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84)

제1장 부자(父子)의 꿈

 크르르! 크르르! 크르릉!

 크앙!

 "으악! 늑대다! 컥!"

 "살려줘, 제발…."

 수백 마리의 붉은 늑대가 오십여 호의 조그마한 화전민 마을을 유린하고

있었다.

 얼기설기 지어진 화전민의 가옥은 흉폭한 맹수의 발길을 막기에는 너무나

약했다. 불이 피워져있는 인가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든 늑대는 사람들을 물

어뜯으며 밖으로 몰아치고, 밖에서 대기하던 또 다른 혈랑(血狼)들은 뛰쳐

나오는 마을 사람들을 그대로 찢어발기고 있었다.

 아기를 안고 도망치던 여인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자 대여섯 마리의 혈랑

이 그대로 덮쳐들었다. 그 여인은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온몸이 뜯겨나

가고 말았다.

 퍼붓는 빗속에 마을 사람들의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있었으나 그 어디에

도 구원의 손길은 없었다.

 "엄마…! 흡!"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

 사냥을 나갔다가 방금 돌아왔는지 허리에 두어 마리의 토끼를 매단 건장한

 중년인이 조그마한 아이의 입을 틀어막은 채 도망을 치던 여인이 혈랑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먹이가 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백보 밖에서 활을 쏘아 목표물을 맞힐 수 있는 명사수면 무얼 하나,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활활 타고 있는 사냥꾼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는 방갓을 쓴 십여 명

의 인물들이 혈랑 떼의 살육을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꽉 틀어쥔 손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이 사냥꾼이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우막(雨膜) 때문이었다. 극강한 내가고수

의 무림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광경,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그들의

 몸에 접근하지 못하고 튕겨나가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늘 활기찼던 마을에 쓸쓸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단지 백산의 흐느낌

만 메아리쳐 들려올 뿐이었다.

 모두들 떠나갔다. 마을 사람들도, 혈랑 떼도, 무림인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도 몇 조각의 살점과 선혈만을 남겨두고 사라져버리고 말

았다.

 "왜! 왜! 엄마를 구하지 못했죠? 왜… 아버지는… 아버지는… 명사수… 흑

! 흑!"

 어머니의 살점이 떨어진 곳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던 아버지를 향해 백산

이 울부짖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몇 조각 남은 살점들을

모아 묵묵히 무덤을 만들고 있었다.

 아버지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추위에 떠는 것은 아니었다. 힘없음에 대한

분노였고, 사랑하는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한 힘없는 남편이고 무력한 아버지

라는 데 대한 자책이었다.

 "산아, 두 가지만 약속할 수 있느냐?"

 새로 만들어진 어머님의 무덤만 뚫어지게 노려보며 백산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첫째는 울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이 아비와 같이 꿈을 꾸는 것이다."

 "예, 아버지. 더 이상 울지 않습니다."

 울지 말라는 소리는 알아들었다.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아 훔쳐내는 손등에

는 빗물만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이미 눈물은 마른 지 오래였다. 다만 세상

을 태울 듯한 살기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 번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꿈을 꿀게요."

 "어머니의 무덤에 대고 약속할 수 있느냐? 약속할 수 있느냐? 약속할 수…

."

 쿠르릉! 쾅! 쾅!

 후드득! 쏴아!

 "헉!"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백산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펄, 또 비네?'

 백산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비다. 벌써 십일 년이 지났건만 비만

오면 고향인 칠성리(七星里)가 생각난다. 그곳에서의 마지막 날이,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이….

 '왜 갑자기 그 꿈을 꾸는 건지 모르겠네. 아버지는 괜찮으시려나?'

 아버지의 꿈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여덟 살 때였다. 어느 이름 있는 문파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쫓겨난 후였다. 강호에 몸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젊

은 시절 한 번은 꿈꾸는 영웅호걸, 뛰어난 무공을 익혀 강호에 이름을 날리

고 절세가인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런 꿈을 한때 아버지도 품으셨

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그러하듯 꿈은 꿈으로 끝났고, 어머니를

만나 자식을 낳고 현실에 안주하셨다. 그러던 아버지가 다시 꿈을 꾸기 시

작했다. 자신의 꿈이 아닌, 자식의 꿈을.

영웅호걸의 꿈이 아닌 복수의 꿈을….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백산을 훈련시키고 약초를 먹이면서 수없이 많은

 문파(門派)의 문을 두드렸지만 먼발치에서 백산의 얼굴을 한번 흘낏 보고

는 모두들 고개를 흔들었다.

 특별히 생긴 것도 없고 영민해 보이지도 않는 덩치만 큰 어린애, 게다가

돈 한 푼 없는 떠돌이를 받아줄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또다시 꿈이 사라지고 있음이다. 이제 더 이상 가볼 곳도 없다. 그러나 백

산의 얼굴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어깨에 다시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아들에게만은 힘없고 무력한 아버지로 남고 싶지 않으신 것이다.

 두 부자는 또다시 중원의 산을 헤매고 다녔다. 아버지는 혈랑을 잡는다는

꿈을, 아들은 복수의 꿈을 가지고 중원의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아버지가 영약이라며 주는 것도 많이 받아먹었다. 또 젊은 시절 아버지를

꿈꾸게 했던 별것 아닌 '호흡법(呼吸法)'도 익혔다.

 참으로 별것 아닌 호흡법이었다. 벌써 십일 년간이나 죽을 둥 살 둥 하며

익히고 있으나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나마 좀 도움이 됐던 것은 특

별히 잔병치레가 없다는 것이었다.

 "꿈은 말이다,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만 꿀 수 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가지는 꿈은 욕심일 뿐이다."

 언젠가 술에 취하셨을 때 하신 말이다. 여덟 살 때 어떤 문파에서 마지막

으로 입문을 거절당하셨을 때부터 아버지는 백산 몰래 술을 드시곤 했다.

 뇌산(雷山).

 아버지는 더 이상 꿈꾸는 것을 포기하셨는지 이 년 전부터 이곳에 정착하

셨다. 중원의 끝, 대월국(大越國)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이곳 남방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먼 옛날 뇌신(雷神)이 살았다 해서 뇌산이라 불리며, 뇌산 제일봉인 우뢰

봉(雨雷峰)은 번개가 가장 많이 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기(雨期)가 시작되고 있었다.

 남쪽 지역인 이곳은 우기가 시작되면 족히 두어 달 정도는 내리 퍼붓곤 한

다. 우기가 되면 그동안 갈증에 목말라했던 초목들이 훌쩍 자라나서 단 며

칠만 지나도 알아볼 수 없게 되는 곳이 또한 이곳이다.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사냥을 가신다며 떠나신 아버지가 걱정되었다. 그리

고 마지막에 하셨던 말, 분명 단서를 잡았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단서라고

할 만한 것은 혈랑 떼밖에 없다.

 추랑객(追狼客).

 아버지를 일컫는 말이다. 거의 구 년 동안 중원을 떠돌아다니면서 잃은 것

은 꿈이었고, 얻은 것은 '추랑객'이라는 이름 석 자였다.

 늑대를 쫓는 사람.

 '비가 그치면 나가봐야겠네.'

 나이는 열다섯밖에 되지 않았지만 사냥복으로 갈아입은 백산의 몸은 이미

어른이었다.

 얼굴에 비해 좀 작은 눈과 중앙에 우뚝 솟은 큰 코는 저잣거리에 가면 흔

히 만날 수 있는 그런 얼굴이지만, 얄팍한 입술과 강한 턱선은 상당한 고집

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던가.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동안 사냥

에 관한 것은 거의 다 배웠다. 활쏘기는 기본이고 바람을 이용하는 방법,

맹수를 추적하는 추적술 등, 이제는 어엿한 사냥꾼으로 불리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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