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소수의 후예 (3)
“왜 그렇게 쳐다보기만 하는 거예요…….”
그제야 단유소가 자상한 어조로 말했다.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한 소저, 힘들었지? 미안해. 제대로 못 지켜줘서.”
왜일까.
저 말을 들으니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물론 힘들었다. 단유소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내내 그랬다.
하지만 그건 단유소가 자신에게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해야 되는 거잖아요. 지금도 너무 미안하기만 한데 오히려 당신이 미안하다고 하면 내가 뭐가 되냐구요.
입 밖으로 그런 말들을 꺼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면 진짜로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단유소가 뭔가를 회상하듯 동굴 천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의식이 가물가물했어. 기억나는 건 거의 없어. 내가 어딘가에 눕혀졌다는 것, 눈을 뜨고 싶어도 눈이 안 떠졌다는 것,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내 몸 같지가 않았다는 것, 옆구리가 너무 아팠다는 것, 너무 추운데도 잠이 쏟아졌다는 것. 희미하게나마 기억이 나는 건 그 정도야.”
한설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은신처를 찾아서 바위 밑에 눕혔던 순간에 대한 얘기인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과 따뜻한 감촉이었어. 안심이 되는 따뜻함이었지. 그 이후로는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어.”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소가 다시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까 소운이가 그러더라고. 은신처도 잘 잡았고 응급처치도 훌륭했다고. 척박한 상황이었을 텐데, 당황스럽고 무서웠을 텐데, 정말 잘해줬어, 한 소저. 그래서 미안하고, 고마워.”
“단 공자님이 자꾸 미안하다고 하시면……, 제가 뭐가 되냐구요……. 흐으으…….”
결국 한설연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전 정말 단 공자님이 어떻게 되시는 줄 알고……. 흐으으으…….”
한설연이 무릎을 꿇더니 침상에 있는 단유소의 머리맡에 고개를 묻고 흐느꼈다.
그런 한설연의 등을 토닥여주는 와중에도 단유소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호위 임무의 대상 중에는 여인들도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개중에는 자신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여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누가 울어도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임무이고 호위 대상일 뿐이었으니까.
‘그 점은 당신도 똑같은데 왜…….’
마음이, 짠할까.
* * *
이틀이 훌쩍 지난 밤.
잠을 자기 위해 조용히 누운 상태에서도 한설연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으으…….’
온몸이 욱신거렸다.
심소옥에게 맞은 곳들이었다.
어제 아침 식사를 할 때, 수련에 동참시켜달라고 심소옥에게 부탁했던 건 자신이었다. 대담하게도.
그때 심소옥이 지어 보였던 미소를 아직도 기억한다.
한쪽 입꼬리가 잔뜩 말려 올라간,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였다.
중간에 나가떨어질 거면 아예 시작하지를 말라고 말하던 심소옥에게,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확언을 해버렸다.
그 후로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단유소의 말대로 심소옥은 가차 없었다.
심소옥이 그냥 때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버티기 위해서 수도 없이 이를 악물어야 했다.
어제 아침부터 시작된 수련이었으니, 꼬박 이틀 내내 심소옥에게 두드려 맞았다. 수천 대는 맞은 것 같다. 연소운과 함께.
수도 없이 두드려 맞는 와중에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단유소의 말마따나 심소옥의 수공은 섬세하고 오묘했다. 그녀는 실수가 없었다. 무시무시한 공격에 맞고도 연소운이나 자신이 치명상을 입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하도 힘들어서 몸이 축 늘어진 상태긴 한데 의외로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고된 일을 마친 후,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자리에 누웠을 때에나 느낄 수 있는, 곤히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은 바로 그 개운함이었다.
한설연이 누운 상태에서 고개를 돌렸다.
약간 떨어진 곳에 등을 돌리고 누워 있는 심소옥의 작은 체구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한설연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원래 고마운 그녀지만 단 하나, 말투만 거슬렸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조차도 거슬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한설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스윽―
자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심소옥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난 심소옥이 검지를 세워 입술을 가리며 조용히 한설연에게 다가왔다.
한설연이 의아함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 때 심소옥의 전음이 들려왔다.
[조용히 하고, 돌아누워. 그리고 그 상태로 가만히 있어.]
[갑자기 왜…….]
[토 달지 말고 하란 대로 해.]
참으로 심소옥다운 화법이었다.
한설연이 그녀의 말에 따라 몸을 돌려 엎드렸다.
그러자 심소옥이 한설연의 옆에 조용히 앉더니 다시 전음을 보냈다.
[지금부터 네 몸을 만질 거야. 그러니 소리 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자는 사람들 다 깨우기 싫으면.]
뭘 하려는 건지는 의아했지만 지금의 심소옥은 진지한 모습이었다. 결국 한설연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심소옥이 지그시 뜬 눈을 한 채, 양손으로 한설연의 상체 이곳저곳을 만지기 시작했다. 마치 진맥을 하는 의원의 모습 같았다.
이윽고 뭔가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심소옥이 양손의 손끝을 이용해 한설연의 등과 엉덩이 근처 이곳저곳을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심소옥이 문지르는 부위는 하나같이 혈과 그 주변이었다. 처음에는 매우 부드럽게 문지르다가도 어떤 때는 강해졌고, 그러다가 또다시 부드러워지길 반복했다.
그게 아픈 듯하면서도 시원했다.
보아하니 심소옥은 단순히 손끝의 힘만으로 문지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모종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진기를 일으켜서 문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를 약 일다경(一茶頃.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 대략 20분)쯤 흘렀을까?
심소옥의 전음이 들렸다.
[돌아서 바르게 누워.]
한설연이 잠자코 바로 눕자, 이번에도 심소옥이 한설연의 상체 이곳저곳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누워서 얼굴을 보니 심소옥은 매우 집중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궁금한 건 많았지만 한설연은 심소옥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또다시 일다경쯤 지났을 때, 심소옥이 한설연의 몸에서 손을 떼며 전음을 보냈다.
[뭐야, 너. 보기보다 훨씬 크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심소옥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니 금방 알 것 같았다.
한설연이 양팔로 가슴께를 감싸며 말했다.
[가, 갑자기 무슨 그런 소릴…….]
심소옥이 피식 웃었다.
[얼굴도 예쁘다면서 몸매까지 좋다니. 이거 질투 나는데?]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애매했기에 한설연은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심소옥을 바라보던 한설연이 물었다.
[그런데 방금 뭐 한 거야?]
[그냥 세상에서 제일 비싼 안마 받았다고 생각해.]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대강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련을 하면서 때린 게 혈을 자극하는 느낌이었다면 방금 전에 문지른 건 혈을 달래주는 느낌이었다.
[고마워. 왠지 이 말만 하는 것 같네…….]
[보아하니 숙부한테 좋은 것도 먹여준 것 같고 해서 선심 한번 쓴 거야. 그러니 잠이나 자.]
한설연이 빙그레 웃었다.
[웃지 마. 정들어.]
심소옥이 그렇게 말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그녀가 조용히 걸음을 옮긴 곳은 연소운이 누워 있는 방향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에게 해줬던 것과 똑같은 것을 연소운에게 해줄 것이다.
종종걸음으로 연소운에게 다가가는 그 뒷모습이 작은 선녀 같았다.
고개를 들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설연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베개에 댔다.
몸이 나른한 가운데 잠이 스르르 몰려왔다.
* * *
아직 새벽도 되기 전의 어두운 시각.
심소옥이 문을 닫고 조용히 거처를 빠져나왔다.
나선형으로 이어진 통로를 지나 물웅덩이가 있는 공간으로 내려온 그녀가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뭔가를 눈치챈 반응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 한설연이 앉아 있었다. 바위 위였다.
심소옥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자리에 없기에 대충 예상은 했지. 역시 여기에 있었네.”
그러자 한설연이 바위 위에서 내려와 심소옥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 물었다.
“벌써 가는 거야?”
“어두울 때 가는 게 좋지. 혹시 모를 이목마저도 조심해줘야 여기 있는 사람들도 안전할 거 아냐.”
“인사들은 나눴고?”
“일어나 있는 사람들하고만. 간단히.”
아마도 단유소와 황 노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없이 바라보며 서 있는 한설연을 향해 심소옥이 말했다.
“간다. 잘 있어.”
그 말을 마친 심소옥이 막 두세 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언니.”
갑자기 들려온 한설연의 목소리에 심소옥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심소옥은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야, 난데없이.”
“그냥. 그렇게 부르고 싶었어. 지금까지는 선뜻 말이 안 나왔을 뿐.”
그러자 의미 모를 미소를 보이던 심소옥이 말했다.
“이번 나들이는 나름 성과가 있네. 천하에서 제일 예쁘다는 동생도 생기고.”
“그렇게 따지면 나는 완전 횡재지. 이 강호의 그 누가 소수마후와 지인이 될 수 있겠어. 게다가 빈말이 아니고, 나는 언니 쪽이 더 예쁘다고 생각해.”
“그런 얘긴 그만하자. 누가 듣고 재수 없다고 할라.”
웃으며 수긍한 한설연이 심소옥에게 말했다.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뭐, 솔직히 말해서 나도 너한테 고마워하고 있어. 네가 숙부를 살렸으니까. 만약 숙부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다면 난…….”
대체 어떤 관계기에 심소옥이 저렇게까지 단유소를 생각하는 걸까.
한설연이 궁금해하고 있을 때 심소옥이 말했다.
“숙부는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거든. 사연을 얘기하자면 길지만, 그런 게 있어.”
“아.”
고개를 끄덕여 보인 한설연이 물었다.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까?”
“글쎄.”
“그럼 언제라도 좋으니 한 번쯤 현월곡에 놀러와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무리일까? 내가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봐도 소수궁에서 나 같은 외부인의 방문을 허락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내가 현월곡에 갈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있다 해도 먼 훗날이 될 거야. 빨라도 내 제자가 들어온 후에야 가능할 일이거든.”
“아…….”
아쉬웠다.
심소옥이 참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됐는데,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 기약할 수 없다니.
“이제 정말 가야겠다. 잘 있어.”
“잘 가, 언니. 조심하고.”
고개를 끄덕인 심소옥이 이윽고 물가로 향했다.
막 입수하려다 말고 심소옥이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앞으로도 우리 숙부, 잘 부탁해.”
“언니도 알다시피 내가 그런 부탁 받을 입장이 아니잖아. 게다가 앞으로라고 해봐야 단 공자님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도 한정되어 있고.”
그러자 심소옥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글쎄…….”
의미 모를 미소를 지어 보인 심소옥이 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퐁당!
잠시 동안 크게 일렁이던 수면이 거의 잠잠해지기까지, 한설연은 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참 무섭지?”
“엄마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한설연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위쪽으로 올라가는 통로의 구석진 곳에 단유소가 서 있었다.
“뭐, 뭐, 뭐, 뭐예요, 갑자기……!”
단유소가 대답 대신 씩 웃었다.
“노, 놀랐잖아요! 기척도 없이……!”
“미안.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큰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린 한설연이 단유소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예요?”
“조금 전부터.”
“그런데 이렇게 움직여도 되는 거예요?”
“응. 통증이 많이 가라앉았어. 천천히 걷는 정도는 괜찮아. 계속 누워만 있었더니 답답하기도 했고.”
그 말에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그런데 처음에 했던 말은 뭐예요? 무섭다니요?”
“아! 미운 정이 참 무섭지 않느냐는 말이었어.”
그러자 한설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
“거슬리는 건 있었어도 미워했던 건 아니었거든요?”
단유소는 가타부타 대꾸하지 않고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러더니 물었다.
“좋은 녀석이지?”
“네. 언제 또 만나게 될지 기약이 없다는 게 한없이 서운할 정도로.”
“언젠간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야. 보아하니 소옥이 그 녀석, 당신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눈치였거든.”
“정말요?”
단유소가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한설연의 안색이 환해졌다.
“꼭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해주고 싶은 것도 많고, 함께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한설연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있었지만, 단유소의 눈동자는 웃고 있지 않았다.
왠지 심소옥을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마. 그러니 너도 조심해야 한다, 소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