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백리가의 비밀 (3)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군요.”
백리우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며칠이 자나고 나서 어쩌다가 잠들어 있는 그 아이의 방에 잠시 들어갈 일이 있었다. 내가 그 아이의 방에 들어간 건 그 밤이 처음이었지. 그때 보았다. 그날 새로 끼웠던 베갯잇이 온통 얼룩져 있는 흔적을.”
한 차례 코로 한숨을 내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이도 울었던 거지. 남들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고 절대 약한 척하지 않다가 혼자 있을 때에만 숨죽여 울었던 거야. 그렇지. 그게 정상이지. 엄마가 죽었는데 그 나이의 꼬마가 울지 않는 게 이상한 거지.”
“아…….”
“그런데 나는 며칠간 그 점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던 거야. 꼬마가 하도 의젓했으니까. 놀라울 정도로 담담한 모습이었으니까. 그 생각이 드는 와중에, 잠들어 있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면서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
말을 하면서도 그때의 감정이 다시 생각나는지, 백리우의 눈가가 살짝 촉촉해져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녀의 말이 맞지. 애가 무슨 죄겠어. 사실, 이 세상의 그 누구라도, 태어난 것 자체가 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잖아. 아이가 스스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도 아닌데.”
제갈윤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백리우가 다시 말했다.
“그다음 날부터 나도 그 아이를 다르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 어린 것을 미워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 돌아가신 어머니도 내가 그러는 걸 바라지는 않으실 것 같았고. 그 아이나 나나 어머니를 잃은 것도 같고, 같은 아버지를 둔 것도 같고. 더 불쌍한 쪽은 그 녀석이었지. 너무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으니.”
“그렇긴 하죠.”
“그다음 날 처음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알았다. 유소라는 이름이더구나. 그윽한 휘파람 소리라는 뜻이지. 제 어머니가 지었다고 하더라. 성도 제 어머니의 성을 따서 단씨를 쓰고 있었고.”
“그랬군요.”
백리우는 그 시절을 회상하는 표정이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그 후로 삼 주간 그 집에 머물렀다. 표익이 종종 집을 비워서 녀석과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녀석은 주로 책을 읽었고, 나는 누워서 무공 생각들을 하면서 지냈다. 간혹 녀석과 산책을 나가기도 했지. 지내면 지낼수록 점점 더 녀석이 마음에 들더라.”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일 때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름 유익한 시간이었다. 뭐랄까, 그간 세상사에 찌들어 지내던 영혼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더라. 그렇게 삼 주가 살짝 넘은 어느 날 밤이었다. 녀석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누군가 은밀히 그 집에 찾아왔다. 놀랍게도, 그분은 내 할아버지였다.”
“예에? 천무검신께서요?”
천무검신(天武劍神).
당대의 천하제일인이자 무림맹주였던 백리극의 별호였다.
제갈윤이 바로 다시 물었다.
“그 즈음의 천무검신께서는 대외적으로는 완전히 은거했다고 알려졌었고, 실제로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셔서 백리세가에서조차 행적을 모르고 있다고 했었잖아요.”
“그랬지. 그 당시로 따져도 이미 몇 년 전부터 할아버지와는 연락조차 되지 않았었지. 그랬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그곳에 나타나셔서 나도 놀랐던 거야.”
“이야기와는 상관없이 너무 궁금해서 그러는데, 천무검신께서는 아직 살아 계신 거죠?”
은거한 시점으로부터 지금까지 천무검신 백리극은 단 한 번도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강호에는 그가 이미 죽었을 것이라는 예측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제갈윤조차 백리극의 생사 여부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백리우도 얘기해주지 않았고 제갈윤도 억지로 묻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한번 백리우가 얘기했던 것처럼 백리세가에서도 여전히 행적을 못 찾고 있겠거니, 말해줄 만한 사안이면 백리우가 알아서 이야기해주겠거니, 하고 넘겼었다.
그런데 지금은 강호의 상황이 달라졌다. 강호의 질서가 매우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은거한 고수들의 근황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특히 당대의 천하제일인이었던 천무검신 백리극 정도 되는 인물의 근황이라면 더더욱.
“듣다 보면 알게 될 거다.”
그 말에 제갈윤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우가 다시 말했다.
“어쨌거나 할아버지는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시더구나. 그러면서 자신이 아들을 잘못 키운 탓이 크니, 유소 그 아이는 본인께서 책임지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그 아이를 데려가셨지. 그날 내가 당신을 본 건 비밀로 하라고 하시면서 말이야. 그 사안에 대해서 아버지에게는 따로 얘기를 하셨던 모양이고.”
제갈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 그렇다면 묵룡을 키워낸 분이 다름 아닌 천무검신이라는 말씀입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래.”
“허……!”
제갈윤은 놀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한편으로 묵룡이 어떻게 나이에 비해 그렇게 비상식적으로 강해질 수 있었던 건지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되었다.
‘천하제일가라고 불리는 백리세가의 핏줄에, 근래 강호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무인이라 평가받는 천무검신의 지도라니…….’
게다가 아까 백리우가 말했듯, 묵룡은 어렸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떡잎이었다.
그 모든 여건들을 종합해보면 충분히 납득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모든 여건들을 따지기 이전에, 지금처럼 되기까지는 묵룡 스스로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겠지만.
“아까 네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우리 할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신다. 주기적으로, 간간이 나와 연락을 하면서 지내신다. 우리 가문 내에서도 오로지 나하고만.”
“아……!”
제갈윤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작게 탄성을 내뱉을 때 백리우가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네가 뭔가를 기대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된다.”
그 말에 제갈윤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시 아쉬워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그는 이내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백리우가 다시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모든 이야기들 중에서 중요한 부분 몇 가지만 얘기해주마. 일단 그 아이는 자신의 사부가 친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모른다. 자신의 사부가 천무검신 백리극이라는 사실도 당연히 모른다.”
제갈윤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자신의 아버지가 당시의 무림맹주였다는 것도 모르고 어렸을 때 잠깐 봤던 자신의 이복형이 현재의 무림맹주라는 사실 또한 전혀 모른다. 고로 자신이 백리가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예 모른다. 녀석이 무림맹에 입맹했을 때에야 나도 실로 오랜만에 녀석의 얼굴을 봤다. 그간에는 할아버지를 통해서 녀석의 소식만을 전해 들었었고.”
“일부러 그에게 밝히지 않았던 거군요.”
“그래. 할아버지의 뜻이었다.”
“간혹 그가 보고를 하러 맹주전에 찾아온 경우에 형님이 항상 저를 불렀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군요. 그때마다 형님은 제가 그를 상대하게끔 했었죠. 형님은 뒷모습을 보인 채로 짧은 대꾸만 하면서.”
제갈윤의 말에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갈윤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계속 그가 모르게 하실 생각입니까? 언젠가는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백리우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나도 나중에야 들은 내용이지만 할아버지는 은거 후에 아직 강호에 밝혀지지 않은 숨겨진 무공들을 찾아다니셨던 모양이다. 각종 무공 비급들을 모아서 직접 연구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연구한 바를 토대로 상당히 강력한 무공을 만들어냈는데, 그걸 유소 그 아이에게 전수하셨다나 봐.”
“아…….”
“다만, 강력한 만큼 위험성도 커서 실험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한다. 어느 정도 안전성이 확보되어서 전수하셨다는 모양인데, 나도 그 무공에 대해서 잘은 몰라.”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리우가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할아버지는 그 아이의 발전 가능성이 무궁하다고 판단하고 계시다. 그런 때에 그 아이가 백리가의 혈통인 걸 알게 되어서 좋을 일이 없다고 하셨다. 아직은 혼자 터득해가야 하는 단계라면서 말이야. 그게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이고.”
“몰래 도와주기만 했던 이유도 그래서였군요.”
그 말에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래. 그리고 그 아이는 자신이 사부의 지인을 통해 무림맹에 입맹한 것으로 알고 있을 거야. 무림맹의 핵심부에 있는 그 지인이 자신을 돕는 것으로 알 것이고.”
백리우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신형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할 얘기를 모두 끝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제법 이어지던 중에 제갈윤이 말했다.
“가십시오, 형님.”
“가지 말라면서? 상식선의 문제라면서?”
백리우가 돌아서며 비아냥거리듯 물었지만 제갈윤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러자 백리우가 짐짓 제갈윤의 눈치를 살피는 척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뭐야, 또 왜 무서운 표정 짓고 그래.”
“형님과 묵룡의 관계를 몰랐다면 모를까, 알았는데도 형님을 붙잡아둘 수는 없잖습니까. 게다가 어차피 형님도 중간에 알아채셨을 거 아닙니까. 제가 형님을 보내줄 거라는 사실을.”
그 말에 백리우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간에, 그러니까 단유소가 자신의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을 제갈윤이 알게 된 순간에, 표익의 기척이 사라졌었다.
제갈윤이 미리 표익을 보낸 것이다. 그에게 먼저 출발하라고 전음으로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많은 얘기를 하셨지만 어차피 시간은 고작 일다경(약 20분) 정도가 지났을 뿐입니다. 보아하니 형님은 요새 더 강해지신 것 같으니, 그 정도 늦춰졌다고 해서 큰 차질이 빚어지진 않겠지요.”
“내 실력이 상승한 건 또 어찌 알았냐?”
그러자 제갈윤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함께한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작은 변화만 감지되어도 많은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거지요. 어쨌거나 그 일다경을 버티지 못하고 청성이 궤멸되었다면 그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버티고 있을 거야.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했어도 어떻게든 버티고 있을 거야.”
백리우가 확신하듯 말하자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하긴, 목종림 장문 그 사람, 평소에는 조용한 듯하지만 실상은 보통내기가 아니지요. 지도력도 좋고. 게다가 묵룡과 그 조원들이 함께하고 있으니, 뭐.”
“투신 그 노인네가 소리 소문 없이 돌아와 있기를 바라야겠군.”
공감한다는 듯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리우가 돌아서며 말했다.
“그럼 다녀오마.”
“참, 형님.”
그 말에 백리우가 고개만 돌려 제갈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갈윤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어 백리우를 향해 가볍게 던졌다.
백리우가 한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자그마한 목갑이었다. 그것도 밀봉 처리가 확실하게 된 목갑이었다.
“이게 뭐냐?”
“쉬지도 않고 전력으로 달리실 거 아닙니까. 그러면 아무리 형님이라도 기력 다 소진합니다. 그때 드시라고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니까?”
“왜요? 독약인지 의심돼요?”
“농담으로 말 돌리지 말고……!”
제갈윤이 밝히기 전까지 백리우는 떠나지 않을 기세였다. 결국 제갈윤이 포기한 표정으로 말했다.
“몇 년 전에 제가 소림에 가서 고서 번역 작업을 해준 적이 있었잖아요. 그때 사례로 받은 겁니다. 그 고서가 워낙 귀한 물건이었던지라.”
“그럼 설마 이거……!”
놀란 표정의 백리우를 향해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우가 예상하고 있는 그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야! 이 귀한 걸 내가 어떻게 받아!”
“늦었다면서요. 얼른 출발이나 하십쇼. 아낄 생각 말고 꼭 드시고요.”
제갈윤이 그 말을 남기더니 바로 뒤돌아서서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