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결사 항전 (4)
지풍이 모든 범위를 점하며 한꺼번에 날아왔기에 단유소는 더 이상 황학과의 거리를 좁힐 수가 없었다.
단유소의 쌍소검이 허공에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파바바바바바방!
황학이 발출한 지풍을 모두 쳐냈지만, 이미 서로의 거리는 벌어져 있었다.
단유소는 아쉬웠다.
사실, 초반부터 거세게 황학을 밀어붙인 건, 청성 문도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기 위함이었다. 전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사기다. 특히 단체의 전투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렇기에 조금 더 몰아붙이고 조금 더 피해를 줬어야 했다.
그편이 청성 문도들의 사기를 올리기에도 더 좋고, 향후 황학과의 전투를 계속하기에도 더 좋다. 어차피 황학 정도 되는 고수와 단기간에 승부를 보기는 힘드니까.
황학은 역시 고수다웠다. 들고 있던 도를 버린 건, 적이지만 훌륭한 판단이었다.
어차피 도를 쓰는 팔을 다친 이상, 계속 들고 있어봐야 큰 효과를 보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황학이나, 자신이나, 포원이나 모두, 무기에 큰 구애를 받지 않을 고수들이니까.
어쨌거나 상황이 그렇게 되자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지며 전투가 잠시 멈췄다.
황학이 손바닥의 상처에서 흐르고 있는 피를 한 차례 혀로 핥았다.
그러더니 씩 웃으며 단유소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정말 안 잤어?”
그 말에 청성의 문도들이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허……!”
두 군데나 부상을 입어 본인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저런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
단유소가 대꾸했다.
“집요하군. 욕구불만인가?”
“욕구불만 따위, 있을 리가. 이래 봬도 나, 여자들한테 인기 많아.”
“훗.”
단유소가 코웃음을 치자 황학이 다시 말했다.
“그냥 궁금해서 그래. 그 유명한 천하제일미에 관련된 일이니. 봐. 저 말코 도사들도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잖아.”
그 말에 청성 문도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들의 분노한 기색이 점점 커져 갈 때, 단유소가 물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단체를 뭐라고 부르지?”
어차피 황학이 순순히 대꾸해줄 리 없었다. 그래도 말하는 걸 좋아하는 모양인지라 손해 볼 건 없다는 마음에서 물어봤던 것이다.
그러자 황학이 대꾸했다.
“내가 그거 대답해주면 당신도 대답해줄 거야?”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마자 황학이 대꾸했다.
“혈천맹(血天盟).”
의외였다. 설마 황학이 순순히 대답해줄 줄이야.
“피의 하늘이라. 누가 봐도 딱 악당의 무리다운 명칭이네. 온갖 악행이라는 악행은 다 할 것 같은.”
말속에 일부러 약간의 도발을 섞었다. 혹시라도 저들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나마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황학이 대꾸했다.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악마를 키우고 있지. 당신들 정파인들도 그렇잖아. 겉으로는 협객인 척 광명정대한 척 보이지만, 실상은 힘을 차지하고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친구도 죽이고 형제의 등에도 비수를 꽂잖아. 상대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기 위해 마교와 내통했다는 소문을 퍼트려서 몰락시키기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그 속사정은 신룡대인 당신이 더 잘 알 거 아냐?”
황학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들도 악당이야. 오히려 대놓고 악당인 우리보다 그들이 더 악질이라고. 이쯤에서 정보 하나 알려줄까? 당신도 뭔가 알아내고 싶어 하는 눈치이니.”
황학이 비릿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백도 쪽 인사들을 상대로도 영입 작업을 꾸준히 펼쳤어. 그러던 중에 우리도 놀란 게 뭔지 알아? 우리 쪽에 합류한 자들의 수가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많았다는 거야. 우리의 유혹을 못 이겨서 넘어온 자들도 있지만, 비열한 방식으로 매장을 당한 후에 하소연할 곳이 없어서 넘어온 자들도 엄청나게 많아. 너무 억울해서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은 거지.”
청성의 문도들이 놀랄 때, 황학이 말을 이었다.
“뭐, 악당 입장에서 그다지 정파의 악당들을 나무라고 싶은 생각은 없어. 더 강해져서 경쟁자들을 이기고 싶고, 힘을 키워서 세를 확장시키고 싶고, 그래서 약자들의 위에 군림하고 싶은 건 인간 본연의 욕구니까. 우리는 다만 그런 본연의 모습에 충실할 뿐이야. 위선 떨지 않고.”
“그저 강자존의 법칙에 충실한 것뿐이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강자를 위한 약자의 희생. 역사는 늘 그 반복이잖아? 지금도 그러고 있지. 당연하다는 듯이 민초들을 착취하는 나라님들에게 무슨 대단한 이유라도 있는 것 같아? 결국 다 자기 배 부르려고 약자들을 희생시키는 것뿐이야.”
황학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이 강호라고 해서 다를까? 무림맹이든, 천마신교든 다 같아. 대의랍시고 늘 약자를 위험으로 몰아넣고 희생을 강요하지. 약자를 이용하고 착취하고 희생시킨다는 부분에서 모두가 같아. 그러기 위해서 모두가 허울 좋게 포장할 뿐이라고. 여태껏 그래왔다는 식으로 세뇌 아닌 세뇌를 시키면서. 말인즉, 모든 게 강자들의 논리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뜻이야. 우리는 그 본연의 모습에 충실할 뿐이고.”
“어차피 피장파장이니 당신들은 대놓고 약자를 희생양으로 쓰는 것이다?”
“말했잖아.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약자를 희생양으로 쓰고 있다고. 약자들은 자신보다 더 약한 자들을 희생양으로 쓰지.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라고 다를 것 같아? 결국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야. 포장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 쪽이 솔직한 거고.”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황학은 그 어두운 면을 자극하고 있었다.
단유소가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들 많이 만났지. 다들 당신과 비슷한 소리를 하더군. 어차피 비슷하다고.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당신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 누구에게나 그런 욕망들이 있을 수 있고.”
황학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을 때 단유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약자들을 착취하고 이용하려는 강자들이 있다면, 반대로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지켜주려는 강자들도 있어.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협객의 탈을 쓴 악질들을 많이 봤지.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 본 건, 아무런 이유나 대가 없이, 때때로 본인을 희생해가면서 이 사회와 강호를 더 나은 길로 나아가게 하려는 사람들이었어. 그리고 나는 그 사람들의 방식, 그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싸울 뿐이야.”
그러자 황학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겉과는 달리 속으로는 위선이라서, 당신이 실제로는 이용당하는 것이라 해도?”
“위선 없는 사람이 있을까? 다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 적어도 그 정도가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상관없어. 설령 내가 이용당하는 것이라 해도.”
“언젠가 실망하게 될 거야.”
“실망도 하면서 사는 게 인생 아닌가?”
“하여간 고리타분하긴. 뭐, 애초에 당신을 설득하려고 꺼냈던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제는 확실히 알겠어. 당신은 교월과 안 잤군.”
“그 얘기, 이제는 지겨울 때도 안 됐나?”
그러자 황학이 피식 웃더니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러면서 말했다.
“이차전은 일차전과 다를 거야.”
단유소는 특유의 희미한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지만, 실상 그는 진평에게 전음을 보내는 중이었다.
[진평. 내가 이자와 싸울 때 그쪽에 또 다른 위험이 닥칠 수 있다. 주변 상황을 주시하고 한 소저에게도 주의하라고 일러.]
[예, 조장님.]
진평이 대꾸하자마자 단유소의 신형이 황학을 향해 짓쳐들었다.
어찌어찌 버텨내고는 있었지만 후미 쪽의 상황은 상당히 위태로웠다.
장문인 목종림이 가세하여 청강시를 상대하고 있는데도 그랬다. 황학의 공격을 막으면서 기운을 너무 많이 소진했던 탓이었다.
흑강시를 상대하는 건 서백풍과 곽승추였다.
흑강시들을 상대하다가도 서백풍은 간혹 목종림을 지원하곤 했는데, 그의 창은 번번이 청강시의 단단한 피부를 뚫지 못했다. 단유소의 조언에 따라 청강시의 관절을 노렸으나, 아직까지는 단 한 번도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청심대원들과 연소운은 강시가 아닌 흑의인들을 상대하며 강시를 상대하고 있는 세 사람을 엄호하는 역할이었다. 청심대원들이 서백풍과 곽승추를 지원했고, 장문인 목종림을 엄호하는 역할은 연소운이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후미의 방어선은 조금씩 뒤로 밀리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목종림의 상태가 좋지 않은 영향이 컸다.
‘이대로는 모두가 오래 버티지 못할 텐데…….’
서백풍은 염려스러웠다.
싸우는 와중에도 티 나지 않게 꾸준히 목종림의 상태를 살폈는데, 그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두르는 검의 위력이 눈에 띄게 약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반응 속도마저도 점점 둔탁해지고 있었다.
단유소나 포원이 올 때까지 반드시 버텨야 하는데, 후미 방어선의 중심인 목종림이 저 상태라면 결국 뚫리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목종림을 도울 실력이 되지 않으니, 서백풍은 너무 답답했다.
그런 식으로 위태로운 전투가 이어지던 어느 순간이었다.
막 새로운 청강시 한 구를 상대하고 있던 목종림에게 또 다른 청강시 하나가 달려들었다.
목종림이 원래 상대하던 청강시의 무릎께를 향해 서둘러 검을 휘둘렀다. 일단 한 구라도 빨리 무력화시킨 후에 또 다른 청강시를 상대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퍼걱!
청강시의 무릎을 베던 목종림의 검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 보아하니 검이 무릎을 베지 못하고 그대로 박혀 있었다.
기운이 많이 소진된 탓이기도 했고, 다급하여 검에 제대로 힘을 싣지 못한 탓이었다.
그 순간 무릎에 검이 박힌 청강시가 목종림의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터억!
“이잇……!”
목종림이 자신의 검을 빼내려 했으나 허사였다.
서백풍이 황급히 목종림 쪽을 지원했다.
그의 창이 검이 박힌 청강시의 팔 관절을 빠르게 찔러갔다.
퍼억!
서백풍의 창은 이번에도 역시나 강시의 피부를 가르지 못했다.
그때는 이미 다른 청강시가 목종림을 공격해오고 있었다. 도를 든 청강시가 목종림의 상체를 사선으로 베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피하십시오!”
서백풍이 다급하게 외쳤다.
목종림이 황급히 검을 놓고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도를 든 청강시가 너무 거리를 좁힌 상태.
피할 수가 없었다.
결국 청강시의 도가 목종림의 어깨 어림으로 떨어져 내렸다.
“장문……!”
서백풍의 입에서 안타까움 가득한 외침이 흘러나올 때였다.
뭔가가 목종림과 서백풍의 사이를 스치고 앞으로 나아간다 싶더니, 갑자기 두 사람의 앞에서 검광이 번쩍였다.
쉭―
그러자 도를 휘두르던 강시의 어깨가 그대로 날아갔다.
목종림의 앞을 막아선 인영의 뒷모습을 확인한 서백풍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서백풍이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소, 소운……?”
청강시의 팔을 베어 목종림을 구하자마자 연소운이 신형을 급격하게 낮췄다.
그 직후, 방금 팔이 날아간 청강시의 하체 쪽에서 또다시 검광이 일었다.
쉭―
연소운의 검이 이번에도 청강시를 베었다. 청강시의 무릎이 그대로 갈라진 것이다.
그 청강시의 몸이 기우뚱하며 중심을 잃을 때쯤, 목종림의 검을 잡고 있던 또 다른 청강시가 어느새 연소운의 등 뒤에서 그를 향해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휘익―
강시의 손날이 연소운의 뒷목을 향해 짓쳐들었다.
수도(手刀)를 이용한 공격이 빠르고 날카로웠다.
그 순간, 연소운이 신형을 더욱 낮췄다.
스륵―
연소운의 몸이 미끄러지듯 뒤로 이동했다.
이어서 그가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등 뒤에 꽂혀 있는 다른 한 자루의 검을 뽑아냈다.
챙!
검이 뽑힘과 동시에 검광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