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4화 (4/200)

4화. 주선연 (1)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알고 싶어요.”

막상 사내를 보고 나자 양금영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최익 대협이 말씀하시길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했거든요. 평소 최익 대협의 성품을 보면 괜히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은 아니어서요.”

그 말을 할 때의 양금영은 진지했다.

“그러니 처음 봤을 때 영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면 언니가 이야기를 한번 나눠봤으면 좋겠어요. 주변에서 만났든 주선연으로 만났든, 괜찮은 사람이면 서로 알아가며 인연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양금영의 맞긴 하다.

하필 이 시점에 그 말이 떠올라서 마음이 약해진 게 문제지만.

에잇. 귀찮아서 정말.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소중한 동생인 양금영의 청을 들어주는 수밖에.

어쩌면 잘된 일일 수도 있다.

자신이 직접 겪고 가서 이 사내가 얼마나 한심한지를 전해준다면, 앞으로 양금영도 더 이상 주선연 따위에 혹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차 한잔하자고 한 것이다.

사실 차 한잔하는 것 정도는 어려울 게 없었다. 진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눈앞에 앉아 있는 사내의 분위기였다.

단유소의 눈빛과 표정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지금 자신에게 큰 호감을 갖고 있음을.

흥! 꼴에 보는 눈은 있어서.

뭐, 당연한 일이지. 어디 인피면구 따위로 가려질 매력인가? 내 매력이?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사내가 반색하며 물었다.

이 한심한 남자야. 그렇게 속내를 곧바로 드러내면 상대가 얕잡아 보기 시작하는 거라고! 없어 보여! 표정이나 어조에 좀 더 여유를 가질 수는 없는 거야?

일단 외모 점수는 사 점.

하지만 어수룩한 모습에서 삼 점 감점.

그나마 착해 보이는 인상이니까, 후하게 이 점 추가.

결국 첫인상 점수는 십 점 만점에 삼 점.

역시 이게 주선연 같은 데에 나오는 사내들의 수준이라는 거다.

“단 공자께서 그냥 이렇게 가시면 제 친구 때문에 공연히 헛걸음만 하신 게 되잖아요. 친한 친구의 입장에서 미안하기도 하고, 저도 마침 시간이 좀 있고요.”

“고맙습니다, 한 소저.”

사내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좋단다, 아주.

남의 속도 모르고.

함께 차를 주문하고 나서 한수련이, 아니 한설연이 단유소에게 말했다.

“옷이 멋지네요. 고급스럽고.”

이봐요. 주선연 나온다고 비싼 것들로만 골라서 걸친 모양인데 안 어울려요. 자연스러운 맛이 없잖아요. 색깔도 매무새도.

그래서 옷차림새 점수도 삼 점.

“아, 그렇습니까?”

단유소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응? 그냥 웃기만 하고 끝?

이왕 옷차림 얘기가 나왔으니 상대 여인의 옷차림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줘야 할 거 아냐, 이 한심아.

눈치 점수, 빵점!

“단 공자는 뭐 하는 분이세요? 제가 듣기로 무림맹 쪽에서 일하신다는 것 같던데.”

“아, 예. 들으신 대롭니다.”

“무림맹이라니 대단하세요!”

무림맹에 대해서는 한설연 자신이 더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억지로 추켜세우는 척해준 것이다.

사내들은 이런 걸 좋아한다. 이러면 신나서 더 떠들게 되어 있다.

“아니 뭐……, 그렇게 대단할 정도는 아닙니다.”

“무림맹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데요? 무인이신가요?”

무림맹에서 일한다고 해서 모두가 무인인 것은 아니었다. 사무를 보는 사람도,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한설연이 볼 때 단유소는 무공을 익힌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물론, 보는 것만으로 무공을 익혔는지 익히지 않았는지를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당사자가 내공을 운용하여 기운을 끌어올리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다만 무공을 수준 이상으로 익힌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기세 같은 것은 있는데, 단유소에게서는 그런 게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유소가 대답했다.

“무림맹 비마대의 외부 업무 지원조에 있습니다.”

비마대는 쉽게 말하면 무림맹의 수송대였다.

“비마대가 뭐 하는 곳인데요?”

물론 알면서도 떠보기 위해 물은 것이다. 허세를 부리는 사람인지 어떤지, 성향을 보기 위해서.

“간단히 말씀드리면, 수송대 같은 겁니다.”

“마차로 짐 나르고 그러는?”

“예.”

“외부 업무 지원조는 뭐 하는 덴가요?”

“무림맹과 거래하는 상단이나 표국 등을 돌아다니며 수송 업무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입니다.”

비마대 제30조의 조장이 바로 단유소가 맹 내에서 사용하는 현재의 위장 신분이었다. 묵룡조원 모두가 그곳에 속해 있다.

때때로 높은 지위가 필요할 때 쓰는 위장 신분은 또 따로 있다.

단유소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실, 비마대에 필요한 일이면 뭐든 다 합니다. 인력이 부족할 때는 수송 마차도 몰고, 구사(廐舍, 마구간) 일도 합니다. 지원조라는 게 그런 거니까요.”

“아하. 그런 일을 하시는구나. 그럼 무공은 할 줄 아세요? 무림맹에서 일하는 분들은 왠지 무슨 일을 해도 기본적으로 무공은 할 것 같거든요.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그렇게들 생각하시더군요. 하지만 저는 무공 쪽으로는 그냥 호신술 정도만…….”

그래. 최소한 말도 안 되는 허세나 부리는 칠푼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인정해준다.

“와! 호신술! 그러면 길거리에서 파락호들이 시비를 걸어오면 혼내줄 수도 있는 거예요?”

한설연이 약한 척하며 그렇게 물었다.

물론 길거리의 파락호들 따위는 백 명이 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의 무공을 갖춘 그녀였다. 그렇기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가증스러운 질문이긴 했다.

뭐, 어때.

어차피 한수련은 가상의 인물인데.

게다가 이 사람은 오늘 보고 안 볼 사람인데.

“글쎄요. 상대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오오! 자신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런 말씀은 아니고요. 요즘 파락호들 무섭거든요. 그냥,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한둘쯤은 어떻게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해본 말입니다.”

일단은 솔직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한심한 사내라는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지만.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단유소는 한수련이라는 여인이 마음에 들었다.

말투며 표정이며 자세며 손짓이며, 모든 면에서 은은한 기품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총기가 엿보이는 눈동자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적극적인 모습이 좋았다.

말도 잘 걸어주고, 잘 들어주고 또 호응도 잘해준다.

설레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주선연 자리에서 이런 여인을 만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극히 적다. 주선연에 제법 많이 나가봤기에 잘 알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 한수련과의 이 자리는 주선연이라고 보기 힘들긴 하지만.

그나저나 한수련이라는 이 여인은 뭐 하는 여인일까.

문득 단유소는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한 소저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요.”

“제 얘기요? 뭐가 궁금한데요?”

“그냥 뭐, 어떤 분인지…….”

“구체적으로 하나씩.”

“아, 참. 그렇죠. 하. 하하.”

어색하게 웃어 보인 단유소는 제법 신중히 질문을 골랐다.

“한 소저는 몇 살이십니까? 양 소저와 친구 사이시긴 하지만 동갑이 아닐 수도 있으니.”

“스물셋이에요.”

“아, 양 소저보다 언니시군요.”

“맞아요. 단 공자는 스물일곱이시죠?”

“예.”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단유소가 다시 물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지금 하시는 일 같은 걸 여쭤봐도…….”

“직업을 물어보신 거라면, 없어요. 그냥 집안일이나 돕는 정도예요.”

“아.”

어떤 집안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준 있는 가풍을 가진 집안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을 저렇게 잘 키웠다면.

“취미는 뭔지요? 그러니까 혼자 있는 시간에 뭘 하시는지.”

“주로 책을 읽어요.”

“오오.”

“안 믿어지나요?”

“믿습니다. 한 소저라면 왠지 그러실 것 같아서요.”

그 말에 한설연이 미소를 지었다.

단유소의 눈에 비친 그녀의 미소는 황홀할 정도로 예뻤다.

이 여자, 정말 마음에 들어.

승추야, 고맙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단유소는 한설연에게 점점 더 빠져들었다.

“단 공자는 꿈이 뭔가요? 어떤 목표를 갖고 있다든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든가. 내지는 어떤 삶을 살고 싶다든가.”

“사실 제 꿈은……, 평범하게 사는 겁니다. 평범한 가정을 꾸려서, 소중한 사람들과 더불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사는 거지요.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면서요.”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그게 꿈이라고?

물론 그런 생각 자체를 한심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게 가장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래서 어떻게 상대방이 매력을 느끼겠느냔 말이다.

적어도 마음에 드는 상대 앞에서라면 조금은 더 멋진 꿈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비마대주가 되겠다는 둥 허황된 목표까지는 아니더라도, 비마대 지휘부의 간부 정도는 누구나 충분히 목표로 삼을 수 있으니까.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산다는 생각 자체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단유소가 저렇게 말하니 그저 현실에 만족하고 월봉이나 챙기며 살겠다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어진 상황에서의 야망, 패기, 가능성 등을 통틀어서 모두 빵점!

하여간 처음부터 끝까지 한심하다니까.

“소중한 사람들이란 아까 말씀하신 그 동료들인가요?”

“예. 그 친구들도 포함해서요.”

“그분들을 많이 신뢰하시나 봐요.”

“예. 강호에서 쓰는 말로 표현하자면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친구들이거든요. 여러모로.”

답답하다. 순진해도 정도가 있지.

이보세요. 강호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답니다. 그래서 초고수들도 아무에게나 등 뒤를 맡기지 않는 거라고요. 그렇게 무작정 믿고 있다가는 등 뒤에 칼 꽂히기 십상이니까.

어쨌거나 여태까지의 총점은 아무리 높게 쳐줘도 십 점 만점에 일이 점 정도.

이조차도 그나마 진솔한 면은 있다는 점을 고려해 후하게 점수를 준 것이다.

금영아, 이 철없는 것아. 알겠니?

이게 오늘 네가 만나려던 사내의 수준이란다.

이제 슬슬 자리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난 후로 벌써 한 시진(두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주선연은 적당히 경험했다. 양금영에게 체면치레도 충분히 한 셈이다.

주선연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단유소라는 눈앞의 사내는 한심하기만 했다.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게 재미있지도 않았다.

결국 사내들이 한심하다는 점과 주선연에 나오는 사내들은 특히 더 한심하다는 점만 확인한 셈이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 틈을 타서 한설연이 말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이제 슬슬 들어가야겠어요.”

그 말에 단유소가 놀란 기색을 보였다.

“아……!”

한설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단유소도 따라서 일어났다. 단유소가 잔뜩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한 소저.”

아이고, 그러셨어요?

안타깝게도 저에게는 시간낭비였답니다.

“저도요.”

한설연이 생긋 웃으며 대꾸하자 그 모습을 보던 단유소의 얼굴이 붉어졌다.

“댁 근처까지 배웅해드리겠습니다.”

“호의는 고맙지만 괜찮아요. 집에 가기 전에 잠시 들를 데가 있어서요.”

“그, 그럼 이 아래까지라도…….”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미안하지만 난 당신한테 관심 없어요.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 그런데 왜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나요?

“그래요. 그러면 이 아래까지만 부탁드려요.”

“예, 한 소저. 가시죠.”

두 사람이 나란히 계단을 내려와 다루를 벗어났다.

다루 앞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한설연이 말했다.

“그럼 단 공자님, 건승을 빌어요.”

“예……, 한 소저도요.”

한설연이 돌아섰다.

그녀가 막 두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한 소저.”

한설연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로 돌아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그, 그게, 그러니까…….”

주저하며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던 단유소가 침을 한 번 삼키더니 말했다.

“하, 한 소저와…… 계속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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