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173.
설비는 이어 부러진 팔을 아무렇게나 팽개친 후 손을 쭉 뻗었다. 이번에는 담종의 목을 뽑아버릴 기세였다.
그때였다.
“멈춰라, 설비.”
난장판이 된 혼마당의 밀실에 마천의 고수들이 들이닥쳤다.
슈슉∼.
십여 개의 검이 일순간에 뻗어 설비의 몸을 머리부터 허벅지까지 그어갔다. 그에게 살인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푸슈악∼.
설비의 몸은 열 개의 검기에 의해 사방으로 찢겨져 주변에 널브러졌다. 그제야 담종은 벽에 몸을 기대고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그가 보고 싶다던 천하인들의 도륙을 보기도 전에 그가 먼저 가고 말았구나. 결국 이게 되는 건가.’
현묵과 영후는 마천의 외곽지대에서 비밀 경비를 맡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밤.
그들은 지금 교대를 마치고 각기 처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가는 도중 더 이상 발을 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아무런 말도 할 수조차 없었다.
‘이, 이게…….’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강호에서 일어나는 어떤 당황스런 일보다도 더욱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시커먼 털을 지닌 거대한 괴물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은 생애 최초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것이 결코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헉!’
‘저건……?’
그건 믿기지 않았지만 수만 마리 정도는 돼 보이는 쥐 떼들이었다. 그것이 함께 무리를 지어 이동하다 보니 거대 괴물로 보인 것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확 돋았다. 그 어떤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쥐 떼들은 마치 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산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대재앙이 올 때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도망친다고 하지 않던가.’
쥐와 곤충들, 그리고 다른 짐승들의 예지 능력에 대해 현묵이나 영후도 알고 있었다.
혈수에 이어 종기, 그리고 우박과 강시 제조의 책임자인 불수귀요의 광란에 이어 이번엔 짐승들의 대이동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천마산에 임했다. 그 어둠은 보통 흔히 말하는 어둠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 자신의 손조차 볼 수 없는 어둠이 마천에 임한 것이다. 등불을 켜도 등불이 빛을 내지 않았고 해도 달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천 내에서 흑암지신이라고 불리는 사요학조차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어둠의 신이라 불리며 암흑 속에서는 최고의 고수였다. 그렇게 삼 일 동안 마천에 어둠이 지속되었고 마천은 더불어 침묵에 잠겼다. 어느 누구도 말하는 이가 없었고 어느 누구도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이제 수라혼마강시가 완성되기까지 칠 일이 남았다.
제14장 재앙의 날
해 저무는 이날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찌 잊겠는가.
그리고 붉은 띠도 버리지 못할 것 같다.
믿어지지 않지만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 도방
***
번개가 하늘을 찢어발기듯 밤하늘을 갈랐고 그와 함께 우렛소리가 온 천지에 진동했다. 거기에 쏟아지는 폭우는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엄청난 광경이었다. 수라강시를 제련하여 무림을 제패하려는 마천에도 이 밤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대단하군. 이런 밤하늘을 내 생애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마천 내성 수비를 맡고 있는 최명(崔命) 환곡이 조사귀(早死鬼) 설응에게 전음을 내보냈다. 그들은 은밀히 매복을 서야 하는 관계로 빗줄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말이네. 우리가 귀신으로 불리고 있지만 진짜 귀신이 나타날 것만 같구먼.
둘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전음을 주고받았다. 이런저런 말을 나눌 때였다.
“헉!”
갑작스레 환곡이 흠칫 놀라는 소리를 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얼굴엔 자신이 은밀하게 매복을 서고 있다는 것도 잊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놀란 것은 더욱 그뿐이 아니었다.
“흐흡!”
조사귀 설응도 환곡과 약간의 시간차를 냈을 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자네 혹시 보았나?”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
그들의 놀람은 마천의 중앙 뜰에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흑의 장포를 휘감은 채 한 노인이 서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멀리서부터 그 종적을 눈으로 쫓고 있다가 중앙에 이르렀음을 보았다면 놀라울 것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칙칙한 검은 안개를 연상시키는 듯한 장포에 감싸인 노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잠시의 정적이 가히 천 년이 흐른 듯 보일 때였다.
피익, 피익, 피이이익-!
두 번째까지는 짧게 세 번째는 길게 이어진 휘파람이 울려 퍼졌다. 내력이 잔뜩 실린 휘파람은 마천 전체를 휘감아 돌았는데 조사귀 설응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날린 가장 큰 위기를 알리는 경보였다.
고작 한 사람이 나타난 것에 호들갑을 떤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설응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천둥 번개가 치고 있다고 해도 이곳까지 오는 동안 겹겹으로 매복되어진 수비를 바람처럼 뚫고 온 것과 수비가 없는 곳으로 왔다 해도 마환태혼진을 뚫고 온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서 있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인 기세를 발하고 있었다.
휘파람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없이 많은 그림자들이 허공을 가르며 몰려들었다. 어두운 밤 번개가 칠 때마다 몰려드는 이들의 모습이 나타났다가 번개가 사라지면 어둠에 묻혀 스스슥거리는 소리가 죄어오는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다.
잠시 후 일순간에 흑포를 입은 노인 주위로는 수십 개로 겹겹이 마천의 고수들이 에워싼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함부로 출수하는 사람은 없었다. 환곡과 설응이 처음 보고 느꼈던 것처럼 모두들 범접하기 힘든 위세에 눌려 선뜻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흑포를 걸친 노인의 몸에서 스멀스멀 거무스름한 안개가 피어나 감싸 돌고 빛줄기가 거의 반 장(약 1.5미터) 정도 밖까지 튕겨지며 몸 근처로는 아예 닿지도 않는 것이 대체 어느 정도의 내력을 형성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때였다.
“누구냐!”
한소리 우렁찬 소리가 밤하늘을 갈랐고 음성과 동시에 사람들 사이를 날며 회색 장포를 걸친 마천의 천주 도의봉이 내려앉았다. 도의봉은 이 정체불명의 노인을 바라보며 잠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솔직히 한참 운우지락을 맛보고 있던 중이라 최고 수준의 경보가 발령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별것 아니라면 가만두지 않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 그는 가슴이 저릿해지는 기분에 멈칫거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무단으로 마천에 침입하여 소란을 피우는 것인가?”
천하제패를 꿈꾸는 마천의 천주 도의봉이 상대를 제압하고 나서 물어도 될 말을 먼저 꺼냈다.
그때서야 흑포 노인이 말했다.
“잘 들어라. 너희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말았다. 어느 곳이든 한계는 있는 법, 마천은 하늘의 징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을 울렁이게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흑포 노인이 전혀 입을 열지 않은 채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건 전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음성 전달법이 있다는 말은 전설로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저 멍하니 ‘네, 알겠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이기엔 마천의 자부심이 너무 컸다.
도의봉이 오른손을 살짝 들자 그것을 신호로 10개의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쉬시쉭-
그들은 십마혼이라고 불리우는 도의봉의 친위 호위대들로 각기 성격이 다른 열 가지의 장법을 사용하는 무서운 고수들이었다.
단혼장(斷魂掌)의 뇌공굉.
번천장(煩天掌)의 담대풍.
창룡장(蒼龍掌)의 막리추.
조양장(朝陽掌)의 아륜제.
파운장(破雲掌)의 모용초.
칠성장(七星掌)의 북고월.
파운장(破雲掌)의 백한로.
풍우장(風雨掌)의 노소풍.
백포장(白袍掌)의 여세기.
혈경장(血磬掌)의 숙야검.
이들은 각기 서로 다른 장법을 구사하면서도 위급 시엔 열 개의 장력의 기운을 조화시킬 줄 아는 능력도 갖추고 있어 합공을 펼칠 때 그 위력은 열 명의 힘이 아닌 그 서너 배의 힘을 발휘했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들 듯 장력의 기세가 흑운신에게 밀려들었다. 하지만 흑운신의 눈에는 그 어떤 놀람이나 감흥도 없었다. 그저 처음과 달라진 것 없이 작게 말할 뿐이었다.
“멈춰라!”
도둑놈에게 ‘게 서거라’ 소리 지르며 쫓는다고 도둑이 설 리 만무하고 살기를 띠고 공격하는 이들에게 멈추라고 말한다고 곱게 멈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간단한 말은 놀랍게도 허공에 솟구치며 달려들던 십마혼들의 몸을 정지시켜 버리고 말았다.
어떤 이는 쌍장을 쭉 뻗은 자세 그대로 두 발까지 허공에 띄운 채 멈춰 섰고, 또 어떤 이는 두 발을 오므리며 막 출수하려는 동작을 취한 상태이기도 했다. 어쨌든 열 명은 땅의 중력을 무시한 채 허공에 매달렸고 혈이 찍힌 듯, 아니, 시간이 그들에게만 정지해 버린 듯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멈추고야 말았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라 도의봉으로서도 더 이상 손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일 해 질 때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다. 뜻을 돌이켜 재앙을 면하고자 하는 이는 오른 손목에 붉은 띠를 하면 그는 재앙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뜻을 받들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죽음 이후에도 큰 고난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또렷이 귓가로 파고드는 말이 있은 후 흑운신은 검붉은 광채를 뿌리며 하늘로 솟구쳐 사라졌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 그 모습을 지켜볼 때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뿌려지더니 귀퉁이에 있던 바위에 닿아 글귀를 새겨놓았다.
천외천.
하늘 밖의 하늘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도의봉을 비롯한 모두는 일시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도의봉은 밤이 이렇게 길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그전에 있었던 재앙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그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중얼거렸다.
“죽음을 본 것이야, 죽음을…….”
그렇다. 도의봉의 공포는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한 그런 공포였다.
이제 이틀이 지나면 강시가 완성된다. 강시만 있다면 세상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저절로 떨리는 몸을 웅크림으로 막아내려 했다.
“으윽…으으으…….”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샌 도의봉은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정면 승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