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결사 항전 (3)
목종림이 자신의 검에 전신의 기운을 모조리 끌어모았다. 그의 검을 타고 짙은 빛무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렇게 해야만 막을 수 있는 공격이었다. 진기를 아끼는 등의 여유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콰아앙!
강렬한 폭음이 들렸다.
‘읍……!’
목종림은 절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겨우 참아냈다. 가느다란 강기가 와서 부딪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반탄력이 엄청났다. 손아귀가 저려왔다.
그러나 고통 따위를 느끼고 있을 새가 없었다. 어느새 특유의 가느다란 도강이 미세한 시간 차를 두고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종림이 연속으로 검을 휘둘렀다.
콰광!
‘크윽……!’
반탄력으로 인한 충격도 갑절이었다.
검을 쥔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팠다. 이제는 팔이 저려오고 있었다. 충격으로 인해 체내의 진기마저도 요동치고 있었다.
보아하니 들고 있던 검의 날이 상해 있었다.
세상에, 강기를 가득 주입한 검의 날이 상하다니, 대체 저 청년의 강함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황의 청년은 제법이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목종림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잘해야 한두 번 정도?
그 생각을 하던 찰나, 청년이 또다시 도를 휘둘렀다. 이전보다 휘두르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즉, 이어질 그의 공격도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할 것이라는 뜻.
목종림의 귓전으로 한 줄기의 전음이 날아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숙이십시오!]
너무도 기다렸던, 반가운 목소리.
목종림이 이유를 따지지 않고 곧바로 자세를 낮췄다.
그러자마자 후방에서 날아온 무언가가 목종림의 등 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슈슈슉―
그 즈음에야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등 위를 스치고 지나간 그 무언가가 얼마나 빠르며 얼마나 강력한 힘을 담고 있는지를.
콰과광!
목종림의 앞에서 강력한 폭음이 일었다.
진기와 진기의 폭발이었다.
즉, 목종림의 등 위를 스쳐 지나간 것은 누군가가 원거리에서 발출한 강기였던 것이다.
목종림이 폭발의 여파에 의한 거센 풍압을 느끼며 허리를 세울 때, 누군가가 허공을 날아 그의 앞에 착지했다.
쉬익― 척!
그는 역시나 단유소였다.
[사정상 후미 쪽의 전력이 공백 상태입니다. 조치가 필요합니다. 연소운을 데려가십시오. 자세한 얘기는 백풍이 해줄 겁니다.]
[알겠네.]
목종림이 빠르게 대꾸하며 신형을 돌렸다.
길을 막고 있는 적이 저 황의 청년뿐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분명히 그를 지원하고 있는 누군가가, 또는 무리가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단유소 혼자서 이곳을 막기엔 역부족일 수도 있다. 당장 그가 혼자서 저 황의 청년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안정감이 드는 건, 아마도 단유소가 묵룡이라 불리는 사내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단유소의 마음씀씀이도 고마웠다.
굳이 연소운을 데려가라고 한 건, 자신의 안전을 염려해서였을 것이다. 방금 전에 자신이 황의 사내를 막아내느라 기운을 많이 소모한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목종림은 연소운의 빼어난 실력을 이미 직접 경험한 바 있었다. 그래서 든든했다.
목종림이 연소운을 바라보며 경공을 펼치기 시작하니, 연소운이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의 뒤를 따랐다.
황의 청년이 미소 띤 얼굴로 단유소를 향해 말했다.
“처음 보는데도 당신이 누군지 알 것 같군. 드디어 나타나셨군그래. 내가 여태 기다리던 사람도 사실은 당신이었거든.”
표정 없는 얼굴로 조용히 황의 청년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실상 단유소는 주변의 기척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산길 옆, 능선 위쪽 경사면의 숲 속에 대여섯 명가량의 무인이 숨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감지하지 못했을 기척이나, 한설연에 의해 영약을 복용한 후로 감지 능력도 상승했다. 대라유유선공의 단계가 상승한 덕분이었다.
감지가 되는 기척이긴 하나 그들의 실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평균적인 신룡대원들의 실력 이상인 듯했다.
그러나 왠지 그들이 전부가 아닐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늘밤, 적들은 작정하고 이곳에 온 모양이니까.
대라유유선공의 경지가 상승한 상태에서도 자신이 기척을 잡을 수 없는 상대라면, 상황이 매우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능선 아래쪽 경사면에서도 감지될 듯 말 듯 한, 매우 미세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단유소는 그러한 기척의 정체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살수 특유의 기척이었다.
여태껏 상대해왔던 적들 특유의 느낌이 아닌 것으로 보아, 그들은 목종림이 언급했던 청성의 조력자들인 듯했다. 그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단유소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을 파악하고 있을 때, 황의 청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홍학과 백학을 처치했다더니 역시나 실력이 범상치 않더군? 과연 묵룡이라 그건가?”
홍학(紅鶴)이라는 호칭은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에게 큰 상처를 입혔던 백의 청년에게서였다. 백학(白鶴)이란 아마도 그 백의 청년을 말하는 것 같았다.
단유소가 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황학(黃鶴)인가?”
“그렇게 불리지.”
황의 청년의 대꾸에 단유소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두루미 망신은 당신들이 다 시키고 있었군그래.”
“용(龍) 망신은 안 시킬 자신이 있나 보네?”
그 말에 단유소가 또다시 피식 웃더니 물었다.
“그래서 학은 총 몇 마리나 되나?”
“몇이 더 있건 상관없잖아? 어차피 당신이 기억할 수 있는 건 나까지 셋뿐일 텐데.”
“그런 말을 들은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최소한 네 마리까지는 확인해야겠군.”
단유소의 대꾸에 황학이 입술을 비틀며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그가 단유소에게 물었다.
“나, 당신한테 진짜 궁금한 거 있는데.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좀 물어봐도 될까?”
단유소가 뭐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황학이 바로 입을 열었다.
“당신, 한동안 교월이랑 둘만 붙어 다녔잖아. 그녀랑 잤어?”
갑작스러운 직설적인 표현에 청성 문도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모두가 당황한 표정이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문도들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당황스러운 사람은 역시 한설연 본인이었다. 진실 여부를 떠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런 얘기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그녀의 볼이 붉어져 갈 때였다.
[자극하려는 거야. 진정해.]
그 또한 당사자인데,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냉철함이라니.
어쨌거나 한설연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시작할 무렵, 단유소가 황의 청년, 황학을 향해 물었다.
“안 잤다고 하면, 믿게?”
그러자 황학이 고개를 저었다.
“못 믿지. 청춘 남녀 단둘이서 수많은 밤을 함께 보냈는데, 어떻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
그 순간, 황학이 채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두 눈을 부릅떴다.
단유소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황학은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리 고수라도 움직이기 위해서는 미세하게나마 준비 자세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방금 전의 묵룡은 그런 게 없었다. 문득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싶었던 순간, 그가 자신의 바로 앞에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슈슉―
이미 그의 묵색 쌍소검이 연달아 휘둘러진 상태.
황학이 보니 두 자루의 소검에는 빛무리가 맺히지 않은 상태였다. 강기를 주입하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묵룡은 탐색전 느낌으로 한번 기습을 해본 모양이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무시할 수 있는 공격은 아니었다. 상대의 속도가 워낙 빨랐으니까.
그러데 하필이면 자신은 도를 늘어뜨리고 있던 상태였다. 고로 무기를 이용해서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
황학이 호신강기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신형을 뒤로 뺐다. 동시에 도를 들어 올리며 묵룡의 하체를 향해 휘둘렀다.
무기를 이용해서 방어하기에는 늦었으니 오히려 공격을 가함으로써 상대를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그 순간, 묵룡의 팔이 쭉 늘어났다. 물론 실제로 팔이 늘어난 건 아니었고, 동작이 너무 빨랐던 탓에 생긴 착시 효과였다.
서걱―
그 소리가 들릴 즈음 황학의 두 눈동자는 휘둥그레져 있었다. 도를 든 팔의 상박 부분에서 불에 덴 듯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묵룡의 검이 자신의 팔에 상처를 낸 것이다. 상처가 결코 옅지 않았다. 무시할 만한 수준의 상처가 아니었다.
황학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순간적이었지만 분명히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렸었다. 검기는 말할 것도 없고 어설픈 강기 정도는 큰 문제없이 막아낼 수 있을 만한 호신강기였다.
그런데 강기도 맺히지 않은 검으로 호신강기를 뚫다니?
하지만 의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을 새가 없었다.
신형을 뒤로 빼긴 했으나, 상대가 거리를 더욱 좁히며 품으로 파고들고 있었던 탓이다.
슈슈슈슉―
쌍소검이 빠르게, 연달아서 찔러왔다.
상대인 묵룡은 도를 회수할 잠깐의 틈조차 내어 주지 않았다.
황학은 후회스러웠다.
결국 처음부터 판단 착오였다.
묵룡이 기습한 순간에 견제의 목적으로 오히려 그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아예 그때 도를 회수했어야 옳았다.
도는 기본적으로 찌르는 용도가 아니라 베는 용도의 무기이다. 가뜩이나 자신의 도는 커다란 도였다. 지금과 같은 초근접전에서는 효율을 발휘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지금 자신은 도를 쓰는 팔을 다친 상태였다.
그러나 상대의 무기는 소검, 그것도 쌍소검이었다. 소검이니 지금과 같은 초근접전에서 매우 유리하다. 게다가 검의 기본적인 특성상 찌르기에도 좋고 베기에도 좋다. 묵룡은 현재 그 유리함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친 것도, 상황이 이렇듯 불리해진 것도 모두 방심의 대가였다. 그 대가가 너무 컸다.
황학이 이를 악물었다.
황학은 어느새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며 상대의 공격을 피하거나 흘리는 동시에 도를 쥐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장력을 끌어올렸다.
묵룡의 속도 또한 무시무시할 정도로 빠른 데다가 틈을 주지 않고 찰거머리처럼 달라붙고 있으니, 피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탓이다.
더러는 피하고 더러는 막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전히 호신강기는 극한으로 끌어올린 상태였다.
휘휙― 펑! 퍼벙!
부지런히 피하는 와중에 장력으로 묵룡의 쌍소검을 막았을 때였다.
“큭……!”
결국 황학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장력을 발출하던 손바닥을 묵룡의 소검이 관통했기 때문이었다.
손바닥의 상처가 아픈 것보다 놀람이 더 컸다.
초근접전이고 선수를 빼앗겨 급하게 막아냈던 건 맞다. 그러나 분명히 손바닥에 강기를 주입하여 막았었다.
그런데 강기도 주입되지 않은 상대의 소검이 자신의 강기를 뚫고 손바닥에 상처를 입힌 것이다.
‘어떻게……!’
저 묵색의 쌍소검이 신병(神兵)이라도 되는 건가?
또다시 의문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쯤 되자 황학으로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묵룡은 강하다.
어차피 이런 식이라면 절대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포기할 건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힘을 다해서 그를 상대해야 한다.
판단이 끝난 순간, 황학은 아예 자신이 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그대로 놓아버렸다.
양손이 자유로워졌다. 비록 무기는 없지만 지금과 같은 근접전을 치르기에는 훨씬 나아졌다.
그러자마자 황학은 전신의 진기를 가득 끌어모아 열 손가락에 집중시켰다.
이윽고 그의 열 손가락에서 발출된 열 가닥의 지풍이 단유소를 향해 한꺼번에 폭사되었다.
슈슈슈슈슈슉―
그 모든 지풍이 날카로운 강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