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결사 항전 (2)
상청궁을 향하여 빠르게 산길을 오르던 청성의 문도들이 황의 청년을 발견한 건 방금 전의 일이었다. 그는 산길의 위쪽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산보라도 하듯, 뒷짐을 진 채로 혼자서 천천히 걸어 내려오던 황의 청년의 모습에 모두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년의 표정이나 행동이 워낙 태평하다 보니, 그가 아군 측 조력자인지 적인지조차 알 방법도 없었다.
깜짝 놀랄 일이 발생한 건 그 직후였다.
황의 청년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고 생각된 순간, 그가 아래쪽을 향해 도를 수평으로 그었던 것이다.
그 동작이 얼마나 느릿느릿했는지, 청성의 문도들 중에서 가장 무공이 약한 문도들의 눈에도 그 동작이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
위험한 느낌의 그 미소를 보니 아마도 적인 듯한데, 웬 미친놈이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다. 그런 건 무공도 무엇도 아니었다. 어이가 없었다.
“피햇!”
날카로운 음성이 들린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중진에 있던 목종림이었다.
장문인이 괜히 피하라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닐 텐데, 대체 무엇을 피하라는 걸까. 어디로, 어떻게 피하라는 걸까.
선봉에 있던 무인들이 그런 의문을 품은 찰나였다.
샥― 샥― 샤악― 샤샥―
마치 칼로 종이라도 베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직후 모두가 경악했다.
선봉에 있었던 청의위와 청심대 무인들의 몸이 갈라지며 그대로 신형이 무너져 내리는 게 아닌가.
선봉에 서 있었던 십여 명의 인물들을 관통한 그 기운은 그 후열에 서 있던 문도들까지 벤 후에야 사라졌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장난이라고 생각했던 수법에 이십 명에 가까운 인원들이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물론 초고수들이라면 대부분 한 번의 출수로 그 정도의 인원을 살상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문제는 그 한 번의 출수에 의해 당한 게 선봉에 있던 청의위와 청심대라는 점이었다. 청성파에서 가장 강하다는 정예들이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당한 것이다.
즉, 저 황의 청년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초고수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모두가 벌벌 떨며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척!
그 순간 행렬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도약하여 문도들의 앞에 내려섰다. 그 뒷모습의 주인공은 목종림이었다.
“장문……!”
“장문 어른……!”
황의 청년이 얼마나 위험한 고수인지 똑똑히 봤으니, 문도들이 저마다 우려가 가득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장문 어른, 너무 위험한 행동이십니다! 상대의 실력을 아시잖습니까!]
진평의 전음이 목종림의 귓전으로 날아들었다. 목종림의 호위를 맡고 있는 만큼, 그의 현재 상황이 너무도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문도들 앞에서 뒷짐을 진 채로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진평이 우려한 대로 목종림도 이 상황이 매우 두려웠다. 떨지 않으려 해도 미세하게 떨리는 본인의 무릎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눈앞의 황의 청년은 그 정도로 강했다.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단유소나 포원이라 해서 저 청년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강했다.
괜히 결사 항전을 택한 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되었다.
지금의 상황은 앞뒤로 포위된 형국이었다.
뒤에서는 강시를 대동한 적이 물밀 듯 추격해오고 있는데, 앞에는 저렇듯 강한 자가 버티고 있어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다. 차라리 혈로를 뚫고 청성을 빠져나가는 게 더 나은 판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종림은 태연한 기색을 제법 잘 유지하고 있었다. 장문인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자신이 흔들리지 않아야 뒤에 있는 문도들이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목종림이 황의 청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진평에게 대꾸했다. 입술을 달싹이지 않는 전음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포 사숙과 단 공자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려면, 장문인 정도 되는 사람이 목숨을 걸 수밖에.]
진평이 대꾸하는 대신 이를 악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너무 위험한 판단이긴 하나, 현재의 상황에서는 최선의 판단이기도 했다. 물론 그가 죽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황의 청년은 오르막에 서서 목종림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는 그의 저 미소가 섬뜩하고 잔인한 미소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미소 띤 얼굴로 황의 청년이 말했다.
“문도들을 위한 장문의 희생정신이라. 애잔하네.”
청성 문도들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뻘 되는 장문인에게 반말을 찍찍 해대는 황의 청년의 모습에 분노한 것이다.
“실로 무릎이 떨릴 정도로 강한 분이시구려. 이미 알고 계시듯 빈도는 청성의 장문이오. 목종림이라 하외다.”
자식뻘의 청년은 건방진데 아버지뻘인 장문인은 공손하기 이를 데 없다.
뒤쪽에 있던 한설연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누가 봐도 한 문파의 수장다운 대처였다. 어른다운 대처였고 도를 추구하는 사람다운 대처였다.
목종림의 음성은 차분하고 그의 분위기는 의연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문도들의 동요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목종림이라는 구심점을 향해 정신이 결집되고 있었던 것이다.
황의 청년이 피식 웃었다.
“훗! 빤한 수작. 시간을 벌어보시겠다 그거겠지.”
“명철하기까지 하시구려. 하긴 그러니 젊은 나이에 그토록 강해진 거겠지. 대단하시오.”
그 말에 황의 청년이 또다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보니까 여기 참 재미있는 동네던데? 저 위에 보니까 살수들이 대기하고 있더라고. 보아하니 당신들의 조력자인 것 같던데, 당신들이 고용한 건가? 소위 백도의 명문이라는 이곳에서 본인들을 지키겠다고 살수들을 고용할 줄이야. 아주 막장이네.”
청년의 말에 청성의 문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 가운데 목종림과 한설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아차렸다니……!’
청성의 살수들이야말로 두 사람이 기대하고 있던 최후의 한 수였다. 그런데 청년이 알아채 버린 것이다.
갑자기 밝혀져 문도들이 동요한 것이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기습이 완전히 물 건너가 버렸다. 상황이 갈수록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목종림이 말했다.
“과거의 개인적인 인연이었다오. 은혜에 보답하고자 왔다는데, 본 파의 상황이 이렇듯 힘겹다 보니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이더구려. 그래서 그들이 돕는다는 걸 허락했소.”
무엇보다도 살수들의 생사 여부가 너무 궁금했지만 황의 청년에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괜히 그들을 걱정하는 분위기를 풍길 필요는 없었다. 문도들에게나 황의 청년에게나.
어쨌거나 그가 살수들의 존재를 알았다는 건, 분명히 그들에게도 손을 썼다는 의미였다. 현실적으로 살수들이 모두 당하지는 않았겠지만 황의 청년 정도 되는 고수에게서 그들이 얼마나 살아남았을지 걱정이 되었다.
‘제발 무사하기를…….’
비록 살수들을 통한 기습 작전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현 상황에서 청성의 큰 전력인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시간을 끄는 일.
목종림이 황의 청년에게 물었다.
“공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공자가 속한 세력이 어딘지도 모르나, 근래 우리 청성은 어딘가에 해를 끼친 적이 없었소. 한데 대체 왜 우리를 핍박하는 것이오?”
그 말에 황의 청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간을 끌려는 수작인 줄 빤히 알고 있지만 그냥 어울려준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할까? 내가 그만두라고 하면 아마 다들 그만두고 물러갈 텐데.”
황의 청년의 말에 청성의 문도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목종림도 궁금하긴 했다. 이미 많은 피해를 입긴 했으나 남은 인원이라도 보전하면 회생하기가 훨씬 수월할 테니까.
황의 청년이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교월. 그녀를 넘겨. 그러면 이대로 물러가 주지.”
문도들은 의아했다.
교월이라면 그 유명한 천하제일미 한설연일 텐데, 그녀를 현월곡에 가서 찾아야지 왜 청성에서 찾고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문도들이 하나둘씩 한곳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의문을 갖다 보니 문득 생각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엊그제 손님으로 왔던 그녀.
오늘 전투가 벌어진 이후로, 내내 장문의 곁에 붙어 있었던 그녀.
‘설마……?’
문도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목종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동도이자 친구인 사람을 내어 주고 문파의 안녕을 도모한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그 말에 문도들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장문인의 말인즉, 그녀가 한설연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셈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 유명한 교월 한설연이 여태 함께하고 있었다니.
황의 청년이 입을 열었다.
“아까 우리가 왜 당신들을 핍박하냐고 물었었지? 그녀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거든. 게다가 당신은 청성의 장문이잖아. 문파가 우선이고 제자들의 안전이 우선이어야 하지. 굳이 일개 외부인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할 필요가 있겠어?”
그 말에 문도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청성이 이 큰 고난을 겪고 있는 이유가 한설연, 바로 그녀 때문이었다니. 어쩌면 멸문지화를 당하기 직전인 이 상황이, 바로 한설연 때문이었다니.
그런 생각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자, 평소의 호감을 떠나서 그녀에 대한 반감이 생기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 밤, 이미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른 탓이었다.
그 즈음, 목종림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대단하시오. 시간을 끌려는 내 의도에 맞춰주는 척하면서 오히려 심리전을 펼치며 우리 문도들을 흔들리게 하다니.”
황의 청년을 향해 대단하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한 목종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젊은이.”
황의 청년을 상대한 후 처음으로 목종림의 입에서 하대가 나왔다. 황의 청년의 눈동자가 이채를 띨 때 목종림이 바로 말을 이었다.
“정(正)과 의(義)와 협(俠)을 추구한다는 백도에서 적에게 친구를 내어 주고 제 살길만 도모할 문파라면, 차라리 그 문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낫다네. 그게 시정잡배들과 우리의 차이일세.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그 고귀함이 있기에 명문이 명문으로 존재하는 거거든.”
적을 상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목종림의 어조는 자상했다. 망설임도 없었고 흔들림도 없었다. 목종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청성이 끝까지, 의롭고 고귀했던 명문으로 남길 원하네. 그게 내가 장문으로서 문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지막 전언이기도 하지. 만약 오늘 우리 청성의 역사가 끝난다면 말일세.”
“쳇! 역시 꼰대 상대로 말을 오래 섞는 게 아니었어. 처음에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냥 처리해버리는 거였는데.”
황의 청년의 입가에 다시금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그 직후, 그가 늘어뜨리고 있던 커다란 도를 들었다.
한설연이 침을 꿀꺽 삼켰고 진평이 이를 악물었다.
목종림은 전신의 진기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도복이 거세게 펄럭이기 시작한 순간, 황의 청년이 커다란 도를 횡으로 그었다.
스윽―
그의 도에서 매우 미세하고 얇은 호선이 발출되었다.
목종림이 이를 악물었다.
바로 저것이었다.
처음에 문도들이 당한 것은 저 실처럼 가느다란 강기 때문이었다.
시야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기운도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저 가느다란 강기에 담긴 힘은 결코 우습지 않다.
은밀하고 날카로우며 강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