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5장 (76/199)

 # 75

75.

제15장 불귀도의 안내자 손패

“불귀도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표영은 노인장에게 들었던 말을 수하들에게 그대로 설명해 주었다.

“저주의 섬이니 뭐니 하는 말들은 신경 쓸 것 없어. 난 마음으로 결정했다. 불귀도는 이제 진개방의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 곳이 될 것이다. 으하하하!”

표영은 들뜬 마음으로 웃어댔지만 듣고 있는 제갈호 등은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방주님, 불귀도에 가셔선 안 됩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까진 없잖습니까?”

“그럼요, 제갈 사제의 말이 옳습니다. 바쁠 것도 없는데 천천히 다른 곳을 찾아보자고요.”

어찌 보면 대단한 충성심이 아닐 수 없었지만 실제 내막은 그보다 현실적이었다. 그 답은 노각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방주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저희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들은 표영을 걱정하는 말을 쏟아냈지만 정작 근본은 ‘자칫 죽기라도 하면 해독은 누가 해준단 말입니까?’라는 말이었다.

교청인도 옥음(玉音)을 울리며 한마디를 보탰다.

“절대로 보내드릴 수 없어요. 제가 아버님께 돈을 얻어서라도 섬을 하나 구해드릴 테니 제발 가만히 계세요.”

표영은 모두의 말을 듣고 감동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너, 너희들이 이 방주를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더란 말이냐.”

이유야 어떻든 수하들이 단결하고 있는 모습은 우두머리로서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좋다, 결정했다.”

표영의 단호한 말에 모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해독 걱정은 없는 것이다. 서로는 의외로 방주가 심약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다.

“생각 잘하신 겁니다. 꼭 섬이 불귀도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제갈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뜬금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 결정했어. 불귀도로 가자. 자, 어서 따라와.”

“네?!”

“이런……!”

“뭐, 뭐야. 대체!”

모두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바삐 표영을 뒤쫓았다.

“정말 그러실 겁니까?”

“아, 정말 짜증나네.”

표영은 유일하게 불귀도로 배를 태워준다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이미 위치는 노인으로부터 들은 터였다. 기실 노인은 끝끝내 말해 주려고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표영이 누구던가. 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야 마는 족속이 아니던가 말이다. 결국 노인은 진드기보다 더한 표영의 끈질김과 할머니에게 일러바친다는 말에 결국 항복하고 만 것이다.

가는 동안에도 연신 만첨이나 제갈호 등이 재잘재잘 거리며 가선 안 된다고 잔소리를 해댔지만 표영의 의지는 굳건하기만 했다.

“염려하지 말라니까. 거지로 살다보면 좋은 점이 뭔지 아니?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지내다 보면 말이야. 자연스럽게 감(感)을 잡는 능력이 생기게 되거든. 왠지 이번 불귀도에 가는 길은 감이 좋아. 못 믿을진 몰라도 이제껏 내 감은 틀린 적이 없었단다. 알겠어?”

표영의 이 말은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비천신공이 늘어가면서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만첨이나 제갈호 등이 그 말을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 그러시다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어차피 방주님과 생사를 함께하게 된 이상 그냥 넋 놓고 있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교청인도 제갈호의 말에 동의했다.

“저도 가겠어요.”

이렇게 되자 처음 불귀도에 대한 말을 들을 때부터 절대 그곳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만첨과 노각은 난처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로서는 불귀도에 가자니 왠지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고, 남아 있자니 후환이 두려웠다.

‘에라, 그래. 함께 죽자, 함께 죽어. 씨팔.’

“저희도 가겠습니다.”

이들 모두는 큰 결심을 하고 한 말이었지만 표영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었다.

“니들 맘대로 해.”

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이제 이들이 철저히 자신의 삶을 맡기고 순응하는 듯한 모습에 흐뭇해졌다.

‘기특한 녀석들, 흐흐.’

노인장의 설명대로 걸어가던 표영은 멀리 작은 움막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곳이구나.”

그곳이 확실할 수밖에 없는 건 움막집 위로 깃발 달린 큰 장대가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깃발에는 붉은 글씨로 불귀도행(不歸島行)이라 적혀 있었다. 만첨과 제갈호 등은 선입관을 가지고 바라봐서인지 몰라도 불귀도행의 붉은 글씨가 유독 불길하게 느껴졌다.

움막 앞에 이르자 노각이 나서서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이윽고 문이 삐그덕 열리며 40대 후반의 비쩍 마른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용모는 마른 몸에 강단이 서려 있는 것이 고집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 표영 일행을 쭉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네놈들에게 적선할 밥은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 봐라.”

큰 덩치를 자랑하는 노각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표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는 밥을 얻으러 온 것이 아니라 불귀도에 가려고 왔습니다만.”

그러자 사내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금 찬찬히 위아래로 일행을 훑어보았다. 그런 행동은 상당히 결례였지만 모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내의 말을 기다렸다.

표영을 만나기 전의 제갈호, 교청인이었다면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났으리라. 하지만 지금에 있어서는 이보다 더한 일까지 겪으면서 이곳까지 온 터라 크게 기분 나쁠 것도 없었다.

훑어보기를 끝낸 사내는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탄식을 늘어놓았다.

“나 손패가 막중한 사명을 받은 지 40년이 지났건만 정녕 오실 이는 오시지 않고 파리만 꼬이는구나. 아, 만고의 세월이여.”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고 나서도 그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갈호나 교청인은 그의 한 많은 세월이야 어떻든 간에 사람을 대놓고 파리 운운하자 기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아직 걸인의 수준으로 말하자면 초보에 불과한 그들인지라 ‘파리’라는 말은 감당키 힘든 것이었다. 제갈호가 성이 돋아 막 무엇이라 말하려 할 때였다.

“하하하하하. 우리보고 파리란다, 파리. 하하하!”

표영의 웃음소리였다. 거짓으로 웃는 것이 아니라 정말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우리 같은 거지에겐 파리라는 말은 대단한 찬사가 아니더냐. 하하하하, 이보다 더한 말이 어딨겠느냐.”

표영은 역시 대단한 거지였으며 개방 방주다웠다. 진정으로 큰 칭찬을 받은 사람처럼 즐거웠던 것이다.

그런 반응에 익히 물들어 있는 만첨이나 노각, 그리고 제갈호 등은 ‘또 발작이군. 또 발작이야’라고 생각했지만 움막 주인 손패는 달랐다.

‘음… 보통 거지 놈은 아니로구나. 저놈이 내가 기다리는 분은 아니겠지만 모욕을 주어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마음만으로 불귀도에 다녀올 자격은 얻은 셈이다.’

“모두 안으로 들어와라.”

들어오라고는 했지만 손패의 말투는 아직도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자, 애들아. 들어가자.”

표영은 당연하다는 듯 안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제갈호 등은 미심쩍음을 버리지 못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의 광경은 사뭇 밖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많지 않은 집기였지만 곳곳마다 정갈함이 묻어났으며 깨끗하게 정돈된 것이 마음까지 차분하게 해주는 듯했다. 집 안에 탁자가 있었으나 의자가 두 개밖에 없어 자리엔 손패와 표영만이 앉았다.

손패의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술이 열렸다.

“불귀도에 왜 들어가고자 하는지는 묻지 않겠다. 하지만 불귀도에 들어가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

모두가 시선으로 묻자 손패가 말을 이었다.

“첫째는 누구나 장난삼아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적당한 사례를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말을 끝낸 손패의 얼굴엔 돈이 준비가 안 됐으면 빨리 나가라는 듯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표영은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라 머리를 긁적였다. 거지가 대체 무슨 돈이 있겠는가.

“음. 그게… 우리가 본래 거지들이라…….”

그러다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교청인! 헤에, 그렇지.’

표영은 고개를 돌려 교청인을 바라보았다. 오가는 대화를 들은 교청인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이것만은 안 돼요. 절대 드릴 수 없어요!”

실제 표영이 제갈호를 보지 않고 교청인만 바라본 이유는 오는 동안 모든 패물과 돈을 어렵게 사는 이들에게 나눠 줘 버렸기 때문이었다. 표영이 ‘거지가 무슨 돈이 필요하냐’며 다 버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교청인은 팔찌만은 절대 안 된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녀로선 어릴 적에 아껴주신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귀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자자, 그러지 말고 어서 이리 줘봐.”

교청인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안 돼요. 이것만은…….”

“걱정하지 마. 나중에 내가 더 좋은 것으로 선물해 줄 테니까.”

표영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슬며시 타구봉을 빼 들었다. 수틀리면 몽둥이가 날아갈 판이었다.

교청인은 씩씩거렸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방주는 여자라고 봐줄 위인이 아닌 것이다. 이왕 뺏길 거 맞고 주는 것보단 그냥 주는 게 나을 터였다.

‘나중에 선물은 무슨……. 평생 거지 노릇이나 할 거면서.’

하지만 어느새 말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약속하신 거죠?”

표영은 얼른 팔찌를 가로챘다.

“약속한다, 암.”

그리고는 팔찌를 손패에게 건넸다.

“자, 이것이면 되겠습니까?”

“음, 좋다. 이번엔 두 번째 조건에 대해 말해 주겠다. 그건 불귀도에는 반드시 한 사람씩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중에 누가 먼저 불귀도에 가겠느냐?”

표영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제갈호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우린 함께 가야 하오. 대체 누가 한 사람씩 들어가야 한다고 정한 것이오?”

손패가 팔찌를 도로 탁자에 내려놓으며 답했다.

“그럼 할 수 없지. 불귀도에 가는 것은 없던 것으로 한다.”

표영이 얼른 끼어들었다.

“제갈호, 가만히 있지 못해? 죽고 싶냐!”

그리곤 손패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먼저 가겠소이다.”

그러자 우르르 입을 열었다.

“안 됩니다. 어떤 곳인 줄 알고 혼자 가신단 말입니까?”

“같이 가지 않는 이상 절대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표영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표영은 그들의 입까지 봉해 버린 것이다.

“지금부터 한마디만 더 내뱉으면 너희들을 두고 어디론가 꼭꼭 숨어버리겠다. 하지만 너희들이 잠잠하면 나는 반드시 이 자리로 돌아온다. 알겠나!”

순식간에 수하들을 벙어리처럼 만들어 버린 표영이 손패에게 말했다.

“갑시다.”

“날 따라와라.”

이윽고 표영을 태운 배는 점점 멀어지며 작은 점이 되었다.

만첨과 노각. 그리고 제갈호와 교청인은 방주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각기 생각에 잠겼다.

‘과연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육지를 떠난 배는 하염없이 바다를 질주했다. 표영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 여러 말을 지껄였지만 손패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묵묵히 배를 진행시킬 뿐이었다. 거의 한 시진(두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희뿌연 안개 속을 지나던 배는 어느 작은 섬 근처에 이르렀다. 배가 섬에 이르게 되었을 때 이제껏 아무 말도 없던 손패가 입을 열었다.

“이곳이 불귀도다. 나는 내일 이 시간에 올 테니 늦지 않게 나와 있도록 해라.”

“수고 많으셨소이다. 그럼 내일 봅시다.”

손패는 불귀도에 여러 사람을 데려다 주었지만 어떤 무인도 이 거지처럼 태평한 모습을 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보통 놈은 아니야.’

이윽고 배를 띄운 손패는 혼자서 섬을 둘러보는 거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배가 서서히 진행할수록 거지의 모습은 점점 작아져 갔다. 손패의 입술이 자신도 모르게 열렸다.

“저 거지가 오시리라 한 그분일 리는 만무할 터. 과연 예언의 때는 언제쯤 이루어진단 말인가.”

그는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에 눈을 돌리며 길게 탄식했다. 과연 손패가 말한 그분은 누구이며 예언은 무엇을 가리킴일까. 지켜볼 일이다.

* 작가의 말

마천루 스토리 3 - 마천루 최대의 적

마천루에 적(敵)이 출현했다. 결코 우리에게 적은 없을 것이라 자부했건만 놀랍게도 버젓이 그 모습을 드러내 버리고 말았다. 마천루 작가 사무실에서 적(敵)이라면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적은 형상도 없이 주변을 맴돌아 모두가 글을 쓰려고 하면 나타나 울트라 파워 모드로 방해하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럴 때면 작가들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헤매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바쁘다. 언제나 세상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정의와 그 반대되는 적이 있기 마련인 법. 마징가제트가 있는가 하면 아수라 백작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이 적은 아수라 백작과 같은 허접한 악당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졌다. 또한 깨뜨려 부술 수도 없으니 모두들 힘써 이겨내 보려 하지만 끝내 패배하고 만다.

그럼 마천루 최대의 적, 그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 적의 이름은 '친분(親分)으로, 별호는 정(情)'이라고 한다. 친분은 수없이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사무실 내에서 역효과도 만만치 않게 과시하고 있다. 내가 처음 마천루에 들어왔을 때는 약간의 쭈뼛거리는 머뭇거림과 어색함, 소년 같은 수줍음이 자리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으며 농담을 건네려 해도 몇 번을 생각하고 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도 달라져 버렸다. 형, 동생으로 진하게 엮인 상태에서는 웃고 떠들기와 농담 따먹기가 주된 생활의 일부가 돼버린 것이다.

사실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집중력이 없이는 자판을 두드리기 힘들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예외는 있다. 불굴의 정신력과 집중력을 소유한 『바람과 벼락의 검』의 저자이신 최후식 대형 같은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대형은 한번 글에 집중하면 옆에서 지랄 발광을 한다고 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질 않으신다. 아마도 옆 건물이 포탄에 맞아 부서지고 지진이 일어나 건물 외곽이 떨어져 나가 책상만 덩그러니 남는다 해도 오로지 눈엔 모니터상의 글만 보이지 않을런지. 참으로 경이로운 그 집중력에 이 자리를 빌어 마음을 다해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짐작컨대 그런 정신력이 『표류공주』나 『바람과 벼락의 검』처럼 훌륭한 문체와 구성력을 지닌 명작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본인이나 다른 작가들처럼 고요함(?)과 아늑함(?)을 최고의 환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친분으로 인한 소란스러움은 난제(難題)가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글이 안 풀린다며 왔다 갔다 혼잣말을 하게 되면 여차저차 말이 오고 가게 되어 삽시간에 분위기는 전염되고 만다(아마 그 주범은 내가 아닐지… 깊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농담이라도 한마디 나올 것 같으면 그것이 두 배로 증폭되고 다시 열 배, 그러다 100배로 증폭, 변형, 확장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시간은 우리들 몰래 후닥닥 달아나 버린다.

그러다 보면 정작 글 쓰는 시간이 10분이라면 쉬는 시간은 3시간 정도가 될 지경에 이르고 만다. 즉, 마천루 작가 사무실이 아닌 마천루 놀이방, 마천루 휴게실로 변화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 글을 좀 써볼까 하면 머피의 법칙이 다가온다. 꼭 마음 잡고 글을 쓰려고 하면 식사할 시간인 것이다. 서로들 무엇을 시킬 것인지 한참 동안 머리를 굴린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주르륵… 식사 배달 기다린다고 다시 시간이 주르륵… 그 후 식사를 마쳤으니 티타임이라고 커피 한잔하다 보면 주르륵… 이렇게 하루 를 보내고 나서 결과물을 들여다보면 모니터에는 챕터 제목만 덩그러니 남아 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좀 더 나은 성과를 보이는 경우엔 글 속의 주인공들이 몇 마디 나누기도 하지만 그것도 아주 적은 양에 불과하다. 이 얼마나 엄청난 폐해인가.

하지만 친분이라는 적은 만행을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특이하게도 친분은 또 다른 동료를 데리고 다니는데 그 동료의 이름은 게임이다. 작가들마다에겐 좋아하는 게임이 있는데 그중 단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은 스타크래프트라는 악당이다.

스타는 혼자하는 것만으로도 그 작가에게 글을 못 쓰게 하는 병균을 뿜어대지만 전염성도 탄저균이나 천연두에 못지 않게 막강하기 이를 데 없다. 스타에 열광하는 이들은 한참 혼자하다가 지겨울 때면 편을 나누고 대전에 들어간다. 그래도 끈끈한 유대 관계가 악화될까 염려해 꼭 싸울 때는 작가 대 작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작가 대 컴퓨터로 맞추어놓고 게임에 임한다.

어찌 보면 좋은 구도인 것도 같지만 실은 악한 적을 더욱 키우는 것일 뿐이다. 나는 스타를 전혀 하지 못하지만 과거 임진록을 해본 터라 개념이나 방식은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임진록이나 스타나 내 관점에서는 이건 순 노가다가 아닐 수 없다. 미네랄을 채취하고 가스를 생산하며 기지를 짓느라 힘을 쏟다니. 허나 다른 스타를 즐기는 작가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스타를 하지 않는 작가로는 나와 한성수님, 그리고 목정균님, 임무성님 정도다. 어떤 면에서는 이들은 피해자다. 반면 스타에 열광적인 분들은 집중력의 달인 최후식 대형과 조진행님, 그리고 일묘님, 홍성화님이다. 이들은 서로 눈만 마주치면 파파팟 불꽃을 튀기며 누구든 말을 꺼낸다.

"스타 한판?"

"좋지."

제안도 짧고 대답도 간결하기 그지없다. 그들에게서 '지금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란 말은 거의 백 번에 한두 번 정도 나올 뿐이다. 이런 폐해는 케이블 TV 중 게임 방송 시청에까지 다다른다. 특히 마천루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프로 게이머 임요환님의 게임 때는 모두가 다 TV 앞에 모인다. 이때는 참으로 진지하기 이를 데 없어 긴장감이 주변을 휘감는다. 이때 만약 누군가가 떠들다간 연환퇴의 발차기나 강룡십팔장 같은 장력에 얻어맞아 사망에 이르게 되기에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환경에서 잘하지도 못하는 게임이지만 어느새 임요환의 팬이 되어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좋아하니 나도 좋아지게 된 것이다. 시청 중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란 광신도들이 따로 없다. 처음 TV가 들어올 때는 순 기능적인 목적을 지니고 입성하게 되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한다는 것과 해외에서 고생하는 박찬호는 응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도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있고 박찬호는 쉬고 있는데 우리의 TV는 게임 방송 보내기에 바쁘다.

여기까지 스타의 폐해에 대해 말했지만 그렇다고 본인이 아예 게임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난 그 이름도 찬란한 피파축구를 한다. 실제 축구는 못하면서 보는 것과 게임은 즐기는 편이다. 쉼없이 골을 넣다 보면 기분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피파 중독이란 말인가). 최근에는 용산 갈 기회가 있어 피파2002 정품 시디를 구입했고 홍성화님을 끌어들여 맞상대로 열심히 경기에 열중 중이다(그래서 다른 분들이 스타한다고 해도 아무 말도 못한다-_-;;).

홍성화님은 게임의 귀재가 분명하다. 근 1년 간 피파만 해온 나의 실력을 단 일주일 만에 능가해 버리는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전에 플레이스테이션2가 있을 때도 DOA2에서도 얼마나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던가. 플스 2의 달인 목정균님과 맞짱뜰 수 있는 유일한 게이머가 바로 홍성화님이다.

하지만 모든 작가가 다 게임에 빠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마천루 작가 중 게임을 멀리하는 분도 있으니 그는 바로 한성수님이다.

사실 멀리한다기보다는 컴퓨터 환경이 따라주지 않는 점도 한몫 단단히 하지 않을까 싶다. 여태까지 그는 구형 초기 펜티엄 버전으로(기가급 시대에 아직 75메가짜리를) 글을 쓰고 있다. 랜도 설치되어 있지 않고 구형 14인치 모니터로 작품을 뽑아내고 있으니 그저 대단하다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게다가 그는 성실한 작가로 우리들 사이에 정평이 났기에 별명은 사자후, 혹은 성실맨으로 통한다. 그는 아직 미혼이니 여성 팬들은 대시를 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그가 선호하는 스타일은 선녀 같은 여자 분들을 좋아하기에 그걸 염두에 둔다면 만남이 수월할 것이다. 누구든 자신이 선녀 스타일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아마 확실할 듯. 눈이 너무 높은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말하는 선녀는 그냥 수수하고 착하다고 하니 말이다.

어쨌든 이제까지 장황하게 마천루의 울트라 파워풀 적(敵)에 대해 설명을 했다. 분명한 건 친분과 게임에 일대 혁신이 일어나야만 한 단계 나은 작가 사무실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하지만 과연 게임을 뛰어넘을 수 있을런지).

만약 마천루가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사무실 이름은 마천루 게임방으로 바꿔 달아야 하지 않을까? 현재 본인은 주화입마 상태에 빠져 3권의 대부분을 집에서 쓰게 되었다(물론 중간에 아이가 아파 입원하는 대사건이 발생한 점도 있지만).

마천루의 회생은 사무실 구조를 고시원 체제로 폐쇄된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서 글을 쓰고 휴게실은 따로 만들어 기분 전환하는 구조로 변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만일 게임으로 인한 주화입마에 계속 빠져들게 되고 그래서 계속 집에서 쓰게 되면 아마도 '마천루 스토리 4'는 기약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요즘 한참 인기를 끌고 있는 DVD에 등장하는 서플(제작 과정이나 감독의 해설, N.G 모음이나 삭제 분량을 수록한 것을 의미)처럼 『걸인각성』에 대한 뒷이야기와 왜 그런 장면이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글을 올려 글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더해볼까 생각 중이다.

예를 들자면 이진구의 동굴 사건이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썼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궁극적인 나의 바람은 오직 사무실의 일대 개혁이다(모든 독자 분들은 한마음으로 성원을 보내주시어 마천루가 훌륭한 작가 집단이 될 수 있도록 기원해 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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