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119.
“으으윽…….”
바닥을 굴며 머리를 감싸 쥔 능파와 능혼에게 표영은 타구봉과 발길질을 가리지 않고 질러댔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이런 광경을 지켜보는 제갈호와 교청인은 그저 이 황당한 상황에 입을 쩍 벌리고 굳어버렸다.
아까까지 목숨을 내놓고 구하려 했던 아름다운(?) 모습은 어디로 가고 지금 남은 것은 오직 살벌함뿐이었다.
하지만 정작 몰매를 맞고 있는 능파와 능혼의 마음은 달랐다. 두 사람은 가끔 신음을 토해내긴 했지만 오히려 개운한 느낌이었다.
이제까지 짧은 세월을 살아온 것이 아닌 두 사람이기에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상황은 수하를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파파팍- 파팍-
“무식한 놈의 자식들! 너희들이 그러고도 나의 심복이라 할 수 있단 말이냐! 차라리 죽어! 자식들아, 죽으라고!!”
표영의 이러한 외침과 행동은 두 가지 정도로 해석해 볼 수 있었다.
하나는 마교의 교주로서 너무 정성스럽게 치유하는 모습을 보인 것을 무마해 보려는 생각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쑥스러움까지 씻어내고자 함이었다.
또 하나는 가까운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였다. 이미 표영은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떠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체험했기에 또다시 그런 지경에 처하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무자비한 폭행은 어느덧 능파와 능혼이 표영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게 되었다는 반증이었다.
한동안 후려 패던 표영은 이 정도면 됐다 싶어 손을 거두고 바닥을 구른 두 사람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자, 대체 무슨 일인지 자세히 이야기해 봐.”
표영도 아무렇게나 그런 주화입마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님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둘 다 선명한 핏물을 입으로 올려내지 않았던가. 그 말에 능파와 능혼이 서로를 바라보며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머뭇거렸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능파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비록 여러 가지 과거의 화려했던 재능들을 기억하진 못했지만 무공에 대해서만큼은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또 한 번 이런 일이 벌어질 텐데 지존께 굳이 숨길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중 능혼이 입을 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말은 제갈호와 교청인이 아직은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지존께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죄송합니다. 사실 이 일은 저희가 이 시대에 깨어나게 된 ‘천극간시공해체대법’에 관한 내용입니다. 대법은 인세에 불가능을 가능케 하여 부족한 저희가 존귀하신 지존을 뵈올 수 있었으나 그에 따른 부작용이 있습니다.”
표영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표영은 사실 질문을 하면서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길 바랬는데 의외로 큰 문제인 것같이 느껴진 것이다.
능혼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부작용이란 대법에 적용된 자가 본래의 수명대로 남은 생애를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최고 7년을 버틸 수 있으나 대부분 그전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의 신호는 그 가운데 두 번의 경고가 주어지는데 피를 토하며 기혈이 엉키게 됩니다. 거기에 세 번째 피를 토할 때 마지막을 맞게 됩니다.”
“으음…….”
표영이 침음성을 흘렸다.
설마 이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표영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영원한 이별에 대해 극도로 불안해하는 표영이 아니던가. 하지만 표영은 아주 잠깐 동안 어둠을 보였을 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게 무슨 별문제냐는 듯 말했다.
“미련한 놈들 같으니.”
그렇게 냉랭하게 말한 후 표영은 돌아섰고 몇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말했다.
“잠시 이곳에서 쉬었다가 가도록 한다.”
표영은 말을 마치고 언덕 위로 걸어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는 것이었지만 능파와 능혼은 지존의 어깨가 처져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돌아서 걷는 표영의 안색은 전혀 밝지 않았다.
오히려 안타까움만이 가득 묻어 있었다.
‘또 보내야 하나?’
표영의 눈에 떠나간 사부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13장 동영 최고의 고수
그의 이름은 소시타 고로스케다. 하지만 정작 그는 이름보다는 다른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려졌다.
동영(일본) 최고의 칼잡이.
수없이 많은 검객과 도객 사이를 뚫고 정상에 우뚝 선 그였다.
그에게 있어서 동영은 이제 우물과도 같이 여겨졌다. 그는 과연 자신의 솜씨가 천하에 누구와 비견해도 떨어지지 않을 것인지를 가늠해 보고 싶었다.
그가 생각해 낸 사람은 둘이었다. 한 명은 중원에 있었고, 또 한 명은 조선에 있었다. 중원 제일고수는 천선부주 오비원이라 했고 조선의 검객은 이현이라 했다. 소시타는 그중 먼저 중원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 까닭은 조선의 검객 이현의 종적을 찾기 힘들고 워낙에 신비에 가려져 있기에 과연 만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오비원을 만난다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고정된 장소에 머물러 있음이니 중원의 여러 무사들에게 물어보면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일성을 토해내며 동영을 떠나 중원에 도착했다.
“동영의 위대함과 전우주류 도법의 위대함을 심어주리라.”
이런 다짐으로 그가 동영을 떠나올 때 모두가 승리를 예상한 것만은 아니었다. 가장 절친한 친구인 다케시마는 염려스러운 눈으로 떠나기 전날 말했었다.
“자넨 정녕 중원으로 가겠다는 것인가?”
“그렇네.”
소시타의 답은 단호했다. 다케시마가 다시 말했다.
“자네가 내게 해준 말을 나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네. 그때는 자네가 지금처럼 최고에 이르기 전이었지.”
소시타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자네는 이렇게 말했네. 진정한 승부는 나 자신과의 결투라고 말일세. 거기에서 이기고 또 이기면서 결국은 천지만물에 나를 동화시켜 나가게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자네는 어찌하여…….”
다케시마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소시타가 굳은 어조로 말을 끊은 것이다.
“내가 오비원을 만나러 가려 함은 그를 꺾고자 함이 아닐세. 나는 그를 통해 나 자신을 비추어보려고 할 뿐이네.”
하지만 다케시마는 이 말이 소시타의 그럴싸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이야기해 봤자 결국은 뜻을 굽히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다케시마는 입을 다물었다.
‘내면의 거울을 잊어버린 겐가. 어찌하여 여인네들이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고 외모를 비출 거울만 찾는 것처럼 자네 또한 헛되이 거울을 보고자 함이란 말인가.’
다케시마의 안타까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친구인 소시타가 오비원의 금황신공을 당해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금황신공을 익힌 오비원의 몸은 도검으로도 벨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아무리 빠른 쾌검을 구사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그러한 생각을 소시타가 읽기라도 한 듯 차갑게 말했다.
“비록 오비원의 금황신공이 뛰어나다 하나 결국은 그의 몸도 한낱 여인에게서 나온 몸, 나의 칼을 피하지 못할 것이네. 나는 이제 오비원을 꺾고 동영의 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고 말겠네.”
그가 이처럼 자신감을 내세우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동영에서 내로라하는 검사들이 그의 칼 앞에 얼마나 많이 죽어갔는지 모른다. 그의 같은 일단 뽑히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무영도’라고 불렸고, 철컥 하는 소리가 나며 칼이 제자리를 찾을 때는 어느새 상대는 심장에 구멍이 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제 그의 나이 40세, 아직은 야망에 불타고 승부욕에 생명을 거는 나이였다.
소시타 고로스케가 중원에 도착한 것은 표영의 행동 시점으로 바라본다면 불귀도에서 막 당가로 출발할 즈음이었다. 소시타는 동영에서 대충 익힌 중원 말을 어눌하게 해가며 천선부주 오비원에게 한 발 한 발 다가섰다.
말을 유창하게 할 수 없어 가끔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인내를 가지고 나아가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할 줄 아는 말은 꼭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말들도 있었다.
그 문장은 딱 세 개였다.
“천선부주 오비원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오비원과 겨루러 왔소이다.”
“나의 이름은 소시타 고로스케다.”
그는 이 말을 중원을 유람하고 온 학사, 마사로 히데오에게서 배웠다. 그 외에도 기본적인 내용을 익혔지만 아직 너무도 부족했다. 그는 중원을 지나며 자신의 특이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삿갓을 쓰고 다녔다. 간혹 시비가 일 때면 재빨리 피해 버리거나 외면하고 혹은 가볍게 손을 봐주는 것으로 일단락 짓기도 했다.
***
“천선부주 오비원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명춘관의 검사로 명춘무도장에서는 사범으로 일하고 있는 운형학은 느닷없이 던져진 질문에 얼떨떨했다.
그 목소리가 감정이라고는 전혀 섞여 있지 않은 것이라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삿갓을 깊게 눌러쓴 상태라 상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운형학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아 퉁명스럽게 답했다.
“무슨 일로 찾아가려는 것인 줄 모르나 괜히 헛수고하지 말고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오.”
천선부주가 아무나 찾아간다고 만나줄 사람이 아니잖은가.
삿갓을 눌러쓴 이는 소시타 고로스케였다. 강서성을 지나면서 다시금 어디로 가야 할지 물어보고 갈 참이었던 것이다.
소시타는 상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어눌하게 다시 물었다.
“다시 말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일까?”
발음도 어눌하고 말투도 끝이 이상했다. 소시타에게는 한어가 외국어이므로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시. 간. 낭. 비. 일 뿐이니 돌. 아. 가. 라. 고.”
한 자씩 끊어서 운형학이 설명하자 그때서야 소시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거만한 녀석이로군.’
그는 속으로 중얼거림과 동시에 번개같이 칼을 뽑아 그었다. 번개였다. 칼이 바람을 스치며 운형학의 앞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잘라 버렸다. 순간 운형학은 싸늘한 한기가 얼굴을 에이듯이 지나면서 머리카락이 잠시 떠올랐다가 서서히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