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아들의 꿈
묵림.
아버지의 흔적을 쫓다가 다다른 곳이다. 우뢰봉(雨雷峰)과 함께 뇌산에 있
는 두 군데 금역(禁域) 중의 하나로 들어간 사람 중에 살아나온 자가 없다
하여 불귀역(不歸域)이라 불린다.
묵림에 도착한 백산의 손에 못 보던 것이 들려있었다. 아버지를 추랑객(追
狼客)으로 불리게 했던 철궁(鐵弓)이었다.
이곳에서 십여 리 떨어진 곳에 버려져있던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철궁 주
변에 나있던 희미한 흔적들은 내리는 비에 거의 지워지기는 했으나 분명 인
간의 발자국이었다. 그것도 두 명 이상의 발자국.
그 흔적을 더듬어 도달한 곳이 이곳이다.
다행히 바람은 역풍, 맞바람으로 진입하게 될 것이므로 맹수의 습격은 걱
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흔한 산새들 울음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침
묵의 숲 묵림은 침입하고자 하는 인간의 발걸음을 거부하는 것인지 스산한
바람만을 내보내고 있다.
이런 걸 기시감(旣視感)이라 하던가,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백산의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간밤의 꿈도 그렇고 불행한 현실에 직면할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사냥꾼의 운명을 타고난 우리는 집에서 죽는 경우가 거의 없다. 산에서
죽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죽음이 두려워서 산을 오르지 못한다
는 것은 집 안에서 생을 마감하는 많은 양민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기를 꺼
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사냥꾼에게 산은 집이다."
더 이상 꿈꾸기를 포기한 아버지가 본격적인 사냥술을 가르치면서 한 말이
었다.
'그래, 집에 들어가는데 용기 같은 것은 필요 없어, 자연스럽게 들어가면
된다.'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백산이 흔적을 쫓아서 묵림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수북하게 쌓인 낙엽들 속에서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차분하게 정신을 집중하며 조금씩 전진했다.
"헉!"
거의 한 시진 정도 전진했을까. 눈앞에 드러난 흔적에 절로 신음소리가 터
져 나왔다. 거대한 발자국 네 개, 축축한 바닥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발자국
은 난생 처음 보는 크기였다.
호랑이 발자국이었다.
저 정도의 발자국이라면 거의 집채만 한 크기의 호랑이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옆에 떨어져있는 화살을 담았던 전통과 신발 한 짝, 주변에 흩어져있
는 희미한 핏자국.
아버지의 물건이었다. 불안감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아도 아버지가 돌봐주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도 꿈이 되어버렸다. 결코 이루지 못할 꿈도 아니었는데, 특별
히 준비할 것도 없는 꿈이었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모두가 준비되어 있는
그런 꿈이었는데, 그것조차 잡지 못하고 또다시 허공으로 날려버리고 말았
다.
"큭! 누가 부부 아니랄까봐!"
아버지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다. 이럴 땐 눈물이
앞을 가려야 하는데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로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저의 꿈만 남았군요.'
분노해야 되는데, 세상을 향해서 소리쳐야 하는데 가슴속이 더 차가워지고
있는 자신이 싫어진다. 아버지가 각 문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던 것이
자신의 입문을 위한 것임을 알았을 때도 분노하지 못했다.
가진 자들은 결코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가 그랬듯이 백산도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인
전통과 신발을 챙겨들고 그 자리를 떴다.
땅을 파고 있다.
멀리 운무곡(雲霧谷)이라는 안개 낀 계곡이 보이는 곳에서 온몸에 땀을 흘
리며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고 있다. 구덩이 주변에는 어디서 구입했는지 거
의 십 척 크기의 무쇠로 된 창살들이 수십 개가 뒹굴고 있다.
'아버지, 저의 꿈은 별것 아닙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에 침묵하고
계셨지만 저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원수를 갚겠습니다. 저에게는 지켜야할
자식이 없으니까요….'
나이가 들면서 백산도 알 수 있었다. 그때 아버지께서 어머니와 같이 죽지
못한 이유를… 어머니가 가장 사랑했던 자신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기정사실화되고 백산은 치밀한 조사를 했다. 아버지의 죽
음은 단순한 호랑이의 공격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옮겨지기 전에 이미 살해되었던 것이다.
무림인의 짓이었다. 한 호흡에 이십여 발의 화살을 날릴 수 있는 아버지를
해칠 수 있는 자들은 무림인밖에 없다.
이곳 뇌룡현은 떠나기 전에 말씀하셨던 단서와 관련이 있는 것임에 틀림없
을 것이다. 그러나 무림인에 대해서는 자신이 어찌해볼 방법이 없다. 자신
의 영역 밖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유골을 찾기로 했다.
짐승의 뱃속에 두고 싶지가 않았다.
백호(白虎).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던 중 묵림에 살고 있는 놈을 보았을 때의 첫 느낌
은 두려움과 공포였다. 오금이 저려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온몸이 은색 털로 덮여있는, 집채만 한 크기의 호랑이… 얼마나 오래 살았
는지 모르지만 묵림이 금역인 이유가 그놈 때문이었다.
한 번의 도약으로 십여 장 정도를 뛰어오르는 놈은 산중제왕이 아니라 하
늘의 천신(天神)이었다. 그러나 해야한다.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꿈
이었기에.
그날부터 놈을 잡을 방법을 생각했다.
완전히 꿈을 버리지 못하셨는지 아버지는 많은 돈을 모아두셨다. 결국 그
돈은 아버지의 꿈 대신 자식의 꿈을 위해 쓰였다.
뇌룡현(雷龍縣).
국경지대이다 보니 밀무역이 성행하는 곳이다. 암시장도 있어서 그곳에 가
면 없는 것이 없다. 단지 돈이 문제일 뿐이다.
백산이 준비한 것은 세 가지였다.
수십 개의 무쇠창과 쇠뇌, 그리고 화약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자주 가보았
던 곳이었기에 심부름이라 둘러대서 쉽게 장만할 수 있었다.
이제는 함정을 만드는 일만 남았다. 놈을 잡기 위한 함정은 전부 네 곳,
지금 이곳에서부터 운무곡까지 함정을 만들 계획이다.
첫 번째 함정은 구덩이였다. 놈이 완벽하게 빠질 만한 큰 구덩이를 만들어
그 속에 수십 개의 창살을 심는 작업이다.
두 번째는 창살을 박아넣은 통나무 공격, 이곳에서 이십오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에 통나무를 걸쳐서 줄을 연결시켜둘 것이다.
그 다음은 운무곡 입구에 네 대의 쇠뇌 설치, 한꺼번에 다섯 대 정도 발사
가능한 쇠뇌는 두 치 두께의 철판을 뚫을 정도로 강력하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놈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운무곡에 화약을 매설할 것이다. 가장 무
서운 것이기도 했지만 행여 비라도 내리면 무용지물이 될 소지가 다분한 것
이 또한 화약이다.
두 달이란 기간 동안 그 작업을 다 끝냈다.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아서 운무
곡에 화약도 매설할 수 있었다.
* * *
오늘은 드디어 놈을 사냥하는 날이다.
"나와라, 이놈!"
백산의 고함소리가 묵림을 뒤흔들고 있었다. 놈의 이동 경로 중 함정과 가
장 가까운 곳에서 아버지의 유품인 철궁을 들고 놈을 불러내고 있었다.
거의 반 시진 정도가 지났을까. 거대한 은색의 동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
었다. 벌써 수십 번을 보았지만 볼 때마다 기가 질리는 놈이다. 더구나 정
면으로 마주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백산! 힘을 내라, 힘을. 저놈은 맹수일 뿐이다.'
놈은 하등의 긴장감도 없이 조그마한 벌레를 보듯 백산을 쳐다보며 다가오
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놈의 도약 거리였다. 정확하게 함정으로 떨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놈을 도발할 거리 선택이 중요하다.
핑! 슉! 핑! 핑!
미리 생각해둔 거리에 들어오자 네 대의 화살이 백호의 눈을 향해 날아갔
고, 백산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전력으로 첫 번째 함정을 향해서 몸을 날렸
다.
카앙!
도발이 성공했는지 거대한 포효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도약력을 얻기
위해서 서서히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빨랐다.
함정에 다다른 백산이 고개를 돌려보니 거대한 동체가 바로 자신의 위에
있었다. 전력으로 몸을 굴려 함정을 벗어난 백산은 뒤돌아볼 틈도 없이 두
번째 함정이 있는 곳으로 죽을힘을 다해서 내달렸다.
우직끈! 카앙!
정확하게 함정으로 빠지는 소리였다.
그러나 뒤돌아볼 겨를이 없다. 두 번째 함정까지는 십 장밖에 안 남았는데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것인가.
크앙!
엄청난 포효와 함께 은빛 백호가 함정 속에서 튀어나와 허공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함정 속에 있던 창도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한 성싶었다.
"개자식!"
백산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조그마한 소도를 이용하여 통나무를 고정시
켰던 줄을 거칠게 잘라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달음질, 숨이 턱까지 차오르
고 있었다.
간신히 세 번째 함정인 쇠뇌 앞에 도달한 백산이 고개를 돌려보니 놈은 벌
써 아래로 내려서고 있었다.
이곳의 쇠뇌는 놈의 도약 거리인 십 장보다 더 길게 설치했다. 놈이 일차
도약을 하고 착지한 후 다시 뛰어오를 때를 노려서 쏘아야 한다.
백산의 눈에 놈의 뒤쪽으로 암기처럼 날아가는 흙덩이들이 보였다.
두 번째 도약의 시작이었다. 백산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이더니 다시 운무
곡의 끝을 향해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커어엉!
귓전으로 들려오는 포효소리가 약간 달라진 듯싶었다. 충격을 주었음에 틀
림없다. 철판도 뚫는 쇠뇌가 오 장 앞에서 발사되었는데 무사할 리가 없을
것이다.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놈이 소리 지르며 따라와야 되는데, 지금쯤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사방이 너무나 조용했다.
'이겼나?'
주위가 너무 조용하다는 불안감 속에서 백산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 새파랗게 빛나는 구체 한 개가 백산의 눈에 들어왔다.
크아앙…!
백산을 향해 거대한 은색 덩어리가 덮쳐오고 있었다. 백산은 태어난 이래
가장 빠른 속도로 뒹굴었다. 어깨 언저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두 바퀴
를 더 구르고 나서야 놈을 쳐다보았다.
이제 다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놈은 영물답게 가만히 백산을 쳐다보고 있었
다. 영악하게도 놈은 계곡을 따라 오지 않고 절벽 위로 온 것이었다. 눈에
하나, 몸통에 네 대의 창살을 박고도 놈은 멀쩡한 듯했다.
은백색으로 빛나던 털이 온통 피에 젖어있으면서도 산중의 제왕이란 위엄
을 잃지 않고 백산을 향해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백산은 눈을 감고 말았다. 더 이상 저항해보아야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사냥꾼답게 무의식적으로 철궁에 시위를 먹이고는 있었지만 감히 당길 생각
을 하지 못했다.
저 많은 창대를 박고도 멀쩡한 놈의 어디를 노려서 활을 쏜단 말인가.
다시 한번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얼굴로 무엇인가가 스치는 듯하더
니 곧이어 끈적끈적한 것이 백산의 얼굴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 이
상하게 백산의 정신은 맑아졌다. 저놈은 지금 승자의 여유를 부리고 있다.
바로 죽일 수 있음에도 마치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이 자신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아직은 기회가 있다.'
죽음의 끝자락에 서서 맑아진 백산의 머리는 민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 바위 뒤쪽에 도화선이 있다.
그것은 돌 위에 올려져있어 이 철궁으로 세차게 내려치면 불이 붙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절벽으로 떨어지면 저놈을 잡을 수도 있다. 어차피 죽을 목
숨, 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같이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
했다.
조용히 숨을 고른 백산은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재고 있던 화살을 한쪽만 남은 백호의 눈을 향해 당기고 재빠르게 바위 뒤
로 몸을 던지며 도화선을 향해서 철궁을 있는 힘껏 내려쳤다.
카앙!
쇳소리와 함께 도화선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백산은 지체 없이 십여 장
정도 되어 보이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절벽에서 떨어지자마자 백산은
폭약을 묻어둔 지점 아래를 향해서 몸을 굴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부러졌
는지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필사적으로 폭약 아래로 기어갔다.
절벽 높이는 비록 십여 장 정도로 백호가 한번에 도약할 수 있는 곳이지만
이곳은 약간 파여서 백호가 바로 도달할 수는 없었다. 결국 백호가 먹이를
잡기 위해서는 두 번에 걸쳐 도약해야만 한다. 백산이 노린 것은 바로 그
것이었다.
백호가 두 번을 도약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면 폭약이 터질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고 볼 수 있다. 백호의 이차 도약이 시작되었는지 놈의 포효소리와
더불어 백산의 눈앞에 거대한 빛 덩어리가 보였고 다음 순간 정신을 잃었다
.
'아버지, 저의 꿈은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