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결사 항전 (1)
닫힌 방문을 한동안 응시하던 백리우가 이윽고 돌아섰다.
‘윤이……, 너란 녀석은 참…….’
대환단(大還丹)이었다.
강호 최고의 명문인 소림에서만 생산되고 관리되는, 인간이 제조한 영약 중에서 최고로 친다는, 그 유명한 대환단이었다. 삼류 무사가 한 알만 먹어도 능히 일류, 나아가서는 절정의 경지를 넘볼 수 있다는 바로 그 대환단이었다.
그 귀한 영약을 제갈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넘긴 것이다.
아무리 무림맹에서 머리 쓰는 일만 주로 하고 있다지만 제갈윤 자신도 무림인인데. 무공에 대한 욕심이 당연히 클 텐데.
창문 밖으로 조용히 나선 백리우가 조용히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잠시 후, 무림맹 사천지부의 밖으로 빠져나온 백리우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져 있었다.
‘실망시키지 않으마.’
이윽고 백리우의 신형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청성의 문도들이 빠르게 지붕 아래로 모여들었다.
그러자마자 목종림이 외쳤다.
“우리는 끝까지 이 청성을 지킬 것이다! 다만 이곳보다 더 안전한 곳에서 지킬 것이다! 잠시 후 본 장문의 지시가 떨어지는 즉시, 청의위 전원이 선봉에서 길을 열고, 청심대의 일, 이조가 선봉을 지원한다!”
내력을 담은 목종림의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청성의 모든 문도들은 질서정연하고 신속하게 이동해야 할 것이다! 이후에 어떠한 상황이 벌어져도 결코 당황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용맹함을 잃지 마라! 자, 목적지는 상청궁이다! 전원, 즉시 이동!”
그 말이 끝나자마자 청의위의 고수들이 일제히 상청궁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청심대의 일부가 뒤에서 그들을 따랐다.
동시에 진평과 연소운이 지상으로 뛰어내렸고 목종림과 한설연이 바로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뛰어내렸다.
선봉이 혈로를 뚫기 시작하자 문도들이 그 뒤를 따랐다. 목종림과 한설연 역시 중진에 위치하여 문도들과 함께 이동했다. 진평과 연소운이 지근거리에서 두 사람을 호위했다.
원래 청성은 포위되어 있었다.
그 상황에서 모든 문도들이 밀집하여 이미 한 방향을 뚫고 전진하고 있으니, 적이 추격해오는 방향은 자연스레 세 방향이 되었다.
세 방향에서 추격해오는 적들 중에는 여전히 강시들도 다수 섞여 있으니, 당연하게도 후미를 맡은 자들의 위험 부담이 가장 클 수밖에 없었다. 후미에서 적들을 제대로 막지 못하면 이동 중인 청성의 문도들이 매우 위험해지기에 더더욱 힘든 위치였다.
그러나 막상 상황이 닥치고 보니 후미 쪽은 생각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약간의 피해는 있었지만, 지금의 도박적인 상황을 생각했을 때 그 정도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후미를 맡은 사람들이 다름 아닌 포원과 단유소였기 때문이다.
방어선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포원과 나머지 청심대원들이, 다른 한쪽은 단유소와 서백풍 그리고 곽승추가 맡았다. 물론 포원과 청심대원 쪽에서 맡은 범위가 더 넓었다.
쉬익― 쉬익― 쉬익―
포원의 도에서 쉬지 않고 도기가 발출되었다.
그가 발출한 호선 모양의 도기들이 강시를 제외한 적들의 몸을 어김없이 베었다.
그러다가도 강시가 다가오면 포원은 순간적으로 강기를 일으켜 강시들을 베었다. 강시를 벨 때 그가 노리는 부위는 오직 한 곳, 한쪽 다리였다.
포원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인지 그와 함께 후미를 맡은 청심대원들의 눈동자에도 힘이 실려 있었다. 움직임도 활발했다.
청심대원들 또한 청성의 정예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투신 포원은 문파의 큰 어른을 넘어서 전설 같은 무인이었다.
그런 존재와 보조를 맞추며 실전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커다란 의미였다. 그렇기에 청성의 후배로서, 또한 청성의 정예로서 부족함을 보이지 않기 위해 투지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부지런히 도를 휘두르며 적들을 막아내는 와중에도 포원은 틈틈이 시선을 돌려 어딘가를 확인하곤 했다. 그의 시선이 머무른 곳에는 항상 단유소가 있었다.
단유소 쪽의 상황을 확인할 목적이기도 했지만, 더 큰 목적은 단유소의 움직임을 눈에 담아두기 위해서였다.
물론 정찰을 나갔다가 산 중턱에서 적들을 처치할 때에도, 문파에 돌아와서 싸울 때에도, 틈이 날 때마다 단유소의 모습을 눈여겨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원이 계속해서 단유소의 모습을 확인하는 이유는 경쟁심 때문이 아니었다.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미 확인했듯 단유소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간결하며, 자연스러움 속에 강력함을 품고 있다.
그러나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그런 움직임은 상승 무공을 익힌 중원의 고수라면 누구나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저 아이, 분명히 저런 모습 이상의 대단한 뭔가가 있는데…….’
포원의 눈빛이 깊어졌다.
퓨뷰뷰뷰뷰뷰븃―
곽승추가 들고 있는 쇠뇌에서 화살이 연달아 발사되었다. 흑의인들이 빼곡하게 몰려오고 있었던 탓에, 연사된 화살들의 대부분이 그들의 몸에 박혔다.
곽승추가 사용 중인 쇠뇌는 묵룡조의 공용 무기인 철혼이었다. 장문인 목종림의 명령에 따라 지붕 아래로 모였을 때 진평에게서 건네받았다. 후미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상대하기에 철혼만큼 좋은 무기도 없으니까.
서백풍이 곽승추를 엄호하는 가운데 단유소는 두 사람이 눈으로 좇기조차 힘든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었다.
단유소의 양손에서 묵색의 쌍소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적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 또한 강시들이 다가오면 철저하게 다리를 베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청성의 문도들이 빠르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선봉에서 포위망을 뚫은 것이다.
그 후로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청성의 문도들은 개활지를 벗어나 널따란 산길로 접어들었다. 상청궁으로 향하는 외길로 진입한 것이다.
그러자 후미를 맡고 있던 포원과 단유소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막아야 할 범위가 좁아졌기에 두 사람의 임무도 한결 수월해졌다.
포원이 추격해오는 적들을 향해 도기를 발출해내며 전음을 보냈다.
[그래도 큰 피해 없이 이 길로 접어들어서 다행이군. 아직 끝난 건 아니나 한시름 놓게 된 건 맞네. 고생 많았네.]
[어르신이야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전음으로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청성의 문도들을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그렇게 반각쯤 이동했을까.
거침없이 이동하던 청성 문도들의 발걸음이 엉뚱한 곳에서 갑자기 멈췄을 때쯤, 포원과 단유소의 시선이 빠르게 마주쳤다.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눈빛이 심각했다.
단유소와 포원의 표정이 심각해진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산의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움직임 때문이었다.
이곳으로부터의 거리가 제법 멀었는데, 두 사람 모두 경지가 높다 보니 거의 동시에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한 것이다.
일단의 무인들이 적의 포위망을 뚫으며 산을 올라오고 있었다. 인원이 제법 많았는데 정예 중에서도 정예, 즉 최정예 무인의 느낌을 풍기는 자들도 다수가 섞여 있었다.
아직 정체를 알 수 없으나 조력자들인 게 확실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포위망을 뚫으며 산 위로 올라올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러나 때가 너무 좋지 않았다.
마침 청성의 문도들 모두가 본산을 떠나 상청궁으로 향하는 길인데 하필 지금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최정예 무인들 다수가 동행하고 있다 해도 이런 식이라면 본산까지 올라오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적의 수는 많고 강시까지 끼어 있는 탓에 결국 그들은 포위되어 고립될 것이다. 본산까지 올라오지도 못하고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고, 설령 본산까지 올라온다 해도 아군이 떠난 뒤니 고립되는 건 매한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상청궁으로 향하는 문도들의 행렬을 되돌릴 수도 없는 일.
고민스러웠다.
두 사람의 표정이 심각해진 또 하나의 이유는, 상청궁으로 향하는 청성 문도들의 선봉 쪽에서 갑자기 한 차례의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단유소와 포원이 놀랄 만큼 강력한 기운이었다. 당연히 아군일 리가 없었다. 앞서간 인원들 중에 가장 강한 인물은 장문인 목종림인데, 그가 발산할 수 있는 수준의 힘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자가 적으로 등장했다면 문도들의 안위는 안 봐도 빤하다.
두 사람이 심각해진 이유는 그 두 가지 상황이 거의 동시에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어찌하는 게 좋겠는가?]
포원의 전음이었다.
어쨌거나 산을 올라오고 있는 조력자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다수의 최정예 무인들이 섞여 있다면, 그들을 합류시켜야 오늘 밤 적들과의 싸움에서 버텨내기가 수월해진다.
그리고 한 사람은 반드시 행렬의 앞쪽에 가서 방금 등장한 강자를 상대해야 했다.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후미를 누군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건데, 그게 애매하다는 점이었다.
후미를 지원하고 있는 인원들은 청심대원들과 서백풍, 곽승추 정도다. 그들 중에서 가장 강한 인원이 서백풍인데, 그런 서백풍조차도 청강시를 상대하기가 버거운 실정이었다.
단유소가 전음으로 대꾸했다.
[청성의 지리에 밝은 분은 어르신이시니 손님들은 어르신께서 맞으러 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곳은 임시로 백풍과 승추 등에게 맡기고 저는 바로 행렬의 앞쪽으로 가보겠습니다. 장문 어른께 이 상황을 말씀드려서 적절한 조치가 따르게끔 해야겠지요.]
[으음.]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저는 적측의 고수들을 상대해본 경험이 있으니 제가 그를 맡으러 가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후미를 지원하고 있는 청심대원들에게 지금 바로 이 사안을 전파해주십시오.]
포원의 입장에서는 단유소의 본신 실력을 볼 수 있는 기회였지만, 지금은 그런 걸 아쉬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포원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청심대의 선임에게 전음으로 지시를 내렸다. 동시에 단유소도 서백풍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 직후 단유소가 포원에게 말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어르신.]
[훗! 자네야말로.]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두 사람의 신형이 이윽고 다른 방향을 향해 튕겨 나갔다.
스으으으―
상청궁으로 향하는 오르막 산길에 차갑고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산길을 오르던 청성파 문도들의 긴 행렬은 어느 순간 이후로 멈춘 상태였다.
행렬의 후미에서는 추격해오는 적들로 인해 아직도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종종 들려오고 있었지만, 선봉부터 중진까지는 쥐죽은 듯 조용할 뿐이었다.
걸음을 멈춘 청성파의 문도들은 모두 고개를 들고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경사가 급해지는 오르막길의 위쪽이었다.
그곳에 한 사내가 서있었다.
사내는 황색 무복을 입은 자로, 얼굴을 보니 나이는 삼십 대 초반쯤으로 짐작되었다. 왜소하고 호리호리한 체구의 사내였는데, 본인의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도(刀)를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청년은 한 손에 쥔 도를 늘어트린 채로 청성의 문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한쪽 입꼬리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상대가 한 명뿐인데도 모든 청성의 문도들이 이렇듯 멈춘 채로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황의 청년의 등장이 너무 강렬했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