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118.
쉬쉬쉭-
허름한 옷자락을 나부끼며 다섯의 신형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채 중간중간 돌을 밟으며 하강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아마도 멀리서 누군가가 보았다면 그들이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표영과 그 일행의 모습에는 무한한 자유로움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굳이 견준다면 신선이 구름 위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것과 비할 수 있을까. 그만큼 멋진 모습이라 할만 했다.
산 아래까지 무사히 내려선 일행은 자신들이 거쳐 온 절벽을 다시금 올려다보았다
비록 완만하다고는 해도 녹녹치 않은 길을 가볍게 내려섰다는 것이 마음을 기쁘게 했다.
표영이 모두를 둘러보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는 자신감이 넘쳐 났기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힘을 느끼게 만들었다.
능파와 능혼, 그리고 제갈호도 씨익 웃음 지었고 교청인은 잠시 넋을 잃었다. 표영의 얼굴은 아주 추접의 극을 달리고 있었지만 한번 마음이 끌린 교청인에겐 과거에 보았던 그 고운 얼굴이 겹쳐져 보인 것이다.
“그럼 또 가볼까.”
표영이 몸을 날리자 다시금 이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표영은 곧바로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건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기도 했다.
“어억…….”
“커억!”
거의 동시적으로 두 명의 비명 소리가 터졌다.
비명의 주인공들은 전혀 쓰러질 것 같지도 않고 쓰러질 수도 없을 것 같던 능파와 능혼이었다. 표영이 얼른 돌아보며 둘을 부축했고 제갈호와 교청인이 신형을 번개같이 날려 혹시 누군가 암습을 가한 것인지 주위를 신속하게 둘러보았다.
어느덧 능파와 능혼은 바닥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며 입가로 붉은 선혈을 흘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표영이 빠르게 그들의 몸을 살폈다.
어디에도 외상이 없음을 보니 암기나 표창 등에 맞아서 쓰러진 것은 아님이 확실했다. 어지간하면 말을 할 수도 있으련만 심히 고통스러운지 둘은 그저 가느다란 신음에 옅게 숨을 내쉬며 하얗게 질려갔다.
표영은 이들이 어지간한 고통에도 신음 한번 내지 않는 사람들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로 미루어보건대 지금 상황은 말로 형용하기 힘든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리라.
‘독에 당한 것일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독이었다.
표영은 황급히 맥을 짚어 기혈을 살피고 눈과 피부를 세밀하게 살폈다. 독에 중독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몸 안에서 기혈이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것이 그 정도가 심히 엄했다.
‘기를 안정시키도록 해야겠다.’
표영은 두 사람을 나란히 눕히고 손을 바람처럼 날려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몸이 마비되는 혈을 찍었다. 더불어 입으로는 제갈호와 교청인에게 외쳤다.
“정신을 집중하고 호위하도록 하라!”
“네!”
제갈호와 교청인이 약간 간격을 두고 반대쪽에서 경계에 들어갔다.
능파와 능혼은 혈을 제압당해 고통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몸이 온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온몸이 배배 꼬이듯이 기혈이 요동 치고 있었던지라 마혈이 찍히지 않았더라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정신만큼은 멀쩡한지라 지존이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인지를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눈살이 찌푸려진 것은 표영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정작 그들은 지존을 보살피러 왔건만 지금 지존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표영은 먼저 능파의 머리 부분에 좌정하고 그의 백회혈에 손을 가만히 놓았다.
백회혈은 사람의 제일 위쪽에 자리한 혈도로 그곳에서부터 기를 온전히 다스려야 온 기혈이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표영은 한 모금의 호흡으로 진기를 다스리며 장심으로 내공을 주입했다. 표영의 내공은 비천신공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정순하기가 이루 형용키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천년하수오를 복용한 터라 그 내공은 지극히 강렬하면서도 순수했다.
비천진기는 표영의 손을 타고 능파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능파의 몸 안에서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기혈을 부드럽게 감싸며 하나둘씩 풀어 나갔다.
이러한 치료는 사실 엄청난 내공의 소모가 불가피한 것이었으나 표영은 자신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어느덧 표영의 이마에서 구슬땀이 비 오듯 흐르고 머리 위로 하얀 증기가 거침없이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은 능파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고 능파는 서서히 안정되는 가운데 표현하기 힘든 심리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계속 내공을 무리해서 주입하시면 지존께서 위험해지실 텐데… 왜 지존께서는 이렇게…….’
능파는 스스로의 몸을 제어할 수 없었기에 몸 안으로 밀려들며 기를 조종해 가는 표영의 기운을 거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뭔지 모를 기이한 감정에 사로잡혔는데 그것은 이제까지 마교에 몸담고 있으면서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대체… 왜… 이런 희생까지…….’
지금 상황으로 보자면 오히려 자신은 나을지 모르지만 이로 인해 지존은 치명적인 상태에 빠질 것이었다.
능파, 그가 알고 있는 마교의 지존은 이러한 모습이 아니었다. 마교의 영광을 위해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교주가 자신의 목숨을 등한시하고 치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혼란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옆에 누운 능혼도 마찬가지였다.
‘천마지체는 천하인들 중에 가장 잔악하고 포악한 자라 하지 않았던가. 뭐가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마교 교주의 상징인 건곤패와 독을 마음대로 다루시는 것으로 볼 때 분명 교주님이 확실하다고 느꼈기에 더욱더 지금의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식경(30분) 정도가 지났을쯤 능파의 기혈은 거의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그렇다고 곧바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니었고 어느 정도는 능파 스스로도 자신의 기혈을 다시 조종할 필요가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었다.
표영은 약간 푸석푸석해진 몸 상태였으나 지체치 않고 능혼에게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진력이 급격히 소모된 후에 바로 휴식 없이 손을 쓴 것이기에 능파 때보다 더욱 표영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능혼은 수만 가지 의문이 떠올랐지만 오히려 지금은 정신을 집중해 지존의 기를 온전히 수용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 것이라 여기고 기혈을 안정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지존께선 부하들만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있음이니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으음…….’
역대 마교의 길을 보자면 힘들고 어려운 일은 모두 부하들에게 떠넘겨졌고 비록 희생이 있더라도 그리 중요시 여기지 않았었다. 그들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었고 충성의 한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표영은 도리어 자신의 안위는 도외시한 채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음이니 마교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표영은 능파를 치유할 때보다 두 번째 능혼을 치유할 때 더 힘들어했다.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때 온몸은 땀에 흥건히 젖어들었고 눈에는 거의 초점이 잡히지 않을 만큼 흐릿해져 있었다.
그렇게 일식경이 지나자 표영은 좌정한 상태에서 그대로 옆으로 허물어졌다.
만일 표영이 능파에게 힘을 쏟은 후 어느 정도 내기를 안정시키고 기를 보충한 다음 능혼을 치유했더라면 이렇게 허물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표영이 그렇게 했다면 능혼은 몸에 상당한 손상을 입었을 것이고 어찌 될지 장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표영이 쓰러지자 어느 정도 몸이 안정된 능파가 달려왔고 경계를 서며 틈틈이 상황을 파악하던 제갈호와 교청인도 표영에게 뛰어왔다.
“지존이시여∼!”
“방주님!”
“방주님!”
능파가 급히 표영의 내식을 살폈다.
기의 흐름이 매우 옅은 것이 강물이 말라 아주 작은 물줄기만 흐르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갑작스레 한꺼번에 기를 뽑아낸 것이 문제였다.
능파는 어느 순간엔가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서 마음을 모질게 먹고 억지로 얼굴에 힘을 주었다. 혼자 있다면 모를까, 제갈호와 교청인이 바로 옆에 있는데 눈물을 흘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서 능파는 이제까지 충성했던 마음과는 또다른 충성심을 느꼈다. 그것은 어떤 사명감에 의한 것과는 다른 것으로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도,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지존이시여∼.”
능파는 격정적으로 표영을 부른 후 장심에 손을 얹고 기를 불어넣었다.
또한 능파는 제갈호와 교청인에게 역할을 주었다.
“호, 너는 방주님의 명문혈에 손을 대고 단전으로 기가 모이도록 유도하고, 청인은 천중혈에 손을 대고 기를 위로 끌어올리도록 해라!”
능파는 급격히 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마음먹은 대로 기가 주입되지 않았다.
‘음… 왜 이렇지? 내 몸은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지 않았던가?’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떠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점이 이상하기만 했다. 하지만 사실 그건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표영의 몸은 일시적으로 내력이 소진되어 힘을 잃은 것뿐이었다.
표영이 익힌 비천신공은 조금의 진기라도 있다면 곧 회복되고 거기에 천년하수오까지 복용한 터라 조금만 기를 북돋워준다면 바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비천신공은 외부에서 힘이 밀려들자 꼭 필요한 힘만큼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억제한 것이다.
그렇게 능파가 만족스럽지 못한 마음으로 진기를 유도하느라 일다경(15분) 정도가 지났을 때 표영의 몸에서는 다시 봇물이 터져 나오듯 진기가 부풀고 있었다.
거기에 다시 일다경이 지났을 때는 완전히 다시 본래의 내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엄청난 진기의 소모치고는 경이로울 정도로 놀라운 회복력이 아닐 수 없었다. 표영은 크게 한 모금 호흡하고 내기를 순환시킨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표영의 일어섬과 맞추어 능혼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표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팔을 휘저어 보이며 능파와 능혼을 향해 물었다.
“지금 몸 상태는 어떻지?”
능파와 능혼이 표영이 머리를 조아리며 한 목소리로 답했다.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습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표영은 두 번 정도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에게 손짓하며 따라오라고 했다.
제갈호와 교청인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이르자 표영이 타구봉을 빼 들며 이죽거렸다.
“좋게 말해라.”
능파와 능혼은 표영이 갑자기 험악하게 나오자 약간 당황스러웠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표영이 가늘게 실눈을 뜨고 타구봉을 손에 탁탁 때리며 말했다.
“니들 미쳤지?”
“……?!”
“……?”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단 말이냐?”
그 말과 함께 표영의 타구봉이 허공을 가르며 능파와 능혼을 패버리기 시작했다.
파파팍- 팍팍-
“느닷없이 주화입마라니… 그게 정상인 사람이 할 짓이냐. 응? 진짜 나한테 죽어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