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결전 (1)
죽립을 쓴 세 명의 사내가 산자락 위쪽을 어슬렁거리자, 아래쪽에서 네 명의 무인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우리는 척가장의 경계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실례지만 귀하들께서는 이 어두운 시각에 무슨 용무로 이곳을 돌아다니시는 것인지요?”
정중히 물어온 사람은 경계 무인들 중에서 가장 앞에 선 장년인이었다.
그러자 죽립을 쓴 세 명의 사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대꾸했다. 죽립을 쓴 세 명의 사내는 두 명이 중년인이었고, 한 명이 청년이었다.
“아하! 이곳이 바로 척가장이었군. 나도 들어본 적이 있소. 사실 우리는 외지에서 왔는데, 어두운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중이었소. 그러다가 어찌어찌 이곳에 이르게 된 것이오.”
“아, 그러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못 보던 분들이라서 그렇겠거니 여기고는 있었습니다. 한데 뭐 하시는 분들이기에 이 시간에 이곳을 헤매고 계셨는지요? 병장기를 휴대하셨으니 무인이신 듯도 한데.”
“허헛. 무인은 무슨. 우리는 그저 변변찮은 심부름꾼들에 불과하오. 이번에는 사람 찾는 일을 의뢰받아서 그 일을 하러 나선 길이었다오.”
“아하.”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라서 서로 형님, 아우 하는 사이요. 내가 첫째고 이쪽이 둘째, 이쪽이 막내요. 그리고 병장기는 호신용이오. 요즘 같이 험한 세상에 이런 거라도 안 들고 다니면 얕잡혀 보이기 십상이잖소.”
“하긴 그렇지요.”
장년 무인이 대꾸하자 이번에는 죽립을 쓴 첫째가 물었다.
“한데, 우리가 몰라서 여쭙겠소만, 이곳은 척가장 담장의 바깥임에도 출입에 제한이 있는 것이오?”
“실은 이 산 전체가 척가장의 소유입니다. 물론 척가장의 소유라 해도 일반인의 출입 자체를 제한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냥, 벌채, 채집 등의 행위만 제한됩니다. 산의 이곳저곳에 그 사실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데 귀하들께서 못 보신 모양이로군요.”
“아, 그랬구려. 우리가 어두운 상태에서 길을 잃고 당황하여, 그런 표지판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소. 미안하오.”
“몰랐으니 그러셨을 수도 있지요. 어쨌거나 내려가시는 길은 이쪽입니다. 담장을 따라 내려가시면 됩니다.”
“아, 알겠소. 고맙소.”
첫째가 대꾸하자, 죽립인들 중에서 둘째인 중년 사내가 말했다.
“형님, 나는 너무 지치고 배가 고파서 걸어 다닐 힘도 없소. 일단 이곳에 앉아서 조금만 쉬었다 갑시다. 어차피 무사님들이 내려가는 길도 알려주셨으니, 좀 쉬었다가 가도 될 것 아니오.”
아닌 게 아니라 둘째는 안색이 창백하고 매우 지쳐 보였다.
“이 사람아, 그러면 여기 이 무사님들이 계속 우리를 신경 쓰고 있어야 하잖아.”
“아, 진짜. 우리가 헤매기 시작한지 두 시진도 넘었는데, 그동안 한 번도 못 쉬게 하셨잖소. 이제 길도 찾았으니 단 일각 동안만이라도 앉아서 쉬었다 가자는 말이오. 무사님들이 그 정도도 이해 못 해주시겠소?”
“더 폐 끼치지 말고 일단 내려가서 쉬자, 아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더니 말했다.
“아이고, 아이고. 난 모르겠소. 너무 지치고 배고파서 이 어두운 세상이 누렇게 보일 지경이란 말이오. 때려죽여도 난 좀 쉬었다 가야겠소.”
“아우, 이러면 안 된다고. 어서 일어나란 말이다.”
첫째가 민망하다는 듯 둘째를 재촉했지만, 둘째는 입을 내밀고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러자 여태 조용히 있던 막내가 말했다.
“형님들, 제가 언젠가 들었는데, 척가장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소홀히 하지 않아, 인근에서도 매우 명망이 높다 하였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배고프고 지쳤는데 밤도 늦었으니 척가장에 부탁을 좀 드려보면 어떨는지요? 마침 이분 무사님들의 정중한 태도를 보아하니 척가장의 그 명성이 헛된 게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에이, 막내야. 그래도 그건 너무 염치없는 일이지.”
첫째가 그렇게 대꾸하며 경계 무사들의 눈치를 살며시 살폈다. 그러자 앞서 대화를 나누었던 장년 무인이 웃으며 말했다.
“하긴, 척가장은 좀 외떨어진 곳이라, 허기를 채우고 묵을 곳을 찾으시려거든 한참을 더 가셔야 할 겁니다. 어차피 본 장원에는 나그네들을 위한 거처도 있으니, 그곳을 이용하실 수 있도록 제가 조치해드리겠습니다.”
“헛! 저, 정말이시오? 그, 그렇게 해주신다면 염치 문제도 있고 하니, 우리가 약소하나마 숙박비와 식대라도 드리겠소.”
“하핫. 숙박비나 식대를 준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남는 방 하나를 제공해드리는 것뿐이니까. 게다가 시간이 시간인지라 식사도 볼품없을 겁니다. 야간 근무를 서는 우리 같은 사람들 요기라도 하라고 쪄둔, 식은 만두 정도입니다. 일찍 오셨더라면 따뜻한 밥 한 끼 정도는 드실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자 둘째가 땅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아이고, 그게 어디요? 고맙소, 정말 고맙소.”
곧 장년 무인이 뒤쪽을 바라보며 수하로 보이는 다른 무인에게 지시했다.
“자네가 가서 조장님께 이분들의 출입을 보고하고, 출입증을 준비해주게.”
“예!”
무인 하나가 빠르게 사라지자 장년 무인이 또 다른 수하에게 지시했다.
“자네는 가서 이분들이 묵을 숙소를 정해드리고, 식은 만두나마 넉넉하게 챙겨드리게.”
“알겠습니다.”
그러자 첫째가 말했다.
“아이고 이렇게 고마울 데가……! 고맙소! 정말 고맙소!”
“모쪼록 편히 쉬다 가십시오. 아, 참! 그리고 막내분의 그 매, 멋집니다. 깃털이 눈처럼 하얘서.”
장년 무인의 말에 막내가 어깨에 앉아 있는 매의 깃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해동에서 난다는 해동청입니다. 다친 녀석을 치료해줬더니 그 후로는 도통 제 곁을 떠나지 않아서요. 어쨌거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무사님.”
죽립인들이 안내를 맡은 무인의 뒤를 따랐다.
[어떻소? 교주께서 보시기엔?]
[맹주께서도 눈치채셨겠지만, 둘은 최소한 절정 이상의 고수고 나머지 둘의 수준은 이류 정도요. 보고하기 위해 처음에 떠난 자가 가장 고수고, 우리와 대화를 나눴던 장년인의 곁에 남아 있는 자가 그다음 고수요. 장년인과 우리 앞에 있는 자들이 이류고.]
죽립인 첫째와 둘째 사이의 전음.
그랬다. 첫째 백리우였고 둘째는 혁련강이었다. 막내 역할을 하고 있는 청년은 바로 단유소였고, 그의 어깨 앉아 있는 매는 설화였다.
백리우가 이번에는 단유소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어떻던가?]
[한 명은 확실합니다. 제가 수도 없이 상대해왔던 혈천맹 측 무인들 특유의 느낌이었습니다.]
[보고하러 간 쪽? 아니면 남아 있는 쪽?]
[보고하러 간 쪽입니다. 일단 장원 안으로 진입해서 더 많은 대상들을 살펴봐야 확실해질 듯합니다.]
척가장이 혈천맹의 본거지임을 알고 있다지만, 확실한 확인 과정은 반드시 필요했다.
백리우와 혁련강과 단유소가 나선 이유는 안전상의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이야말로 높은 무공 경지로 인해 오히려 평범해 보이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었다. 일반인으로 보여야 척가장 측의 이목을 속일 수 있기에 세 사람이 직접 나선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단유소는 혈천맹의 무인들이 풍기는 특유의 기운을 확인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희한하게도 단유소의 경우에는 혈천맹의 무인들이 풍기는 느낌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는데, 이는 모두가 짐작하는 것처럼, 혈천맹을 상대해온 그만의 수많은 경험 때문이 아니었다.
실은 대라유유선공의 현묘함 때문이었다.
일정한 경지를 넘어선 대라유유선공이 알아서 마기와 사기를 구분해주었는데, 혼원태극공과 합일되어 더 완벽해진 지금에는 더 확실하게 그 느낌을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장원의 정문을 세 명의 무인이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보는 방향에서 우측에 있는 자.]
혁련강의 전음이었다. 백리우가 대꾸했다.
[최절정급의 고수구려.]
[그 정도 고수가 일개 정문 경비 무사로 있다? 확실히 이상하지요. 최절정급의 고수이니 어지간한 무인들도 그의 경지를 짐작하지는 못할 것이고.]
입술조차 전혀 달싹이지 않는 전음이 오갔다. 최절정 고수라 해도 알아챌 리 없는.
백리우가 곧바로 단유소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어떠하냐?]
[우측에 있는 자에게서도 느낌이 확실히 납니다. 정문 안쪽 초소에는 저자보다 더 강한 자가 있습니다. 그에게서도 느낌이 납니다.]
그 말을 들은 백리우는 내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네 경지가 확실히 나를 앞섰구나!’
자신이 아직 파악하지 못한 사실을 단유소는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백리우가 단유소에게서 들은 사실을 혁련강에게 전했다.
이윽고 세 사람은 척가장의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서 실개천을 따라 걷는 와중에 혁련강이 또다시 전음을 보냈다.
[건물들의 지붕 위, 음영 속에서도 기척이 느껴지는구려.]
[그들 모두가 아까 정문에서 봤던 자에 못지않은 고수들이오.]
백리우가 혁련강에게 그렇게 대꾸했을 때쯤, 이번에는 단유소가 알아서 백리우에게 전음을 보냈다.
[각 건물들의 지붕 위에 은신하고 있는 고수들도 모두 그 느낌을 풍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확실하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백리우가 단유소에게서 들은 내용을 간단하게 혁련강에게 전했다.
그 후로 백리우는 먼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그의 눈동자에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천지신명이시여, 우리를 도우소서.’
잠시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그 말을 되뇐 백리우가 다시 눈을 떴다. 다시 뜬 그의 눈동자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백리우가 혁련강에게 짧게 전음을 보냈다.
[시작하겠소.]
혁련강이 짧게 고개를 끄덕인 순간, 백리우가 단유소에게 전음으로 지시했다.
[신호하게.]
그러자 단유소가 걷다 말고 서서 설화를 양손 위에 감싸 든 채로 말했다.
“뭐야? 너도 배고픈 게냐?”
인근의 지붕에 은신해 있는 무인들도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지 않은 목소리였다.
안내하던 무인이 돌아서서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단유소가 무인을 향해 말했다.
“허! 이 녀석도 배가 고픈 모양입니다. 이 녀석은 우리와 달리 한심하지 않습니다. 놔두면 알아서 제 끼니를 잘 챙겨 먹고, 낮이 되면 어느샌가 제 곁으로 다시 돌아오지요.”
“그렇습니까.”
“날려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아! 그 전에 무사님께서 이 녀석을 확인해주십시오. 척가장에서는 저희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셨는데, 행여나 의심스러운 행동으로 비춰질까 염려돼서 말입니다.”
전서 따위를 보내는 게 아님을 확인하라는 뜻.
그러자 안내하던 무인이 단유소에게 다가오며 대꾸했다.
“설마 여러분께서 그러시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저 같은 말단은 융통성을 발휘하기보다는 규정에 따라야하는지라…….”
“아이구, 물론 그러셔야지요. 저희들 때문에 무사님이 혹시라도 곤란해지시면 안 될 일이지요. 자, 설화. 얌전히 있어야 한다?”
단유소가 그렇게 말하며 설화를 무인에게 건넸다.
“어이구. 가까이서 보니 깃털이 더욱 희고 예쁘군요. 어디 보자, 요 녀석…….”
무인이 설화를 이리저리 살폈다. 물론 전서통 같은 게 묶여 있을 리 없었다.
단유소가 그를 돕겠다는 듯 설화의 날개를 한쪽씩 차례로 들어올려, 날개 아래에도 아무 것도 없음을 확인시켰다.
확인을 마친 무인이 설화를 단유소에게 다시 건네며 말했다.
“번거롭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객이 주인의 법도를 따르는 건 상식이지요. 그럼, 녀석을 보내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러자 단유소가 양손에 감싸고 있던 설화를 힘차게 허공 위로 띄워 올렸다.
“훨훨 날아라!”
설화가 크게 날갯짓하며 떠올랐다.
끼이이이이이이―
한 차례 긴 울음을 토해낸 설화가 가속도를 붙이며 순식간에 허공 위로 멀어져 갔다. 마치, 깜깜한 밤하늘에 수직으로 하나의 하얀 선이 떠오르는 듯했다.
“뭐, 뭐야!”
멀찍이에서 낮은 외침이 들린 건 그 순간이었다. 백리우 일행이 방금 지나쳐온 정문 쪽이었다.
“치, 침입자다! 침입자다!”
정문 쪽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린 찰나, 일단의 무리들이 가볍게 장원의 담을 뛰어넘어 안으로 진입했다. 그들의 뒤를 이어 수많은 인영들이 담을 넘기 시작했다.
삑― 삑― 삐이익― 삐이이익―
정문 쪽에서 시작된 시끄러운 호각 소리가 꼬리를 물고 장원 안쪽으로 이어졌다.
백리우 등을 안내하던 무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대체 어찌된…….”
그 무인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미 그의 신형은 스르르 바닥으로 쓰러지는 중이었다.
단유소가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그의 수혈을 짚어, 금세 쓰러지며 잠에 빠져든 것이다.
“나, 천마신교주 혁련강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나니, 저항하지 않고 협조하는 자들은 살 것이되,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죽으리라!”
내공을 가득 실은 혁련강의 중후한 음성이, 골짜기 안을 가득 울리며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