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3/84)

제3장 공격(攻擊)

 "우리가 한발 늦었네? 벌써 다 끝나버렸어."

 백산 일행이 살육의 현장에서 상류 쪽으로 옮겨 피 묻은 몸과 도 등을 정

리하고 있을 때 네 명의 인물들이 나타나면서 하는 소리였다.

 "숙부!"

 냉추렴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자기 때문에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생각에 얼마나 힘들었던가. 더구나 숫제 싸움에 나서지도 못하게 하는 백산

 때문에 광견조원들이 다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야하는 것이 너무나 미안

하고 죄스러웠다.

 그런데 자신의 일행에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천마맹을

떠났던 광사 초상, 독안랑 서문천 등 무욕십대고수 중 네 명이 도착한 것이

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얼굴이 더 예뻐졌구나. 남자라도 생겼나?"

 냉추렴을 번쩍 안아든 광사초상이나 나머지 삼 인들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나타났다. 마치 집나간 딸을 찾은 아버지의 표정을 지으며

냉추렴을 쳐다보았다.

 오로지 무공일도에만 정진하느라 가정도 이루지 못했던 그들에게 있어서

냉추렴은 조카이기 이전에 딸이다.

 생각보다 밝은 냉추렴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들도 이곳에 오기

전에 저 아래쪽에 있는 살육의 현장을 지나쳐왔다.

 무인이라고 칼밥을 먹은 이래 처음 본 광경이었다.

 그 살육 속에서 상처하나 없이 이렇게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대형

인 철목승이 강호에서 가장 강한 집단일 것이라 했지만 용지 옆에 뒹굴고

있던 시체들을 보았을 때 난전이고 혼전이었다.

 그리고 수백 명이나 되어 보이는 시체들, 그 많은 인원의 공격을 이들이

막아냈다는 것이 경이롭기만 했다.

 더구나 상대는 무림이천의 최정예 들이다. 내심으로 많은 걱정을 하며 이

곳으로 왔는데 엄청난 살인에 대한 후유증 때문인지 모두들 침울하게 굳어

서 입만 오물거리고 있을 뿐 크게 문제가 있어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서로 간에 수인사를 끝내고 사인은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그들이 알고

있었던 냉추렴과 소걸영 구소운 외에도 천장지옥마 갈태독, 만금돈노 석숭,

 그리고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와 그의 딸, 강호인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입

이 벌어질 그런 인물들이 이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들 속에 일행으로 있었던

 것이다.

 그 중 독안랑 서문천의 놀라움이 가장 컸다. 그의 놀라움은 백 년 전의 전

설이었던 천장지옥마 갈태독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남궁세가의 전대가주와 만

금돈노 석숭이 같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수백 명의 무인들과 싸워서 사망자 하나 없이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는 아

마도 남궁세가의 진식 때문일는지도.

 그것은 과거 오천맹의 일원이었던 남궁세가가 이미 강호활동을 시작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가 북경이라 했고 남궁세가의 전대가주라는 거물급 인

사가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본인들이야 강호유람이라 하지만 아직도 남

궁세가와 하북팽가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 강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특히 무림 이천의 생각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가 보았을 때 일이 더 심각한 상황으로 변했고 이들의 신변도 더 위험해

지고 있었다. 서로 간에 노리는 바가 있으니 한꺼번에 몰살시킬 수도 없다.

 이들의 존재가 수면위로 떠오르고 두 맹에서 자신들의 동료를 암살하려 했

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맹의 수뇌부는 바로 파멸이다.

 이들에 관한 것은 끝까지 비밀에 붙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저들은 그런 상황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모르고 있는지 검은 놈 하

나를 심문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석 대인, 아는 놈이요?"

 석숭과 금령의 고문에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검은 녀석을 두고 백산이

 하는 말이었다.

 "내가 만상투인루에 간 이유가 저놈들 때문일세."

 이어서 석숭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지금 심문하고 있는 살수가 과거 원나라 시절의 최고 암살기관이었던 자밀

원(慈密元)살수라는 것이었다.

 원나라.

 역사상 최강의 대 제국을 건설했던 성길사한(成吉思汗)의 후예들.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이었지만 수많은 부족들의 연합체였던 그들은 안정된 기반

의 황실을 세우지 못했다.

 부족간의 권력다툼과 끊임없이 저항하는 한족들 때문이었다.

 약해지는 황실을 바로 세우고자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한족 저항운동의 기

반이 되었던 무공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중원 천하를 죄다 뒤져서 수백 권의 무공기서를 찾아냈고 그 중에 선택된

다섯 가지의 무공, 일점홍(一點紅), 팔만사천검법(八萬四千劍法), 지옥참마

도법(地獄斬魔刀法), 무영권(無影拳), 무영비천류(無影飛天流)가 그것이었

다.

 이 다섯 가지 무공을 바탕으로 창설한 기관이 바로 자밀원(慈密院)이었다.

 총 이백 명으로 구성된 자밀원 살수들을 흑객(黑客)이라 불렀고 흑립, 흑

면, 흑의는 흑객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들의 표적은 황실에 해가

될만한 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간혹 강호의 무림인들까지도 암살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백의 인물 중에 오십 명의 일급살수가 있었고 귀살 마천득이 그중 한 명

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일급살수 위에 오대흑객이라는 특급살수들이

있는데 자밀원 최고 수뇌들이었으며 일점홍을 익힌 무객(無客), 팔만사천검

법을 익힌 천객(天客), 지옥참마도법의 사객(死客), 무영권의 혈객(血客),

무영비천류의 영객(影客)이 그들이라고 한다.

 놀라운 말이었다. 석숭이 말한 다섯 가지 무공, 웬만한 무림인이라면 다

알고 있는 전설상의 무공이다. 그런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면 살수가 아니다

. 초극의 고수가 살수비기까지 익히고 있는 것이다.

 "근데 망해버린 나라의 잔당들은 왜 찾는 거요?"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하지만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나라의 후예들이

뭘 어쩌겠는가. 가만히 놓아두면 그렇게 사라질 것 아닌가.

 "그게… 그들이 사라지면서 황실의 물건 하나를 가지고 갔네."

 곤혹스러운 표정의 석숭이 더 이상은 말을 잇지 못하겠는지 입을 다물어버

렸다. 자신과 황제만의 비밀이다.

 그러나 백산의 표정은 반짝 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또다시 돈 냄새를 맡

았다는 표정이다.

 "뭐가 되었던지 그것만 찾아주면 한 밑천 주겠네?"

 "금령! 먼저 가서 금의위(錦衣衛)를 전부 낙양으로 집결시켜라."

 백산의 말에는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이 심각한 얼굴로 금령에게 명령을 내

리는 석숭의 정체, 명 황실 최고 사정기관이며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

을 휘두르고 있는 금의위의 수장이 바로 그였다.

 "석 대인이 금의위의 영반이셨단 말입니까?"

 남궁지우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자신도 가문을 운영해 보았기에

금의위 영반이란 직책이 어떤지 알고 있다. 명나라 권력의 최고 실세가 바

로 석숭이었다. 거의 황제와 동일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이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일행이 되어있다니… 이상한 일행이 아닐 수 없

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면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광견조에 대한 놀라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이름자도 쓰지 못하는 광견조, 가문의 진식을 가르칠 때도 얼마나

놀랐던가. 건(乾)이 뭔지 감(坤)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쉽게 풀어서 움

직임을 이야기하자 마치 수십 년을 반복해서 맞춘 것처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놈들이 왜 우리를 노리는 거죠?"

 백산이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석숭을 쳐다보았다. 무림이천이야 목

적이 있어서 자신들을 노린다지만 그 외에는 무림과 하등 관련이 없는 자신

들이 아닌가.

 "아마 천사맹 쪽이겠지."

 독안랑 서문천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북경에 가서 조직 일을 한다는 단

순한 이유로 뇌룡현이란 오지를 출발한 이들. 무림이란 곳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했고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이들이 무림삼천의 공격을 받고 있

는 엄청난 집단이 되어버렸다.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면 강호상에 나타나지도 않을 사람들이다. 그런데

 세상의 패권(覇權)을 원하는 자들이 이들을 강호 무림으로 끌어들이려하고

 있다.

 "엥? 내가 준 돈으로 우리를 죽이려 든단 말이야? 이런 개 같은 놈들."

 그때부터 백산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대상은 그들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해 주자고 했던 갈태독과 조천영이었다. 그나마 제 자식을 임신하고 있는

조천영에게는 별 소리 하지 않고 오직 갈태독에게만 계속 쪼아대고 있었다.

 "허!"

 독안랑이 어이없다는 듯이 백산을 바라보았다. 무림삼천의 목표가 되었다

하는데도 돈타령만 하고 있다. 대형으로부터 대충 이야기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한가롭게 육포를 뜯어먹고 있는 광견조라는 저 친구들, 무욕인들이

 괴짜라고 하지만 이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나저나 혈마군의 전멸이라… 그 노인네들 똥줄이 타겠구먼.'

*     *     *

 "뭐라고? 혈마군이 전멸했단 말이냐, 삼백이 전부?"

 천마맹 검마전, 광뇌 궁유의 보고를 받던 구마(九魔)들의 얼굴이 경악스런

 표정으로 변했고 그들 중 실질적으로 수뇌인 검마 요대철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이십여 명 정도의 인원밖에 안 되는 자들에게 혈마군이 전멸했다는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천마맹의 정예가 천무

맹과의 전쟁도 아니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자들에게 전부 당했다는 것이

다.

 그러나 계속 드러나는 사실에 할말을 잃고 말았다. 광천뢰가 있고 천장지

옥마 갈태독과 남궁세가의 전대가주 그리고 중원 제일거부인 만금돈노 석숭

이 같은 일행으로 있다고 한다.

 그냥 넘길 사안이 절대 아니다.

 "남궁세가가 강호 활동을 시작했다면 허투루 넘길 일이 아니잖소."

 과거 반전파의 수장이었던 철마(鐵魔) 지청인(池靑燐) 이었다. 실상 그도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천마맹의 주도권 싸움. 권력 쟁탈전에서

 반대파인 검마 요대철이 전쟁을 주장했기에 어쩔 수 없이 반전을 외치며

세력을 규합했던 것인데 자신의 세력으로 있던 혈마, 요마, 비마가 검마 쪽

으로 노선을 바꾸어버리고 말았다.

 살아남기 위한 그들의 선택이었지만 철마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이 되었고

검마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임박하지 않았으면 벌써 죽었

을 터였다.

 오천맹(五天盟).

 구마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단체이다. 일개 세가의 연합에 의해 강호

무림 전체가 무릎을 꿇지 않았던가. 오대세가라 했지만 그 전력의 육 할이

남궁세가와 하북팽가였다.

 결국 무림이천은 연합할 수밖에 없었고, 정공(正攻)도 아닌 음모로 그들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강호상에서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오십

년 봉문(封門)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들의 힘이 강했기 때문이

었다.

 "남궁세가와 하북팽가 그리고 석숭의 자금 연계도 염두에 두어야 하겠군요

."

 혈마 소지악, 철마의 편에 섰다가 대세가 검마 쪽으로 기울자 재빠르게 노

선을 바꾼 자로 가진 세력이 검마 다음으로 강하다.

 "혈마 전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만약 그렇게 연결이 된다면 앞으로 오

년 내에 그들은 다시 강호 제일 세력으로 등극할 것입니다. 남궁세가가 일

년간 재 봉문 한다고 했으나 강호에 대한 약속도 아니고 자신들만의 약속입

니다."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는 봉문이란 말이다.

 거대한 단체를 이끌고 있는 수뇌들이라서 그런지 일반인들과 사고 방식 자

체가 달랐다.

 이제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벌써 전쟁이 끝나고 난 후의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여기 있는 누구도 자신들이 전쟁에 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

고 있다는 말이다. 하기야 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때문에 남궁세가의 처리 문제는 냉추렴만큼이나 중요한 사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으음!'

 과거 오십 년 전이 생각났는지 검마 요대철이 나직한 신음성을 발했다. 맹

주였던 패천신마 궁무독은 강호 패권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마인(魔人

)들이 편히 살 수 있는 곳에 만족했던 전형적인 무인일 뿐이었다. 자신들이

 오천맹의 제거를 주장했을 때도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맹주의 무관

심 속에 오천맹은 강호를 제패했고 구마는 서로 합작하여 맹주를 암살했다.

 해서 잡은 권력이었다. 내분만 없었다면 지금쯤 강호 무림은 자신들의 것

이 되었을 것이다.

 "방법이 있겠느냐?"

 같은 일행에 있는 자들 중 죽여야 할 자와 살려야 할 자들이 있다. 자칫

잘못하면 오십 년의 기다림이 허송세월이 될 수 있음이다.

 "이 전쟁이 확대가 되더라도 철목승과 구대문파의 손에 승패의 향방이 걸

려있다는 것을 여기계신 모든 분들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다. 좀더 실질적인 것을 말해야 될 것 아닌

가."

 검마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왔다. 드러내놓고 공개적으로 할 수도 없고

 비공개적으로 처리하자니 너무 제약이 많고 이래저래 진퇴양난에 빠져버리

고 말았다.

 "제가 내놓을 수 있는 대안은 그들의 전원 몰살 후 그 죄를 천무맹에 물어

 바로 전면전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조사할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전쟁을 확대해서 끝을

봐야한다는 것이다. 비록 천무맹과 천마맹 두 곳의 전쟁이라지만 강호의 민

심도 무시할 수는 없다. 강호 무림에서 절대자로 인정하지 않으면 설령 전

쟁에 승리한다 하더라도 껍데기만 가지게 될 것이고 끊임없이 저항에 시달

려야 한다.

 "그들을 제거할 때 천무맹의 이름으로 하면 더욱더 효과가 크겠지요."

 "만일 구화산에서 그들의 제거에 실패하면?"

 "그때는 산서성에서 그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천무맹의 영역인 하남으로

들어가면 저희도 손댈 수 없고 천무맹에서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천무맹의 안방으로 천마맹의 병력이 들어갈 수도 없고 또한 천무맹은 자신

들의 안방에서 그들이 죽기라도 한다면 그 모든 죄를 그쪽에서 뒤집어쓰게

되니 손을 댈 수가 없다는 말이다. 결국 백산 일행에게 가장 안전한 지역이

 바로 하남성(河南省)이라는 소리였다.

 "구화산은 혈마전주께서 가주셔야 되겠습니다."

 이미 파견할 인물은 사전에 선정해 두었는지 검마 요대철의 입에서 바로

혈마(血魔) 소지악(蘇智岳)이 호명되었다.

 "그런 사소한 일까지 구마전에서 처리해야 하오?"

 내키지 않음이다. 자신의 세력을 축소시키려는 의도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혈마군 삼백이 전부 당했소이다. 그리고 혈마전주 아니면 암사월을 설득

할 인물이 없습니다."

 "그건 광천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실력으로…."

 결코 혈마군이 실력이 부족해서 당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광천뢰라는 화탄 때문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최고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잣대로만 상대를 판단하기에 직접 마주치지 않으면 인정하려 들지 않

는다. 아니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 옳은 것이다.

 자신들이 수십 년에 걸쳐서 이룩해 놓았던 것이 그렇게 단순하게 무너지리

라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혈마를 비롯한 나머지 구마들도 다르지

않았다. 백산 일행이 자신들의 전쟁에 어떤 영향을 끼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맹주가 협조를 안 합니까?"

 "그렇다 하오. 천원으로 숨었소. 더 이상 맹주령을 얻기가 힘들어졌소이다

."

 혈마 소지악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로서도 더 이상 발을 뺄 수가 없다. 자

신의 팔다리를 잘라내야 하지만 갈 수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다.

 "알았소이다. 그럼 뒤는 누가 받칠 거요."

 자신들이 남궁지우 일행을 칠 때 천무맹의 병력을 처리할 세력을 말함이다

.

 일의 성패는 그들의 제거에도 있지만 천무맹의 시선을 얼마나 잘 차단하느

냐 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귀주의 흑사파(黑砂派)를 출동시킬 거요. 뒤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일이 잘되면 우환거리도 제거하고 천무맹의 내분도 유도할 수 있으니 좋

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공은 전부 혈마전주께 돌아가는 것이고요."

 흑사파, 귀주에 기반을 두고 있는 천마맹의 한 축으로 그 힘은 구파 일방

에 못지않은 거대 방파이다.

 검마 요대철이 굳이 혈마전 출병시키고자 하는 이유는 소지악이 예상한 대

로였다. 원활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두머리보다 더 강한 세력을 가

지고 있는 부하가 있으면 아니 된다.

 명령 체계가 바로 서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도 중요

하지만 자신의 최대 견제 세력이 될 수 있는 혈마 소지악의 세력을 줄일 필

요성이 절실했던 것이다. 해서 그의 제자인 암사월을 먼저 내 보냈고 그 다

음이 혈마였다.

 가서 임무를 완수해도 좋고 그들에게 죽어도 검마로서는 크게 손해날 것이

 없다. 혈마 정도는 아니지만 고수는 많이 있고 혈마의 잔여 병력이 자신에

게 소속이 될 터이니 어쩌면 되려 이익이라 할 수 있다. 혈마가 꼭 가야할

진정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전쟁은 시작되었다. 먼저 선수를 치는 쪽이 이기게 되는 전쟁이….'

 검마 요대철이 내심으로 중얼거렸다.

 귀주 흑사파의 출병은 이미 전쟁의 양상이 확전으로 치닫고 있다는 의미이

고,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도 드러났다. 애초에 냉추렴을 제거하려 했던

그들의 전술이 백산일행의 전원 제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     *     *

 "맹에서 지급으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천무맹의 안휘분타에 화인걸과 정철이 자리를 같이 하고 있는 가운데 화인

걸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천마맹에서 치는 것처럼 해서 전원을 제거하라는 지십니다. 구화산을 벗

어나기 전에 해결하라 하였습니다."

 "십천각에서 동의했다는 말입니까?"

 구소운이 있는 일행의 제거를 십천각에서 찬성했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정도 제일이라는 자신들의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서 선제공격도 서슴

지 않았던 그들이지만 자파의 제자를 제거하는 일에 대해서 찬성할 리가 없

다는 생각에서였다.

 "십천각에는 천마맹을 막는다고 했을 뿐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르게 처리해야 합니다. 저는 계속 천마맹을 막고 정 분타주가 그들

을 제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십천각 즉 구파 일방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 화인걸은 천마맹을 막는 역

할을 하고 그 사이에 정철을 시켜서 백산일행을 제거하도록 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구파일방이라기 보다는 개방이라 해야 옳다. 개방의 이목

을 피할 수 있느냐에 이번 작전의 성패가 달린 것이다.

 "천마맹의 추가인원이 도착하기 전에 서두르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각주님."

 천마맹과 천무맹 두 곳의 의도가 드러났다. 서로간에 상대편으로 변장하여

 백산 일행 전원을 제거하려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이익만 취할 수 있다면 그 외의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었

다. 강호 정의니 무림인의 사명이니 하는 것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오

직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염두에 두지 않

았다.

 "참, 오천맹의 잔당들은 전부 처리했습니까?"

 "예! 다시는 활동하지 못하게 해 주었습니다."

*     *     *

 "다 죽었군요."

 용지를 출발하여 발길을 재촉하고 있던 백산 일행의 앞에 이십여 구의 시

체가 여기저기에 쓰러져있었다. 황보세가의 마지막 후예인 황보천과 그의

일행이었다.

 허무한 종말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의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검(劒)조차

버린 채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자 했던 황보세가, 결국 구화산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곳에서 최후를 맞은 것이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가. 제대로 된 길을 찾았고 그 길을 가려고

마음먹은 그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그러나 의외로 황보천의 얼굴은 편안해보였다. 그동안 마음을 짓누르던 중

압감에서 벗어난 안도감인지 가문을 다시 세워야한다는 짐을 벗어서 인지는

 모르지만 힘들어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광견조원들이 전부 달려들어 황보세가 인원들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 자신들 때문에 이들이 다 죽었다 생각했는지 광견조의 표정도 그렇게 좋

아보이지는 않았다.

 "뱁새, 마지막에 네 녀석의 이름을 써라."

 이십 명을 한꺼번에 합장을 하고 난 후 거대한 바위 하나를 가져와서 석두

가 비문을 적고 마지막 비석을 만들어준 사람의 이름으로 뱁새의 이름을 쓰

라고 하고 있었다.

 이름 석자 쓰는 시험은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판국인데도 끝나지 않았다.

 "형님!"

 뱁새가 울상을 지으며 백산을 쳐다보았다. 석두가 먼저 써놓은 글 아래 이

름을 쓰려니 도무지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살우! 무덤 다시 파. 이 새끼도 같이 묻어."

 "네! 형님."

 "씁니다요. 쓰면 될 것 아뇨."

 소살우가 무덤 쪽을 향해 다가가자 기겁을 한 뱁새가 손을 휘휘 저으며 앞

으로 나섰다.

 '목인영(穆仁零).'

 온몸에 땀을 흘리며 써놓은 뱁새의 이름. 그러나 이곳에 있는 누구도 알아

보지 못했다. 광견조원들은 본인 이름 이외에 아는 글자가 없으니 당연히

못 알아보았고 나머지는 워낙 악필이었던 탓에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붉어진 뱁새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글이었지만 처음으로 써본 자신의 이름이었다. 모사보다

못쓰면 각오하라던 백산의 말도 무섭지 않았다. 까짓 것 이름이 생겼고 직

접 쓰기도 했는데 몇 대 맞는다 한들 그게 아픔이겠는가. 자신의 이름을 바

라보는 뱁새의 눈가에 물기가 비치고 있었다.

 퍼억!

 "야 새끼야 저것도 글이라 써놓고 혼자서 감동 먹냐?"

 뱁새의 그런 행동이 못 마땅했는지 소살우가 그의 뒤통수를 냅다 까며 소

리를 질렀다.

 "명필이다, 임마!"

 그도 알고 있다. 자신들이 아무리 노력해봐야 지금 뱁새만큼 밖에 쓰지 못

한다는 것을. 얼마나 잘 썼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마음으

로 썼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고맙수, 형님. 그래도 날 알아주는 새끼는 형님밖에 없소."

 "…?"

 "뭘 멍청하게 쳐다보오. 빨리 갑시다."

 여기저기서 광견조원들이 숨죽이며 웃는 듯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황당한 표정의 소살우가 뱁새의 뒤를 따랐다.

 일행이 떠나고 난 자리, '무인(武人)으로 살다 무인(武人)으로 죽다. 목인

영.'이라 쓰인 비석만이 그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일부러 황보세가라는 말을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말 괴짜들이구먼?"

 "저들만의 긴장 해소법이라오."

 서문천과 석숭이었다. 서로 상당한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친밀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아무리 강심장이라 하더라도 최악의 상황인데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 것

이다. 백산이 아니면 소살우가 또는 다른 광견조원들이 서로서로 팽팽한 그

들의 기분을 이완시켜 주고 있었다.

 '실전도 별로 없는 친구들이 대단하구먼… 하기야 살아온 세월이 곧 실전

과 다름없을 테니.'

 뱁새가 이름 쓰는 것을 보고 처음 써보는 글이라는 것과 쓸 수 있는 글이

그 세자밖에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이름 석자도 없이 살아온 친구들이라면 세상을 어떻게 살았는지 대충 짐작

할 수 있다. 하루 한 끼라도 밥이란 것을 먹을 수 있는 집에서 자랐다면 이

름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없었다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어쩌면 힘을 가지고 싸우고 있는 지금이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대형은 무슨 이유로 추렴이를 이들에게 두고 왔는지 모르겠네?

지금 상황을 예측하고 한 일인가… 어쩌면….'

*     *     *

 "그러니까 애꾸 양반의 말은 그 놈들이 변장을 해서 우릴 덮칠 거라 이거

요?"

 천태봉(天台峰).

 구화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웅장한 천태봉이 굽어보고 있는

계곡에서 백산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서문천의 입에서 나온 말들, 남궁세가와 팽가의 연결에 석숭의 자금까지

일행 중 누구하나 안전한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무림삼천의 표적이 되었다

고 한다.

 갈수록 태산이란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인지, 일행에 있는 모든 인물들이

표적이 되어버렸다.

 "석 대인, 얼마 줄 거요? 목숨을 구해주면."

 놀란 듯한 표정은 짓고 있으나 빙그레 웃으며 석숭을 쳐다보고 있는 모양

새가 별로 긴장하지도 않은 듯 했고, 이제는 석숭도 표적이 되었다는 것에

더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다.

 "내가 죽으면 자네가 맡긴 것도 다 사라지게 되네."

 석숭도 배짱인가, 백산이 맡긴 돈을 가지고 오히려 협박을 하고 있다. 이

제는 그도 백산이나 광견조와 같은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 이른바 물귀신

작전이다. 백산의 등살에 살아남기 위해서 자연스레 터득한 억척, 자신도

셀 수 없이 많은 재산에 황실 최고 권력기관인 금의위 영반까지, 부와 권력

을 모두 지니고 있는 그도 백산일행과 같이 다니다 보니 악착같아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만난 갈태독도 변했는데 석숭은 그나마 오래 간 것이라 볼

 수 있다.

 못난 놈이 잘난 사람을 따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잘난 사람이었던 석숭의

수준이 광견조원 정도로 낮아져버린 것이다. 이른바 문명의 퇴보가 이루어

져버렸다.

 "이 새끼가 왜 계속 쫓아다니는 거야?"

 자신이 죽으면 돈이 없어진다는 석숭의 말에 심술이 났는지, 얼핏 들으면

꼭 석숭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는 거친 욕설을 남기고 백산의 신형이 순식간

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윽! 헉!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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