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거점 타격 (5)
대답을 들은 왕운생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시선을 돌려 곽승추와 단유소의 기색을 차례로 살폈다.
상황이 이런데도 긴장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긴장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유일했다.
이런 상황에 얼마나 많이 처해봤으면 저렇게까지 차분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살아온 강호와 이들의 강호가 너무 다른 것 같아서 묘한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이윽고 서백풍의 신형이 강시들을 향해 짓쳐들었다.
슈슈슉― 슈악―
그의 창이 아까보다 더 빠르고 자유롭게 허공을 수놓았다.
왕운생은 주의 깊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의 속도가 더 빠르기는 하나, 내 속도와 큰 차이는 없다. 운용하는 진기의 양도 서로 간에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그는 베고 자신은 베지 못한다.
몇 가지의 차이들이 있었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건 역시 아까도 확인했듯 하나였다. 모든 차이들이 거기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타격하는 그 순간의 차이였다.
그 짧은 순간에 그는 매우 강력한 힘을 담는다. 그 순간의 진기 운용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악했다 하여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었다. 진기 운용법을 바꾼다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저런 식의 진기 운용이 몸에 익으려면 최소 몇 년 간은 그것에만 매달려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진기 운용 방식은 결정적으로 부드럽고 곡선적인 무당의 무학과도 어울리지 않아.’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당연한 결론이겠지만.
물론 그 방식을 찾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오늘의 경험은 적어도 자신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남겨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엽풍이라는 사내의 움직임은 아까보다 더 깔끔하고 빨라, 이미 강시들이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다리만 집중적으로 베어 강시들의 움직임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그래서 처리가 더 빨랐던 것이고.
“가시죠!”
서백풍이 낮게 외치더니 쓰러져서 꿈틀거리는 강시들을 뛰어넘었다. 왕운생도 신룡대와 함께 강시들을 뛰어넘어 동굴의 안쪽으로 진입했다.
그렇게 얼마간을 나아갔을까.
갑자기 통로가 밝아지는가 싶더니 커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아까 동굴에 진입해서 처음 봤던 공간보다 더 커다란 공간이었다. 어떻게 땅속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는지 의아할 정도로.
그리고 공간의 반대쪽 끝에, 대머리에 왜소한 체구의 노인 한 명이 서 있었다. 왕운생이 안력을 돋워 보니 주름이 쭈글쭈글한 노인으로 인상이 매우 음침해 보였다. 그는 한 손에 호롱불을 들고 있었다.
“키키키키키!”
노인이 웃었다.
무슨 저런 웃음소리가 다 있을까.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키키킥! 쥐새끼 같은 놈들에게 제법 실력은 있었던 모양이구나! 여기까지 기어들어 오다니!”
웃음소리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특이했다. 뭔가를 긁는 듯한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그래. 잘들 왔다. 키키킥! 잠시 후면 네놈들은 아주 커다란 무덤을 만들어준 노부에게 고마워하게 될 게야. 물론 저승에서 말이지. 키키키킥!”
대머리 노인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웃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노인의 앞에 있는 커다란 상자였다.
이 공간에 도달하자 아예 진하게 풍기는 유황 냄새와 폭약 냄새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의 주변에는 아마도 벽력탄을 제조하는 것으로 보이는 시설물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니 대머리 노인의 앞에 있는 저 커다란 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노인의 앞에 있는 상자가 매우 커서, 저 정도의 양이라면 동굴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저게 터지면 퇴로가 확보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매우 오랫동안 동굴 안으로 들어왔으니, 나가는 길도 그만큼 길 수밖에 없으니까.
곽승추가 빠르게 단유소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자는 아마도 벽력탄들을 옮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동귀어진을 노리는 듯합니다. 양이 많아서 위험해 보이는데, 조장님의 판단은 어떻습니까? 이곳에서 다 함께 탈출하는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단유소가 대꾸했다.
[놈들의 벽력탄은 성능도 대단하지. 너도 전에 청성산에서 봤을 것 아니냐.]
[어이쿠! 그랬죠, 참.]
단유소는 당시에 허공에서 떨어지던 수많은 벽력탄을 제어하여 산 아래에 떨어트렸다. 그때 산 아래에서 터지던 벽력탄에 청성산이 온통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곽승추가 다시금 단유소에게 물었다.
[이제 조장님 생각이 듣고 싶은데요? 탈출할 수 있는 그림입니까, 없는 그림입니까?]
[쉽지 않겠는데.]
단유소의 표정과 어조가 진지했다.
[저야 뭐 이곳에 묻혀도 괜찮은데, 조장님은 참 억울하시겠습니다그려.]
농담기가 가득한 어조.
단유소가 곧바로 되물었다.
[무슨 말이냐?]
[저야 뭐 신룡대에 와서 인생 한판 잘 놀았고, 나름 의미 있고 좋은 일들도 하고 살았잖습니까. 우리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건 나도 너와 같은데.]
[결정적으로 저는 연애도 실컷 하고 사랑도 실컷 하며 살았잖습니까. 조장님은 이제야 꽃피는 청춘이 왔고, 상대도 절세미인인 한 소저시니, 어찌 억울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전히 농담기가 가득한 어조.
그러자 단유소도 농을 하듯 대꾸했다.
[확실히 그건 문제구나. 저승에 가서도 너희들한테 놀림을 받을 것 같으니. 그러니 놀림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 혼자라도 반드시 살아야겠다.]
곽승추가 미세하게 웃었다.
어차피 단유소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예, 조장님. 어차피 다 죽게 될 상황이면 조장님이라도 꼭 사십시오. 제가 그렇게 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곽승추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쨌거나 곽승추가 가만히 살펴보니 노인은 장난기가 많고, 정신적으로도 약간의 문제가 있어 보였다.
[보아하니 저 노인에게는 심리전이 통할 법도 한데, 한번 찔러볼까요? 분명히 가까운 퇴로가 있을 텐데,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가 없어서요.]
[그래봐.]
단유소가 대꾸하자마자 곽승추가 노인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어어? 어르신께서는 혹시 그때 그 어르신이 아니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노인의 쭈글쭈글한 이마에 주름이 더 강하게 잡혔다.
곽승추의 언변이 너무 자연스럽고, 실제로도 노인을 알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했던 것이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곽승추를 향해 물었다.
“너, 너는 누구냐? 나를……, 아느냐?”
“어어? 나 진짜 기억 안 나요? 하긴, 그러실 수밖에 없겠구나. 벌써 십오 년 전의 일이니.”
대머리 노인이 경계의 빛이 가득한 기색으로 곽승추를 바라보며 눈알을 굴렸다. 그러다가 대꾸했다.
“아무리 봐도 나는 네놈이 처음이구나. 아마도 네놈은 노부를 상대로 개수작을 부리려는 뜻이렷다?”
그러자 곽승추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닌데. 분명히 어르신 같은데. 송구한 말씀이오나 어르신의 용안이 좀 특이한 편이잖습니까. 그래서 똑똑히 기억이 나는데……. 혹시 어르신께서는 십수 년 전에 감숙이나 청해 또는 사천 쪽에 들른 적이 없으셨습니까?”
아직 노인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백도인이 아니니 마교나 사파의 인물일 터였다.
곽승추가 말한 세 지역은 비록 정파의 영역이나, 마교나 사파인들이 몰래 돌아다니는 지역이기도 했다. 곽승추는 그런 곳만 콕 집어서 말한 것이다.
노인의 눈동자를 살피며 곽승추가 말을 이었다.
“혹시 어르신께서는 객잔의 어린 점소이에게 수고비를 제법 많이 챙겨준 적이 없으십니까?”
점소이의 나이가 어리든 많든, 강호인들은 대부분 그들에게 따로 동전 한 닢이라도 챙겨준다. 특히 지인들에게 식사나 술을 대접할 경우에는 더 시원시원하게 점소이를 챙겨주기도 한다.
돈이 아주 없지 않은 이상, 점소이가 기분을 조금만 잘 맞춰주면 대부분 그렇게 한다. 그러면 점소이도 그런 손님들에게 조금 더 신경을 써주니까.
“당시에 제 모친께서는 큰 병을 앓고 계셨는데, 점소이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병간호 비용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어르신께서는 지인들과 함께 계셨는데, 그때 어르신께서는 제게 수고비를 많이 챙겨주셨습니다. 그 돈으로 모친의 병간호 비용을 급하게 댈 수 있었던 겁니다.”
곽승추가 바로 말을 이었다.
“어르신도 아시다시피 점소이들은 사람들의 얼굴을 잘 기억합니다. 저는 아무리 봐도 그때 그분이 어르신 같습니다. 참고로 모친께서는 그 후로 수년 간 더 사시다가 작고하셨습니다. 그때 모친께서 더 오래 사실 수 있었던 건 모두 어르신 덕분입니다.”
대머리 노인이 눈알을 굴리며 곽승추를 자세히 훑었다. 그러자 곽승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에 이런 인연이 다 있군요. 아무튼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곽승추가 대머리 노인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아무리 네놈의 말이 맞다 해도 어차피 변하는 건 없다. 네놈은 무림맹의 개가 아니냐.”
대머리 노인이 짐짓 냉랭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곽승추가 내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비록 부정적인 대꾸를 해왔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노인이 답을 해주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성과였다. 아무리 봐도 노인이 특이한 성격일 것 같아서 시도한 것인데, 나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곽승추가 크게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에게 말했다.
“어르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다만 저라고 해서 뭐 대단한 정의감과 협의심이 있어서 무림맹에 들어갔겠습니까? 사람이 먹고살려고 이리저리 구르다 보니, 어쩌다가 여기에 이른 것이지요. 칼밥 먹고 사는데 무림맹이고, 마교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당시의 제 운명이 무림맹으로 이끈 것뿐이겠지요.”
대머리 노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음을 확인한 곽승추가 바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무림맹이든 혈천맹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곳에서 어르신도 돌아가시고 저도 죽을 운명인 것을. 그리고 저는 억울하지도 않습니다. 어르신은 적어도 제와 제 모친의 은인이시니까요. 그나저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곽승추가 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전방으로 아무렇게나 던지며 말했다.
“이따위 검 같은 것도 필요 없겠지요. 모쪼록 고통스럽지 않게만 보내주십시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어조와 표정이었다.
노인이 대꾸했다.
“그것만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게다. 번쩍하는 순간 다들 저세상에 가있을 테니까.”
그 말에 곽승추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더니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거, 사람들 참 매정하네요. 설마 어르신 혼자 뒤처리를 하게 만들고 본인들은 쥐새끼들처럼 다 빠져나간 겁니까? 진짜 너무들 하네.”
“……노부가 자청했다.”
“그자들이 분위기를 그런 식으로 몰아간 것은 아니고요? 살 만큼 사셨으니 미련도 별로 없을 것 아니냐는 둥의 소리를 해대지는 않았습니까?”
“…….”
대머리 노인이 대꾸하지 못하자 곽승추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그러더니 곽승추가 허리춤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어 들었다. 이어서 그가 마개를 열고 그 내용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의 입가로 한 줄기 맑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크으으으으……!”
곽승추가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그런 소리를 내자, 대머리 노인이 갑자기 큰 관심을 보였다.
“그, 그것은 설마 술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