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 - 40화 (41/84)

제1장 천오백 년의 비사(秘事)

 "으음!"

 온몸에 화상을 입었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피부위로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

는 알몸의 인물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처음 손가락에서부터 시작된 잔 떨림

이 곧이어 손목으로, 팔로 그리고 온몸으로 이어져 움찔거리는 경련이 조금

씩 번져나가고 있었다.

 "내가 살아난 것인가? 그 속에서…."

 백무천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심열화천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

었던 그가 무시무시한 지옥의 열기 속을 뚫고 살아난 것이다.

 "훗!"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누워있는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살아났다는 것이 더 중

요했다. 숨을 쉴 수 있다는 것, 심장의 박동소리가 들린다는 것, 그것만으

로도 희망이 있음이다.

 천천히 눈을 떴다. 강렬한 빛이 눈을 찔러오며 아릿한 고통이 밀려왔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 눈이 적응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픔이 아니었다.

 살아있음에 대한 환희였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웃음

이 터져나왔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온몸에서 샘솟듯 솟아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벗겨진 피부가 아우성치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즐거웠다.

 무섭도록 뜨거운 열기가 동굴 속 가득 몰아치고 있는데도 느끼지 못한 듯

천장에 박혀있는 야명주(夜明珠) 빛을 따라서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거대한 석실이었다. 중앙에 붉은 색의 빛나

는 돌로 만들어진 단이 있었고 그 옆에는 온화한 모습의 금의 중년인 한 사

람이 가부좌를 한 채 백무천을 노려보고 있었다. 고대 복장을 한 시신이었

다.

 "이런 곳에 시신이라… 이것을 두고 기연(奇緣)이라 하는가?"

 백무천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장소에서 살

아날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크! 하! 하! 하!"

 백무천의 입에서 통쾌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제는 완전히 살아났다는 표

정이었다. 자신이 있는 이곳에 죽은 시신이 있다는 것은 나가는 길이 존재

한다는 말이 아닌가. 아직 하늘이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흥분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백무천의 눈앞에 더욱더 놀라운 사실

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 사방을 살피던 중 한쪽 벽에

 써있는 수많은 글을 발견한 것이다.

 금신가(金神家)의 성지에 온 것을 환영한다, 연자(緣者)여! 나는 금신가의

 마지막 가주인 금장천(金丈天)이라 한다. 그대 연자는 금황파천신공(金黃

破天神功)을 익혔을 터, 오직 금황파천신공의 연성자만이 이곳에 들 수 있

다.

 백무천이 살아난 이유였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가 금황신공 으로

알고 있는 고금오천무 중의 금황파천신공 때문에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령극지가 있는 동굴에서 언급된 금신가란 말. 이들이 동굴 속으

로 진입한 후 흑의 복면인이 한 말 중에서도 금신가가 있었다. 무엇을 의미

하는 말인가.

 많은 궁금증이 있을 줄 안다. 우선 그대가 알아야 될 것이기에 이렇게 장

황하게 적는다.

 태고(太古)적부터 존재하는 다섯 개의 천역(天域)이 있었다. 세상을 지탱

하는 축이라 하여 반신오천역(半神五天域)라 불렸던 곳이다. 그리고 언제부

터인지는 모르지만 그 반신오천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가문들이 있었으니 그

들을 가리켜 반신오가(半神五家)라 칭했다.

 반신오천역 중 유형마지에서는 마신가(魔神家)라는 가문이, 화령극지에서

는 금신가(金神家)가, 빙극냉지에서는 수신가(水神家), 불연성지에서는 천

신가(天神家)가 그리고 사극혈지에서는 사신가(邪神家)가, 서로간의 견제와

 균형을 이루며 암중으로 세상을 조정해 왔다.

 반신오천역의 천력(天力)을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낸 그들의 힘은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인간이되 인간이 될 수 없었던 그들의 능력은 자신들을

인간이 아닌 신(神)의 자손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천한 인간들과 어울려 살

아가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오히려 가문 내에서 권력다툼을 일삼는 것에 더욱 몰두하며 살아가고 있었

던 것이다.

 그러던 신가의 균형을 깨트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신가 중 서열 사위였

던 천신가가 인간 세상에 나서면서 세속의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세상에 나선 그들은 신가의 엄청난 힘을

바탕으로 대륙의 패권을 잡으며 주(周)나라라는 국가를 건국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인간세상을 지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

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다른 신가들의 냉소와 조소 속에 인간

세상을 지배하던 천신가가 나머지 네 곳의 신가를 뒤로하고 오신가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신가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하층민이라 무시했던 노예들의 힘이었다. 지금껏 균형을 유지해 오

던 질서가 무너졌다.

 천신가의 세상일에 대한 관여는 신가들의 바로 아래 있던 중간 계층-그들

을 천가(天家)라 불렀다-이었던 천가의 힘을 강성하게 만들었고 마침내는

그들의 힘이 신가에 육박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연자도 이곳에 들어와 보았기에 알 수 있었겠지만 '사득'이란 말을 보았을

 것이다. 이곳 화령극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한다. 따라서

신가라고 하지만 천역의 힘을 완전하게 사용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천가들의 힘이 커지면서 중원을 지배하고 있던 주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게 되고 천신가는 본가가 있던 낙양(洛陽)으로 쫓겨나게 된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천신가의 위세에 눌려 숨죽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

리고 있던 나머지 네 곳의 신가들도 중원을 향해서 뛰어들게 되었고, 오대

신가 상호간 또는 오대신가와 각 천가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바로 사가(

史家)들에 의해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로 명명된 시대이다.

 신가들의 힘은 무서웠다. 수십 개의 나라가 멸망하고 또 생겨나고 엄청난

수의 백성들이 죽어나갔다.

 춘추전국시대 오백 년 동안 백여 개의 나라가 난립했으니 그들의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굳이 설명을 다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신가와 천가들의 전쟁에서 가장 피해가 극심했던 이들은 전쟁수행 당사자

들이 아닌 가장 하층계급으로, 노예였으며 그냥 가(家)라고 불린 이들이었

다. 즉, 신가와 천가인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을 그들은 그냥 가(家)라고 불

렀다.

 그 가(家)의 인원들은 나라가 바뀔 때마다 신가에 의해 동원되어 전쟁에서

 죽고 천가들에 의해서 전쟁터로 내몰리어 그렇게 죽어갔다.

 그런 가(家)들 중 전쟁에 동원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철

가(鐵家)였다.

 즉 병장기를 만들어주는 노예가문을 일컫는 말이다.

 전쟁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병기다. 그 병기를 만드는 이들을 전쟁터

로 보내서 죽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것은 나라가 바뀌어도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병기를 만들어 내는 힘이

바로 전쟁수행능력과 같이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갈수록 전쟁은 점점 치열해 졌고 능력이 거의 비슷했던 신가와 천

가들이 무기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더 강력한 무기를 얻기 위해서 그들의

힘을 병기에 주입하기를 원했고, 힘을 사용하는 비전과 함께 무기를 주문하

곤 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철가에 의해 발견된 철기는 자신들의 모든 힘

을 병기내부에 주입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각 가문의 더 많은 주요 비전들

이 철가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천한 노예들이었기에 자신들의 비전이 그들에게 들어간다 해도 크

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들 철가인은 신가나 천가인들에 의해 일정한 장

소에서 사육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단 한 명의 노예에게 비전

을 주고 병기가 만들어졌을 때는 살인멸구를 해서 입을 막았기에 자신들의

비전 유출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천한 철가인을 다루는 방법이었고 춘추전국시대 오백 년 동안 병기

를 얻어온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열심히 일을 해준 대가를 죽음으로 받은 철

가들이 그들만의 한(恨)을 키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수백 년의 전쟁을 통해서 신가들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거의 소진했으

나 이에 비해 천가들은 노예들이었던 가(家)와 연합을 시도하여 그 들의 힘

을 점점 키워나갔다.

 다섯 신가의 선택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오신가의 연합. 우리 금신가에

의해서 세워졌던 진(秦)나라에 모든 신가의 잔여 인원들이 모여들었다.

 멸망하지 않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그들이 합친 힘은 무서웠

다. 순식간에 대륙을 통일했고 역사상 처음으로 진(秦)이라는 통일제국을

건립한 것이다.

 오백 년 동안의 전쟁의 끝이었고 춘추전국시대의 종말이었다.

 그러나 오신가의 연합체인 진 제국은 건국 초기부터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

고 있었다. 이미 권력다툼에 이골 난 신가의 후예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암

투를 벌이는 것이 그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거의 멸망해가던 천가의 잔당

들이 대륙 밖에서 저 야만족인 흉노와 연합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

다는 것이었다.

 진 제국에서는 그들을 막기 위해서 장성을 쌓아야 했다. 또한 그들을 토벌

하기 위한 또 한 번의 연합이 필요했다.

 천가의 잔당을 치기 위해 선발된 오신가의 후예들, 그들이 병기를 만들기

위해서 철가(鐵家)중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혈가(血家)를 방문하게 된다.

 과거와 다름없이 병기를 주문했고 그것들이 완성되었을 때, 지금까지 하던

 방식 그대로 그들을 죽여서 입을 막고자 했던 오신가의 후예들 중, 넷이

죽고 단 한 명만이 도망을 쳐 제국의 수도인 함양에 도착했다.

 진 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했던 재앙의 시작이었다.

 오신가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혈가에서 죽은 그들은 오신가의 적통 후

계자들이었다. 각 가문의 비전을 거의 익히고 있었고 반신오천역에 갈 절차

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죽어서 시체조차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하찮은 노예라고 생각했던 그들을 바로 치지를 못했다. 오백 년의

세월동안 한을 키워왔던 철가들의 힘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오신가의 병기를 만들기 위해서 전했던 모든 비공(秘功)들이 그들의 각 가

(家)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노예라고 무시했던 철가인들이 진 제국의 존망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성장

에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들을 지키는 것 이외에는 그 힘

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신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식들의 원수라 해서 혈가를 바로 제

거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수천 철가의 수장이었던 혈가를 명분 없이 친

다면 반란이 일어날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강호에 있는 모든 서책을 태우고 이에 반하는 유생

들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사가들이 말하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바로 그것이었다.

 분서갱유는 오직 한 노예가문, 감히 신가를 능멸한 천한 노예가문의 수장

이었던 혈가를 제거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었다. 결국 그들

은 성공했다. 혈가에 있던 자신들의 모든 비전을 찾아내어 소각시켰고, 혈

가와 관련된 모든 인물들을 잡아들였다.

 그 다음에 오신가에서 행한 방법은 그들의 생매장이었다. 다시는 혈가 같

은 노예가가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벌백계의 처벌을 단행한 것이었다.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고 중원 대륙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오신가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진정한 혈가의 후예가 존재하고 있

었다는 것을.

 분서갱유가 있던 그 다음 해부터 철가의 오백 년 한풀이가 시작되었다. 그

것은 혈가의 한풀이만이 아니었다. 오백 년의 세월동안 신가와 천가에 의해

서 당했던 노예들의 반란이었고 민초들의 분노였다.

 한풀이의 시작은 사신가(邪神家)의 본가가 있던 태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유리 같은 새하얀 눈을 가진 혈가의 후예는 열두 개의 비도를 휘두르며 사

신가의 본가에 있던 모든 인물들을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고, 힘의 근원

이었던 사극혈지마저 완전하게 파괴해버렸다.

 혈가 후예의 힘은 무서웠다. 각 오신가의 본가에는 천역에 들어서 신가의

모든 힘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들이 한두 명씩 있었다. 그런데 그들까지도

모두 도륙(屠戮)당한 것이다.

 세인들은 그를 가리켜 파멸안(破滅眼)이라 불렀고, 그가 휘두르던 열두 개

의 비도, 손목과 발목에 있던 그것을 광혈지옥비(狂血地獄匕)라 불렀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지만 놀랍게도 광혈지옥비는 춘추전국시대에 가장 강

했던 오신가와 육대천가의 힘이었던 천지간의 기운을 몸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천기였던 것이다. 그것은 혈가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온 중

원 대륙 전체에 있던 수많은 철가에서 수백 년 동안 한을 곱씹으며 목숨을

걸고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비도 하나에 자신들의 모든 한과 분노를 담아서 천비(天匕)

라 칭했다 한다.

 그 무엇으로도 자를 수 없고 파괴할 수도 없는, 철가들의 오백 년 한이 만

들어낸 원한과 집념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신가들의 터전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혈가의 후예는 잔인했다.

 마치 자신의 가족이 당했던 것을 그대로 복수라도 하듯 중원곳곳에 흩어져

있던 신가들의 후예들을 하나씩 찾아서 죽였다.

 그 누구도 그를 막아낼 수 없었다.

 오신가는 방법을 찾아야했다. 진 제국이 문제가 아니었다. 천역의 힘으로

도 막을 수 없는 파멸안을 상대하기 위해 불사의 성약을 찾기 시작했다. 온

 세상으로 신하들을 내보냈다. 죽지 않는 힘이 있어야 파멸안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놈이 더 빨랐다.

 처음 백색지안으로 시작했던 파멸안의 눈이 흑색지안을 거쳐 진 제국의 수

도에 도착했을 때는 붉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붉은 눈동자와 똑같은 열두 개의 붉은 비도.

 분서갱유라는 사건을 일으켜 혈가를 제거한지 정확하게 육 년 만에 오신가

의 멸망이 있었다. 진 제국의 기둥이었던 오신가가 사라지자 최초의 통일

제국이었던 진 나라의 멸망이 왔다.

 오백 년 동안 싸웠고, 오신가가 하나가 되어 중원을 차지한지 십 사 년 만

의 일이었다.

 세상은 신가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신가

와 천가의 비전들이 수없이 세상으로 퍼져나갔고 노예라 천시했던 가(家)들

이 그것을 익히고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의 자식이라 생각했던 신가나 천가인들도 인간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지금 이것을 믿으라는 소리인가? 과거의 모든 것이 오신가라는 가문들 전

쟁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적혀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너무나 엄청난 비사가 아닐 수 없었다. 세상을

지배했던 지배계급이 노예 한 번 잘못 다룬 것으로 해서 멸망했다고 하고

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접해서인지 아니면 지금에서야 피곤함을 느꼈는지 백무

천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잠시 벽에서 물러났다.

 "살아남은 자는 나 혼잔가? 그런데 누가 이런 짓을 했는가…."

 지금에서야 그가 처했던 상황이 생각났는지 가만히 동굴에서의 일을 생각

해 보았다. 벽에는 아직도 많은 내용이 남아있었지만 일단 정리를 하고 싶

었다.

 치밀한 음모였다. 생각보다 많은 무인들이 온 것 같지는 않았으나 이곳에

든 무인들 거의가 다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무엇을 노리고 이런 짓을 저질렀

느냐 하는 것이다. 자신이나 사진악 그리고 나머지 무림인들도 나름대로 중

요한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현 무림에 어떤 영향을 줄 정도로 큰 위치를 차

지하고 있는 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미래를 노리고 자신들을 제거하려 했다

는 것은 더욱 더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내가 살아났으니 완전하게 성공한 것은 아니지… 사진악은 어찌되

었는지 모르겠군. 어쩌면 나처럼 살았을지도…."

 자신과 일장을 교환한 후에 도선금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 뒤로 날아가면

서 흘끗 본 사진악도 다른 동굴로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백무천이 예상하고 있던 것처럼 사진악도 살아남았음은 물론이고 또 다른

기연과 조우하고 있었다.

 백무천과는 달리 비교적 깨끗한 행색의 사진악이 자신 앞에 있는 벽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연자여, 나는 벽력천가(霹靂天家) 십대 가주인 벽력천왕(霹靂天王) 뇌음(

雷陰)이라 한다.

 … 중략 ….

 자신들은 신이라 생각했지만 그들도 결국 인간이었다. 파멸안이고 학살자

라 칭해진 혈가의 후예를 피해서 도망을 쳤던 것이다. 그러나 혈가의 후예

는 집요했다. 오신가가 혈가를 칠 때 그랬듯이 그도 오신가와 관련이 있던

모든 인물들을 다 제거하고 다녔다.

 금신가의 가신이었던 우리 벽력천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붉은 혈안(

血眼)의 상태로 우리 벽력천가를 방문했을 때 파멸안을 막아선 이가 있었다

.

 바로 가주님의 딸이었던 뇌화황(雷火凰) 조사님 이셨다. 두 분은 서로 사

랑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때의 가주님께서 천한 노예가문이라며 혈가의

후예를 내치고 뇌화황 조사님을 천가의 금역인 벽력동(霹靂洞)에 가두게 되

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는지 뇌화황 조사님이 그곳을 뛰쳐나와 파멸안의 앞을 막

은 것이다.

 전설의 끝이었다. 파멸안, 백색지안, 흑색지안, 광혈지안. 무려 오년 간을

, 오신가와 모든 천가인들을 도륙하고 다녔던 그가 뇌화황 그분과 함께 벽

력동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후인들은 죽음밖에 없었던 대륙에 한줄기 빛이 되었다며 뇌화황 그분을 광

명안(光明眼)이라 불렀다.

 그리고 혈가의 후예가 다시 나타난 것은 두 분이 벽력동으로 드신 지 십

년 후였다.

 천가의 비전을 익힌 무인들도 빠져나오기 힘든 벽력동을 무공도 없이 빠져

나왔던 뇌화황 그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육대 조사님 앞에 주

고 가신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손에 쥐어져있는 이 화황척(火凰尺)이다. 자신이 사랑했

던 분의 이름을 딴 이 화황척은 겉보기에는 평범하게 보이지만 내공을 운용

하게 되면 엄청난 힘을 내게 된다. 가히 신가들의 무공에 필적하는 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기(神器)가 있었지만 그것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마

도 혈가의 후예였던 그 분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상하게 했던 죄를

이것으로 물으셨던 것 같았다. 우리 천가들의 염원이었던 신가를 넘어서는

것,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 신기의 모든 힘을 뽑아낼 수 있는 무공이

 없었다. 우리 벽력천가의 무공으로는 오 할의 힘도 뽑아낼 수 없었던 것이

다.

 그때부터 벽련천가는 이 화황척을 사용할 수 있는 비법을 찾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기를 이백 년 결국 나의 대에 이르러서 이곳 화령극지까

지 찾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화령극지는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었다. 금신가의 후예에게만

허락되어있었다.

 극도의 실망감과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가려던 길에 이곳을 발견하게 되었

다. 화령극지에 들기 위해 이곳을 찾았던 금신가의 후예들, 그들 중 두려움

에 의해 힘의 원천에 들지 못하고 좌절했던 자들이 이곳에 자신들의 비기를

 남기고 죽어간 것이다. 치욕스러운 마음에 돌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금신가의 본신 무공들이었다. 나는 기뻤다. 벽력천가의 선조 들의 염

원이었던 신가를 능가하는 힘, 그 힘을 가질 수 있는 단서를 이곳에서 찾은

 것이다. 비록 그것이 신가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그것을 익히고 연구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완성하고야 말았다. 금신가의 무공을 바탕으로 그들의 화룡파천비

공(火龍破天秘功)에 절대 뒤지지 않는 무공을 창안하고 말았다.

 '벽력혼원황(霹靂混元荒)' 이 화황척으로 펼칠 수 있는 일초의 무공이다.

 익혀라.

 그리고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신가의 힘을 꺾어주기를 부탁한다.

 벽력천황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끝이 났고 그 아래로는 무공의 구결인지

빽빽한 글자가 적혀있었다.

 사진악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유언을 거짓으로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년 전의 이야기다. 자신의 선조들의 일대기를

이곳에 기록해 둔 것이다.

 "어르신 소망대로 해 보이겠습니다. 기필코 익혀서 신가라는 곳이 아직 남

아있다면 이겨 보이겠습니다."

 사진악이 무공연마를 시작했고 그보다 백장 아래 있는 백무천은 새로운 사

실을 접하고 있었다.

 세인들은 오신가를 멸망시킨 혈가를 신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아니 신가

가 과거에 노예라 천시하며 가(家)라 했던 그들과 같이 취급된 것이다. 그

리고 혈가(血家)의 탄생지였던 저 남만 오지의 뇌산이란 곳을 뇌극철지(雷

極鐵地)라 칭했으나 그곳은 하늘의 힘이니 하는 것이 없다. 오직 철가의 수

장이었던 혈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일 뿐이었다.

 이 땅 위에 민초(民草)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뇌극철지가 될 수 있

음이다. 혈가의 후예가 사정을 두었는지 광명안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오

신가의 후예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반신오천역이 사라진 신가는 더 이상 신도 아니었고 지배자도 아니

었다. 그때부터 새로운 힘을 만들기 위한 오욕의 세월이었다. 무려 이백 년

 동안 과거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 온 힘을 다 쏟았다.

 각 가문에 남아있던 무공기서를 바탕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마침내

천역의 힘이 없이도 인간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천무(天武)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천신가의 천검무극류, 마신가의 천마심공, 사신가의 사사지옥혈공, 수신가

의 빙천수라마공, 금신가의 금황파천신공이 그것이었다.

 서열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신가 중 서열 사위였던 천신가가

일위가 된 것이다.

 반신오천역의 상실은 오신가의 근본을 흔들어버리는 것이었지만 그 중 가

장 타격이 컸던 곳은 수신가와 우리 금신가였다. 나머지 삼신가의 무공은

인간의 내면에 바탕을 두고 천역의 힘을 흡수하는 무공이었고 수신가나 금

신가는 오직 천역의 기운만을 이용해서 익히는 무공이었다.

 천역의 힘이 없어진 금신가와 수신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우

리 금신가가 선택한 것은 구룡천가(九龍天家)의 구룡신공을 얻는 것이었다.

 오대신가 중 가장 재물이 많았기에 금신가가 되었던 우리는 모든 것을 그

들에게 주었고 구룡천가의 석씨는 중원 최대의 부호가 되었다.

 연자는 우습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다 버릴 정도로 힘이 중요

한 것이었냐고. 그러나 그것은 힘을 가져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금신가의 상대는 사대신가 밖에 없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하찮

은 것일 뿐이다.

 사대신가와 동일선상에 설 수 있는 것은 힘(力)이었지 재산이 아니기 때문

이다.

 구룡신공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만들어낸 무공이 금황파천신공이다.

 그러나 그것도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극화(極火)의 기운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극화의 기운에 견디고 흡수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언

젠가 후예가 이곳을 찾으리라는 마지막 안배였다.

 금황파천신공을 완성한 우리들이 한 일은 이곳을 찾는 일이었다. 무공을

완성하기는 했지만 세상의 전면에는 나설 수가 없었다. 바로 혈가의 후예

때문이었다. 세상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혈가의 후예, 그들은 어디에도 존

재할 수 있다. 가장 하층민이었던 철가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이곳을 찾아내고 말았다. 비록 오백 년 전과 많은 것이 변해

있었지만 이곳에 들어오는 것을 대물림했던 우리는 이곳에 도착하고 말았다

.

 그러나 동굴입구에 있던 사득(捨得)이란 말을 해독하지 못하면 이곳에 들

지 못한다. 오직 금황파천신공을 익힌 자가 목숨을 버릴 각오가 있어야하고

 자신의 몸을 중요하게 여길 줄 아는 자만이 이곳에 도착할 수 있다.

 강호의 비사가 하나씩 밝혀지고 있었다. 고금오천무가 만들어진 배경이 나

왔고 석씨 세가가 중원의 대 부호가 되었던 비밀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

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대가 이 글을 보고 있는 그 시기에도 오신가의 후예는 존재하고 있으리

라 생각한다.

 그대에게 크게 원하는 것은 없다. 다만 한 가지, 금신가의 무공이 다시 한

번 대륙을 질타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금신가의 마지막 후예인 금황(金皇)이 적는다.

 금황이란 인물의 긴 서술이 끝이 났고 그 아래쪽에는 무공 구결이 있었다.

 또한 금신가의 마지막 후예라 했다. 결국 자신들을 신이라고 까지 칭했던

금신가는 세월 속에 그렇게 사라져 간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선배님. 아무리 신의 자손이니 어쩌니

해도 당신들도 인간일 뿐입니다. 유한한 삶을 가진 인간. 그렇기에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군림이란 말을 생각하고 있는 백무천이었다. 천검무극류보다 더 강한 것을

 얻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 과거 신의 가문이라 했던 오신가 중 금신

가의 최후 무공이 적혀있었다.

 화룡파천비공(火龍破天秘功),

 제(第) 일공(一功) 화룡지천무(火龍地天舞).

 제(第) 이공(二功) 화룡사멸무(火龍死滅舞).

 제(第) 삼공(三功) 화룡천멸무(火龍天滅舞).

 "이것이 인간의 무공이란 말인가!"

 백무천의 입에서 나온 탄성소리였다. 무수히 많은 무공을 알고 있었고 또

익히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지금 눈앞에 있는 것만 못했다.

 심지어 그가 익히고 있는 고금오천무인 금황파천신공, 그것을 십이 성 대

성했을 때가 화룡파천비공의 제 일공인 화룡지천무의 위력과 비슷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있는 한마디,

 나는 자신한다. 화룡천멸무에 필적하는 무공이 없으리라는 것을. 단 인간

의 심성을 가지고 있다면 대성할 수 없다. 명심하라 연자여, 신이라 생각하

는 자만이 화룡파천비공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을….

 가문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었고 믿음이었다. 그것은 백무천의 생각과도

일치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화룡파천비공은 신무(神武)였다. 이런 신의 무공을

 꺾을 수 있는 무공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오백 년 전에 한 번 나타나고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무공이 다시 세상에 나올 리도 없는 것이고 설사 나타난다 하더라도 질 리

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사득', 목숨을 버리되 시신마저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그런 자 만이

화룡파천비공을 얻을 수 있다고 했던 금황의 말처럼 백무천은 이곳에서 살

아났던 것이다.

 '할아버지, 저의 선택이 또 옳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눈빛으로 하

셨던, 결코 짐승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하셨던 그 말씀. 저도 할

아버지와 같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익히겠습니다. 모두 완전하게 익히겠습니다."

 백무천의 희열에 찬 외침이 터져나왔다. 죽음의 나락에서 살아났고 새로운

 힘을 얻었다.

 최악의 조건에서 죽음을 선택했고 그 속에서 생존했던 것이다.

 천선비도를 타고 왔던 두 사람이 이곳 화령극지에서 천고의 기연을 만났고

 그 기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련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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