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76장 (177/199)

 # 176

176.

걸인각성(乞人覺醒) - 거지의 깨달음 8

가장 소중한 것

제1장 베갯잇 송사

나의 지금을 낳아주신 분은 진인이시다.

그리고 나의 지금을 지탱해 주는 건 그녀.

그녀를 볼 때마다 난 아직도 마음이 설레인다.

나의 사랑하는 그녀…….

- 맹공효

***

맹공효는 침상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부주님, 부디 그곳에선 마음 편히 쉬십시오.’

오늘로 건곤진인 오비원이 세상을 뜬 지 열흘이 지났다. 장례식은 강호 인사들의 참여 속에 엄숙하고도 장엄하게 마쳐졌다. 장례 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에도 오비원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 이름만으로도 두려움에 떨게 하고 혹은 존경심으로 두근거리게 했던 그가 영영 세상과 이별을 고한 것이다.

하지만 천선부인들은 아직까지 그를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오비원이었지만 그들 마음엔 여전히 거인처럼 서 있었다.

오비원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곳을 볼 때마다 그의 존재감은 더욱 뚜렷이 부각되었다. 그렇게 그는 어떤 곳에서도 존재했다. 그가 자주 거닐던 화원의 구석구석에, 그가 가만히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던 그 창가에도 향기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어찌 보면 정작 오비원은 살아 있는데 단지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투명체가 되었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향기는 그만큼 짙게 천선부에 머물러 좀체 떠나려 하지 않았다.

특히 맹공효 같은 경우엔 그 정도가 극히 심했다. 그는 한 호흡을 내쉬고 한 걸음을 떼는 중에도, 또는 천선부 어느 곳을 보던지 간에 오비원의 모습을 보았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아버지였고 또한 스승이었다. 그를 잊기엔 열흘이라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수십 년이 지나고 생이 끝마쳐지는 그 순간까지도 그를 지우긴 힘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께서 부탁하신 일은 차질없이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양팔을 머리 뒤로 포개고 드러누운 맹공효의 눈은 천장에 새겨진 고리 문양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리 문양이 어떻게 이어지고 어느 지점에서 동그라미가 커지고 어떻게 겹쳐져 문양을 이루는지 따위는 전혀 보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조차도 언제 눈을 깜박이는지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다른 생각에 깊게 사로잡혀 마냥 지난 시간들 속을 헤매며 돌아다닐 뿐이었다. 이 순간 그는 추억으로의 여행자였다.

그런 일이 생길 리는 만무하겠지만 지금 그의 눈동자 위로 조그마한 -양 손바닥을 펼쳐 놓은 것만큼이나 조그마한- 먹구름이 다가와 비를 쏟아 붓고 간간이 뇌성벽력을 발한다 해도 어쩌면 전혀 알아채지 못할 것만 같이 그는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상념은 의외로 너무 간단한 소리에 의해 깨어졌다. 그건 고함 소리나 사자후와 같은 커다란 소리가 아니었다. 조용히 간질이듯 들려오는 감미로운 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진인을 생각하시나요?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감미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맹공효의 아내 진몽향이었다. 그녀는 공효의 왼쪽에서 구부린 팔을 베고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진인께선 천수를 누리고 가셨잖아요. 그러니 당신께서 너무 염려하시면 진인께서 저 하늘에서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시겠어요.”

그녀는 목소리만 아름다울 뿐 아니라 고혹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현숙한 부인의 자태(姿態) 속에 보일 듯 말 듯 기묘한 매력이 깃들어 있는데 지극히 정갈한 미(美)와 그 사이사이를 관통하는 미세한 요염함이 숨 쉬고 있었다.

호롱불이 살짝살짝 느리게 춤을 출 때마다 음영이 교차하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눈부시게 빛내주었다. 이제 30대 초반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아련한 미모였다.

맹공효는 느리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질서를 이루지 못한 혼잡한 마음이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닿자 서서히 현실로 돌아오는 듯했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음… 하지만 난 한 가지 일을 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분의 지난날을 편하게 추억하게 될 것 같군.”

진몽향은 눈동자를 위로 올려 몇 번 깜박이고 입술을 옴지락거렸다. 그것은 그녀가 질문 대신에 자주 사용하는 표정이었다.

어떤 경우엔 직접 말을 하는 것보다 작은 동작이나 행동 하나가 더 큰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지금 진몽향의 표정이 그러했다.

그건 단순히 ‘그 일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 것보다 훨씬 고명한 수단이라 할 만했다. 대충 표현을 해보자면 ‘아마 내게 말하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할걸요?’라고 여유를 부리는 것 같았다.

공효는 그녀가 지어내는 그 모습을 너무도 사랑했다. 그럴 땐 그는 세상의 낙원에 와 있는 착각에 빠져 아무 생각조차 없어지곤 했다.

“그 일은 바로…….”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대뇌에 비상 신호가 켜졌다. 그것이 바로 ‘천보갑’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아무리 부부가 일심동체라고 하지만 진인이 긴요하게 부탁한 일을 간단히 말한다는 게 마음에 걸린 것이다.

‘몽향에게 말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아니야, 그래도 내가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맹공효가 망설인 것은 찰나지간이었지만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는 상대방의 입장에선 그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진몽향은 그런 것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미련스럽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지극히 지혜로운 편에 속했다. 그녀는 이미 공효의 어색한 안색을 대하고 괜히 곤란하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말씀하지 마세요. 그것이 어떤 일이든 저는 상관없답니다. 단지 위험스런 일만 아니라면 좋겠어요. 그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맹공효는 부인에게 미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천보갑과 관련된 일이 너무도 막중한 건 사실이었지만 부인의 자상한 말을 듣고 있자니 자신이 십대 소년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부인은 어머니가 된 듯했다.

“부탁이 뭐지?”

“그전에 혼자 조용히 여행을 다녀오시는 것은 어떨까요? 진인이 떠난 후로 당신이 너무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 옆에서 지켜보기가 여간 걱정스럽지 않답니다.”

맹공효는 자신을 위하는 아내의 마음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는 어색한 표정을 풀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리도 착한 부인에게 내가 굳이 숨겨둔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잖는가.’

천보갑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런 여자라면 어떤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여행을 다녀오라는 말을 듣자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이제껏 그녀와 10년 가까이 살며 여행을 다녀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특별한 임무를 띠고 강호를 다니기 바빴을 뿐 그녀와 함께 여유롭게 산천을 구경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둘 사이엔 아직까지 아이가 들어서지 않은 터였다. 맹공효는 비록 무골이지만 적어도 여자들이 얼마나 아이를 원하는지,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얼마나 아이를 낳고 싶어하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 고생이 많을 텐데도 그녀는 전혀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여행이라…….”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뇌까리긴 했지만 그 말속에는 미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참으로 나는 무심한 남편이었군.’

특히 이번에 천보갑을 전해주는 일 또한 떠나게 되면 돌아오기까지 그 기간이 적어도 1년 가까이는 될 것이 분명했다.

진몽향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이에요… 제 걱정일랑 마시고 시간을 내보세요.”

맹공효는 그녀의 진심 어린 말에 한없이 미안해졌다.

‘여행이라… 그래, 그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함께 가는 거야. 그것이 천보갑을 전하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일지도 모르잖는가. 좋아.’

공효는 마음으로 결정을 내리고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은 이번에 진인께서는 내게 돌아가시기 직전에 중한 부탁을 하셨다오.”

“말씀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녀는 고의로 눈살을 찌푸리며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이고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르잖아요. 게다가 제게 말하고 나서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구요.”

하지만 그녀의 말은 도리어 맹공효에게 더욱 믿음을 심어주는 일이 될 뿐이었다. 공효는 살짝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다정하게 말했다.

“그런 걱정일랑 마. 세상천지에 내가 당신을 믿지 못한다면 과연 누구를 믿을 수 있겠어.”

그러면서 공효는 진인의 넷째 아들인 오유태에게 천보갑을 전해야 한다는 이야길 해주었다.

“진인께서는 떠나시기 오 일 전에 나를 부르셨다오.”

공효는 천보갑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고 그 외 부분들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었다. 진몽향도 쫓겨난 넷째 도련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천선부인으로서 훗날 천선부를 잇게 될 것이라 알려졌던 천고의 기재를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그녀는 말이 이어지는 중간에 문득문득 묻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지만 꾹 눌러 참으며 귀를 기울였다.

“…진인은 지난날을 후회하셨어. 그분은 아마도 진심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말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아.”

맹공효의 말속에는 화사한 빛덩어리 하나가 어느덧 천선부에서 뻗어 나가 저 멀리 오유태가 거하고 있는 멀고 먼 곤륜산까지 닿아가는 느낌이 들어 있었다.

“천보갑이 그리 대단한 건가요?”

약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뱉는 말에 맹공효는 몽향을 슬쩍 바라보고 씨익 하고 웃었다. 웃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게 마련인데, 지금 그가 보인 웃음은 ‘무조건(無條件)적으로 웃음이 나와 어쩔 수 없었다’라는 듯한 웃음이었다.

어느 정도 강호에 식견을 갖춘 자라면 이런 질문을 태연자약하게 내뱉는 그녀를 보고 눈알을 휘둥그레 뜨며, 혹은 핏대를 세우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천선부 사람이 맞소이까? 허허, 거참.

-무식한 건지 아니면 순진한 건지 원.

-에이, 농담도 지나치시구려.

-지금 장난하는 거유∼

하지만 진몽향의 얼굴 어디를 봐도 장난기나 농담을 하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모습은 공효에겐 도리어 신선함이었다. 키가 큰 사람은 작은 사람을 동경하고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큰 사람을 동경하는 것처럼 자신과는 다른 사람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되는 법이다.

누구나가 상식적인 일에 상식적인 반응을 보여야 하는데 상식을 짓뭉개고 뛰어넘어 담담하게 반응한다면 그는 바로 신선한 자가 될 것이다. 그처럼 몽향은 공효에겐 신선했다. 10년 가까이 살아온 지금조차도 신선했다.

‘중원 최강의 힘을 자랑하는 천선부, 바로 이곳에서 초보적인 무공 수준에 강호 보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당신은 험한 절벽가에 피어난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이구려.’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공효는 미소 띤 얼굴로 약간의 뜸을 들여 집중토록 한 후 바로 말을 이었다.

“천보갑 따윈 당신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야. 하하하.”

“흐음, 근데 왜 웃는 거죠? 으음… 어째 저로선 놀림당하고 있는 기분이 드는걸요?”

“하하, 이거 들켜 버렸는걸.”

“진짜 놀렸군요. 에잇, 참을 수 없어.”

진몽향은 새초롬한 얼굴을 한 채 양손으로 마구 맹공효의 가슴이며 옆구리를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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