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08장 (109/199)

 # 108

108.

천음조화를 통해 흘러나온 표영의 말은 당문천과 네 장로의 귓가로 파고들며 뇌리로 또렷이 각인되었다. 단순한 말이었지만 음성은 공명을 이루며 계속 머릿속에서 윙윙거렸다.

그렇다.

표영이 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은 고통과 수치였다.

나흘간에 걸쳐 서로 치고 받으면서 누군가에게 맞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배우길 바랐고, 마지막 오 일째를 맞이해서는 수많은 사람들 그것도 일가친지들이 있는 가운데서 맞게 함으로써 수치를 깨닫게 하고자 했다.

강호를 횡행하며 자식 앞에서 그 부모가 채찍질 당하고 자식이 부모 앞에서 고통당하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이겠는가.

혹은 부인이 보는 가운데 그 남편이 맞는다고 했을 때는 어떠하겠는가. 그러한 기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강호를 활보하며 함부로 사람을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실제 과거 당문천 등은 표영의 사부 엽지혼을 걷어차지 않았던가. 비록 엽지혼이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하더라도 제자가 보는 가운데 땅바닥을 굴렀었다.

“고통과 수치를 기억하고 생이 끝나는 날까지 잊지 마라.”

제5장 같은 밤 다른 이야기

악몽 같은 오 일이 지나고 당문천은 저녁이 되어 잠들었다. 옆자리에서 부인 소운교는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이제 나이 58세였지만 사파 계열에 속한 당가의 안주인이라기엔 차분하고 교양 있는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어쩌면 당문천이 생에 가장 잘한 일이라면 부인 소운교를 얻은 일이리라.

“휴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녀는 당문천과 함께 수십 년을 살았지만 이제껏 그가 이런 몰골로 변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여보, 어쩌면 하늘이 내린 천벌일지도 모르겠군요.”

소운교는 세상모르게 잠에 깊이 빠져 듣지도 못할 당문천에게 말했다.

“그렇겠지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면 어디서 그런 괴상한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겠어요. 그 젊은 거지 두목이 무형지독을 병째로 마시는 것만 봐도 과연 사람일 리가 없답니다. 휴우∼”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당문천의 머릿결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쨌든 이번 일로 우리 당가도 변했으면 좋겠어요. 강호인들이 두려워하는 가문이 아닌 신망과 존경을 받는 곳으로 말이죠.”

그녀는 불행이 다하면 행복이 온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부디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런 모습으로 당가가 변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옆으로 누이고 얼굴이 부어오른 당문천을 바라보며 그의 손을 잡고 잠을 청했다.

한편 당문천은 꿈속을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 오 일간에 걸쳐 주고받은, 기억조차 하기 싫은 일들은 안타깝게도 다시 꿈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으아악!”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주먹이 뻗어와 턱에 작렬하는가 하면 수십 개의 발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또한 문어같이 생긴 괴물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그 괴물의 발엔 모두 쇠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촤장창-

쇠갈고리가 허공에 교차할 때 서로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고 일순간 한꺼번에 당문천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갈고리에 맞아 비칠대는데 문어괴물은 입에서 슉- 하는 소리와 함께 금륜을 날렸다.

카강캉!

기이한 마찰음을 내며 짓쳐오는 금륜은 갈고리에 꼼짝 못하고 잡혀 있는 당문천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안 돼!”

하지만 안 된다고 말하면 중도에 멈출 금륜이 아니었다. 속절없이 달려드는 금륜은 그만 당문천의 목을 댕강 하고 날려 버렸다.

이윽고 갈고리가 몸에서 빠져나가고 문어괴물도 사라지자 당문천은 허겁지겁 머리를 찾아 목에 붙이려 했다. 하지만 눈은 머리에 붙어 있었고 그 머리는 다리와 팔도 없으니 그저 마음만 애타할 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목 없는 몸만이 사방을 더듬거렸고 끝내 머리를 찾아 목에 붙일 수 있었다.

“휴우∼ 다행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당문천은 다시 괴성을 토해내야만 했다.

“으아악!”

허겁지겁 머리를 붙이느라 그만 머리 앞뒤가 바뀐 것이다. 한마디로 등 쪽으로 눈과 코가 위치하고 만 것이다.

그때였다.

“미친놈, 어디서 소란을 피우는 거냐!”

어딘가 낯익은 음성이다 싶어 바라보니 자신을 가장 아껴주는 부인 소운교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의 모습은 따스하게 살펴주는 평소의 그녀가 아니었다.

“부인, 내 목이 잘못 붙었소. 어서 날 이곳에서 데려가 주시오.”

당문천이 곧 울듯 말했지만 소운교는 비웃음을 지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흥, 네놈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괴롭혔는지 생각이나 하고 그런 말 하거라. 하지만 너의 목은 내가 바로 돌려주겠다.”

그 말과 함께 그녀는 허공으로 도약하더니 몸을 두 바퀴 틀며 발로 당문천의 턱을 가격해 버렸다.

“헉! 으악∼”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당문천이 쓰러졌고 그 모습을 소운교가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런…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았는걸.”

그때부터 연신 당문천은 턱만 얻어맞았다. 괜히 목을 잘못 달아서 괴로움이 더해진 것이다. 얼마나 맞았을까.

꿈속인지라 일각이 하루가 지난 시간처럼 늘어나기도 함에 따라 긴 시간 얻어맞은 것이 분명했다.

“음… 이런, 내 힘으로는 안 되겠는걸. 넌 평생 그렇게 뒤를 돌아보며 살도록 해라. 호호호호!”

소운교가 안개처럼 사라져 가자 당문천은 괴로워하면서도 부인을 불렀다.

“부인∼ 가지 마시오. 제발… 날 두고 가면 안 돼∼.”

이것으로 끝난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안타깝게도 꿈은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는 그가 강호를 활보하며 괴롭혔던 이들이 나타났다. 마치 귀신처럼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깔깔거리며 웃고 조롱했다.

“낄낄낄, 바보 같은 당문천아… 어떠냐. 넌 이제 평생 병신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네가 그렇게 사람을 괴롭히더니 말년에 개망신을 당하는구나.”

“너는 죽을 때까지 편히 지낼 줄 알았겠지? 내 침을 받아라. 퉤∼.”

허름한 옷차림을 한 이부터 시작해서 고귀한 옷차림을 한 사람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서서히 사방에서 좁혀들었다. 그들은 손가락질하며 침을 뱉는가 하면 심지어 가까이 이르러서는 그의 옷을 벗겨내기도 했다.

“네놈이 내 갈비뼈를 부러뜨렸었지?”

“당문천, 네놈 때문에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 네놈도 한번 당해봐라!”

“아직도 난 절뚝거리고 있어. 하지만 네놈은 멀쩡한 것 같으니 내 다리와 바꾸자. 이놈아!”

그들은 각기 다가와 과거 당했던 설움을 토해내며 다리를 뜯어가려 하는가 하면 귀를 잡아 뜯기도 했다.

“사람 살려∼.”

“네놈이 정녕 사람이었더란 말이냐!”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단 말이야! 아니, 잘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오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말을 듣고 물러서는 이는 없었다. 당문천은 꿈속에서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지만 정녕 현실 속에서는 그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토해내지 못했다.

대게 사나운 악몽을 꿀라 치면 몸부림을 치고 비명을 내지르게 되어 있지만 당문천은 가위에 눌려 그저 작은 신음 소리만을 뱉어낼 따름이었다. 그는 이런 꿈을 꾸면서 비로소 고통에 대해, 그리고 서러움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다.

수치스러움이 무엇인지, 폭행한 자는 돌아서면 잊을 수 있을지 몰라도 폭행을 당한 자는 평생을 두고 서러워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비록 너무도 늦은 깨달음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네 명의 장로들도 당문천의 경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피곤에 지쳐 침상에 쓰러지다시피 잠든 그들은 뇌리에 심겨진 표영의 말이 계속해서 울려나는 바람에 해괴한 꿈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도 그 덕분에 작으나마 사람의 존귀함에 대해 알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꿈은 약 사오 일간 계속되다가 육 일째가 되어서야 서서히 잦아들었는데, 그 후 당문천 등은 예전의 모습이 아닌 조금은 무거운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

당문천 등이 치고받기를 마치던 그날 늦은 밤.

당가의 서쪽 끝에 자리한 암운각의 지붕 위로 제갈호와 교청인이 달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의 옷차림은 너저분했고 머리는 이리저리 흩어진 것이 영락없이 거지 그 자체라 할 만했지만 둥근 달빛과 그 주위에 서성이는 별들과 묘한 대치를 이루는 것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아∼ 달이 만두처럼 보이네.”

교청인이 두 손을 턱에 괸 채 달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과거의 그녀라면 달이 만두 같다는 말은 저속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어느덧 표영에게 전염될 대로 된 그녀는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옆에 앉은 제갈호는 불규칙하게 나열된 별을 보며 물었다.

“교 매, 교 매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제갈호의 말투는 흡사 동생에게 하는 듯 편한 어조였다. 사실 칠옥삼봉이 사마복의 생일을 맞이해 모인 자리까지만 해도 이런 말투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칠옥삼봉은 각자가 좋은 가문의 자제들로 나름대로 존중하는 분위기가 컸기에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예식을 갖춘 말들이 오갔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충분했다.

그동안 불귀도와 어촌 마을 신합에서 거지 수련을 한답시고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처참한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서로 감추고 내숭 떨고 할 입장이 아니게 된 것이다.

영약 복용이라는 이름 아래 개밥을 나눠 먹고 시장 바닥을 뇌려타곤이라 외치며 구르느라 서로에겐 진한 전우애가 쌓였고 편안한 사이로 변한 것이다.

함께 같은 고난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동질감을 느끼게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것이리라.

하지만 둘에게 있어서도 오늘은 모처럼 만에 갖는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끊임없는 거지 수련과 당가까지 오는 데 있어서도 잠깐 눈을 붙이는 시간 외에는 쉴 새 없이 달려오느라 차분히 대화를 나눌 만한 시간은 없었던 것이다.

제갈호는 질문을 던져 놓고 교청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신이 입을 열었다. 굳이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갈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도 나와 비슷하겠지만 처음에 난 방주에게 끌려 다니는 것이 미칠 것만 같았어. 하루에도 수십 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 조금 재밌기도 하고 말이야. 방주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경험 역시 못하지 않았겠어? 하긴, 세상천지에 이런 짓을 하고 다닐 사람이 방주가 아니고 누가 있겠냐만.”

제갈호는 말을 하며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우리가 먹은 독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는데… 어쩌면 방주는 우리가 간곡하게 떠나겠다고 하면 해독해 줄 것 같은 그런 느낌도 들더구나.”

지금까지 제갈호가 지켜본 표영은 단순한 거지가 아니었다. 비록 그 성격이 괴팍하고 개구리처럼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분명한 건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의를 숭상하라’는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억지로 독을 먹이고 거지 노릇을 시키고는 있지만 생명을 중시하고 약한 자를 돌볼 줄 아는 자인 것이다. 제갈호가 무슨 생각이 난 건지 피식 하고 웃었다.

“근데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아? 교 매가 듣기에는 조금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는데. 왠지 방주가 점점 마음에 드는 거 있지. 후후후…….”

교청인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제갈 형은 그럼 돌아갈 마음이 없나 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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