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77.
푸스슥-
암벽 안에 자리하던 두 노인의 위쪽으로 번개에 맞아 부서졌던 바위덩어리가 거센 빗줄기에 의해 움직거렸다. 위치를 가늠해 볼 때 만일 흑의노인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대로 머리로 떨어질 상황이었다.
이때 보랏빛 광채는 일곱 번째로 몸을 휘감고 있었다. 천천히 하체를 휘감던 광채는 잠시 머물더니 안개가 빠르게 걷혀지듯 대기 중으로 틀어졌다.
푸스스슥-
그 순간 염려스러웠던 일이 벌어졌다. 턱걸이하듯 걸쳐 있던 바위덩어리가 흑의노인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린 것이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일순 흑의를 입은 노인의 하체에서 사라져 가던 보랏빛 광채가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치솟아 오르더니 돌덩이에 부딪쳤다. 그것은 치열하게 흑의노인을 보호하려는 움직임 같았다.
파사삭-
보랏빛 광채는 바위에 부딪쳐 바위를 박살내 버리고 이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광채는 거의 대기 중으로 틀어지려 했던 상태였던지라 바위를 깨부수긴 했지만 온전히 막아내지 못했고 일부 돌덩이가 흑의노인의 머리를 강타하고 말았다.
흑의노인은 충격으로 앉은 자세 그대로 뒤쪽으로 쓰러졌다.
그때 옆자리에 있던 백의노인은 보랏빛 광채가 사라진 후 눈을 떴다.
번쩍.
백의노인의 눈에는 보랏빛 잔광이 춤추듯 일렁이며 돌더니 사라졌다. 백의노인의 얼굴은 어떤 기대감으로 설레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의 입이 열렸다.
“드… 디… 어… 때… 가… 된… 것… 인… 가…….”
그의 목소리는 벙어리가 처음으로 말을 하는 것같이 어설펐지만 그 속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짙은 감회가 서려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흑의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형님… 우리의 때가 되었습…헉……!”
백의노인은 옆의 노인이 당연히 정좌를 하고 앉아 있을 것을 기대했다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경악성을 토해냈다.
“형님, 형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신 차리세요!”
백의노인은 황급히 흑의노인에게 다가가 몸을 살폈다. 주변에 돌 조각이 널려 있고 머리 부분에 돌가루가 뿌옇게 자리한 것을 보자 대충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천극간시공해체대법이 온전히 풀리기 전에 돌 더미가 쏟아져 내렸구나. 아무런 이상이 없으셔야 할 텐데.’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보았다. 그나마 다행히도 몸은 크게 이상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급히 추나수법으로 정신을 차리게 해보았으나 좀체 깨어나지 않았기에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천극간시공해체대법이 풀렸음은 곧 지존이 이곳에 당도하셨음을 의미한다. 아! 지존을 배알해야 하건만 처음부터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다니……. 이 일이 마교의 불안한 미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럼 이 두 사람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이 두 노인은 200년 전 멸망한 마교인이었다.
일명 십절쌍마로 흑의노인의 이름은 능파였고 백의노인의 이름은 능혼이었다. 이들은 형제로 200년 전 당시 후대에 등장하게 될 천마지체를 타고난 마교의 지존을 보필하기 위해 대법을 통해 기다리다 깨어난 것이었다.
‘일단 형님을 편안한 곳에 두고 지존을 찾아뵙도록 하자.’
백의노인 능혼은 계속해서 굵은 빗줄기가 쉴 틈 없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 상태로 형님을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쓰러져 있는 능파를 들쳐 메고 신형을 날려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았다. 얼마 가지 않아 능혼은 여러 동굴이 있는 곳을 발견하고 제일 왼편에 위치한 곳으로 들어갔다.
묘한 것은 그 동굴이 모여 있는 곳 중앙 쪽이 표영이 잠시 비를 피하고 있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형님, 조금만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먼저 교주님을 찾아봬야 할 것 같습니다.”
형님 능파의 몸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것이 결코 새로 모실 교주님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능혼이 그렇게 막 동굴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휘휘휙- 휘히힉-
휘파람 소리였다. 능혼은 뜻밖의 소리에 흠칫 놀라며 귀를 기울였다.
‘오호… 청아한 소리 속에 강력한 내기가 담겨 있지 않은가.’
불귀도에서 휘파람을 불어 신호를 보낼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심장이 거세게 요동 쳤다.
‘이건 필시 지존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소리임이 분명하다. 드디어 200년의 시간을 넘어 마교의 진정한 주인을 만나게 되는 것인가? 과연 천마지체를 타고나신 교주님의 모습은 어떠할까.’
능혼은 휘파람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장중하게 뻗어 나감에 감탄을 발하고 어디쯤에서 소리가 들려오는지 정신을 집중했다. 빗줄기 속에서도 명확하게 퍼져 나가는 휘파람 소리는 뜻밖에도 그리 멀리서 들려온 것이 아니었다.
‘이런, 바로 지척에 계시는구나.’
능혼은 중앙 쪽 동굴에서 소리가 나오고 있음을 간파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제하며 서서히 다가갔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능혼아, 바보같이 더듬거려서는 안 된다. 처음이 중요한 법이야. 지존께 실망을 안겨드려선 안 돼.’
그의 발걸음은 지극히 조심스러웠고 얼굴은 긴장으로 가득했으며 몸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어찌 떨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극간시공해체대법으로 200년을 뚫고 지존을 만나는데 말이다.
‘지존이시여, 설기 능혼이 깨어났습니다. 아니야, 너무 약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신 교주님을 뵙습니다. 속하 능혼, 200년을 기다려 왔습니다.’
능혼은 머릿속에서 온갖 인사말을 궁리했다. 지척인 거리가 마치 십 리라도 된 듯이 멀게만 느껴졌다. 급기야 힘겨운 발걸음 속에서 능혼은 중앙 쪽의 동굴에 이르렀다. 능혼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청아하게 뻗어 나오던 휘파람 소리도 그쳤다. 능혼의 목이 크게 출렁였다. 이제껏 모아둔 침이 일시에 넘어간 것이다.
능혼의 입이 감정의 회오리를 타고 열렸다.
“천하를 굽어보시는 거룩한 지존님을 뵈옵니다. 십절쌍마 능파와 능혼, 이곳에서 200년을 숨죽이며 교주님을 기다렸나이다. 이제 강호에 그 영명하신 권능을 드러내소서.”
가슴 가득 끓어오르는 충정 어린 말이 동굴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가슴 가득 솟아난 말인지라 마음의 울림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능혼은 과연 지존께서 어떤 음성으로 말씀하실지 팽팽한 긴장감 속에 기다렸다.
하지만 정작 동굴 안에 있는 이는 천마지체를 타고난 지존이 아니라 표영이 아니던가.
표영은 뜬금없이 나타난 사람과 또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 표영이 생각하기엔 불귀도에는 아무도 없어야 하는 것이 정상인 것이다.
‘허걱! 누굴까? 설마 귀신은 아니겠지.’
표영은 능혼이 이르기 전 천음조화를 시전하다가 잠이 들었었다.
얼마나 잤을까. 갑자기 섬에 지진이라도 난 듯 커다란 뇌성벽력과 섬을 울리는 진동에 잠이 깼다.
이때가 바로 암벽이 갈라지고 능혼과 능파가 깨어난 시점이었다.
굉음에 놀란 표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미 장작불은 꺼진 지 오래였는데 한 번씩 번개가 칠 때마다 불붙일 만한 것을 찾았으나 마땅한 것을 구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천음조화를 운용하며 휘파람을 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며 ‘지존’에 ‘마교’를 읊어대자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입구 쪽만 노려보게 된 것이다.
이때는 시간상으로 날이 밝아질 때였으나 아직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 차 사방에 어둠이 임한 상태였고 표영은 밖에서 말하는 이가 과연 누구인지도 확인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
표영의 긴장은 능혼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표영에게는 끽해야 귀신이겠지만 능혼에게 있어서는 귀신보다 더욱 두렵고 무서운 지존이니 말이다. 바로 그 지존께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이다.
‘으음, 뭐가 잘못된 걸까? 내 말에 무슨 실수라도 있었던 것일까?’
능혼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한 번 충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신 교주님을 뵈옵습니다. 속하 능혼을 거두어주소서.”
이번에는 어떤 응대가 있으리라 생각한 능혼에게 역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소리는 차라리 듣지 않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거기… 누구세요?”
능혼은 대답을 듣고 하마터면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헉!’
능혼은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가 속으로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 대답은 마치 철퇴로 뒤통수를 강타하는 듯한 충격이었다.
‘거기… 누구세요라니…….’
그가 듣길 원했던 대답이 결코 아니었다. 역대 교주님들의 말투는 이런 것이 아니었지 않던가. 거기에다 지금 들려오는 말투의 어눌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능혼이 기대했던 대답은 대충 이러했다.
-왜 이제야 왔느냐, 시건방진 녀석.
-어떤 새끼냐!
-클클클클…….
최소한 이것들 중 하나가 나와야만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거기 누구세요’라는 말투는 되레 겁을 잔뜩 집어먹은 듯했고 박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위에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누구냐!’라고만 했어도 이렇게 식은땀이 흐르지는 않았을 터였다.
정말 백 번 양보한다 해도 결코 ‘누구세요’는 아니었다. 하지만 능혼은 잠깐 동안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예로부터 전대의 교주님들은 하나같이 괴팍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혹시 이 시대의 교주께서는 나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 억지로 아까처럼 말씀하신 게 아닐까? 그래, 맞아. 그게 확실해. 대법 또한 교주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해제된 것이 아닌가.’
능혼은 다시금 충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속하, 능혼… 200년의 시간을 넘어 교주님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지존을 뵙게 되었으니 마교천하는 눈앞에 이른 것과 같나이다.”
연거푸 세 번씩이나 진지하게 내뱉는 괴상한 말을 듣게 된 표영은 여전히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도무지 교통될 수 없을 것 같은 기이한 흐름이 계속됐다.
‘지존? 교주? 마교천하?’
표영은 얼떨떨해져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능혼은 급기야 이마에서 굵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건 정말 식은땀이었다. 결코 비를 맞고 흘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이게 어, 어떻게 된 거지.’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
“…….”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무 말도 없는 이 순간이 두 사람에게는 그 어떤 시간보다 길게 느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능혼이었다. 하지만 말을 내뱉은 것은 아니었다.
화르르-
능혼이 화염신공을 발휘해 손 위로 불을 일으킨 것이다. 그 불빛은 동굴 안까지 환히 밝혔다. 능혼은 얼굴이라도 봐야겠다고 생각한 듯싶었다. 둘은 불빛으로 인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가득 떠올랐다. 하지만 표영의 당혹스러움은 능혼의 당혹스러움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뭐, 뭐지…….’
도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동굴 안에는 교주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거지새끼가 퀭하니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누, 누구시오?”
그래도 혹시 몰라 능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표영은 이제까지 강호를 주유하며 누구냐는 질문을 한두 번 받아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답변은 한결같았다.
“저, 저는 거지입니다만… 그쪽은 뉘신지…….”
표영은 어눌하게 대답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놓였다. 확실히 귀신은 아닌 것이다.
귀신이 어둡다고 불을 밝혀 사람을 확인할 리는 없을 것이고 말을 더듬거릴 리는 더더욱 없을 테니까 말이다.
“허걱!”
능혼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심장은 쿵쾅거리며 거세게 요동쳤다. 그는 당장에라도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바라보다가 바람처럼 몸을 돌려 신형을 날렸다.
“이게 아냐… 이게 아냐∼”
쏜살같이 튕겨져 나가며 소리치는 능혼의 모습을 보며 표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가 아니란 걸까? 거참 희한한 사람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