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새로운 꿈
하하하! 호호호!
나지막한 구릉에서 세 명의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야 백산, 우리 다시 만날 때는 더 멋진 사람이 되어서 만나자. 아마 그때
쯤이면 나도 령이와 결혼해서 살고 있을지도 몰라."
"표운 너, 령이 좋아하는구나?"
"남자는 말이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어야해. 그
래서 나는 힘을 기를 거야. 그래야 령이의 병도 고치고… 그러니 너도 약속
지켜라. 반드시 꿈을 이루겠다고…."
"으으윽!"
우뢰봉에 있는 조그마한 동굴 속.
청아한 약 내음이 가득 차 있는 연못 위로 고개만 내밀고 있는 인영의 입
에서 나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왼쪽 뺨으로부터 오른쪽 귀 아랫부분까지 길게 나있는 상처, 백호의 공격
에 당했던 백산이었다.
'내가 살아난 것인가. 큭! 질긴 목숨이군.'
모진 것이 인간의 목숨인지 마지막 함정이었던 화약을 터뜨리며 백호와 같
이 폭사하고자 했던 자신을 누군가가 구한 모양이었다.
"깨어난 게냐? 생각보다 빠르구나."
햇빛을 등지고 건장한 체격의 인물이 동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노인
이었다.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연못 속으로 던져넣으며 백산을 보며
하는 말이었다.
비쳐드는 햇살에 드러나는 노인의 얼굴은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 가득 덮고 있는 거미줄 같은 흉터는
노인의 인생여정이 어떠했는지를 가히 짐작하게끔 해주었다.
흉터가 주름살로 변해버린 노인의 얼굴에서 그나마 정상적인 것은 눈뿐이
었지만 그것마저도 살아있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과거에도 저런 눈을 본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문파에서 거절당했을 때 백산을 향해 돌아서던 아버지
가 처음 지어보이던, 지금도 백산의 뇌리에 화인처럼 박혀있는 아버지의 눈
빛, 더 이상 꿈을 꾸지 못하는 자의 눈빛이었고 희망을 버린 눈빛이었다.
"백산이라고 하더구나. 무슨 연유로 그 무서운 놈에게 덤볐느냐?"
이 노인은 백산에 대해 거의 모른다. 다만 의동생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뿐
이다. 개인적인 볼일로 외지에 나갔다가 동생이 있는 대장간에 들렀는데 그
곳에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괜찮은 애라며 한번 키워보라고 했던 백산이란 녀석이 호랑이를 잡는다고
장비를 만들어 갔는데 그게 엄청난 것들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화약까지 사갔다는 말을 듣고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잡으려 하
는 호랑이가 어느 놈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약까지 준비했다고
하지만 그놈은 사냥꾼이 잡을 수 있는 그런 일반 맹수가 아니었다.
마령호(魔靈虎).
아마 네발 달린 짐승 중에서 가장 무서운 놈일 것이다.
백호는 백호인데 일반 백호와는 다르다.
보통 백호라 하면 백색의 털을 가지고 있지만 갈색의 줄무늬가 남아있다.
그런 놈이 우연히 어떤 영약이나 영물을 섭취하게 되면 그때부터 줄무늬가
없어지며 모든 털이 백색으로 변하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천 년이 걸린
다 했고, 크기는 일반 호랑이의 두 배 정도 된다고 했다.
거의 도검불침에 영성까지 겸비한, 그야말로 백수의 제왕이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그 백호를 마령호(魔靈虎)라 부른다 했다.
믿을 수는 없지만 중원에서 보기 힘든 괴수들에 대한 것을 적어놓은 괴이
지(怪異誌)에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놈은 일반 호랑이의 두 배가 아니라
거의 열 배 이상의 크기였다. 얼마나 살았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폭발음 소리를 듣고 운무곡에 도착한 그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눈과 온몸에
창살이 박힌 채 붉은 피를 흘리며 멀어져 가는 마령호의 모습이었다.
그 놀라운 광경에 사냥꾼 부자를 구하러왔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절뚝거
리며 묵림을 향해 가고 있는 놈만 쳐다보고 있었다.
무너진 바위틈에서 새어나오는 미약한 신음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는 이 무
모한 부자를 구하기 위해서 바위를 치우다가 또 한번 경악하고 말았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 의동생이 말했던 어린애 하나만 온몸이 부서진 채 피
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해서 주변을 찾아보았으나 백
산이라는 애밖에 없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제 열다섯 밖에 안 된 어린애가 그런 놈을 잡겠다
고 나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같이 자폭까지 하려든 것을 보면 단순한 호승심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의동생의 말이 좀 되바라지기는 했어도 성격은 무섭도록 치밀하다
고 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싶었습니다."
뒤이어 백산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연들,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와 자신의
꿈, 그 꿈의 사라짐 등등 그것은 열다섯 살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인생이었다.
세상이 무엇인지 모르고 한창 뛰어놀아야 할 아이가 이미 어른이 되어 있
었다. 가진 자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운 곳이지만 없는 자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벌써 깨우치고 있었다.
'이것도 인연인가….'
노인의 외유, 제자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제자가 아닌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은인의 진전을 이어주기 위해서 천하를 헤매고 다녔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헛걸음만 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하지만 신분도 정확하지 않은 자에게 누가 자식을
맡기려 하겠는가.
"백산아, 나와 같이 다시 꿈을 꾸어보지 않겠느냐? 새로운 꿈을…."
인연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외유에서 돌아오자마자 녀석에 관한 소식을 들
었고, 다행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자신의 꿈은 이룰 수 없다고 하지만
이 어린아이의 꿈은 이루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꿈을 이루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기회를 주고 싶다는 것이 더 옳은 말
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인생이 무엇이던가.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인간들이 아니던가.
"그 꿈속에 우막(雨膜)을 만들 정도의 힘이 있습니까?"
무인에 대한 백산의 기준이다. 고향 마을에 혈랑을 끌고 왔던 무림인들이
보였던 경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면 시작할 필요도 없음이다.
그들을 잡는 것이 꿈이지 무공을 익히는 것이 꿈은 아니다. 도달하지 못할
꿈이라면 아예 꾸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을 그동안 수차례의 경험을 통해
서 알고 있다.
"너의 몸속에 있는 그 기운과 굳건한 의지만 있으면 가능하다."
백산에 대해 노인이 또 한 번 놀란 것은 치료할 때 감지된, 그의 몸속에
숨어있는 거대한 잠력이었다.
내공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자신에 필적할 정도의 거대한 힘. 두 부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심산유곡을 헤매면서 복용했던 영약의 기운이 그대로 몸속에 남아 있었다.
별것 아니라 했던 호흡법 때문이었으리라. 보통 일반인이 영약을 복용하게
되면 거의가 외부로 배출되어버리고 체내에는 아주 극소량밖에 남지 않는
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무병장수하게 된다.
그 약 기운을 한 방울도 버리지 않고 몸속에 저장하고 있는 백산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별것 아닌 심법의 글 이외에는 아
는 글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글은 무공을 익힐 때 병행해서 깨우치려 했었다 한다. 백산의 아버지도 글
을 몰랐고 정착해서 살아본 적이 없으니 배울 시간이 없었다는 것도 이유
중의 한 가지였다.
"그럼 새로운 꿈을 꿔보겠습니다."
미소를 짓고 있다. 얼굴에 난 상처가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인데도 웃고 있
었다.
"내가 개세마두라 해도 상관이 없느냐?"
"큭! 그게 마두 얼굴이지 사람 얼굴입니까?"
개세마두(蓋世魔頭). 스스로 마두라 칭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마두가 될
수 없음이다. 가장 순순한 척, 남을 생각하는 척하는 사람 중에 더 나쁜 자
들이 많은 세상이었다. 백산이 들렀던 모든 문파들이 그랬다.
이제는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약간씩
돌아오고 있었다. 악인이면 어떻고 마두면 어떤가, 자신에게 꿈을 꾸게 해
줄 사람이 생겼다.
"그러는 네놈 얼굴은 좋은 줄 아느냐?"
이번에는 팽무도도 지지 않는다. 자신의 얼굴에 대고 사람 얼굴이 아니라
고 하는 놈은 처음 보았다. 상대방에게 마음의 상처가 될까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써주는 것이 그 사
람을 더 힘들게 한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상대방의 약점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것을 약점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잘생긴 사람에게 이런 흉터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모르시는군요."
"이놈아, 아침에 먹은 것 넘어올라."
흉터로 인해 분명치는 않지만 팽무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오르
는 듯 보였다.
"좋다. 잘 기억하거라. 이 사부의 이름은 팽무도(彭武刀)다."
과거의 일이 생각나는 것인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데도 약간 주저하는
표정이었다.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 팽무도(彭武刀). 백산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이름이
지만 검을 차고 있는 무림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저주스러운 이름이고
입에 담기도 꺼리는 이름이 팽무도란 석자다.
'아버지, 새로운 꿈의 시작입니다. 욕심이 아닌 진정한 꿈 말입니다.'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백산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팽무도.
그도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인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흉터를 가지고 있는 팽무도라는 노인과 하
나의 흉터로 얼굴을 버린 어린애가 꿈을 꾸기 위해서 만났다.
새로운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