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109.
“글쎄,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면 돌아가는 게 맞겠지만 지금은 그냥 방주와 함께 있고 싶어. 내가 비록 강호에서 칠옥삼봉 중 한 명으로 불리며 명성을 얻었지만 사실 그럴듯한 협행을 이루어본 적은 없잖아. 하지만 방주와 함께 있으면 조금 위험한 일이 많을 것 같긴 해도 삶의 의미가 더 클 것 같거든.”
교청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제갈호의 말은 교청인의 생각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때 교청인이 갑자기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제갈 형! 약혼한 방 매에게는 연락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교청인이 말한 방 매는 청화장주의 딸인 방효미를 가리킴이었다. 칠옥삼봉 사이에선 제갈호와 방효미가 약혼한 사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제까지 워낙에 정신이 없어 생각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떠오른 터였다.
제갈호는 방효미에 대한 말을 듣자 눈에 사랑의 감정이 가득 들어찼다.
“당연하지. 당가의 일이 정리되는 대로 표국을 통하거나 사람을 시켜 집에 소식을 전해야겠어.”
제갈호가 바라보고 있던 별들이 둥그렇게 이어지더니 약혼녀 방효미의 얼굴로 변했다. 별빛으로 이루어진 방효미는 제갈호를 보더니 살짝 한쪽 눈을 감으며 미소를 보내주었다.
‘효미! 별일없이 잘 지내겠지? 보고 싶구나.’
그동안 표영에게 잡힌 후에도 잠을 청할 때면 늘 나타나 자신을 위로해 주던 방 매였다. 제갈호는 옆에 교청인이 있다는 것도 잊었는지 얼이 나간 사람마냥 먼 하늘을 바라보며 싱글거렸다.
‘저렇게 좋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 두기라도 한 듯한 제갈호의 모습을 보며 교청인은 문득 표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 호랑이를 잡는다며 기다릴 때 만첨과 노각을 구르게 하며 재촉하던 모습, 독약을 먹으라며 내밀던 손길과 기이한 미소, 영약 복용은 이런 것이라며 시범을 보이던 모습, 뇌려타곤이라고 외치던 목소리, 그리고 막연히 괴팍하고 짓궂게만 보았던 표영을 새롭게 보게 만든 계기인 해적 사건. 해적들에게 곤욕을 치른 후 물에 흠뻑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겨 나타난 얼굴은 귀여울 뿐 아니라 사랑스럽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거기에 이곳에서 갈조혁이 어린아이를 인질로 삼아 위협할 때 분노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이제껏 함께 지내오면서 과연 그가 그런 얼굴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 일은 그녀에게 표영과 함께한 것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님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지난 기억들을 더듬어보며 교청인은 자신이 그 기억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에구∼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황급히 제갈호를 바라보았다.
‘휴우∼’
다행히 제갈호는 아직까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뭐가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인 채였다.
‘그래, 제갈 형의 말처럼 나는 칠옥삼봉으로 이름을 떨치며 다니던 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한 것 같구나. 비록 차림새나 꼴은 말이 아니지만 이런 것이 어쩌면 진정한 강호행이 아니겠어? 음… 근데 방주는 나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피식 하고 코웃음이 터졌다.
‘어떻게 생각하긴, 그저 거지로 생각하겠지. 좀 더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을 하고 있는 것뿐이지 않겠어.’
그녀의 시선이 달을 향했다. 둥근 달은 어느덧 표영의 얼굴로 변했고 표영의 입에서 한소리가 터져 나왔다.
-뇌려타곤!
“푸후후…….”
교청인이 신합 마을에서 있었던 거지 수련 때의 뇌려타곤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리자 그때서야 제갈호가 정신을 차리고 교청인을 바라봤다.
“교 매, 뭐 재밌는 것이라도 본 거야?”
그 말에 교청인이 무슨 나쁜 짓이라고 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붉혔다.
제갈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어라? 이거 수상한데… 혹시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애인이라도 떠올린 건가?”
“흥, 애인은 무슨 애인이에요. 전 단지 방주가 참 신기한 사람이란 생각을 한 것뿐이라고요.”
교청인은 얼른 다른 말로 화제를 바꿨고 그 말은 다행히 통했다.
“하하, 신기한 사람이라… 그 말이 딱 제격인걸. 정말이지 하는 일마다 엉뚱한데도 신기하게 뜻한 바대로 다 되니까 말이야. 신기해… 암, 신기하지. 방주는 하늘이 내린 행운아가 아닐까 싶단 말이야.”
“호호호.”
둘은 유쾌하게 웃었다.
“제갈 형, 근데 말이에요. 방주는 갑자기 어디에서 뚝 떨어져 내린 걸까요?”
제갈호도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글쎄, 그러고 보니 방주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이름이 표영이라는 것밖엔 없잖아. 표영이라… 어라? 그러고 보니 일옥검수 표숙 형과 성이 같잖아?”
교청인이 그건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에이, 너무 지나친 상상은 하지 말자고요. 성이 같다고 같은 친족일 리는 없잖아요. 표숙 오라버니와 방주가 어디가 비슷한 점이 있겠어요.”
하지만 교청인은 곧 표영의 맨얼굴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조금 닮긴 했는 걸?’
그러다 다시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음… 아닐 거야. 표숙 오라버니에겐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잖아.’
그때 제갈호가 말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물어봐야겠어. 나이는 나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말이야. 쩝.”
“그래요, 이만 가죠. 방주가 왜 이리 늦게 오냐고 한마디 할 것 같으니까요.”
“그래, 가자.”
둘은 암운각의 지붕에서 신형을 날려 공중에서 회전하며 바닥으로 착지했다. 거처로 걸음을 옮기는 중 교청인은 아까 제갈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마음으로 다짐했다.
‘얼마 동안이 될지 모르지만 나도 방주를 따라야겠다.’
제6장 점소이 옥현기
화경루의 점소이 옥현기는 오늘도 어김없이 손님들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냈다.
“어서 오십시오. 이쪽 빈자리로 앉으십시오.”
그는 이곳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꽤 적응을 잘하고 있었다. 대략 20대 후반으로 보였는데 그의 얼굴은 조금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그 특별함이라고 하는 것은 외모가 유독 출중하다거나 혹은 그와는 반대로 곰보나 못난 얼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얼굴. 즉, 한번 보고 나서 다시 얼굴을 떠올릴라 치면 ‘음… 어떻게 생겼었더라?’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될 얼굴이었다. 그만큼 옥현기의 얼굴은 평범한 것처럼 보이지만, 평범함 이면에 고귀함을 갖추고 있었다.
옥현기가 사귀고 있는 이제 스무 살 된 봉화조차도 잠들 무렵 그의 얼굴을 기억해 내려 애쓰지만 번번이 뿌옇게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윤곽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옥현기가 화경루에서 점소이로 일하게 된 지는 두 달이 약간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짧은 시간 속에서 어느 점소이보다 성실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공자님,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네, 네, 곧바로 대령하겠습니다요.”
손님으로부터 음식을 주문받고 바쁘게 움직이는 옥현기에게 설만호가 중도에 짐짓 호랑이 눈을 뜨고 매섭게 쏘아붙였다.
“이놈,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이냐?”
설만호는 이곳 화경루의 주인이었다. 턱에 두텁게 기른 수염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로 인해 처음 그를 본 사람들도 그가 덕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하곤 했다.
그는 매우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얼굴을 풀며 다정다감한 어투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 보거라.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렷다?”
지금 옥현기의 표정은 여느 때와 같아 달라 보이는 점을 찾기 힘들었지만 하루에도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관찰(?)해 온 주인 설만호의 눈은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설만호는 밝음 속에 깃든 작은 그림자를 삼 일 전부터 본 터였다. 그건 뭔가 불안해하는 것만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아이고… 왜 그러세요. 전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 설만호가 꿀밤을 먹였다.
꽁∼
“아야.”
“이놈아! 귀신은 속일 수 있어도 내 눈은 속이지 못한다. 이 녀석, 봉화하고 싸운 게로구나?”
설만호는 봉화가 삼 일 전부터 보이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다.
“에이, 주인님도… 싸우기는요. 봉화도 일이 바빠서 못 온 것뿐이랍니다. 전 그냥 며칠 전부터 몸이 으슬으슬 추워오는 게 도통 힘이 나지 않는 것뿐이라고요. 그래도 주인님이 아니고서는 제 얼굴의 변화를 누가 알아차릴 수나 있겠어요?”
머리를 긁적이며 하는 말에 설만호가 혀를 끌끌 찼다.
“이런이런… 그렇다면 진즉 내게 말을 해야 할 것 아니냐. 미련한 놈 같으니라고. 내 언젠가는 네놈이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네 녀석은 좀 쉬면서 일을 해야 하건만 너무 몸을 돌보지 않는 게 흠이란 말이야. 요즘 보기 드물게 성실한 녀석을 발견했다 싶었는데 몸져누우면 화경루는 누가 돌본단 말이냐. 고얀 놈 같으니…….”
설만호의 목소리에는 옥현기를 아끼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만큼 옥현기가 그동안 보여준 성실함은 일반 점소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가 옥현기를 봤을 때는 그저 뜨내기가 돈이 필요해 잠시의 일거리를 찾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나마 인상이 나쁘지 않고 말도 사근사근하게 하는지라 고용했는데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열심인 것을 보고 점소이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넌 화경루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야. 평소에 몸을 아끼고 조금 쉬엄쉬엄 일을 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그래, 알았으면 오늘은 좀 쉬고 모레부터 일을 하도록 해라.”
설만호가 마치 친자식을 대하듯 하는 말에 옥현기는 연신 허리를 숙였다.
“주인님 말씀만 들어도 벌써부터 몸이 다 나은 것 같은걸요. 아직은 버틸 만하니 제가 정 몸이 아프면 그때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설만호가 윗입술을 삐죽 내밀며 짐짓 불만에 가득 찼음을 나타낸 후 말했다.
“이 녀석, 고집 하고는… 그래, 좋다. 골병이 들어 쓰러져도 나는 모른다. 나쁜 놈 같으니…….”
화경루의 점소이는 옥현기까지 포함해서 총 7명이었다.
그중 다섯은 화경루로부터 가까운 곳에 집을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을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옥현기처럼 거처가 없는 이들은 루의 작은 골방에 잠자리를 마련해 놀았는데 그곳에서 지친 몸을 쉬어야만 했다.
골방에서는 이미 장복과 이환이 아까부터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옥현기는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무릎을 세우고 앉은 채로 깊은 고민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대주께서 이렇게 연락을 주지 않으신 적이 없었지 않는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그의 눈은 객잔에서 음식을 나르던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었다.
‘아니지, 아니야. 이제 고작 육 일밖에 지나지 않았지 않느냐. 내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옥현기의 이마는 잔뜩 찌푸려졌다.
“음…….”
옥현기는 자신이 알고 있는 대주를 떠올렸다. 그러자 다시 불안이 엄습했다.
‘송 대주께서는 매사에 철두철미한 분이시다. 늦는다면 그런 사유라도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보내오셨을 것이 아닌가. 그저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래, 좋다. 내일은 시간을 내서 알아보도록 하자.’
낮에 화경루의 주인 설만호가 너그럽게 말한 것으로 보아 시간을 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옥현기는 마음을 정하고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수많은 상념이 일어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