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76.
걸인각성(乞人覺醒) - 거지의 깨달음 4
강호가 다가오다
제1장 불귀도에서의 하룻밤
표영은 손패를 떠나보낸 후 먼저 섬의 제일 높은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과연 이곳이 앞으로 진개방의 훈련처로 삼기에 적당한지 전체적인 윤곽을 보고자 함이었다.
불귀도는 한눈에 보기에도 거의 돌들로 가득해 돌섬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았다. 그중 가장 높은 봉우리까지는 기암괴석을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기에 거의 암벽을 등반하는 것이라 할만 했다.
하지만 그런 험준한 경사가 표영의 발걸음을 더디게 할 수는 없었다.
취팔선보의 경신법을 발휘해 나아가는 발걸음은 멀리서 볼라치면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마치 접착제가 붙은 듯 척척 달라붙었고 다시 발을 뗄 때는 나비가 날아오르듯 경쾌하기 그지없는 동작을 보였다.
이윽고 정상에 오른 표영은 시원한 바람을 가슴으로 받으며 섬을 둘러보았다.
“야∼ 이거 정말 심하군. 완전히 돌섬이잖아?”
정상에서 내려다본 불귀도는 표영의 말대로 엄청난 바위와 돌들로 가득했다. 동쪽 방향으로 숲이 보이긴 했지만 그건 농사를 짓기엔 터무니없이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짐작컨대 200년 전 이곳에 거주했던 이들은 필시 고기잡이만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리라.
표영은 빙 둘러 섬의 요소요소를 세심하게 살폈다. 잠시 후 표영의 얼굴엔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자세히 보고 있자니 나름대로 그럴싸해 보인 것이다.
“하하하… 하하하……!”
통쾌한 웃음이 천음조화를 통해 나타나자 소리는 섬을 회오리처럼 휘감고 돌았다.
“좋아, 바로 이곳이다. 이제 불귀도는 개방의 새로운 역사를 일구어내는 터전이 될 것이다. 하하하하.”
불귀도는 들었던 말들과는 달리 음산하거나 귀기스러운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로 인해 표영은 저주의 섬이니 전설의 섬이니 하는 것 따위는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시원스럽게 잊어버릴 수 있었다.
표영은 기분이 흥해 섬의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혼자 지껄였다.
“저쪽은 그래도 작게나마 공터가 있어 걸인 연무장으로 사용하면 제격이겠고, 저곳은 지형이 험해 경신술을 연마하기엔 딱이겠다. 하하하, 천하에 빌어먹는 거지에게 이 정도 장소라면 거의 대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렇게 표영이 온갖 궁리 속에 만족해할 때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닥쳤다.
고개를 들어 바람의 방향을 가늠해 보던 표영의 눈에 멀리 짙은 먹구름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어라? 이거 비가 오려나 보네.”
표영은 일단 비를 피해야 했다.
‘이런 돌섬에서는 필시 굴들이 많을 것이다. 그곳에서 비를 피하고 밤을 보내도록 해야겠다.’
표영은 봉우리를 내려와 유달리 뾰쪽하게 솟아난 기암괴석들이 많은 지점으로 치달렸다. 아까 보기로 군데군데 검은 점처럼 보이는 것이 많아 동굴이 있을 가능성이 제일 큰 곳이었다.
한참을 달릴 때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었고 거의 목적한 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는 시커먼 먹구름이 섬 전체를 뒤덮고 말았다. 어찌나 대단하던지 아직 해가 저물기엔 시간이 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섬은 어둠에 휩싸였다.
우르릉- 쾅쾅!
비가 쏟아지기도 전에 먹구름 가운데서 하늘을 갈라 버릴 듯한 번개가 뇌선을 그렸다. 그와 함께 천둥 소리는 거대하게 울려 퍼지며 섬 전체를 뒤흔들었다.
“어라, 이거 어째 좀 불안한데.”
우렁찬 천둥 소리는 아까까지만 해도 별것 아니라고 단정하던 불귀도에 대한 전설을 떠오르게 했다.
그렇기도 한 것이 화창하던 날씨가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변한다는 것은 도무지 상식으로는 곧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내달리던 표영의 눈에 반가움이 일었다. 눈이 이른 곳에는 약 십여 개의 동굴이 불규칙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호, 거지들이 머물기엔 아주 그만이겠는걸.”
아무리 거지라도 비가 올 때면 버젓이 맞고 잠을 잘 수는 없는 것이기에 앞으로 거지 교육을 시킴에 있어서 금상첨화로 여겨졌다. 표영은 일단 십여 개의 동굴 중 제일 먼저 눈에 띈 중앙 쪽으로 들어갔다.
우르릉- 콰쾅!
쏴아악.
표영이 동굴에 막 발을 들이미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폭우가 쏟아졌다. 대개 비가 내릴라치면 옅은 가랑비부터 시작해서 점점 빗줄기가 굵어진다든지 할 터인데 지금 내리는 비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하늘 위에서 미리 큰 항아리에 물을 담아두고 있다가 한꺼번에 부어버리는 것처럼 굵은 빗방울이 거세게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하아… 대단하구나.”
섬 전체가 빗소리로 가득 찼고 사물이 희미해 보일 정도로 어둠이 깔렸다. 그 희미한 밝음은 오히려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건 어두워져 버린 것보다 더욱 귀기스러움을 풍겨내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지극히 평온한 섬이 삽시간에 저주의 섬이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만큼 변한 것이다.
‘불귀도는 규모가 작아 특별히 더 살펴볼 것도 없으니 이곳에서 비를 피하다가 내일 손패가 오면 바로 돌아가야겠다.’
표영은 눈을 지그시 뜨고 안력을 돋웠다. 불을 지필 만한 것이라도 찾고자 함이었다. 동굴 밖에서 비치는 옅은 빛의 도움을 얻어 부스러질 듯한 나뭇가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를 손에 들고 양기를 응축한 후 쏟아냈다.
화르르륵.
펼친 것은 삼매진화였다. 손바닥 위로 불길이 피어 올라 나뭇가지에 불이 붙었고 그 불로 다른 나무들을 모아 모닥불을 피웠다.
이윽고 장작이 타오르며 환히 동굴 안을 비추었다. 불꽃이 일렁일 때마다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동굴 벽에서 춤을 추듯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바깥에서는 거친 빗줄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는데 오히려 일관되게 계속되는 소리에 고요함을 느꼈다. 가만히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불꽃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사부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아련한 추억이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피어났다.
‘사부님…….’
표영은 사부와 함께 불귀도에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생각했다.
‘매정한 사부, 내게 모든 걸 떠넘기고 떠나 버리다니…….’
사부의 떠남을 생각하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처음 사부를 만났던 때, 그리고 형이라 부르며 따라다녔던 사부의 모습, 떠나버리겠다고 윽박지르면 곧 눈물을 흘릴 것같이 글썽이던 얼굴, 이런 생각이 일자 마음에서 한 가닥 따스한 기운이 솟아났다.
‘사부님, 제자를 보세요. 개방이 새롭게 태어날 초석이 될 곳에 이르렀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만천하에 개방과 사부님의 명성을 드높이겠습니다. 꼭 지켜봐 주세요.’
한참 지난날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이번엔 뇌리에 치졸한 당가의 가주와 장로들의 비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그놈들이 있었지. 망할놈들 같으니라구. 너희들에겐 누구도 받아보지 못한 큰 영광을 안겨주겠다. 내가 강호로 나가면 제일 먼저 거지가 되는 가문이 될 테니까. 너희가 멸시했던 거지들의 삶을 살도록 해주마.’
표영은 목숨을 앗는 복수를 할 생각은 없었다. 사부의 유언에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는 점도 있었는 데다가 진정한 복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당가는 사부의 죽음을 재촉한 계기가 된 것이 사실인 만큼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다는 다짐만은 확실했다.
우르릉- 콰광!
엄청난 뇌성벽력이었다. 표영이 추억 속에서 즐거워하고 슬퍼하며 분노할 때 상념을 일거에 날려 버릴 정도로 소리는 대단했다. 어찌나 소리가 크던지 섬 전체가 통째로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이거 점점 심해지는군.’
이런 분위기는 불귀도의 전설을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저주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마음 한 켠에 두려움이 일었다. 차라리 강력한 적과 대치하고 있다면 두려움 따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존재인데다가 풍겨내는 기세가 심히 커 절로 몸을 움츠러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비록 표영이 일차각성을 이룬 뒤로 심령이 담대해지긴 했지만 지금은 외딴 섬, 그것도 저주가 깃들어 있다는, 불귀도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닌가.
우르릉- 콰광!
다시 한 번 번개가 내리치며 동굴 밖이 환해졌다가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다. 표영은 동굴 안에 피워놓은 불이 수그러드는 것 같아 주변에 잔 나뭇가지들을 모아 불더미에 올린 후 애써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건 불안함을 떨쳐내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귀신같은 것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그럼, 그렇고말고. 귀신이 나타난다고 해도 거지에겐 아무 소용도 없다고. 거지에게 얻어먹을 것이 뭐가 있다고 나타나겠어. 하지만 만약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내 타구봉법의 무서움을 따끔하게 보여주고 말겠다. 그뿐이냐? 회선환을 먹여 앞으로는 착한 귀신이 되도록 해줄 테다!”
겉으로 떠벌리며 큰소리를 쳤지만 마음속에서는 다른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으씨… 귀신아, 귀신아… 나타나면 안 돼. 알았지?’
표영은 한참 동안 떠벌리다가 천음조화에 생각이 미쳤다.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지?’
천음조화의 구걸 중 하나가 떠올랐다.
“음(音)은 인간 세상뿐 아니라 천상까지 나아간다. 땅의 것 중 하늘에 가장 근접한 것은 오로지 음뿐이다. 천음조화는 마음을 평안케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격동케 하거나 감동케 할 수도 있음이다. 모름지기 음은 모든 세상의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음이니 무(武)의 극(極)은 오로지 음으로 인해 달성될 것이다.”
벽에 기댄 채로 천음조화를 운용하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맑고 청아한 소리는 동굴 안에 울려 퍼졌고 거센 빗소리와 가끔씩 터져 나오는 천둥 소리마저 억눌렀다.
휘파람이 이어질수록 표영의 마음은 잔잔한 평안에 이르렀다.
표영은 길게 이어지는 소릿결에 다시금 지난날 사부와의 정겨운 나날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정겨움에 묻혀 한순간 잠에 빠져들었다.
제2장 건곤패의 비밀
새벽녘. 이제껏 발했던 번개와는 비할 수 없으리만치 강력한 번개가 하늘에서 번쩍이더니 불귀도의 서쪽 암벽에 내리꽂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거대한 천둥소리.
우르릉… 콰광광쾅!
암벽에 내리꽂힌 번개의 위력은 상삼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어찌나 대단했던지 암벽이 두 갈래로 쩌억 갈라졌는데 그건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 같은 형상이었다.
콰광! 푸스스-
암벽이 갈라지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번개가 지면을 강타하는 현상은 상당히 보기 드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번개가 꽂힌 후에 나타났다. 번개에 의해 두 갈래로 갈라진 틈새 사이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드러난 것이다. 암벽 안에는 기실 아무것도 없어야 정상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 당연히 아무것도 없어야만 했다. 허나 암벽 안에는 백의와 흑의를 입고 있는 청수한 두 노인이 좌화(坐化)라도 한 듯이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기막힌 광경을 누구에게 전해준다 한들 과연 어느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놀라운 광경에 이어 더욱 희한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두 노인이 앉은 밑바닥에서부터 보랏빛 광채가 피어나는가 싶더니 점점 짙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 빛은 서서히 몸을 휘감고 위로 올라왔다.
잠시 후 두 노인은 급기야 뿌연 보랏빛 광채에 휩싸여 그 모습조차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아직도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보랏빛 광채는 전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보랏빛 광채가 다시 변화를 보였다. 이번에는 빛이 두 노인의 머리 위로 모두 올라가 둥그런 환을 이루더니 천천히 머리부터 차례로 내려오며 목, 가슴, 그리고 하체까지 휘감아 돌았다.
신비하다고 밖에는 이 광경을 묘사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놀라운 모습이었다.
세상에 그 어떤 희한한 것도 지금의 현상에 비한다면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이리라. 그리고 그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아마 입을 쩍 벌리고 다물지 못할 것이리라.
그렇게 보랏빛 광채가 여섯 번째로 몸을 휘감을 때였다. 동시에 두 노인의 손이 꿈틀거렸고 후∼ 하는 소리를 토해내며 크게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와 함께 처음과는 달리 두 노인의 얼굴에 서서히 혈색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