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생사 대립 (7)
절정 고수 오십 명이 추가된다면 당연히 적지 않은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체 어디에서 절정 고수 오십 명을 구한단 말인가.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이었기에 한설연이 잠시 목종림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목종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청성에는 오로지 장문인에게만 대대로 인수인계되어 내려오는, 오로지 장문인만이 알고 있는, 그렇기에 장문인만이 쓸 수 있는 힘이 있네.]
한설연의 눈동자가 살짝 커질 때 목종림이 말을 이었다.
[청성뿐만 아니라 유서 깊은 문파나 세가들이라면 아마도 그런 힘을 하나씩은 감추고 있을 것이네.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인 셈이지. 그리고 나는 지금 그 힘을 사용하려는 걸세.]
한동안 고민하던 한설연이 대꾸했다.
[지키기에 유리한 지형들이라면 밤새도록 버틸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경우, 최후의 상황이 되었을 때 혈로를 뚫기도 더 힘들어진다는 맹점이 존재해요. 결국 대부분이 청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섬멸당할 가능성도 커진다는 뜻이고요.]
[알겠네.]
목종림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한 식경 정도만 상황을 지켜보세. 결론은 그 후에 내리도록 하지. 물론 그 와중에도 문도들의 피해가 너무 커진다 싶으면, 자네의 의견을 참고하여 바로 결단을 내리도록 하겠네.]
한설연은 목종림의 의중을 알 것 같았다.
최악의 상황이라지만 장문인의 입장에서 문파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치는 결정을 내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 경우에는 변절자들을 벌할 수 없게 된다. 변절자들을 벌하겠다고 그들을 대동한 채로 탈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변절자들을 처리하는 문제는 문파의 기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그렇기에 목종림은 이곳에서 조금 더 버티려 하는 것이다.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렇게 하세요.]
슈아악― 서걱―
매섭게 공기를 가르며 휘둘러진 서백풍의 창날이 강시의 목을 단번에 잘랐다. 깔끔하게 잘린 강시의 머리통이 땅바닥을 굴렀다.
목이 잘리자 강시가 허우적대며 다짜고짜 주변에 대고 팔다리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목이 잘린 상태에서도 저러고 있는 괴기스러움이라니.
다른 이들이었다면 강시의 그런 모습에 기가 질렸거나 공포를 느꼈겠지만 서백풍과 곽승추는 달랐다. 공포에 질리기는커녕, 두 사람은 미미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휙― 붕― 부웅―
목이 잘린 상태에서도 강시가 휘두르는 팔다리의 위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곽승추가 검기를 발출하며 목 없는 강시를 유인하기 시작했다. 서백풍은 그런 곽승추를 엄호했다.
곽승추의 유인에 의해 진행 방향을 바꾼 강시가 이제는 흑의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쯤 되었을 때에야 서백풍과 곽승추가 강시에게서 떨어졌다.
곽승추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서백풍에게 말했다.
“거봐요. 나쁘지 않죠?”
“그렇긴 하네. 좀 귀찮긴 하지만 나름의 효율도 있는 듯하고.”
이 작전을 쓴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이전의 강시도 목이 떨어진 후로는 흑의인들을 공격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같은 강시를 공격하기도 했다.
서백풍과 곽승추는 주변의 흑의인들을 처치하며 한동안 목이 잘린 강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최전선에서 이미 많은 수의 강시들을 처치했다. 이제는 몰려오는 강시들의 숫자도 점점 적어졌기에 이렇듯 약간의 여유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흑의인들에게 검을 휘두르며 곽승추가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강시뿐만 아니라 몰려오는 적의 숫자도 눈에 띄게 줄었어요. 역시나 조장님과 포 대협 덕분이겠죠?”
“아마도 그렇겠지.”
“이렇게 확 체감이 될 정도라니. 역시 초절정의 경지에 있는 고수들이 다르긴 다르네요.”
수도 없이 몰려들던 흑의인들이 지금은 듬성듬성 올라오고 있었다. 이런 공백을 만들었을 정도라면 단유소와 포원이 얼마나 많은 수의 적들을 처치했을지 충분히 예상할 만했다.
신룡대원으로 살고 있지만 사실, 이렇듯 대규모의 전투에 관여된 적은 거의 없었다. 기본적으로 여태껏 평화로웠던 강호에 이렇게 큰 규모의 전투가 벌어질 일 자체가 없기도 했다.
단유소가 차원이 다른 고수라는 점이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대규모의 적들을 상대하다 보니 그 대단함을 더 크게 느끼게 된다.
서백풍에게서 대꾸가 없자 곽승추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서백풍은 입술을 굳게 다문 상태로 눈동자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곽승추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서백풍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백풍은 최절정 고수였다.
묵룡조에서 최절정 고수는 두 명으로 서백풍과 진평이었다. 두 사람 중에서 더 강한 사람을 꼽으라면 역시 서백풍이었다. 진평은 근래에 그 경지에 올랐고 서백풍은 그 전부터 그 경지에 있었던 탓이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벽을 깨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바로 서백풍이었다. 최절정의 벽을 깨고 초절정의 경지로 나아가고 싶은 것이다.
최절정과 초절정은 말 하나 차이지만 완전히 다른 경지이다. 두 경지 사이에는 엄청난 벽이 존재한다. 초절정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그렇기에 이름난 고수들 중에도 초절정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최절정에 막혀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초절정 고수가 대단한 존재들인 것이다.
곽승추가 말했다.
“형님은 해낼 겁니다. 분명히.”
그 말에 창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서백풍이 곽승추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곽승추의 말뜻을 파악한 서백풍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넌 나를 너무 잘 알아서 탈이야.”
“제가 어쭙잖은 말씀을 드릴 처지는 아니고, 다만 조장님 말씀은 잊지 마십쇼, 형님.”
절대로 조바심 내지 마라.
그게 단유소가 서백풍에게 하는 조언이었다.
곽승추를 향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서백풍의 고개가 한순간 홱 돌아갔다.
누군가가 두 사람 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또한 강시였다.
그런데 그 강시는 여태껏 두 사람이 상대해왔던 강시와는 매우 달랐다.
일단 빠르기부터가 달랐다. 가만히 보니 움직임도 그전의 강시들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이 강시는 무기를 쥐고 있었다. 창이었다.
물론 이전에 상대했던 강시들 중에도 무기를 휘두르던 놈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무기는 모두 조잡한 것들뿐이었다. 녹슨 철검이나 날이 서지 않은 도, 내지는 뭉툭한 철봉 따위였다.
그런데 이 강시가 쥐고 있는 창은 제대로 된 창이었다.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창이었다. 게다가 창대도 나무가 아닌 철제였다.
순식간에 두 사람과 거리를 좁힌 그 강시가 창을 휘둘렀다. 정확하게는 휘두른 게 아니라 쑤신 것이다. 이 강시는 창을 제대로 쓰고 있었다.
슈슉―
그 공격이 매우 위력적이었다.
서백풍이 한 팔을 들어 곽승추를 물러나게 했다. 그러면서 본인도 강시와 약간의 거리를 벌리며 날카로운 기운 몇 가닥을 발출했다.
탐색을 위해서였다.
슈슈슈슈슉―
서백풍이 발출한 기운이 강시의 목과 양 어깨, 그리고 양 다리를 노리고 빠르게 날아갔다. 이윽고 그 기운들이 애초에 서백풍이 노렸던 부분에 닿았다.
카가가가강!
그 소리가 들린 순간 서백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날렸던 기운들 중에 단 하나도 강시의 몸에 박힌 게 없었다. 마치 철벽에 대고 기운을 발출한 느낌이었다.
“혀, 형님……!”
곽승추의 놀란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서백풍이 다시금 한 팔을 내밀어 곽승추를 제지시켰다. 동시에 기운을 가득 끌어올렸다.
서백풍의 창날이 밀도 짙은 빛무리를 머금었다.
그 상태에서 서백풍이 창을 휘둘렀다.
그의 창날이 강시의 한쪽 팔을 향해 빠르게 짓쳐들었다.
퍼억!
서백풍의 창날과 강시의 한쪽 팔이 마주치면서 그런 소리가 났다.
베지 못한 것이다. 서백풍의 창날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깊이의 상흔만을 남겼다.
서백풍의 양미간이 좁아졌다.
강기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이 정도라니.
이런 식이라면 이 강시와의 싸움은 매우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강시에게 오래 붙어 있으면 다른 곳을 지원할 수도 없다. 이래저래 상황이 악화되는 것이다.
슈욱―
어느새 강시가 반격해왔다.
창을 찔러 넣는 속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서백풍이 창을 들어 강시의 창을 막았다.
카앙!
창과 창이 맞닥뜨린 순간, 서백풍은 어금니를 악물어야 했다. 격돌로 인한 반탄력도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던 탓이다.
강시의 공격이 이어졌다.
쉭쉭―
상단과 중단을 연이어 찔러오는 공격.
서백풍이 빠르게 두 번의 공격을 막았다.
카강!
반탄력을 이용하여 서백풍이 창을 빙글 돌리며 강시에게 반격을 가하려 할 때엿다.
강시의 창이 묘하게 휘어지는 듯하더니 또다시 서백풍의 복부를 노리는 게 아닌가.
결국 그가 반격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또다시 강시의 공격을 막아갔다.
카앙!
그 즈음 서백풍의 두 눈은 휘둥그레진 상태였다.
‘이럴 수가!’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강시가 초식에 기반을 둔 창술을 구사하다니……!’
그랬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강시가 방금 전에 구사한 건 분명히 창술이었다.
이제야 자세히 보니 이 강시는 여태껏 상대하던 강시들과는 피부색이 달랐다. 이전 강시들의 피부가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면 이 강시의 피부는 푸르스름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그때쯤 뒤쪽에서 곽승추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목소리였다.
“형님……, 저 사람……!”
서백풍이 강시를 향해 또다시 창을 휘두를 때 곽승추의 외침이 이어졌다.
“저, 저 사람 알아요! 왠지 얼굴이 낯익다 싶었는데, 그자는 산동 쪽에서 창술로 이름을 날리던 하기문(何器雯)이라는 자예요! 절정 고수였고 백도의 인물이었어요!”
서백풍의 눈동자가 커질 때 곽승추가 다시 외쳤다.
“몇 년 전에 갑자기 실종되었는데 결국 찾지 못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가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성향이 어떤 자였는데?”
“올곧고 협심이 가득해서 평이 좋은 인물이었어요. 그랬던 그가 왜 저렇게……!”
곽승추는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서백풍의 눈빛이 더욱 심각해졌다.
백도에서 나름 명망이 좋던 고수가 강시가 되어 나타났다. 그것도 강력한 강시였다.
그런데 왠지 이건 시작에 불과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사실이 퍼지면 많은 사람들이 동요할 것이다. 결국 온 백도가 동요하게 되겠지만, 이 시점에 중요한 건 청성이었다.
‘이 순간에 만약 청성의 인물이 강시가 되어 나타난다면…….’
생각하기도 싫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청성은 엄청나게 동요할 것이다.
그리고 왠지 적들이 그걸 노리고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어쩌면 이미 다른 전선에 그런 강시가 등장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카앙!
다시금 서백풍의 창이 강시의 몸을 강하게 때렸다.
서백풍이 이를 악물었다.
손아귀가 저려왔기 때문이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집중을 하지 못했다. 그 탓에 기운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더 이상 밀리면 안 되는데…….’
보아하니 처음에 이 강시와 마주쳤던 지점으로부터 열 걸음 넘게 후퇴해 있었다. 공격을 해도 먹히질 않고, 오히려 강시의 공격을 피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런 상황이 된 것이다.
더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각오로 서백풍이 창을 고쳐 쥐었을 때였다.
“물러나라, 백풍.”
뒤쪽에서 그 목소리가 들렸다 싶은 순간,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등이 서백풍의 앞을 가로막았다.
서백풍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늦으셨으면 저도 나중에 강시가 되어 조장님을 다시 뵐 뻔했습니다.”
“엄살떨기는. 아무튼 고생 많았다. 쉬면서 호흡 좀 골라.”
그 말이 끝난 순간, 단유소의 검이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