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사천지부 (1)
대개의 무림맹 지부들이 해당 지역의 도읍에 위치해 있는데 반해, 사천지부는 그렇지 않다.
무림맹 사천지부는 사천의 동쪽 경계 근처인 대죽현에 자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천의 중심부에 백도의 거대 무림 세력들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천의 도읍인 성도에는 당가가, 그 인근에는 청성파가 있다. 또한 성도에서 남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아미파도 위치해 있다.
백도에서 당가는 소위 오대세가로 꼽히는 명문세가이고 청성파와 아미파는 구대문파 혹은 십대문파로 불리는 거대 문파이다.
당가, 청성파, 아미파로 구성된 사천의 삼대 무림 세력은 백도의 큰 축이다.
그들이 버티고 있는 사천의 성도에 굳이 무림맹의 지부까지 들어설 필요는 없다고 판단, 초창기에 지부를 설립할 때부터 아예 무림맹과의 중간 지점으로 위치를 정한 것이다.
무림맹 사천지부의 널따란 정원 안에는 인공으로 조성된 아름다운 연못이 있다.
넓은 연못의 중앙에는 한 채의 고풍스러운 정자가 서 있어, 그 위에서 바라보는 정원의 경관은 제법 운치가 있다.
이미 사위가 어두운 밤.
정자 위의 난간에 홀로 앉아서 연못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한 인물이 있었다. 낚싯대를 양 무릎 사이에 끼운 채 턱을 괴고 앉아 있는 그는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낚싯줄이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보아하니 드리워진 낚싯줄이 물에 가라앉지 않고 수면을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즉, 중년인은 바늘도, 추도, 찌도 달려 있지 않은 낚싯대를 연못에 그저 드리우고만 있는 것이다. 적어도 중년인의 목적이 물고기를 낚는 일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언제까지고 유지될 것 같았던 중년인만의 고요한 시간은 이윽고 들려온 발걸음 소리에 의해 깨졌다.
정원으로 난 길을 따라 두 사람이 연못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중년인이었다.
정자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노인이 정자 위의 중년인을 향해 말했다.
“허헐헐! 관상용 잉어와 붕어들만 있는 연못에서 웬 강태공 놀음이십니까.”
그러자 정자 위의 중년인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허허. 할 일이 없을 땐 이렇게 세월도 낚고 해야지요.”
“푸헐헐! 하여간 맹주의 그 엉뚱함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소이다. 덕분에 이 늙은이가 요새 웃고 살긴 합니다만. 헐헐헐.”
노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정자 위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은 바로 무림맹주 백리우였다. 백리우에게 다가가고 있는 두 사람 중에서 노인은 현월곡주 단목수헌이었고, 중년인은 문상 제갈윤이었다.
백리우가 단목수헌을 향해 대꾸했다.
“곡주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자고로 선배들 즐겁게 해드리는 후배만큼 좋은 후배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평소에 이 후배에게 잘해주셔야 하는 거고요.”
단목수헌이 웃으며 대꾸했다.
“헐헐헐! 알겠소이다. 내, 그러겠소이다. 그나저나 이 늙은이가 공연히 맹주의 명상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그러자 옆에서 걸음을 옮기던 제갈윤이 단목수헌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명상은 무슨 명상이겠습니까. 아마도 강호에 이름난 아리따운 소저들 생각이나 하고 계셨을 겁니다. 곡주님도 이제는 대강 아시잖습니까.”
“……다 들린다, 윤아.”
정자 위에서 백리우가 그렇게 말하자 제갈윤이 다시 단목수헌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방금, 말씀하시기 전에 움찔하는 거 보셨지요? 정곡을 찔린 겁니다.”
“푸헐헐헐!”
단목수헌이 웃을 때 정자 위에서 백리우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백리우가 여전히 낚싯대를 드리운 채로 연못을 바라보는 가운데, 정자 위로 올라온 두 사람이 그의 양옆에 섰다.
단목수헌이 말했다.
“맹주께서는 낚시하는 모습조차도 자세가 나오시는구려. 한 폭의 그림 같소이다.”
그러자 옆에서 제갈윤이 단목수헌에게 말했다.
“억지로 있어 보이는 척, 멋있는 척하시려는 겁니다. 형님은 원래 낚시를 싫어하십니다.”
그러자마자 백리우가 단목수헌에게 말했다.
“제가 이러고 삽니다. 저 녀석은 아우가 아니라 상전이라니까요? 제가 예전에도 말씀드렸을 겁니다. 저는 윤이 이 녀석의 꼭두각시라고. 이젠 믿어지시지요?”
“푸허허허허!”
단목수헌이 웃자 제갈윤이 백리우에게 말했다.
“곡주님을 어떻게 보고 그런 모략을 하십니까? 형님이 아무리 그러셔도 넘어갈 분이 아니시란 말입니다.”
그러자 백리우가 하소연하는 표정으로 단목수헌에게 말했다.
“소생은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곡주님의 심안을 믿고 있습니다. 암요, 믿다마다요.”
“글쎄요.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맹주. 이 늙은이에겐 진실을 꿰뚫어 보는 심안 같은 건 없소이다. 허헐헐헐.”
그러자 제갈윤이 말했다.
“곡주님께서 그렇게 일일이 반응하시니까 형님이 더 저러시는 겁니다. 재미있는 줄 알고요.”
“푸허허허허! 문상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구려.”
단목수헌이 대꾸하자 백리우가 탄식을 내뱉었다.
“아……! 곡주님도 결국 저 녀석한테 세뇌되셨군요. 그런 식으로 곡주님도 저 녀석의 꼭두각시가 되는 거란 말입니다. 곡주님 자신도 모르게. 그래서 제가 노상 조심하라고 말씀드리는 거고요.”
단목수헌이 빙그레 웃었다.
이 두 사람과 함께 지낸 게 벌써 삼 주째였다.
그동안 함께하면서 보니 두 사람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이들은 늘 농담을 주고받거나 때론 티격태격하면서 지냈다.
이러다가도 두 사람은 중요한 얘기가 나오면 더없이 진지해졌고, 그렇게 진지하다가도 또다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곤 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는 게 참 즐거웠다.
백리우와 제갈윤이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기에 더 재미가 있었다.
두 사람을 보다 보면 다른 걸 다 떠나서, 서로가 서로에게 편하고 좋은 벗이라는 게 참 부럽기만 하다.
게다가 두 사람에게서는 신뢰를 넘어선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데, 그게 더더욱 부럽다. 자신에게도 벗들은 있지만 이런 관계의 벗은 없으니까.
백리우가 단목수헌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이 밤중에 이곳엔 웬일이십니까, 곡주님.”
“아, 문상께서 할 말이 있다고 하여 따라나선 길이외다. 맹주와 함께 들어야 할 소식이라 하더구려.”
그러자 백리우가 다시 시선을 연못에 둔 채로 대꾸했다.
“아마도 안 좋은 소식일 겁니다. 윤이 이 녀석은 안 좋은 소식을 전할 때마다 이렇듯 가벼운 분위기를 먼저 만들거든요. 성격 참 이상하지요.”
그 말에 제갈윤이 미소를 지었다. 왠지 씁쓸한 느낌의 미소였다.
‘저 미소를 보니 아마도 맹주의 추측이 맞는 것 같군.’
단목수헌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때 제갈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묵룡조의 막내인 연소운에게서 전서가 왔습니다. 그가 묵룡과 합류했다 합니다.”
단목수헌의 눈동자가 커졌다.
의외로 백리우의 경우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전혀 동요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일전에 묵룡이 보내왔던 전서에 따르면 그와 한설연만이 남았다고 했다.
그 이후로는 소식이 없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드디어 그들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특히 단목수헌은 애가 탔다.
묵룡이야 원래 초고수니 큰 걱정이 안 되지만, 강호 초출인 자신의 제자는 얘기가 다를 수 있었다.
속내를 감추며 단목수헌이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두 사람 다……, 무사하답디까?”
그러자 제갈윤이 단목수헌에게 대꾸했다.
“안타깝게도 한 사람은 무사하지 못합니다.”
“아아……!”
단목수헌의 입에서 안타까움 가득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둘 중 한 사람은 무사하지 못하다면, 그건 자신의 제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었다.
제갈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사하지 못한 쪽은 한 소저 쪽이 아닙니다. 묵룡입니다. 그가 중태랍니다.”
“허어! 어찌하여……!”
눈을 부릅뜬 단목수헌의 표정이 심각해져 갔다.
제자가 무사한 건 다행한 일이나, 결론적으로 상황이 안 좋기는 매한가지였다.
묵룡이 중태라는 말인즉, 제자의 신세도 바람 앞의 촛불이라는 뜻이 아닌가.
“현재 묵룡은 옆구리를 크게 베였고, 내상도 심각한 상태랍니다. 의식도 없답니다. 지금은 산속의 적당한 곳에 은신하여 묵룡을 치료하는 중이랍니다.”
“아아……!”
단목수헌이 다시금 탄식을 내뱉었을 때 제갈윤이 말을 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한 소저의 응급 처치가 적절했던 모양입니다. 여전히 의식은 없으나, 묵룡의 몸 상태 자체는 조금씩이나마 호전되고 있다고 합니다.”
보고를 마친 제갈윤이 백리우를 바라보았다.
백리우는 평소와 다름없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제갈윤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형님…….’
백리우가 묵룡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다. 그냥 아끼는 게 아니고 유별나게 아낀다. 그러니 당연히 묵룡이 매우 걱정될 것이다.
그럼에도 동요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건, 단목수헌 앞에서 무림맹주의 위엄을 유지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역시, 많이 동요하셨군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안다.
백리우는 어렸을 때부터 무림맹 권력의 중심에서 많은 일들을 겪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다 보니, 동요하거나 감정이 격해진 상황에서도 습관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척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제갈윤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단목수헌이 물었다.
“상황 파악을 위해 묻는 것인데, 연소운이라는 그 대원의 실력은 어떠하오? 물론 신룡대원이니 당연히 뛰어나겠지만, 상대적인 부분에서 말이오.”
그 말에 여태껏 듣고만 있던 백리우가 대꾸했다.
“묵룡이 그렇게 되었을 정도라면……, 연소운이 그 상황을 감당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제갈윤도 옆에서 동의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뜻.
제자의 처지를 생각하니 단목수헌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아아…….”
결국 그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백리우가 얼른 난간에서 일어서며 그를 부축했다.
“곡주님! 괜찮으십니까!”
단목수헌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똑바로 서기 위해 애썼다. 곧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소이다, 맹주. 고맙소.”
호흡을 크게 하며 스스로를 진정시킨 단목수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께 못난 꼴을 보였소이다. 이 늙은이가 자기 제자 생각만 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되었구려. 정작 중태에 빠진 건 묵룡이니 두 분의 충격이 더 클 터인데……. 송구하외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곡주님. 어차피 묵룡과 한 소저를 별개로 생각할 일이 아니잖습니까.”
“문제는…….”
운을 뗀 후 잠시 말을 멈췄던 단목수헌이 한 차례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을 이었다.
“위기에 처했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으로서는 그쪽을 돕거나 지원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겠구려.”
단목수헌이 말을 마치자마자 백리우가 고개를 돌려 제갈윤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웃으며 물었다.
“역시 내가 직접 가야 하려나?”
제갈윤은 희미하게 미소만 지어 보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곧장 핀잔을 줬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농담조로 던진 말이지만 그게 백리우의 진심일 테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들을 구하러 가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백리우 자신이 더 잘 알 테니까.
곧, 백리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제갈윤에게 물었다.
“묵룡조의 나머지 조원들은?”
“아직 임무를 수행하는 중입니다. 거의 정리가 되어간다고 어제 전서를 받았습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바로 복귀하라고 해. 묵룡의 상태에 관한 내용은 일단 함구하고.”
“예.”
제갈윤이 대꾸하자 백리우가 다시 물었다.
“다른 조들의 상황은?”
“대부분 임무의 막바지입니다.”
신룡대가 맡는 임무들은 간단한 게 거의 없다. 애초에 간단한 임무가 신룡대에 갈 일도 없다. 그렇기에 신룡대의 임무는 소요되는 시간도 대부분 길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백리우가 물었다.
“그중에서도 묵룡과 가장 가까운 조가 어디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