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177.
“어이쿠, 한 번만 용서해 줘. 한 번만∼ 아이구, 사람 살려∼!”
“계속 소리치면 더 괴롭히고 말 거예요.”
“사람 살려∼ 이건 호조수(狐爪手)다∼ 사람 살려∼!”
“뭐라구요? 그럼 제가 여우란 말예요? 가만 안 둘 테다. 이얍∼!”
“어이쿠! 그만그만!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의 공격은 너무 무서워∼!”
침상이 요동 치는 가운데 두 사람은 깔깔거리며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현숙할 때를 알고 또 마음을 풀어줄 때는 어린아이처럼 장난질 칠 줄 아는 여인이 바로 진몽향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웃고 떠든 후 어느 정도 잦아들게 되었을 때 진몽향이 물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왜 제게 하신 건가요?”
맹공효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천보갑을 전하는 길에 당신과 함께 가려는 거지.”
진몽향은 솔직히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던 터라 얼굴이 순간 기쁨으로 물들었다.
“정말이세요?”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기뻐했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다시 본래의 안색으로 돌아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가지 않겠어요.”
물끄러미 바라보며 몽향이 말했다.
“…하지만 가지 않아도 간 것만큼이나 기뻐요. 당신이 날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았으니까요.”
맹공효가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분명 두 사람인 것이 확실했지만 지금 이 순간은 하나가 된 것만 같았다.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었어. 이번엔 꼭 함께 가도록 해. 내일 신임 부주님께 말해 놓을 테니 미리 준비해 둬. 알겠지?”
진몽향이 고개를 들고 공효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 눈물 속에는 사랑과 고마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맹공효는 웃음기 어린 얼굴에 약간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우리 자야지?”
진몽향이 부끄러운지 홍조 띤 얼굴을 숙였다. 두 사람 사이에 따뜻한 공기 층이 형성되어 감돌았다. 마치 솜구름이라도 뭉게뭉게 피어나 그것이 잠시 투명해진 것만 같았다. 그 외의 것들은 둘 사이에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끼어들지 못할 듯이 보였다.
쉭.
맹공효가 가볍게 손을 흔들자 멀리 있던 호롱불이 작은 연기를 피워 올리며 꺼졌고 두 사람은 그렇게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어 어둠에 묻혔다.
“닷새 후에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맹공효의 말에 천선부의 신임 부주가 된 오경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주 오경운은 맹공효가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가지고 가는지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다. 그로선 단순히 맹공효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마음을 추스를 만한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만 여겼다.
“음… 좋아, 그렇게 하게나.”
현재 강호의 태평함을 볼 때 크게 대수로울 것이 없어 보였다. 오경운은 이미 장례식 후 삼 일째 되는 날 맹공효에게 허락을 한 상태였고 이제 정확히 닷새 후에 떠난다는 것도 그저 보고를 받는 것에 불과하다 여겼다.
“그런데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뭔가?”
“이번 여정에 아내와 함께 길을 갔으면 합니다만…….”
“음…….”
그 제안에 오경운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다. 함께 가는 것이 마음을 추스르기 좋을지 아니면 따로 훗날 둘만의 시간을 갖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
“괜찮을까?”
되물어오는 말에 공효가 답했다.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어준다면 마음은 더 안정될 듯싶습니다.”
공효는 천보갑에 대해 말하지 않고 숨길 수밖에 없는 것에 오경운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죄스러웠다. 하지만 유언과도 같이 오비원이 절대로 천보갑에 대해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으음… 듣고 보니 오히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두 사람이 혼인한 지 얼마나 되었지?”
“몇 달 후면 10년이 됩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군. 그동안 특별히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나?”
말이 이 정도로 진행되었다면 성공이나 다름없었다. 맹공효의 머리로 아내 진몽향이 기뻐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
“그렇군. 그럼 이번에 함께 가도록 하게나. 하지만 두 사람이 돌아오게 될 때는 반드시 밝은 표정이어야만 하네.”
“물론입니다.”
이야기가 끝난 후 돌아서는 맹공효의 뒷모습을 오경운은 왠지 막연하게 바라보았다.
제2장 가늘게 피어나는 향기
나는 꽃과 나무를 사랑한다.
그리고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 속의 은밀한 것을 나는 더욱 사랑한다.
- 석춘원의 적점자 만홍
***
진몽향이 이른 곳은 석춘원(石春園)이었다. 이곳은 화원(花園)으로 달리 붉은 석춘원이라고도 불려졌다. 그 까닭은 석춘원의 주인인 만홍의 이마에 붉은 반점이 얼룩져 있어 그와 화원을 연관 지어 부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홍을 칭하길 적점자라 부르기도 했다.
이곳은 진몽향이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 들르는 곳이었다. 그녀가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천선부 내에서 초온진이라는 이름의 화원을 가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편과 함께 떠나게 된 터라 그녀는 눈과 마음에 가득 아름다운 꽃을 담고 싶은 모양이었다.
적점자 만홍에게 있어 그런 진몽향은 매우 귀중한 손님이었다. 그는 상인이라고 하기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였는데 소탈한 성격 탓에 이익을 챙기는 데는 둔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꽃과 나무에 파묻혀 지낸다 해도 천선부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적점자는 그녀가 올 때면 언제나 그 대접이 극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천선부에 대한 경외감이 그녀에게로 옮겨지는 것이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주인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요. 그러잖아도 주인께서는 부인이 언제 오시나 기다리셨던 차랍니다.”
화원에서 일을 돕고 있는 무강이었다.
“또 진귀한 것을 구하셨나 보군요?”
그녀는 무강이 이렇게 말할 때마다 적점자가 대단히 진귀한 식물을 보여주곤 했던 터라 이번에도 귀한 것을 구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에는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말 깜짝 놀라실 겁니다요.”
무강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거리는 얼굴에 연신 머리를 조아린 후 바쁘게 사라졌다.
얼마 후에 적점자 만홍이 날듯이 달려왔다. 이제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그는 비쩍 마른 몸과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인상에 소탈한 외모를 지녔다. 특이한 것은 이마에 난 붉은 반점이 꽤나 강렬한데도 그의 부드러운 얼굴과 합쳐지면 묘하게 어울려 더욱 부드럽게 해주는 것 같았다.
비쩍 말랐다는 것은 그가 매우 부지런한 사람이란 걸 의미했고 거기에 부드러운 인상을 지녔다는 것은 식물을 돌봄에 지극함을 뜻했다.
“어이쿠, 이제야 오셨군요. 그동안 바쁘셨나 봅니다.”
“이번에는 또 무엇을 보여주려고 그러시나요? 기대되는걸요.”
그녀는 대답 대신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정말 기대해도 좋습니다. 이걸 보여 드리고 싶어 근질근질한 것을 겨우 참았지 뭡니까?”
원래 명품은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것의 가치를 모르는 자 앞이라면 무용지물인 셈이다.
그녀가 말 대신 표정으로 궁금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적점자가 빙긋 웃고 길을 인도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굽이굽이 길을 가는 동안 나무와 꽃들이 제각기 그 멋을 뽐내며 걸어가는 길마다 푸르름과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어찌 보면 평범해 보이는 것들이었지만, 사실 거기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정말 궁금해지는걸요?”
“하지만 지금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놀라시는 표정을 제가 봐야 하니까요. 하하하.”
화원은 매우 컸기에 한참이나 가서야 비로소 목적한 곳에 이를 수 있었다.
“자, 놀라지 마십시오. 바로 이것입니다.”
가리워진 채양을 걷으며 적점자가 한 말에 진몽향이 침을 삼켰는지 목 쪽이 꿈틀거렸다.
차락∼
순간 진몽향의 눈이 등잔만큼이나 커졌다.
“이, 이건… 옥란(玉蘭)이로군요. 이럴 수가!”
청초하다고 표현하기엔 그 표현이 너무 단순해 보일 것 같은 그런 난이 신비로운 자태와 향을 발하고 있었다.
잎은 가늘고 길었다. 가는 잎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져서 꽃대 쪽에 이르러 줄기에 밀착하여 흔적만 나 있었다.꽃대에는 수송이의 꽃이 아래로부터 피어났는데 해맑은 흰색의 꽃잎과 긴 꽃 꼬리의 연록색이 이루는 조화가 신비롭기까지 했다.
몽향의 이런 반응은 적점자를 기쁘게 했다. 그의 표정엔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보고 기뻐함이 나의 기쁨이다라는 뜻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그렇습니다. 보신 바대로 난초의 제왕이라는 옥란입니다.”
“옥란을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걸요.”
그녀의 얼굴엔 아직까지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어쩜 이렇게 고울 수가 있나요.”
“그렇지요. 저도 요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지 뭡니까. 하지만 진귀한 것을 나눌 만한 분이 없어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마침 부인이 오셔서 지금 저로서도 기쁨을 헤아릴 수 없군요.”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옥란을 앞에 두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은은히 피어나는 난 향은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으리만치 기묘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저만치서 무강이 달려오더니 적점자에게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어르신, 지금 막 공환님께서 오셔서 찾고 계십니다.”
그 말에 적점자의 얼굴이 일순 어두워졌다. 공환은 50대의 갑부로 석춘원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고객이었지만 식물을 아낀다기보단 그저 과시용으로 생각하는 이였다. 적점자는 좋은 기분이 날아가 버린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얼른 진몽향에게 말했다.
“그럼 전 잠깐 가보겠습니다. 차를 드릴 테니 부인께선 편안히 앉아 옥란을 감상하십시오.”
진몽향이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손님을 맞으세요.”
적점자와 무강이 사라진 후 진몽향은 여러 각도에서 옥란을 감상하며 연신 감탄을 발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그녀는 품에서 작은 종이 쪽지를 꺼내 옥란의 화분 아래에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그녀는 약 일 식경 정도 옥란을 살핀 후에 석춘원을 나섰다.
그녀가 떠난 후 적점자 만홍이 석란 쪽으로 다가가 화분 밑에서 종이 쪽지를 꺼냈다. 그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손놀림이었다. 마치 거기에 쪽지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언제나 그렇게 해왔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가만히 쪽지를 펼쳐 본 적점자의 눈은 아까의 그 부드럽고 소탈한 눈빛이 결코 아니었다.
그의 눈은 그의 이마에 난 붉은 반점만큼이나 강렬하기 이를 데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