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거점 타격 (4)
왕운생의 눈동자가 다시 커졌다.
검은 인영의 전음이었다. 왕운생이 놀란 건 그 전음에 담긴 내용 때문이었다.
신룡대.
순간적으로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아했다.
하지만 분명히 신룡대라고 했다.
오랜 세월 강호에 몸담고 있었지만, 신룡대에 관해서는 말만 무성하게 들었을 뿐이었다. 이처럼 직접 본 적은 처음이었기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나저나 신룡대라.
아직 한참 젊은 나이인 듯한데 저렇게 강하다니.
과연 명불허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들이 혈강시로 이렇게 시간을 끈다는 것은 안쪽에서 위험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까 들으셨겠지만 벽력탄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행여 동굴 안에서 벽력탄이 터지면 몰살입니다.]
엽풍이라고 본인을 밝힌 사내의 전음이 빠르게 이어졌다.
[계속해서 혈강시가 막아선다면 지금처럼 인원이 많아도 진형상으로 효율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정혼단은 대피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남은 조사는 저희들이 마저 하겠습니다.]
[하면 자네들이 위험해지지 않겠는가? 아무리 신룡대라도 이런 동굴에서 벽력탄이 터지면…….]
그러자 두 구의 강시들을 처리하는 와중에도 엽풍이 빠르게 대꾸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희들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생존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습니다. 일단 단원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시지요.]
[알겠네.]
[이렇게 된 이상 많은 분들이 제 정체를 짐작하게 될 겁니다. 잠시 제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시간이 지체되면 곤란합니다. 관심이 너무 집중되지 않도록 대협께서 배려를 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적당히 둘러대시면 제가 맞추겠습니다.]
그 즈음 두 구의 혈강시가 엽풍이라는 사내에 의해 쓰러졌다.
뒤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그대는…… 누군가!”
놀람 가득한 음성의 주인공은 팽야창이었다.
서백풍이 천천히 신형을 뒤쪽으로 돌렸다. 시야에 보이는 모든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백풍이 말없이 왕운생을 바라보자 왕운생이 뒤쪽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는 맹주께서 우리를 돕고자 파견한 인물이오.”
그 말을 들은 많은 이들의 눈매가 좁혀졌다.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던 황보균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면 그는 설마……!”
“여러분께서 생각하시는 그 설마가 맞을 것이오.”
“그가 정말 신룡대라는 말씀입니까?”
여전히 놀람이 가득한 음성.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왕운생이나 그들이나 신룡대를 접한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서백풍의 신위를 눈앞에서 확인한 마당이니 더더욱.
왕운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어쨌거나 이곳은 좁은 동굴이고, 방금 전처럼 혈강시가 앞을 막고 있다면 어차피 우리는 도움이 안 되오. 게다가 아까 다들 들으셨겠지만 적들이 벽력탄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소. 그게 터지면 우리는 모두 생매장될 수도 있소.”
왕운생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안쪽의 조사는 이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밖으로 나가서 퇴로 차단에 힘을 싣는 게 좋을 것 같소. 신룡대의 신위는 이미 보셨을 테니 더 긴 말은 필요가 없을 듯하외다.”
누군가가 안쪽을 조사하기는 해야 한다.
그러나 도움이 안 되는 전력들이 계속 붙어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걸, 이미 혈강시들을 통해 겪은 마당이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수긍하는 빛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의 시선은 서백풍에게 고정된 채였다.
“어서 갑시다. 시간이 촉박하오. 우리가 여기에서 계속 이러고 있어봐야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오.”
왕운생이 다시 한번 말하자 모두가 돌아섰다.
돌아서는 황보균을 향해 왕운생이 전음을 보냈다.
[돌아보지 말고 들으시오. 황 장로가 단원들을 잘 인솔해주셨으면 좋겠소. 나는 책임자로서 이들과 함께 움직일 생각이오. 어차피 모든 분들이 신룡대의 신위를 확인한 마당이니, 이 순간 내가 공을 탐하려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해주시리라 믿소.]
황보균은 정협단의 제이대주다. 그렇기에 그에게 전음을 보낸 것이다.
왕운생의 말처럼 이제 동굴 안쪽을 조사해서 공을 세우는 건 불가능해졌다. 실력이 안 되기도 하거니와, 이미 신룡대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신룡대에 공이 돌아가는 건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신룡대는 무림맹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니까.
가뜩이나 황보균의 입장에서도 왕운생의 경지가 범상치 않다는 걸 확인한 마당이었다. 이곳에 있는 명숙들 중에서 그나마 혈강시에게 생채기라도 낼 수 있는 사람은 왕운생이 유일했으니까.
[왕 장로님께서 공을 탐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왕운생은 무당의 제자로서 평소 욕심이 없고 양보심이 많으며 성품이 솔직하기로 유명했다. 그렇기에 황보균의 그 말은 진심이었다.
[다만, 자칫 위험에 빠지지 않으실까 하여 그게 염려됩니다.]
돌아서서 멀어지는 와중에 황보균이 그렇게 전음을 보내자 왕운생이 대꾸했다.
[걱정해주셔서 고맙소. 혹여 내게 변고가 생기거든, 무당에 계신 장문 사형께는 본인의 선택이었다고 전해주시오. 부탁드리겠소.]
[알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왕 대협.]
모두가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다섯 명이 남았다.
신룡대인 단유소, 서백풍, 곽승추, 이검인에 왕운생까지였다.
“불편할 수 있다는 점, 알고 있네. 그러나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걸세. 귀찮게 하지도 않겠네.”
단유소와 서백풍은 왕운생이 이곳에 남은 이유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아까 혈강시를 상대할 때 그의 실력을 가늠했기 때문이다.
왕운생의 경지는 서백풍과 큰 차이가 없었다. 왕운생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백풍은 혈강시를 어렵지 않게 베고 본인은 베지 못하니, 그 이유를 알고 싶은 것이다.
왕운생 정도 되는 고수라면, 본인보다 더 나은 사람의 실전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즉, 지금이 아니면 영영 그 벽을 허물지 못할 것이라는 절박함이 작용한 것이다.
단유소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수긍해야 하는 문제였다. 상대는 강호 명숙이었다. 그것도 무당파의 장로씩이나 되는.
게다가 지금은 이런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왕운생에 대한 세간의 평이 매우 좋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단유소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 모습을 확인한 서백풍이 왕운생을 향해 말했다.
“가시죠.”
다섯 명은 빠르게 동굴 안쪽으로 나아갔다.
선두에서 달리는 건 곽승추였고 그 뒤를 서백풍이, 그 뒤를 이검인과 왕운생이 따랐다. 단유소는 후미를 맡았다.
왕운생이 보니 네 사람 모두 경공이 매우 탁월하여, 아까의 정협단원들이 우르르 움직일 때와 속도 차이가 컸다.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나? 물론 방해가 된다면 묻지 않겠네. 또한 답하기 껄끄러운 질문이라면 답을 회피해도 되네.]
앞에서 달리는 서백풍을 향해 왕운생이 전음을 보냈다. 그러자 서백풍이 그 내용을 그대로 단유소에게 전했다. 단유소가 승낙했다.
[어차피 우리의 정체가 드러났으니 이런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맹과 무당의 관계가 돈독하니 행여 서운함 느끼시지 않게 답해드려. 너라면 왕 대협이 왜 따라붙었는지 알 테니, 성의 있게. 적의 상황에 대해서는 내가 집중하고 있겠다.]
단유소에서 대답을 들은 서백풍이 왕운생에게 대꾸했다.
[하문하십시오. 답해드릴 수 있는 부분은 답해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왕운생이 물었다.
[이곳에 있는 네 사람 모두가 신룡대원인가?]
[그러합니다.]
[그 특수첩보조의 인원들 모두?]
[예.]
[허어.]
왕운생이 놀랐다는 어조로 그런 반응을 보였다. 그가 다시 전음을 보냈다.
[신룡대원들은 모두 자네들처럼 젊은가?]
[딱히 연령 제한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대부분은 젊습니다.]
신룡대에 들어오는 순간 임무뿐인 삶을 살게 되니, 대부분의 대원들은 삼십 대 중반쯤 되면 은퇴하곤 했다. 물론 그 전에 은퇴하는 대원들도 많다. 그래서 신룡대가 젊은 것이다.
[이렇게 직접 보니 자네들 모두가 젊은 용들임을 잘 알겠군. 강호인들이 괜히 신룡대, 신룡대 하는 게 아니었어.]
대원들의 빼어난 경공 실력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신룡대원들의 경신술은 빼어난 게 당연했다.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에 높은 수준의 경신술은 필수인 것이다.
[과찬이십니다.]
서백풍이 대꾸했다.
약간이 흐른 후에야 왕운생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어떻게……, 벨 수 있는 건가?]
매우 단도직입적인 질문.
서로가 비슷한 경지에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 누군가는 혈강시를 벨 수 있고 누군가는 벨 수 없느냐는 뜻이었다.
왕운생 같은 강호 명숙이 그런 걸 묻는다는 건, 자존심을 내려놓았다는 뜻이었다. 서백풍이 아무리 신룡대이고 상대적으로 고수라 해도, 강호의 위계로 따지면 한참 후배인 게 사실이니까.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자네에게 이런 걸 묻는 게 창피하기도 하네. 그러나 창피함 따위 얼마든지 무릅쓸 수 있네. 자네도 알겠지. 이쯤 되면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이 뿌연 어둠 너머를 얼마나 보고 싶은지. 그래서 실례인 줄 알면서도 자네들을 따라온 것이고.]
서백풍은 잠시 말없이 경공을 펼쳤다.
뭔가를 고민하는 모양이었는데, 왕운생도 그의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이윽고 서백풍이 대꾸했다.
[잘 아시겠지만, 그러한 것들은 말로 설명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다만, 소생의 경우에는 소생보다 더 뛰어난 동료들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엽풍이라는 사내의 이야기 중에 놀랄 만한 부분이 있어, 왕운생은 그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보다 더 뛰어난 동료들이라고 했나? 아니 자네도 젊은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실력인데, 그보다 더 뛰어난 동료들이 있어?]
[그러합니다. 참고로 소생의 실력이야 아까 여러 명숙들에게 밝혀졌지만, 방금 소생이 말씀드린 내용은 왕 대협께서만 알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특성상, 신룡대는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이득 볼 게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일세.]
두 사람이 그런 전음을 주고받던 때였다.
쿵쿵쿵쿵쿵―
수많은 발소리들이 들렸다.
아마도 강시들로 짐작되는 무거운 발소리.
아까의 강시들은 꺾어지는 곳에 대기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강시들은 먼 곳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강시들의 목적이야 빤했다.
“이번에는 숫자가 많은 것 같은데. 최소 대여섯 구는 되어 보이네만…….”
왕운생의 말에 서백풍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서백풍이 선두에 있던 곽승추와 위치를 바꿨다.
강시들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잠시 더 나아가자 동굴의 통로가 점점 넓어졌다. 지금까지는 강시 두 구 정도면 꽉 찰 만한 폭이었는데, 이제는 네댓 구가 달려들어도 충분한 공간이 나온 것이다.
‘아무리 저 친구의 실력이 뛰어나다지만 혼자 상대하기에는 버겁지 않을까?’
하지만 엽풍이라는 청년 외에는 딱히 대안이 없기도 했다. 돕고 싶지만 자신은 실력이 안 되니까.
또한 엽풍이라는 청년을 따르는 대원들도 분명히 실력자들이지만, 왕운생이 볼 때 엽풍만 한 고수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우려스러운 것이다.
“만약 저 친구가 위험해지면 어떻게 대처할 생각인가?”
왕운생이 이검인에게 묻자 이검인이 차분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는 괜찮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