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189화 (189/200)

189화. 척가장 (2)

“그렇습니다.”

제갈윤이 대꾸하자 혁련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척가장이라는 그곳은 인근에서도 선행으로 명망이 드높다고 하더구려. 인근 주민들에 대한 구휼 활동에도 적극적이고,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지낼 곳을 마련해주고 기술을 익히게 하여 세상에 다시 내보낸다고 들었소. 그 외에도 그들의 선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인근에 사는 모든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던데…….”

끝부분에서 잠시 말을 흐렸던 혁련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곳이 혈천맹의 본거지인 게 확실한 것이오? 물론 그렇다 하여 태자보위에서 알려준 정보를 의심한다는 뜻은 아니오만…….”

태자보위(太子保衛).

궁중 고수들로 이뤄진 조직으로, 표면상으로는 황태자의 호위역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직들이 대부분 그렇듯, 호위 임무 외에도 수많은 첩보 임무를 담당한다.

태자보위에 속한 고수들의 실력은 황제 직속의 정보 조직인 그 유명한 동창의 고수들에 비견되곤 한다. 거의 뒤처지지 않는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그 이유는 황태자가 황제의 뒤를 이을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혈천맹의 실질적인 본거지가 척가장임을 무림맹 측에 알려온 것도 태자보위였다. 정확하게는 제갈윤에게 전달되었다. 황태자와 제갈윤 사이의 특수한 관계 덕분이었다.

백리우와 제갈윤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제갈윤이 말했다.

“태자보위에서 이 정보를 알려오기 전에, 본 맹에서는 또 다른 경로를 통해 비슷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렇기에 척가장이 실질적인 혈천맹의 본거지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마연문이 물었다.

“하면 척가장에 대한 정보를 더 일찍 알고 계셨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먼저 입수한 그 정보에 대해 확신하지는 못하고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태자보위에서 정보를 알려온 것이지요.”

“어떤 경로로 입수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제갈윤이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것은…… 본 맹을 배반한 수하로부터 날아온 정보였습니다. 이 이상은 말씀드리기가 껄끄러운 부분이 있으니 양해하십시오.”

그 말에 마연문의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무림맹을 배반했다면, 그 수하는 지금 혈천맹에 속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중요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다는 건, 배반했다는 그 수하의 역량이 매우 뛰어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누굴까.

그 정도로 뛰어난 역량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신룡대였다. 아마 신룡대 내에서도 상당한 실력자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뭐, 이 시점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

끝까지 유추를 거듭하며 그 인물이 누군지를 보다 확실히 하고 싶은 건, 머리를 쓰는 자로서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마연문은 그쯤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 시각, 백리우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였다.

그랬다. 먼저 정보를 제공한 건 청룡이었다. 신룡대에서만 쓰는 암어로 작성된 전서가 일전에 무림맹으로 날아왔었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어서 한동안 제갈윤과 함께 고심했었다. 그러던 중에 제갈윤이 내린 결론은, 온전히 믿지는 말되 일정 부분 대비는 해놓자는 쪽이었다.

그리하여 대비를 하던 차에 황태자로부터 서신을 받고,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청룡, 네 이 녀석……. 그래도 살아남으라고 보내줬더니, 왜 기어이 스스로 무덤을 팠단 말이냐.’

청룡이 중차대한 정보를 제공해준 것도 고맙고 의리를 지켜준 것도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혈천맹이라면 청룡의 행각을 금세 밝혀낼 것이고, 발각된 순간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청룡은 배신의 죄를 죽음으로써 스스로에게 묻겠다는 각오였을 터.

‘그때 내가 너를 놓아줄 때에는, 결코 이런 걸 바랐던 게 아니었단 말이다. 이 한심한 인사야…….’

백리우가 눈을 감고 있을 때 혁련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가 인지하고 있다면 황궁이나 관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있는 것이오? 최소한 그 태자보위의 도움이라도.”

그 말에 제갈윤이 고개를 저었다.

“태자 저하께서는 이일을 강호 차원에서 해결하길 바라고 계십니다. 척가장에서 악행을 저질렀다는 실질적인 증좌가 없으니 섣불리 개입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잘못하면 정치적인 역풍을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하여 태자보위에서 우리에게 전해준 정보에 관한 내용도 극비라고 미리 말씀드렸던 겁니다.”

혁련강과 예교령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척가장은 산자락에 골짜기를 낀 채로 자리 잡고 있으며, 매우 넓은 장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 장원의 규모를 생각하시면 곤란할 정도로 큽니다. 강호로 따지면 어지간한 대문파의 규모를 훌쩍 넘는 수준입니다. 처음에는 규모가 작았으나, 척가장의 위상이 점점 높아지면서 점점 산자락 위쪽으로까지 담장을 넓힌 것이라고 합니다.”

제갈윤이 그렇게 말한 후 마연문을 바라보자, 마연문이 둘둘 말린 커다란 종이를 탁자 위에 펼치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문상과 제가 조사한 척가장의 평면도입니다. 보시다시피 장원의 중앙으로 실개천이 흐르고 있고, 그 실개천의 양옆으로 수많은 건물들이 배치된 모습입니다. 장원을 감싸고 있는 담장은 높지 않습니다. 또한 평소의 경계 태세는 무방비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허술합니다.”

“장원의 명망이 높은 만큼,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느낌을 주려는 뜻이었겠군요. 그런 식으로 세상을 속여왔을 테고요.”

예교령이 의견을 말하자 마연문이 대꾸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공격을 개시한다면, 어느 방향으로 치고 들어가도 상관이 없을 정도입니다. 보이는 것만으로 따져봤을 경우에는 말이지요.”

그러자 제갈윤이 평면도 상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성, 아니, 안채라고 해야겠지요. 안채는 또 다른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고, 바깥채에서 안채로 향하는 문은 하나뿐입니다. 장원의 전체적인 규모가 큰 만큼, 바깥채뿐만 아니라 안채의 규모도 큽니다. 안채의 담장 또한 높지 않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제갈윤이 말을 이었다.

“안채는 산자락에서도 위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 가장 위쪽에 장주 일가의 거처가 있는데, 바로 이곳입니다. 안채에서 장주 일가의 거처로 향하는 대문도 하나입니다.”

그러자 혁련강이 의견을 말했다.

“여태 적들이 구축해뒀던 거점들을 돌이켜 봤을 때, 장원의 지하에 어떠한 시설들 따위가 존재할 가능성도 크겠구려? 그게 아니면 그러한 시설들로 통하는 통로가 있거나.”

“그렇게 예상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 제갈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안채와 장주 일가의 거처로 향하는 문은 각각 하나이나, 모든 담장이 낮아서 우리가 작전을 펼치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겁니다. 다만, 유사시에 사용할 목적으로 기관 장치 등을 설치해뒀을 가능성도 있으니, 이 부분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제갈윤이 말을 마치자 이번에는 마연문이 입을 열었다.

“상주하는 인원은 이천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그중, 현재 척가장에서 돌보고 있는 아이들이 거의 사백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아이들이라…….”

백리우가 그 말을 되뇌었다.

이제는 척가장이 혈천맹의 실질적인 본거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 보니 과연 척가장이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끌어안고 있는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마연문이 보고를 이어갔다.

“드나드는 인원들, 그러니까 척가장에서 일을 돕는 인원들까지 합하면 거의 이천오백을 헤아립니다. 그중에서 무인은 삼백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그들은 주로 경비, 호위 등의 임무를 담당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수치일 뿐이겠군.”

“교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 많은 인원들 중에 어느 정도가 무인들인지는 알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반수 이상이 무인들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전부가 무인들일 수도 있습니다.”

“으음…….”

“또한, 아까 교주님께서 잠깐 언급하셨던 것처럼, 지하의 시설들 따위에 전력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질적인 본거지인 이상, 초고수들이 다수 존재할 가능성도 매우 높겠구려?”

백리우가 말을 보태자 마연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맹주님. 척가장의 모습은 그야말로 허허실실입니다. 섣불리 공격을 개시했다가는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아까도 말씀드렸듯, 민간인도 다수 존재할 수 있어, 작전 수행에 애로사항이 있을 듯합니다.”

민간인에게 상해를 입히면 정당성이 위태로워지고, 정당성이 위태로워지면 민심이 돌아선다. 민간인에 관한 부분은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였다.

“민간인인 줄 알고 지나쳤다가 등을 찔릴 수도 있겠고.”

“예. 그렇기에 민간인으로 추정되는 인원들에 대해서는 상해를 입히지 않는 선에서 미리 제압을 해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수혈을 짚는 방식이 좋을 듯하고, 아군 측 인원들에게도 집중적으로 연습을 시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연문이 그렇게 말하자 제갈윤이 이어서 입을 열었다.

“더 자세한 보고를 드리고 싶으나, 이 이상 파고들 수는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랬다가 적이 낌새라도 눈치채면 우리가 여태껏 심혈을 기울였던 모든 수들이 허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연문이 말했다.

“결국 모든 이들에게 그 가능성에 대해 철저히 주지시키고, 항시 뒤를 조심하게 하며, 기세를 탔다 하여 섣불리 안으로 파고들지 않도록 당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의도대로, 저들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기습해야 하는데, 그 시점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요.”

백리우의 말이었다.

‘청룡의 행각이 혈천맹에 발각되기 전에 일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미워할 수 없는 그 녀석의 검례를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백리우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연문이 말했다.

“사실,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입니다. 군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의 입장에서 이 정도의 결론밖에 말씀드릴 수 없다는 현실이.”

제갈윤도 동감이라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백리우가 대꾸했다.

“그런 말씀 마시오. 우리가 이 현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마연문과 제갈윤의 말마따나, 현실적으로 척가장에 대해 더 자세한 조사를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척가장에 이쪽의 낌새를 들키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임서현 쪽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임서현에 있는 대규모 전력은 단순히 적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패인데, 그들이 계속해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면 적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챌 수밖에 없는 탓이다. 그 경우, 오히려 임서현 쪽의 전력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백리우가 말했다.

“결국 아군 인원들의 탁월한 임무 수행 능력을 믿어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군. 뭐, 이 강호에서 신룡대나 흑풍대의 작전 수행 능력을 따라갈 자들은 없으니, 그 정도는 충분히 대처할 게야. 전직 요원이고 현직 요원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노련한 고수들이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특히 우리 쪽 전직 대원들은 각오가 대단하더이다. 은퇴 후에도 신룡대에게 지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면서.”

혁련강이 대꾸하자 백리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 쪽 능구렁이들도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더이다.”

백리우가 말한 능구렁이들이란 신룡대의 전직 대원들이었다.

그러자 제갈윤과 마연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갈윤이 말했다.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소생들은 가서 이런저런 방법들을 강구해보겠습니다.”

그러자 예교령도 일어섰다.

“저도 소수궁의 인원들에게 방금 말씀하신 주의 사항을 이야기하러 가볼게요.”

세 사람이 그곳을 벗어났다.

그 후 백리우와 혁련강 사이에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혁련강이었다.

“본교의 정점에 있다 보니 자존심도 있고 하여, 내가 어지간하면 이런 얘기는 안 꺼내려고 했는데…….”

혁련강의 표정이 자못 진지했다.

백리우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혁련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 몇 년간 실전은커녕, 수련다운 수련조차 통 해보지 못했소. 결전의 날이 다가오는데 그때 가서 몸이 제대로 움직여줄지 모르겠소이다.”

“아하.”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백리우가 미소 띤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우리 묵룡에게 지원해주신 영약값은 해야겠지요. 물론 이런 식으로 갚으려면 수십 년은 걸릴 테지만 말이오. 허허허.”

“고맙소. 단, 조용한 곳이면 더 좋을 것 같소.”

“그럽시다. 곧 날이 어두워질 테니 얼른 저녁이나 먹고 몰래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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