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주선연 (2)
말했다.
말해버렸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용기가 나온 걸까.
주선연 자리에 많이 나가본 만큼, 그중에는 괜찮은 느낌의 여인들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녀들에게 이런 말을 해본 적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용기가 없었다.
거절당한다는 게 두려웠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여러 여인들을 떠나보냈었다. 바보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바보가 되기 싫었다.
뒤돌아 걸어가는 한수련의 뒷모습을 보니 그 생각만 들었다. 그녀는 그만큼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이대로 놓치기 싫었다.
한수련은 속내를 짐작하기 힘든 눈빛으로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한수련의 입술이 열렸다.
“미안해요, 단 공자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마음 한구석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한테서 거절당하는 일은,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충격적이었다.
“그럼…….”
한수련이 살짝 목례한 후 돌아서려 했다.
“이,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저, 이대로 그녀를 놓치기 싫다는 마음만 가득했다. 그러다 보니 말이 절로 튀어나온 것이다.
이유를 몰라서 물어, 지금?
충분히 말귀를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갈수록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참자. 금영이가 당부한 바가 있으니까.
“저는 애초에 주선연의 당사자도 아니었잖아요. 친구의 상황을 전해주러 나왔던 것뿐이에요.”
“오히려 그래서 인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정말 왜 저럴까.
저렇게까지 눈치가 없는 건가?
“여기까지만 해요. 이 정도면 제 뜻, 충분히 전해졌으리라 생각해요. 미안해요, 단 공자님.”
“한 소저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이 여러모로 부족해 보였을 거라는 점,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보여드린 모습들만이 다는 아닙니다. 더 많은 것들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한 소저께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하, 정말 가지가지 한다.
차라리 양금영이 다쳐서 못 나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뜩이나 심성 고운 양금영이니 이런 상황이 왔다면 거절도 제대로 못 했을 것이다. 곤란해했을 것이다. 이런 별 볼 일 없는 사내 때문에.
이쯤 되니 좋은 말로 거절해서 알아들을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 공자님에게 상처 주기 싫어서 최대한 좋게 매듭을 지으려는데 자꾸 왜 이러시나요? 그래요. 말이 나왔으니 말씀드릴게요. 알고 보면 더 나은 사람이다. 단 공자께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세상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나요? 게다가 이런 주선연에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평소에도 이런 건 아닌데 제가 긴장을 많이 해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 눈에 비친 단 공자님의 모습이 어땠는지 아세요? 한결같은 답답함뿐이었어요. 인생의 목표도, 남자로서의 자신감도, 청춘의 패기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부드럽거나 자상해 보이지도 않았지요. 시종일관 소극적인 모습으로, 재미가 있거나 유쾌하지도 않았고. 어느 한 부분에서도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고요.”
말이 계속될수록 단유소의 눈동자도 점점 커져 갔다.
“게다가 단 공자님은 여자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어요. 주어진 상황마다 어떻게 대응해야 여자가 좋아하는지에 대한 감각 자체가 아예 없어요. 그 누구보다 뛰어나야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최소한 평균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단 공자님의 무엇을 더 기대하겠어요? 다시 만난다고 해서 달라질 거라는 확신, 어떤 근거로 갖겠어요?”
아, 좀 심했나?
잔뜩 상처 받은 표정의 단유소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방식이 궁극적으로 그를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조금의 미련도 가져서는 안 되니까.
어차피 한수련이라는 여인은 오늘부로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니까.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하자.
“게다가 저는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더 이상 저를 피곤하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부디 좋은 분 만나시길 빌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짝사랑이지만.
“그럼 이만.”
곧바로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던 한설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지막 순간에 왠지 단유소의 눈빛이 확 바뀐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코 절망에 빠진 눈빛도 아니었고 분노로 인해 적대감을 담은 눈빛도 아니었다.
무심한 눈빛이었다. 좋게 말하면 차분한 눈빛이었다고 할까? 여태껏 충격으로 인해 심하게 흔들리던 그 눈빛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 생각을 하면서 걷던 한설연이 고개를 저었다.
잘못 본 거야. 착각한 거야.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순식간에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겠어. 그냥 포기한 눈빛이었던 거야. 그 남자에게도 잘된 일이지.
어쨌거나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주선연은 이렇게 끝났다.
의도했던 대로 좋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면 홀가분했을 텐데, 결국은 그러지 못하여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됐어.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자.
“이젠 안녕, 한수련.”
작게 중얼거린 한설연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매 두 마리가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 위를 고고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한수련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후벼 파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 창피하고 자존심도 더 상했다.
억울하기도 했다. 아직 보여주지 못한 게 더 많다는 말은 진심인데.
인피면구를 벗고 자신이 묵룡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을 때가 아주 가끔 있다. 항상 생각에서 머무를 뿐이지만 이번도 그런 경우였다.
한수련은 그렇게 해서라도 잡고 싶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첫눈에 반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믿게 만든 여인이었다.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말들이 더 큰 상처로 다가왔다.
상처가 큰 만큼 자괴감도 더 크게 몰려왔다. 감정이 생긴 여자 앞에서는 왜 늘 이렇게 한심해진단 말인가.
매몰차게 거절하는 한수련의 마지막 모습 속에서, 그녀가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도 갖고 있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의 가능성도 없다는 확신이 서자 여태껏 보이지 않던 그녀의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에 씌었던 콩깍지가 사라지니 초고수로서의 안력(眼力)이 자연스럽게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인의 의지나 마음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그녀가 마지막 말을 마치고 돌아서기까지의 짧은 순간 동안 많은 것이 보였다.
골격, 체형, 키, 팔다리의 길이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얼굴이나 목, 손 같은 곳에 난 미세한 점들의 위치와 개수까지, 그 모든 게 한꺼번에 인식되었다.
자신의 상태를 자각한 단유소가 정신을 차리듯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상처를 받았어도 이러면 안 되지.
‘잊자.’
숙소를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내내 마음속으로 그 말만을 되뇌었다.
꿈이었다고 생각하자.
꾸고 있을 때는 정말 좋았다가 나중에 깨고 나면 슬퍼지는, 간혹 꾸는 그런 꿈이었다고 생각하자.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한설연의 모습과 그녀가 했던 말들이 계속해서 떠올라 마음만 더 아팠다.
술 생각이 났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 * *
“아니 뭐 그런 여자가 다 있어요?”
단유소에게서 모든 상황을 전해 들은 곽승추의 반응이었다. 두 사람이 머무는 숙소에서는 이미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여자 잘못이 아니야. 내가 한심한 탓이지.”
“아니, 그게 어떻게 조장님 잘못이에요? 결국 그 여자는 처음부터 조장님을 떠보기 위해서 남았다는 뜻이잖아요? 차 한잔 마시자고 먼저 말한 것도 그 여자였다면서요?”
곽승추가 술잔을 벌컥 들이켰다. 그러더니 분개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애초에 그 여자가 상황만 전해주고 돌아갔으면 다음 기회에라도 양 소저를 만날 수 있는 거였잖아요. 그런데 왜 자기가 나서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느냐고요.”
“후우…….”
“마지막에도 그래요. 처음부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으면 쉽게 끝났을 일이었잖아요. 굳이 그딴 식으로 싸가지 없는 말을 지껄일 필요도 없었잖아요. 거참 이상한 여자네.”
벌컥.
곽승추의 말을 들은 단유소가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솔직히 그 부분은 곽승추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됐다. 이제 끝난 일이야. 그리고 그렇게까지 나쁜 여자는 아니라니까. 내가 한심하기도 했고.”
“조장님도 참 답답하시네. 이 상황에서도 그 여자를 이해해주고 싶은 거예요?”
“틀린 말은 아니잖냐. 그 여자 말이.”
“아, 답답해.”
곽승추가 또다시 술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안 되겠어요. 최 대협한테 가서 한마디 해줘야겠어요.”
“됐다. 그게 그분한테 따질 일이냐?”
“답답해서 해본 말입니다, 답답해서. 아! 왜 하필 양 소저는 그 시점에 다쳐가지고. 상황이 꼬여도 어떻게 이렇게 꼬인담?”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곽승추가 단유소의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술 한잔 거하게 드시고 잊으세요. 더 좋은 인연이 생기시려고 이러는 거라 생각하시고.”
단유소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또다시 술을 털어 넣었다.
그 후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곽승추의 말에 단유소가 대답 대신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일단 복귀.”
“나는?”
“이왕 절강에 오셨으니 절강지부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파악하여 특이 사항을 보고하랍니다. 절강지부의 비마대에 파견 근무를 나온 형식이 될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군.”
일종의 휴가 개념이었다. 장기 임무를 끝낸 후에는 이런 식의 간단한 임무가 주어지곤 했다.
무림맹 절강지부는 그 유명한 항주에 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항주이니만큼, 경관도 즐기며 충분히 휴식을 취하다가 본맹으로 복귀하라는 뜻이다.
단유소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배려가 고맙긴 한데 이번에는 괜한 배려를 하셨네. 적어도 지금은 절강에 있기 싫은데 말이야.”
* * *
사흘 후, 현월곡.
정갈하게 꾸며진 넓은 방 안에 백발의 노인이 누워 있었다.
노인의 안색은 창백했다.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상태였다.
노인의 옆에 백의를 입은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이십 대 중반쯤의 여인이었는데, 선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미녀였다.
여인이 물에 적신 고운 천으로 조심스럽게 노인의 얼굴을 닦았다.
노인의 이름은 단목수헌. 바로 현월곡주라 불리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단목수헌이 입을 열었다.
“늙어지니 병만 늘어나는구나. 늙은 사부 때문에 매번 네가 고생이 많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사부님. 그보다도 얼른 쾌차하셔야죠.”
그렇게 대답한 여인의 이름은 송채령으로 현월곡주 단목수헌의 둘째 제자였다. 셋째 제자인 한설연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송채령 또한 현숙하고 성품이 곱기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설연이 그 아이가 네 이런 면을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겠구나. 여성스러운 면이 너무 없어서 걱정이야.”
“사매는 똑똑하고 예쁘잖아요. 그거면 됐죠.”
“똑똑하고 예쁘면 뭐 해. 사내들 무시하는 그 성격 안 고치면 시집도 못 보내. 시댁 식구들한테 못할 짓이야.”
“사매도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부님.”
“에잉, 쯧쯧.”
단목수헌이 혀를 찰 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있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사부님!”
한설연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단목수헌이 그렇게 말하자 송채령이 미소를 지었다.
한설연이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너는 왜 또 그렇게 부산스러워?”
단목수헌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묻자 한설연이 전서를 내밀며 황급히 대꾸했다.
“사부님, 큰일 났어요! 사형이 위험에 처했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