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합일 (4)
“푸홧! 흐으읍! 헉! 헉! 허억! 허어어억!”
어두운 수면 위로 머리 하나가 솟아오르더니, 숨이 넘어갈 듯 가쁘게 호흡하기 시작했다. 진평이었다.
바로 이어서 또 하나의 머리가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연소운이었다.
“헉! 헉! 헉!”
그 또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앞서 떠오른 진평보다는 상태가 훨씬 나아 보였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또 하나의 머리가 솟아올랐다.
심소옥이었다.
앞선 두 사람이 거칠게 호흡하는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멀쩡했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자마자 심소옥이 연소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너무 방어 쪽에만 치중하고 있다니까? 방어도 중요하지만 기회가 포착되면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갈 줄도 알아야 한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해? 그래야 상대도 움직임이 위축되고…….”
심소옥이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연소운이 한 방향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던 탓이다.
심소옥의 고개도 자연스레 그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 직후, 그녀의 표정도 연소운과 비슷해졌다.
“수, 숙부!”
심소옥이 놀라서 외치자마자 연소운과 진평이 이어서 외쳤다.
“조장님……!”
동굴로 통하는 입구 근처의 바위 위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단유소였다.
“밤중에도 훈련이라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세 사람이 얼른 물을 벗어나 단유소의 곁으로 다가왔다.
특히 가장 빨리 다가온 사람은 심소옥이었는데, 그녀는 가까워지자마자 단유소에게 안겼다.
“숙부! 숙부…….”
심소옥이 안긴 상태에서 울먹이며 그렇게 말하자, 단유소가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걱정 끼쳐서 미안.”
그러자 단유소의 앞에 선 진평이 다급히 물었다.
“언제 일어나신 겁니까, 조장님!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응. 멀쩡해. 깨어난 건 대략 반 시진 전쯤이고.”
이번에는 연소운이 말했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조장님.”
감수성이 풍부한 연소운답게 목소리도 일렁이고 있었다.
“다들 걱정해준 덕이지.”
세 사람과 더불어 잠시 안부를 주고받다가 단유소가 물었다.
“그런데 다들 수련에 열심인가 보네? 오면서 보니까 신룡대고 흑풍대고 모두 곯아떨어져 있던데.”
심소옥이 대꾸했다.
“아무래도 물속이다 보니 같은 시간을 수련해도 몇 배는 더 힘들 수밖에 없잖아. 며칠 전에 처음 시작했는데, 다들 그때보다 많이 나아졌어. 여러모로.”
“고수들은 안 보이던데, 따로 작전이라도 수행하러 나갔나?”
단유소가 묻자 이번에는 연소운이 대꾸했다.
“아닙니다. 아직 물속에 있습니다. 조장들이나 그에 준하는 고수들의 경우, 낮에는 일반 대원들을 훈련시키고, 저녁 후에는 따로 그들끼리 무리지어 수련하거든요. 무리별로 입수하는 시간들이 다들 달라서요.”
“곧, 차례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진평이 첨언했을 때였다.
그의 말마따나 다른 인원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먼저 떠오른 인물들은 곽승추와 흑풍대의 조장들 세 명이었다.
그들이 떠오른 후,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선화란, 서백풍, 홍련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유소가 그들과 더불어 한동안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두 명이 거의 동시에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적룡과 송주였다.
적룡과 송주가 다가오자 앞서서 인사를 나누었던 모든 인물들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해안가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였던 세 사람이기에,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 것이라 여기고 알아서 배려한 것이다.
자리에 남은 세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 강호에 자네 같은 괴물이 불쑥 나타난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더군? 반칙이잖아, 천무검신 같은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건.”
적룡의 첫마디였다. 농담조였다.
“봐줘. 나도 방금 전에 알았다고. 우리 스승님이 그분이시라는 거. 나 또한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고.”
“어쨌거나 겉보기로는 멀쩡해 보이니 다행이군.”
“속도 멀쩡해, 이 친구야.”
단유소의 말에 적룡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송주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결국 깨어날 줄이야. 이거 아쉽게 됐군. 드디어 내가 이 바닥의 일인자가 되나 싶었더니.”
송주 또한 농담이었다.
단유소가 대꾸했다.
“안타깝게도 자네가 모시고 있는 분은 자네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야.”
“그러게. 그 좋은 영약들, 다 내가 먹겠다고 좀 더 칭얼대볼 걸 그랬어.”
“분위기를 보아하니, 안 그래도 교에 복귀하면 자네 몫도 단단히 준비하실 모양이야. 그러니 조금만 참아.”
그 말에 송주가 웃었고 단유소와 적룡도 함께 웃었다.
송주가 말했다.
“그땐 정말 끝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솔직히 마지막 순간에는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지.”
단유소가 대꾸하자 송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천운이었어. 그 순간에 예 궁주님과 심 궁주가 등장한 것은. 결국 자네의 지인들이니 나는 또 자네에게 신세를 진 셈이군.”
그 말에 단유소가 희미하게 웃었다.
송주는 천운이었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이면의 진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까 맹주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운이 작용하기는 했겠지만,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한설연이었다. 그녀가 황 노파와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며 지내온 덕분에 최악의 상황을 면한 것이다.
‘이번엔 당신이 나를 살렸네.’
물론 맹주가 대외비라고 했기에 그 사실을 송주와 적룡에게 밝힐 수는 없었다.
“그래. 천운이었지.”
단유소가 대꾸하자 송주가 말했다.
“덕분에 자네와의 오랜 약속도 지킬 수 있겠군.”
“그래. 밖에 나가면 이번에야말로 어떻게든 술 한잔하자고. 꼭.”
단유소가 대꾸하자 송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신형을 돌려 동굴의 한쪽 구석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작은 바위의 틈새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송주가 들고 있는 것은 누가 봐도 술병이었다. 양손에 한 병씩, 두 병을 들고 있었다.
“정말 술인가?”
단유소가 묻자 송주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황 어르신은 은신처마다 담가둔 술이 있다고 하시더군. 혹시 몰라서 항상 준비해두신다나? 그중에서 두 병만 얻은 거야. 자네와 술 약속을 했는데, 아직 지키지 못했다고 했어. 자네가 깨어나면 마시고, 아니면 마시지 않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흔쾌히 내어 주시더군.”
“하여간 잘한단 말이야. 그런 거.”
어느새 단유소와 적룡의 곁으로 다가온 송주가 적당한 바위 위에 앉았다. 그러더니 술병의 마개를 열며 말했다.
“죽음의 문턱을 밟아보니 알겠더라고. 약속은 지킬 수 있을 때 지켜야 한다는 걸. 사실 영약보다 더 먹고 싶었던 건, 자네와 함께 마시는 술이었거든.”
공감한다는 듯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이자 적룡도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했다.
“한 병 정도까지는 내가 껴도 되겠지.”
셋이서 천천히 술병을 돌려가며 마셨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술 한 병을 비우고 나니, 적룡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적룡이 사라진 어둠 속을 바라보며 송주가 전음으로 말했다.
[참 괜찮은 친구야.]
단유소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송주가 다시 말했다.
[내가 가만히 보니까, 저 친구하고 화 소저 사이에 뭔가 있어.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게 있어. 우리 모두 죽을 뻔했던 그날, 둘 사이에 뭔가 있었나 보더군.]
[훗. 싸우다 정들었나?]
[딱 그런 셈이지. 청춘이야, 청춘.]
그러자 단유소가 피식 웃더니 송주에게 물었다.
[그러면 자네는?]
[무슨 소린가?]
[아까 물에서 나온 홍련과도 이야기를 나눴지. 내게 안부를 물은 후에 전음으로 그러더군. 대주님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부대주가 대주 챙기는 정도지.]
송주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단유소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자 송주가 단유소에게서 술병을 넘겨받더니, 술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러더니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녀의 마음은 진즉 알고 있었네. 나도 그녀를 아꼈지만, 유능한 부하로서 아끼는 거라고 여겼었어. 한데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희한하게도 마지막에 그녀 생각이 나는 거야. 그제야 내 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지.]
[그래서, 자네의 마음은 전했나?]
[아니. 혈천맹이 정리된 후에 전하려고. 놈들을 깨끗이 정리하고 나서, 당당하게 내 마음을 전할 작정일세. 그래서 나, 그 전까지는 악귀가 될 생각이네. 혈천맹 놈들에게 단단히 각인시켜줄 걸세. 흑풍대주가 왜 흑풍대주인지를.]
[후! 이제야 좀 마두답군.]
단유소가 대꾸하자 송주가 말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당분간 자네가 내 수련을 도맡아줘야겠어.]
[얼마든지.]
돌려가며 빠르게 술병을 비운 두 사람이 진기를 일으켜 취기를 몰아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 * *
제갈윤이 전서의 내용을 천천히 확인하는 가운데, 그의 탁자 앞에 선 한설연은 노심초사하는 표정으로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전서를 내려놓은 제갈윤이 고개를 들어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깨어났다는군.”
한설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사, 상태는 어떻다고 합니까? 몸에 이상은 없다고 합니까?”
“몸에 이상이 없는 것은 물론, 아주 쌩쌩하다고 하는군.”
“아아아아……!”
한설연이 양손을 모아 목 아래에 대며 긴 탄성을 내뱉었다. 단유소가 만들어준 가락지가 매달려 있는 위치였다.
그녀를 향해 제갈윤이 전서를 내밀며 말했다.
“확인해보게. 그가 직접 작성한 전서니까.”
한설연이 전서를 받아 들고 그 내용을 확인했다.
과연 제갈윤의 말대로였다.
한설연이 전서를 품에 안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갈윤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허허. 이제야 좀 생기가 도는군. 지난 며칠간은 거의 울상이던데.”
“소, 송구합니다.”
“미안해할 것 없네. 그렇다고 해서 지난 며칠간 소저가 일처리를 소홀히 했던 것도 아니고. 내가 소저의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니.”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거나 정말 다행일세. 이 강호를 위해서도, 소저를 위해서도.”
한설연이 미소를 지어 보이자 제갈윤이 말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역량을 다해 결전을 준비해야 하네. 각오는 되어 있겠지?”
“물론입니다.”
“자네는 자네대로, 나는 나대로 작전의 초안을 작성해보도록 하세. 그리고 매일 그것들을 비교하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도록 하지. 그 과정에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남에게 발설해서는 안 되네. 문서로 남겨서도 안 되네. 모든 것은 나와 소저의 머릿속에만 있어야 하네. 내 말, 알겠는가?”
“명심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작전을 구상함에 있어, 필요한 사안들과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안들에 대해 모두 말해주겠네. 그 모든 것을 머릿속에 새기게. 내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궁금한 게 있으면 즉시 질문하고.”
“예.”
그 직후부터 시작된 제갈윤의 설명은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