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117.
제11장 교청인의 첫 번째 목욕
녹림채의 근거지가 있는 안휘성을 향해 표영과 그 일행은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했다.
가는 도중에 표영의 얼굴은 여느 때와는 달리 그리 밝지 않았다. 그 원인은 교청인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이용해 목욕을 하도록 만들다니… 고얀 녀석…….’
표영은 처음부터 걸인의 철칙에 대해 분명히 말해 두었었다.
1. 식사는 절대 음식점에서 사먹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길은 오로지 구걸뿐이다.
2. 앞으로 목욕이라는 것은 없다. 또한 내 허락 없이 옷을 갈아입는 것 또한 용납지 않겠다.
이 중요한 철칙을 다른 방법을 통해 빠져나가려고 한 것이다.
차라리 진개방에서 나가겠다고 했다면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집으로 돌려보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기분도 이렇게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표영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번 교청인의 행위는 진개방을 뿌리째 흔들어놓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가에 있으면서도 편하게 식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표영은 굳이 구걸을 하도록 했고 탁자에 앉아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모범적인 행동으로 나날을 보냈건만 힘을 불어넣어 주지는 못할망정 조직을 흩뜨리려 하다니…….
‘참을 수 없어!’
그렇게 다짐한 표영은 가는 내내 교청인을 갈구었다.
“네가 감히 술수를 써? 그럴 수가 있냐? 목욕을 그렇게 자주해서 어쩌겠다는 것이야? 자주 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다 쓸데없는 짓이란 말이다.”
표영은 달리면서 교청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계속 조잘거렸다.
“원래 목욕을 많이 하면 할수록 피부가 약해지는 법이야. 알겠어? 적어도 이삼 년은 버터야만 뽀얀 피부가 될 뿐만 아니라 진정한 개방인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이다.”
이제까지 잔소리를 모르던 표영이 아니었던가.
교청인은 한편으로는 곁에서 조잘대는 것이 좋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머리가 아파왔다.
좋은 것은 호감을 갖기 시작한 표영이 옆에서 말을 걸어준다는 것이었고, 머리가 아픈 것은 하도 말을 많이 해서 그만 귓밥이 다 부스러져 떨어져 내리고 이젠 남아 있지도 않아 고막이 울리고 있는 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정정당당하게 승부할 것이지. 아무리 처녀 거지라고 해도 그렇지 그게 무슨 얌체 같은 행동이냐.”
교청인이라고 그저 아무 말도 없이 듣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방주님! 제가 말한 게 아니라고요. 아버지께서 임의로 말씀하신 것을 가지고 왜 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신 거예요.”
교청인은 말하면서도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기에 이런 핑계를 대고 조잘대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다.
‘방주님이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일까?’
그러자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표영은 교청인이 생각한 것만큼 지금 장난으로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닥쳐! 이 못된 것… 나는 어쩔 수 없이 약속을 해버렸으니 이젠 지킬 수밖에 없게 되었잖아. 그전에 네가 말렸어야지.”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너무도 진지하게 매달리는 표영에게 교청인은 이젠 대꾸할 생각조차 없어졌다.
그건 능파와 능혼, 그리고 제갈호도 비슷했다.
그들은 고작 두 번의 목욕에 대해 질긴 고기처럼 매달리는 표영의 집착에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지존께서 무슨 뜻으로 저러시는 걸까. 역시 우리 마교는 개방을 바탕으로 깔고 일어서야 하니 확실히 해두시려는 걸까?’
‘설마… 지존께서 저 계집애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시겠지? 허허, 내가 이거 무슨 생각을… 역대 마교 교주님들은 눈빛 한 방에 수많은 여자를 거느리셨지. 저런 방법을 사용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제갈호도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근데 교청인은 오히려 이 상황을 좋아하는 것 같네… 거참…….’
각기 나름대로 이 상황을 분석하는 중에도 표영의 조잘거림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들어 교청인의 머릿속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날 지경이 되었을 쯤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고갤 들어 하늘을 바라본 표영은 하늘이 어두워진 것과는 반대로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호… 비가 오는구나.’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모두 멈춰라.”
표영은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으하하! 비가 오다니… 역시 하늘은 때를 기가 막히게 아신다니까.”
발길을 멈춘 일행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비가 온다고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대로 하자면 비가 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전례로 보았을 때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싱글거릴 것도, 그렇다고 인상을 찌푸릴 일도 아니었다. 이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표영은 싱글벙글거리며 하늘을 바라보다가 수하들에게 말했다.
“자, 비가 오면 모두 저기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도록 한다. 단지… 으흐흐…….”
표영은 말을 끊고 교청인을 바라본 후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청인이만 비를 맞으며 약속한 목욕을 하도록 한다.”
모두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누구라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당혹스러움이 교청인의 황당함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허어… 참…….”
교청인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자 어느새 표영과 능파, 그리고 능혼과 제갈호는 가지와 잎사귀가 넓게 펼쳐진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할 준비를 마쳤다.
“으흐흐…. 빨리 비가 와야 할 텐데… 비님! 빨리빨리 오세요. 으흐흐…….”
표영의 말을 하늘의 구름들이 들었음인가. 먹구름 아래로 장대 같은 소낙비가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표영의 얼굴은 화사한 꽃과 같이 변했다.
“와아… 비다∼ 비라구∼.”
퀭∼
교청인은 멍청하게 선 채 넋이 나가 거센 빗줄기를 맞았다.
쏴아아…….
엄청난 빗줄기였다.
교청인은 그 속에서 가끔씩 눈을 깜박거리며 황당함의 호수에 빠져 방황했다.
빗물이 머리를 적시고 옷을 다 적시는 가운데서 그녀는 표영과 일행들을 보았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썹도 움직이지 않는 능파와 능혼도 이번에는 어쩔 줄을 모르고 슬그머니 눈길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제갈호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힐끔거리며 표영을 바라보다가 땅에 눈을 돌리고 손으로 괜히 땅만 긁어댔다. 그 민망함이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표영은 변함이 없었다.
“이봐. 청인! 빨리 목욕해. 가문의 뜻을 높이 받들어야지. 아버지의 간절함을 외면할 생각이냐? 머리도 감고 목의 때도 벗겨내란 말이야.”
교청인은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고 싶어도 너무나 황당해서 눈물이 나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
교청인은 아무 말도 없이 비를 맞으며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표영이 계속 다그쳤다.
“왜 그렇게 가만히 있는 거냐. 그렇게 하고선 이번에는 목욕한 것 아니라고 떼쓰면 곤란해. 알겠어? 일 년에 두 번 하는 것 중에 지금 이 경우가 들어가는 거야.”
“…….”
이런 표영의 집요함은 교청인도 교청인이지만 능파와 능혼, 그리고 제갈호에게도 끔찍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봐도 거지대왕으로서 이보다 더 제격인 사람은 없을 터였다. 이걸 보고 타고났다고 하는 것이리라.
능혼이 보기 안쓰러워 괜히 헛기침을 했다.
“험험.”
표영이 그런 능혼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갈겼다.
“지금 헛기침할 때냐? 얼른 청인이 힘을 내서 목욕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 아니냔 말이다.”
“네? 네… 그래야죠.”
표영은 다시 능파와 제갈호에게도 말했다.
“너희도 마찬가지야.”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여전히 비가 철철 내리는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교청인에게 일제히 격려가 쏟아졌다.
“이봐, 청인. 하늘을 봐라! 조만간에 비가 그칠지도 모르겠어. 빨리해. 아버지를 생각해야지?”
“정신 차려! 넌 할 수 있어! 정 어려우면 얼굴이라도 씻도록 해 봐.”
“교 매!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잘해냈잖아. 예전에 영약을 복용하고 뇌려타곤 했던 것을 떠올려 봐. 그러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말이야.”
아까까지 눈길을 피하며 곤란해 하던 그들은 서로 침을 튀겨가며 격려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교청인의 경우를 보더라도 방주에게 찍히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뻔했으니 말이다.
허나 수없이 많은 격려가 쏟아졌지만 교청인은 비 맞은 석상이 되어갔다. 어찌 보면 숨도 쉬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얼마나 반가웠던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버지는 왜 오셔서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신 거야. 그리고 오셨더라도 그냥 조용히 가실 것이지. 왜 말하지도 않은 목욕 얘기를 꺼내서 이 꼴로 만드시냐고.’
교청인의 눈에서는 급기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거센 빗줄기가 얼굴 가득 흘러내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엄청난 눈물을 보일 뻔했다.
하지만 표영은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봐이봐… 교청인! 서둘러라. 비가 곧 그칠 것 같아. 먹구름이 지나가고 있단 말이다!”
표영은 진짜 마음이 급한 듯 고래고래 소리 지르느라 정신이 없었고 교청인은 그저 눈만 끔뻑거리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제12장 지존의 그늘을 보다
목욕 사건이 있은 뒤로도 일행은 빠른 속도로 이동해 갔다.
비록 잠시 동안 교청인이 쀼루퉁했던 며칠간이 있었지만 모두의 배려 덕분에 그녀 또한 이 시점에서는 본래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여기에서 모두가 배려했다는 것에 의아함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 행한 거지 수련에 관련된 것들을 생각해 볼 때 배려라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알고 보면 배려라는 것도 별것 아니었다.
그건 사실 아주 간단했는데 바로…….
모. 른. 척. 하. 기.
모른 척하기는 의외로 효과가 컸다. 표영으로부터 제갈호에 이르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태도를 취했기에 나중에 가서는 교청인 스스로도 그때 그 일이 그렇게 심각했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품을 지경에 이르렀고 ‘응, 그래. 별거 아니었었나 봐’라고 생각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이런 교청인의 적응은 어느덧 그녀가 거지로서 그 위치를 확고히 했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 일은 어떤 관점에서는 매우 비극적인 상황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교청인은 또 다른 관점에서 담담히, 혹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일행은 부지런히 이동했기에 어느덧 호북성을 지날 수 있었고 안휘성 근처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안휘성 중부에 위치한 녹림채까지의 길은 얼마 남지 않은 셈인 것이다.
이것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는데, 그 원인으로는 표영이 빨리 갈 수만 있다면 아무리 험준한 길이라도 사양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이 비록 험준하다 하더라도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힘들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향산을 통째로 가로지르던 중 표영은 눈앞에 나타난 절벽을 보고 수하들에게 말했다.
“이곳을 타고 내려가도록 하자.”
이곳 동쪽 절벽은 서쪽 절벽에 비해 조금은 완만한 경사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크게 어렵지 않게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 제갈호와 교청인은 일행 중 무공이 제일 처진 입장이었지만 표영을 따라다니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경공이 상승한 터였다.
몸을 이리저리 굴리고 땅에 부비면서 살다 보니 지계(地界)의 힘을 받는 것도 있었고 땅과의 친화력이 생기기도 한 것이었다. 과거 표영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지금 내려서려고 하는 이 절벽은 무리라며 고개를 내저었으리라.
“자, 가자.”
표영이 힘차게 말하고 먼저 신형을 학처럼 날려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고 그 뒤를 이어 능파, 능혼, 제갈호, 교청인이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