이었다.
놈이 웃는 얼굴로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이건 벌이야."
놈과 자신의 가슴 앞에 있던 도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밀어내기 위해서 모든 내공을 쏟아넣고 있었지만 거대한 바위였다. 산이었
고 하늘이었다.
빨리 다가오지도 않는다. 천천히 자신의 입 앞에 다가와 있는 도(刀), 벌이
라고 했던 것이 다른 것이 아니었다. 바로 공포, 죽음의 순간에 맛볼 수 있
는 공포를 벌로 내리고 있었다.
꼬르륵!
입을 통해서 들어간 도가 천천히 뒤통수를 뚫고 나오며 진세개의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내렸다. 하룻밤의 접전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남기고 간 것은 죽음과 시체밖에 없었다. 용지가 붉
게 물들어버렸고, 붉은 안개가 형성되어 구화산 정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사자(死者)들을 위한 진혼곡인가 용지에서 나오는 용음(龍音)이 유달리 구
슬프게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