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6화 (6/200)

6화. 현월곡

누운 상태에서 꼬깃꼬깃한 전서를 확인하던 단목수헌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언제 도착했느냐?”

“방금 전에요.”

한설연이 대꾸하자 단목수헌이 송채령에게 말했다.

“일으켜다오.”

송채령이 양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그냥 누워 계시는 게 좋습니다, 사부님.”

“아니. 일으켜다오.”

단목수헌의 표정이 심각했다. 결국 송채령과 한설연이 양옆에서 그의 상체를 일으켰다.

“소학이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 처한 것 같구나.”

진소학.

그가 바로 현월곡주의 수제자였다. 세간에서는 현월곡의 대공자라고 불렸다.

진소학은 세상을 배우겠다며 강호를 주유하는 중이었다. 책에서 배울 건 거의 다 배웠다는 이유였다.

단목수헌이 송채령에게 전서를 내밀었다.

전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자신이 커다란 위험에 처해 있으니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전서를 확인한 송채령의 커다란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분명히 진소학의 필체였다. 그것도 핏물을 이용해 손가락으로 급하게 흘려 쓴 필체였다. 진소학 본인의 핏물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진소학도 고수였지만 그를 수행하고 있는 무인들도 현월곡의 정예 고수들이었다. 그런데도 위험에 처했다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진소학이 현월곡을 나선 후로 두 해가 지나도록 이런 적은 없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상황이 그만큼 다급했다는 뜻.

“대, 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송채령이 떨리는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유독 걱정스러워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진소학과 그녀가 서로 좋아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곡 내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설연이가 가서 월혼대주와 비월단주를 불러오너라.”

“예, 사부님.”

월혼대(月魂隊)와 비월단(飛月團) 모두 현월곡을 대표하는 무력 조직들이었다. 월혼대는 소수 정예였고 비월단은 규모가 컸다.

잠시 후, 두 명의 무인이 한설연을 따라 들어왔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곡주님! 대공자님은 무사하신 겁니까?”

강렬한 눈매에 사각턱이 인상적인 사십 대 후반 사내가 황급히 물었다. 비월단주 엄주평이었다.

그의 옆에 앉은 차분한 인상의 삼십 대 사내는 월혼대주 구홍립이었다.

“일단 이걸 보시게.”

단목수헌이 전서를 내밀었다.

전서를 확인한 두 사람 역시 놀람을 금치 못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엄주평이 결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외쳤다. 진소학이 어렸던 시절부터 조카처럼 아껴줬던 사람이 바로 엄주평이었다.

그러나 단목수헌은 이미 고개를 젓고 있었다.

“엄 단주는 곡을 지켜주는 게 좋겠네.”

“하오나 곡주님!”

“엄 단주의 실력을 못 믿어서가 아닐세. 지금은 최대한 냉철해질 때야. 최선을 다해 소학이를 지원하면서 곡의 안전도 함께 생각해야 하네. 강호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니까. 엄 단주는 이곳에 남아서 곡을 지켜주는 편이 좋겠네.”

병색이 완연한 와중에도 단목수헌의 눈동자는 차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구 대주가 월혼대를 이끌고 가주게. 이곳에는 한 개 조 정도의 전력만 남겨두고.”

“예.”

“엄 단주는 비월단원 중에서 중상급 고수들을 오십 명 정도 추려주시게. 그들이 구 대주와 함께하게 될 걸세.”

“그리…… 하겠습니다.”

“미리 소문나서 좋을 일 없네. 두 사람 모두 일단은 은밀하게 준비하시게.”

“예, 곡주님.”

지시를 받은 엄주평과 구홍립이 방을 나섰다.

한설연은 사부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엄주평이나 구홍립이나 무공 수위 자체는 비슷했다.

다만 엄주평은 진소학을 매우 아끼는 만큼 중요한 순간에 자칫 판단력이 흐트러질 가능성이 컸다. 그 열성적인 성격만큼이나 물불 안 가리고 진소학만을 위해 움직일 테니까.

그에 반해 구홍립은 말수가 적고 냉철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한설연 자신이 판단하기에도 이번 임무의 성격상 엄주평보다는 구홍립이 더 적절한 패였다. 사부도 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송채령이 말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사부님.”

단목수헌이 한동안 조용히 송채령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채령이 너도 안 된다.”

“사부님……!”

물론 단목수헌도 진소학과 송채령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었다.

“네 심정이 어떨지는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가장 효율적으로 소학이를 돕는 일이다.”

“하오나…….”

송채령이 애원하는 표정으로 재차 말했지만 단목수헌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잠시 그러고 있던 단목수헌이 말했다.

“누구보다도 가장 가고 싶은 건 나다.”

“송구…… 합니다.”

송채령이 고개를 숙였다. 순간적으로 사부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사부의 말이 맞다. 세상에서 진소학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사부일 수밖에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어려운 일이 될 게야. 소학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도 알 수 없고 그 아이가 전서를 보낸 그곳에 여전히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때 한설연이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사부님.”

단목수헌이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너도 보낼 수 없다. 위험해.”

“저마저 가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다른 대안은 있으시고요?”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무림맹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긴 해요. 하지만 그들은 사형을 잘 몰라요. 사형은 똑똑한 사람이니 어떤 식으로든 단서를 남겼을 거예요. 그렇다면 사형을 잘 아는 사람이 꼭 필요하잖아요.”

단목수헌의 양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구 대주님도 사형을 잘 알죠. 하지만 사부님이 말씀대로라면 현장을 철저하게 조사해서 단서를 찾고 추리를 하며 사형의 행적을 뒤쫓아야 할 거예요. 구 대주님이 그걸 할 수 있나요?”

단목수헌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말이 없었다.

“그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대안, 또 있으세요?”

“충동적으로 나설 사안이 아니야.”

“옳은 말씀이세요. 하지만 남 일이 아니잖아요.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친오라비가 위험에 처했는데 누이가 가만히 있어요?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데도? 단지 위험하다는 핑계로? 세상 어느 가족이 그래요.”

단목수헌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설연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다섯 명의 제자 중, 위기가 닥쳤을 때 믿고 뒤를 맡길 수 있는 제자는 두 명. 바로 진소학과 한설연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진소학이 더 뛰어나지만 순발력, 응용력, 판단력 같은 부분은 한설연이 더 뛰어났다. 당돌한 면도 있었고 추진력도 있었다. 무공 수위도 진소학 다음이었다.

문제는 이번 일 자체가 왠지 불길하다는 점이었다. 그간의 강호는 평화로워도 너무 평화로웠으니까.

‘결국 보내야 하는가? 저 어린것을?’

한설연의 말마따나 대안이 없었다. 수제자이자 다음 대의 현월곡을 이끌어가야 할 진소학의 안위가 걸린 문제였다.

단목수헌의 입이 열렸다.

“고수가…… 더 필요하겠구나.”

뜻을 알아들은 한설연이 대꾸했다.

“반드시 사형을 찾아올게요, 사부님.”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단목수헌이 말했다.

“은밀하게 움직일 일이다. 네가 나섰다는 사실을 알면 온 강호가 시끄러워질 게야.”

“알겠어요, 사부님. 사안이 급하고 저도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한설연이 방을 나서자 송채령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을까요, 사부님? 이 상황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사매라는 점이야 저도 백번 공감합니다. 사매는 잘할 거예요. 하지만 저 또한 사매의 안위가 매우 염려됩니다. 사매에게까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러니 무슨 일도 생기지 않게 대비해야겠지. 너도 일단 나가 보거라. 생각을 좀 정리해야겠다.”

“예, 사부님. 필요한 거 있으시면 바로 불러주세요.”

“무림맹주에게 보낼 전서를 써놓을 테니 일각(15분) 후에 오너라.”

“알겠습니다, 사부님.”

송채령이 방을 나섰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단목수헌의 입술이 열렸다.

“석문, 있는가.”

“예, 곡주님.”

대답이 들려온 곳은 방 천장 위였다. 짧지만 절도 있는 목소리였다.

석문은 단목수헌의 수호위였다. 항상 은밀하게 움직이기에 현월곡에서도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들었겠지?”

“예.”

“자네가 설연이 그 아이를 좀 맡아줘야겠네. 은월조(隱月組)를 모두 데려가게. 은밀히 따르다가 위험이 있을 때에만 나서면 되네. 알겠는가?”

“예.”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내게 알려야 하네.”

“당연합니다.”

“가서 준비하게. 자네만 믿네.”

“예!”

천장을 빠져나가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지만 단목수헌은 석문이 이미 떠났음을 알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던 단목수헌이 이윽고 붓을 들었다.

먹물을 가득 머금은 붓이 하얀 종이 위를 거침없이 채워가기 시작했다.

약 일각 후, 무림맹이 있는 무창 방향으로 전서응 한 마리가 힘차게 날아올랐다.

* * *

“허어. 진소학이 위험에 처했다니 거참 큰일이구려, 문상.”

푹신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나른한 어조로 그렇게 대꾸한 중년인의 이름은 백리우(百里雨). 점잖은 인상에 호감형의 얼굴을 지닌 그는 지금 손톱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맹주님, 제가 보고를 드릴 때는 좀 집중해달라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점잖게 타이르는 어조로 그렇게 말한 문사 차림 중년 사내의 이름은 제갈윤(諸葛允). 그가 바로 제갈세가의 현 가주이자 무림맹의 문상이었다.

무림맹주 백리우가 여전히 손톱에 시선을 둔 채로 대꾸했다.

“말인즉 현월곡에서 그 일로 도움을 요청해 왔다는 거잖소. 다 듣고 있다니까요. 그러니 개의치 말고 말씀하세요, 문상.”

무료함이 잔뜩 묻어나는 어조였다.

“그래도 중요한 보고를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해찰은 좀 자제하시는 게…….”

“허허. 우리끼린데 뭘 그리 딱딱하게 구시오. 그냥 편하게 합시…….”

“표 호위, 잠시 자리 좀 비켜주겠나?”

백리우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제갈윤이 허공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

표익은 그림자처럼 백리우를 지키는 수호위였다. 고수들이 득실대는 이 무림맹에서조차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허공에서 그의 간결한 대답이 들렸다.

“충(忠)!”

그러고 나서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백리우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보이며 제갈윤에게 말했다.

“뭐냐? 이젠 아주 내 수호위가 아니라 니 수호위 같다? 번번이 니 명령을 듣는 쟨 또 뭐고? 쟤는 요즘 아예 내 의중은 묻지도 않고 그냥 사라져버리네? 포섭했냐? 음모 짰냐?”

제갈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포섭하긴 뭘 포섭해요! 그리고 그 음모 타령은 이제 지겹지도 않아요?”

그러자 백리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짜식. 맹주 하고 싶으면 음모 짜지 말고 말로 하라니까? 너라면 형이 언제든 물려준다니까. 이십 년간 이 짓 하느라 나도 지쳤다고. 그러니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너 해. 말로 해도 얼마든지 물려줄 수 있으니까.”

“형님, 쫌! 말이 되는 소릴 하십쇼, 쫌!”

결국 제갈윤의 언성이 높아졌다.

백리우가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

“뭘 그리 역정을 내고 그래. 농 한번 해본 거 가지고.”

“아니, 농을 해도 무슨 그런 농을 해요!”

“화내지 마. 무서워. 난 니가 화내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아니 너 자체가 제일 무서워.”

“퍽이나 무서우시겠소! 무림 전체가 덤벼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양반이.”

“그러니까, 무림 전체보다 니가 더 무섭다는 말이잖아.”

백리우의 장난기 어린 미소는 여전했다.

제갈윤이 눈매를 찡그리며 말했다.

“제발 형님, 무공만 천하제일인 걸로 만족합시다. 말장난까지 천하제일이 꼭 되셔야겠소?”

“니가 있는 한 그것만큼은 천하제일이 될 수 없지. 나도 내 주제를 안다고.”

“하아…….”

제갈윤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도 웃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