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74장 (175/199)

 # 174

174.

붉은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이고 어둠이 하나둘 찾아들 때, 마천의 대연무장에는 마천의 모든 힘이 집결되었다. 약 천여 명의 고수들이었다. 아니, 사실 마천의 고수들만을 따지자면 오백여 명이었다.

그 나머지 오백은 괴이한 느낌을 주는 푸르스름한 빛깔의 강시들이었다. 바로 수라혼마강시, 도의봉은 비록 강시가 깨어나기엔 하루가 더 남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이라 판단하고 강시를 가동시킨 것이었다.

터질 듯한 긴장감이 천마산을 휘감아 돌았다. 언제 나타날 것인가. 거짓말 같아 믿지 않으려 해도 바위에 새겨진 천외천이라는 글귀를 볼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칫 하다간 강호 제패는커녕 모조리 멸절당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모두의 마음을 휩쓸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마천인들의 눈에 괴이한 광경이 잡혔다.

‘저건 뭐지……?’

‘헉.’

그들이 본 것은 붉은 노을의 변화였다. 붉게 타오르던 서쪽하늘이 점점 거무스름한 색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색도 어떨 때는 깔끔한 느낌을 전달해 주기도 하지만 지금 나타난 검은색은 죽음의 향을 간직한 듯한 입자가 옅게 분사되어 숨을 막히게 하는 듯한 그런 것이었다.

“으하하하하! 어서 오라!”

도의봉이 큰 소리로 호기를 부리자 술렁이던 고수들의 마음에 다시금 조금씩 용기가 솟았다.

순간.

피이잉-

서쪽 하늘에서부터 검은 연기가 긴 꼬리를 늘어뜨리고 공기를 쪼갤 듯한 기세로 다가왔다. 검은 연기가 기이한 곡선을 그리며 나오자 노을은 다시금 붉은빛을 찾았고 그로 인해 그 광경은 지극히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한가하게 감탄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어느새 검은 연기가 대연무장의 중앙에 이르렀고 홀연히 연기는 흑포를 두른 노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놀라운 광경에 강시를 제외한 모두가 자신들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나타난 이는 흑운신이었다.

흑운신은 가만히 뒷짐을 진 채 사람의 언어로 말했다.

“자, 이제 정한 때가 되었다.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겠다. 오직 손목에 매인 붉은 띠가 모든 것을 말해 줄 것이다.”

모두를 압도하는 강력한 힘이 풍겨져 나와 어느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분위기란 말을 꺼내도 왠지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하지만 천주 도의봉은 입술을 깨물어 흐른 피를 삼키고서 큰 소리를 내질렀다.

“헛소리 집어쳐라! 용서치 않겠다. 자, 모두 공격하라!”

그 말은 두려움에 차 있던 마천의 고수들의 몸을 일깨웠고 강시들의 혼도 깨웠다.

슈슝-

약 500여 개의 신형이 일제히 흑운신에게 쏘아졌다. 그 기세는 가히 산을 가르고 바다를 덮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흑운신은 자신에게 밀려드는 엄중한 기세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아주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보일 뿐이었다. 지극히 느리게 들어 올린 손. 그 손끝에서 검푸른 빛이 뿜어 나왔다.

그 빛은 공중의 어느 정점에 이르자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수백 개의 빛의 가닥으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정확히 밀려드는 마천의 고수들과 강시들의 몸을 향해 달려들었다.

빛의 위력을 제일 먼저 당한 자들은 알서 달려들던 이들이었다. 빛은 그들의 몸을 휘감더니 순간 심장을 뚫고 지나가다가 다시 머리 쪽으로 감아 올라가며 양쪽 관자놀이를 관통하고 사라졌다. 공중에 뜬 채 그와 같이 당한 자들이며 달리던 자세 그대로 빛에 휘감긴 자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그렇게 쓰러졌다.

그 광경에 아직 신형을 날리지 못한 뒤쪽에 있는 이들은 공포에 질렸다. 하지만 검푸른 빛은 그들이 공포에 질렸다고 그냥 넘어가는 아량을 베풀진 않았다. 극히 빠른 속도로 자신이 맡아야 할 사람이 정해져 있는 듯 빛은 그 사람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건 강시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도검이 뚫지 못하고 급소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강시들이었지만 검푸른 빛에 휘감기고 나자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강시들의 경우엔 조금 특별한 구석이 있었는데 그건 강시들이 쓰러진 후에는 과거 원래 시체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즉, 수년 간 연단한 강시의 껍질을 날려 버린 셈이었다.

모두가 빛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때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이하게도 빛이 다가가 살피듯 한번 선회하고서 스르르 사라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빛이 사라진 것을 보고 소매를 걷어 감탄을 발했다. 지금도 눈에 보이는 곳마다 빛에 의한 살육이 진행되는데 놀랍게도 붉은 띠를 맨 그들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고작 붉은 띠 하나였는데도 불구하고 재앙을 면한 것이다.

한편 마천인들 중 가장 경악스러워한 이는 단연 도의봉이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이 믿을 수 없고도 끔찍한 광경에 공포에 휩싸였다.

그의 눈에 저만치서 맹렬히 달려드는 검푸른 빛이 보였다. 그 빛의 목표는 도의봉이었다.

도의봉도 그것을 직감했다.

그는 신형을 뽑아 뒤로 달아났다. 그의 모든 힘을 다 동원해 발휘하는 신법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신형이 빠르다 해도 빛에 비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도의봉은 그 찰나적인 순간에 얼른 품에서 붉은 띠를 꺼내 오른 손목에 묶었다.

그도 붉은 띠를 맨 경우에 살아난 것을 본 것이다. 모든 것이 현실로 드러난 이때 그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는 붉은 띠를 손목에 매고 빛을 향해 돌아서며 친근한 미소를 보냈다.

‘이제 이 빛은 내 몸을 서성거리다가 스르르 소멸되겠지.’

그의 뜻이 통한 것일까, 아니면 아직 죽을 때가되지 않음인가. 검푸른 빛은 그 맹렬한 속도를 죽이고 스르르 뱀처럼 도의봉의 몸 주변을 맴돌았다. 도의봉은 좀 더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소매를 걷고 붉은 띠를 보여주었다.

“난 친구라네.”

빛이 그 말을 들었음일까, 빛은 서서히 이동하더니 도의봉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고돌았다. 따스한 기운이 손목을 타고 도의봉의 몸으로 전달되었다.

‘이제 살았군, 휴우.’

헌데 그때 손목에 시큰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그는 안심하고 있다가 손목을 보고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목젖이 확연히 드러날 정도의 처절한 비명이었다.

검푸른 빛이 그의 손목을 감아 돌면서 잘라 버린 것이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빛은 쌔액 하는 소리와 함께 벌어진 입 속으로 들어가 온몸을 휘감아 버렸다. 도의봉은 눈을 부라리고 거센 통증에 온몸을 떨었다.

검푸른 빛이 몸 안으로 들어가 위와 내장, 간이며 심장 등을 휘저어놓고 있음이었다.

피융-.

끝으로 빛은 도의봉의 정수리를 꿰뚫고 솟아나더니 그 사명을 완수했다는 듯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도의봉은 선 채 그대로 칠공에서 피를 흘렸다. 이미 죽은 것이다. 그의 몸도 끝내 지탱하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검푸른 빛이 제 사명들을 다 끝냈을 때 연무장에 남아있는 이들은 대략 50여 명 정도였다. 그들은 붉은 띠를 손목에 매어 재앙을 넘긴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천주 도의봉의 아들 도방 -기와 조각으로 온몸을 긁었던- 과 장로 둘, 그리고 당주급들도 꽤나 보였다.

흑운신이 발 아래로 검은 안개를 일으키며 곧 떠날 태세를 갖추었다.

“너희가 재앙을 면한 것은 작은 믿음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마천이 아닌 새로운 이름으로 다른 곳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바란다. 이제 이곳은 너희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고 또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 내 다른 곳으로 옮겨주도록 하겠다.”

도방이 두렵지만 황급히 말했다.

“시신을 이렇게 버려두고 갈 수 없으니 수습하도록 해주십시오.”

흑운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신을 거둘 사람들은 이미 마련하였으니 너희는 마음 쓸 필요 없다. 훗날 이곳은 마천의 공동묘지가 되어 있을 터이니 그때 돌아가 보도록 하라.”

흑운신은 그 말과 함께 한줄기 검은 안개로 화해 50여 명의 몸을 감싸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모두 떠나간 자리에는 그저 정적만이 감돌았다.

하늘에서 재앙이 쏟아진 다음 날, 정파연합대가 천마산에 이르렀다. 금세 터질 것만 같은 긴장을 유지한 채 조심스럽게 천마산으로 접근하던 800여 명의 정파 절대고수들은 멀리서 까마귀 떼들이 몰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괴이쩍게 여겼다.

‘죽음을 부르는 강시가 있는 곳답게 까마귀라니… 제길, 어울리는군.’

표영은 선봉에서 기분 나쁜 까마귀 떼를 보고 중얼거렸다. 그 뒤로는 호랑이만 한 덩치의 흰둥이 진백과 혁성이 바짝 뒤따르고 있었다.

‘음, 이 정도면 매복 수비대가 있을 법도 한데 괴이하군.’

대개 매복이 없다면 어떤 특별한 기관 장치가 있게 마련인지라 표영을 위시한 선봉조는 더욱 조심스럽게 산을 올랐다. 하지만 이미 싸늘히 시체로 변해 있을 뿐인 천마산에는 그 어떤 움직임도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연합대로선 지극히 고요한 것이 오히려 신경을 팽팽히 잡아당겼다.

이윽고…….

마천의 본거지에 이르게 되었을 때 표영을 위시한 모든 정파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된 일일까?”

죽은 마천인들과 강시로 사용되었던 사람들의 시체는 겉으로 보기엔 깨끗했다. 빛무리가 워낙에 깔끔하게 꿰뚫고 지나간지라 얼핏 보면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표영은 시체 중 하나를 면밀히 살핀 결과 관자놀이와 심장이 깨끗이 관통된 것을 발견했다.

“대단하군. 대체 무엇으로 공격한 것일까?”

화산파 장문인과 곤륜파 장문인이 가까이 다가와 살피면서 둘 다 감탄사를 발했다.

“실로 대단하구려. 이런 지법이나 장법이 있을 수 있을까요?”

“글쎄올시다. 특별한 암기를 사용한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결국 모두는 추리를 포기해야만 했다. 모든 시체가 정확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한 부위에 동일한 흔적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건 어느 누구라도 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다른 곳은 일체 상처를 주지도 않고 거의 오백여 명에 이른 사람들을 일정하게 죽인 것이다. 이것이 한 사람의 작품인지 아닌지도 혼란스러웠다.

생각 같아선 적어도 수백 명이 공격했다고 봐야 옳지만 그런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발자국을 아예 남기지 않을 순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험한 격전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

표영은 강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어떤 문파가 있는 것은 아닌가 쪽으로 생각했다. 이제 남은 일은 뒷정리를 깔끔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저를 주목해 주십시오.”

표영이 앞쪽에서 큰 소리로 입을 열었고 모두가 주목하자 바로 말을 이었다.

“누가 섬멸했는지는 나중에 차차 알아도 늦지 않으니 일단 이곳을 정리하는 것이 시급한 일인 줄 압니다. 나누어서 일을 처리하여 속히 마무리 짓도록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해야 할 일은 첫째, 시체를 처리하는 일입니다. 비록 이들이 악한 마음으로 강시를 만들었다 하나 이제 죽었으니 한 평 남짓한 땅에 편안히 누울 수 있도록 해줍시다. 둘째는 강시와 관련된 서적과 약품 등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한데 모아두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살라 유출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표영의 말에 따라 정파연합대는 일제히 시체를 매장하는 일을 수행했고 각 대문파의 장문인들은 따로 강시에 대한 부분과 마천의 무공 비급 등을 수거하는 일을 진행했다.

한편 혁성은 시간이 점심 때에 이르자 진백과 함께 한쪽 귀퉁이로 이동했다. 함께 밥을 먹을 시간이 된 것이다.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바위에 무심코 걸터앉은 혁성은 엉덩이가 까칠까칠한 것을 느끼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뭔가 하고 살폈다.

‘응? 천외천?’

거기엔 흑운신이 남겨놓은 천외천이라는 글귀가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사부님∼”

표영은 중앙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다가 제자가 부르는 것을 듣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바쁜데 왜 부르는 거냐?”

“여길 보세요.”

표영은 천외천이라는 글귀를 보고 진지해졌다. 새까맣게 타들어간 듯 검게 새겨진 글귀에는 단지 글자라고 하기엔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으음, 천외천이라… 이곳이 움직인 것이었나 보구나. 하늘 위의 하늘이라…….”

표영은 세상을 지키는 모종의 힘에 대해 생각했다.

‘대체 누구일까?’

마천의 일은 수많은 괴이함과 의문을 남기고 정리되었다. 사람들은 분분히 천외천이라는 곳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어느 누구도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이라 그저 신비감만 더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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