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척가장 (1)
한족, 몽골족, 만족 등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임서(林西)현은 장성을 넘어 하북의 경계를 지나고도 한참이나 북쪽으로 이동해야 나오는 곳이다.
그 임서현에서도 북동쪽으로 더 이동한 빽빽한 산속.
평소 인적이 드문 그곳에 고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는 사람이 있다 해도 발길이 드문 이유는, 몇 년 전부터 그곳을 산적 무리들이 점거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 탓이었다. 산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몇 년째 그런 소문이 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가 없는 이유는 역시 지리적인 여건 때문이었다.
관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장성 북쪽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곳인 탓이다. 그렇다 하여 강호 세력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도 아니었다.
고성 근처에 갔다가 살아서 돌아왔다는 사람이 없으니, 어느 순간부터는 인근의 주민들도 그 근처를 드나드는 일이 없었다. 험한 산속을 찾아다니는 사냥꾼이나 약초꾼들이 발길을 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최단 경로를 이용하려 인근을 경유하던 상인들도 경로를 바꾼 지 오래였다.
“이곳이 이 상황에서 적에게 근접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입니다. 적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곳은 저 능선 너머에 있는 봉우리입니다. 물론 이곳에서 시야가 잡히지는 않습니다.”
높은 봉우리 위에서 어딘가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한 사람은 제갈윤이었다.
무림맹과 천마신교에서는 적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지역 주변에 전력을 집결시킨 상태였다. 양 진영의 모든 정예들이 총집결했고, 그 모든 일은 매우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다른 한 사람이 둘둘 말려 있는 커다란 종이를 펼치며 말했다.
“이쪽을 잘 알고 있는 인근 지역 주민들의 진술을 토대로 만든 지형도입니다. 지형도상으로는 이 지점에 위치한 고성이 바로 적의 본거지입니다.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기에 약간의 오차는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한 이는 천마신교의 총군사인 마연문이었다.
직접 확인할 수 없었던 이유는 최대한 조심하기 위함이었다. 직접 확인하러 갔다가 적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이 강호의 모든 역량을 동원한 이 대규모의 작전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갈윤과 시선을 교환한 마연문이 지형도상의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고성이 위치한 봉우리는 사방으로 경사가 매우 가파르다고 합니다. 성벽까지 끼고 있으니 방어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말씀입니다. 적들이 작정하고 지킨다면 몇 배수의 전력으로 포위 공격을 가해도 승기를 잡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 후로도 마연문이 주로 설명하고 제갈윤이 첨언하는 식으로 한동안 보고가 계속되었다.
두 사람의 보고를 듣고 있는 인물은 총 네 명이었다.
무림맹주 백리우와 천마신교주 혁련강, 그리고 정혼단주를 맡고 있는 유굉 대사와 수라단주 계사평이었다. 수행원들이 멀리 떨어져서 그 여섯 명을 호위하는 중이었다.
보고를 모두 듣고 난 유굉 대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미타불, 이제 남은 일은 시주들께서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몰래 흘리는 일이겠구려.”
무림맹과 천마신교의 정예 전력들이 일제히 자리를 비웠다. 그 모든 작전이 은밀하게 진행되었다고는 하나, 혈천맹 측에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색출한다고 색출했지만 소수의 변절자들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적들은 강호를 대표하는 정예 전력이 본인들의 본거지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자 수라단주 계사평 또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유굉 대사에게 대꾸했다.
“흘리기만 하면 무조건 믿을 겁니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볼 때마다 탄성이 나올 정도니 말입니다. 당장 수행원들조차도 모두 네 사람의 존재를 믿고 있지 않습니까.”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대화였다. 그런 대화가 오가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에 있는 백리우, 혁련강, 제갈윤, 마연문이 실상은 모두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 네 사람과 체형이 비슷한 인물들을 골라 인피면구로 위장시킨 것이다.
그 네 사람이야말로 이 강호 최고의 거물들이었다.
즉, 강호 최고의 거물들이 모두 이곳에 참여하여 이 일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작전이었다.
계사평의 말마따나 수뇌부를 수행하기 위해 함께 온 수행원들조차도 백리우 등이 가짜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아군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유굉 대사와 계사평을 합해도 채 몇 명이 되지 않았다.
“저희들은…… 여전히 긴장이 많이 됩니다.”
제갈윤, 아니 제갈윤으로 위장한 무인의 대꾸였다. 그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굉 대사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아미타불, 긴장이 되시겠지만 시주들께서는 안심하셔도 될 것 같소. 방금 전에 문상인 척한 것도 매우 훌륭했소. 목소리나 어조도 거의 비슷하여 빈승은 계속해서 속으로 감탄하는 중이었소.”
유굉 대사에 이어 계사평이 말했다.
“총군사 역도 매우 훌륭했네. 총군사와는 그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해왔는데, 너무 흡사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네. 뭐, 지금처럼만 해준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가, 감사합니다.”
마연문 역을 맡은 천마신교 측 무인의 대꾸였다. 그러자 계사평이 네 사람을 둘러보며 다시 말했다.
“명심하게. 잠깐이지만 자네들은 이 강호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존재들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걸세. 네 사람 모두 누군가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존재들인 데다가, 우리가 자네들 주변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으니 안심하고 자신 있게 행동하라는 뜻일세.”
“명심하겠습니다.”
천마신교주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무인이 대꾸하자 계사평이 말했다.
“그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내 말에도 일일이 대꾸하지 말게. 교주님처럼 고개만 끄덕여 보이거나 뒤돌아서 뒷짐을 지거나 하면 된단 말일세.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전음으로 말하게. 절대 겉으로는 움츠러들지 말고.”
그 말에 천마신교주 역을 대신하고 있는 무인이 뒤돌아서서 뒷짐을 지며 고개만 끄덕였다. 계사평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그러자 유굉 대사가 말했다.
“자, 그럼 다음 지점으로 이동합시다.”
유굉 대사를 비롯한 여섯 사람이 움직이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수행원들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동하는 와중에 계사평이 유굉 대사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들의 준비가 훌륭하군요. 보아하니 별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네 사람 모두, 주어진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이나마 최선을 다해 연습했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이쪽에 모습을 드러내고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굉 대사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미타불, 빈승도 동의하오. 시선을 끌려는 본래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소.]
이곳에 강호의 모든 전력이 총집결해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누구나 알 만한, 눈에 띄는 고수들과 조직이 다수 포함되어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물론 무림맹의 정예 전력인 지협단과 인의단, 천마신교의 정예 전력인 수라단과 마룡단은 분명히 이곳에 있었다. 거기에 유굉대사가 이끄는 정혼단도 함께하고 있었고, 무림맹의 일반 무인들과 천마신교의 일반 마인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외형상으로는 대규모 전력이나, 실상 양측의 최정예 전력들은 쏙 빠져 있는 상태였다. 무림맹의 천무단과 신룡대, 천마신교의 천마단과 흑풍대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따로 움직이고 있다고만 알린 상태였다.
이 모든 의아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는, 이곳이 적들의 실질적인 본거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무림맹과 천마신교 모두 이곳을 적들의 본거지라고 여겼었다. 그러다가 근래 혈천맹의 본거지에 대한 또 다른 정보를 입수하고 바로 작전을 바꾼 것이다.
그렇기에 이곳에 있는 인원들은 적들을 공격하기 위해 모인 인원들이 아니었다. 무림맹과 천마신교가 이곳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들로 하여금 믿게 만들 목적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 아군들부터 속이고 있는 것이고.
백리우, 혁련강, 제갈윤, 마연문 등의 대역을 만들어 이곳에 등장시킨 것도 적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다른 쪽에 있는 적들이 안심할 테고, 안심은 곧 방심으로 이어질 테니까.
[아미타불, 저쪽에서도 이미 준비를 모두 마친 모양이니, 이제 곧 이 강호의 운명이 결정되겠지요. 부처님의 가호가 그들과 함께하길 빌 뿐이외다.]
* * *
“허허. 참. 혈천맹의 본거지가 설마 그곳일 줄은 몰랐습니다.”
객잔 별채의 이 층 거실.
넓은 탁자 앞에 다섯 명의 인물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방금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렇게 말한 사람은 천마신교의 총군사인 마연문이었다. 대역이 아닌, 진짜 마연문이었다.
“허허허. 그러게 말이외다. 나도 어이가 없소. 황성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 천마신교에서 운영하는 객잔이 버젓이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백리우의 말이었다. 물론 백리우 또한 대역이 아닌 진짜였다.
그 말에, 백리우의 정면에 앉아 있던 중년 사내가 째진 눈으로 백리우를 바라보았다. 백리우의 정면에 앉은 중년 사내는 혁련강이었다.
그러자 혁련강의 옆에 앉아 있던 마연문이 난감한 듯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허헛. 수, 수익 사업의 일환이자 정보 취득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맹주님. 물론 이런 상황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안가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자 백리우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허허. 농이오. 농.”
“농담도 좋은데 지금은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으니 좀 참아주시면 어떻소? 참고로 언젠가 꼭 한 번은 말하고 싶었는데, 귀하의 농담은 썩 재미있지 않소.”
혁련강의 대꾸였다.
“허! 그런 가차 없는 평가라니. 나, 상처 입소.”
“상처는 무슨. 천하제일인씩이나 되시는 분이. 훗!”
혁련강이 코웃음을 칠 때쯤, 탁자의 측면에 홀로 앉은 아름다운 여인이 백리우와 혁련강을 향해 양손을 펼치며 타이르듯 말했다.
“자, 자! 오라버니들, 그 정도만 하세요. 하여간 요새 보면 항상 이런 식이시라니깐. 두 오라버니들이 계속 그러시니까 아까부터 문상 오라버니가 말씀을 꺼내시려다가 계속 못 꺼내고 계시잖아요.”
이 강호에서 무림맹주와 천마신교주에게 동시에 오라비라는 호칭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바로, 전대 소수궁주인 예교령이었다.
“아…….”
“허헛…….”
백리우와 혁련강이 민망해할 때 예교령이 두 사람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영양가 있는 말씀을 하실 분들은 문상 오라버니와 총군사 오라버니예요. 두 분이 조사하러 나간 동안 쉬면서 장기나 두시던 분들이 말씀은 제일 많아, 하여간. 그러니 두 분 오라버니는 잠시 조용.”
“아……, 응…….”
“그, 그래야지…….”
백리우와 혁련강의 반응을 보며 제갈윤과 마연문이 웃었다. 백도와 마교의 지존이라는 존재들이 동시에 한 여인에게 훈계를 듣고 어린 아이들처럼 얌전해지는 모습이라니, 그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말이다.
제갈윤이 말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이게 딱 그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설마 그들이 장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고는 소생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 인근 만리장성의 군 관료들을 모두 매수했겠지요. 그로 인해 장성을 넘나드는 데 불편함이 없었을 겁니다. 정치권력과 연관되었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테고요.”
마연문의 대꾸였다. 그의 말에 제갈윤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혁련강이 제갈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곳이……, 척가장(戚家莊)이라고 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