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73.
“방주님, 훌륭하십니다. 정말이지…….”
만첨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말을 잇지 못했고 이미 노각도 노각대로 입만 오물거릴 뿐이었다. 표영은 타구봉으로 둘의 머리통을 통통 두들기며 너스레를 떨었다.
“음… 보기 흉하진 않았냐? 난 칼 들고 살벌하게 싸우는 건 너무 싫더라. 그래도 어쨌든 새로운 부하가 두 명 늘었구나. 둘 다 좀 싸가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흠이지만 차차 지내면서 고쳐 나가면 되겠지.”
표영이 다시 사마복 등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소. 다른 분들은 달리 이견이 있으십니까?”
“…….”
사마복 등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이 없자 표영이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라고 자체적으로 해석해 버렸다.
“그럼 동의한 것으로 알고 잠깐만 다녀오리다.”
표영은 씨익 웃으면서 제갈호와 교청인을 양 어깨에 들쳐 메고 훌쩍 언덕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사마복과 남궁진창이 벼락같이 달려들어 표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오? 괜한 해코지를 했다간 내 검을 원망하게 될 것이오.”
“아, 너무 염려들 마시구려. 난 단지 부하 임명식을 하려는 것뿐이니.”
그러다 표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지. 내가 내 부하들을 데리고 가는 것도 허락을 맡아야 하나? 당신들은 분명 증인으로 약속했잖은가. 혹시 그대들도 내 수하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허나 남궁진창은 여전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 만일 헛수작을 부린다면 그땐 큰일 날 줄 아시오.”
표영은 웃음을 머금고 턱으로 만첨과 노각을 가리켰다. 그건 저 둘이 당신들 곁에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뜻을 짐작한 사마복이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표영은 언덕을 넘어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둘을 내려놓았다. 아혈까지 찍힌 제갈호와 교청인은 말도 못하고 인상만 구길 뿐이었다.
“자, 이 시간은 둘에게 부하 임명식을 거행하겠다.”
‘이 자식이 무슨 짓을 하려고…….’
제갈호도 제갈호지만 교청인 같은 경우엔 더욱 마음이 심난했다.
‘혹시 이 녀석이…….’
그녀는 그저 이 거지가 색마가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자자, 이것은 내 부하들이라면 다 먹어야 하는 것으로 회선환이라고 부르지. 어때, 이름 좋지 않나? 내가 이름을 지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 지은 것 같단 말씀이야. 하하, 이거 쑥스럽구만. 자, 어서 먹어라.”
슬그머니 몰래 제조한 회선환 두 알을 차례로 제갈호와 교청인의 입 안에 고이 넣었다.
“자, 도와주마.”
표영은 목과 식도 부분을 자극해 잘 삼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제갈호와 교청인으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괴상한 환약이 목구멍을 통과하는 것을 그저 눈 뜨고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 표영은 이번에는 주먹만 한 회선환을 만들었다.
“눈 크게 뜨고 잘 봐라.”
표영이 제갈호와 교청인의 눈 가까이에 왕 때를 구경시켜 준 후 가까운 나무에 대고 회선환을 비볐다.
‘이번엔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환약을 나무에다 바르는 거지?’
궁금증에 목말라 둘은 뚫어지게 표영을 바라보았다. 표영은 골고루 나무에 펴 바른 후 둘의 시선을 피해 검지를 나무에 박고 독기를 주입했다.
나무가 건실해 보인 터라 꽤나 많은 독기를 주입했다.
제갈호와 교청인으로서는 표영이 독기를 따로 주입했음은 전혀 감지도 못한 터였다. 잠시 후 나무는 서서히 잎사귀부터 누렇게 변해가더니 흐물흐물해져 갔다. 그 광경은 제갈호와 교청인의 심장 박동수를 다섯 배 정도 늘려주었다.
‘헉! 저 나무가 왜… 어찌 저런 일이…….’
‘나무가 저 지경이면 내, 내 몸은…….’
제갈호와 교청인은 저런 무지막지한 독은 듣도 보도 못한 터였다. 어찌 바르기만 하는 것으로 나무가 저 지경이 된단 말인가.
깜짝 놀라 눈이 두꺼비처럼 변해 버린 두 사람에게 표영이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음… 그렇게 놀랄 필요까진 없어. 이제부터 내가 자세히 설명해 줄게. 한 번만 이야기해 주는 거니까 잘 들어야 해. 알겠지? 지금 이 나무는 독기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너희들도 나무처럼 극독을 꿀꺽 삼킨 것이지.”
거기까지 듣던 교청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건 제갈호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단지 억지로 눈물을 참고 있다는 것뿐. 이젠 죽은 목숨이다.
“음… 너무 괴로워할 것까진 없어. 너희가 복용한 것은 1년 후에 발작하는 독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 1년이 지났을 때 너희가 다시 회선환을 복용하지 않는다면 끝내 저 나무처럼 돼 버리고 말아. 그건 이독제독의 수법으로 독을 제어하는 거라고 할 수 있지.”
표영이 약간의 뜸을 들인 후 다시 입을 옅었다.
“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 독을 해독해 보겠다고 노력하는 짓 따윈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들어봤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오극전갈의 독으로 만들었거든.”
표영은 오극전갈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도록 한 말이었지만 실제 그 효과는 대단했다.
오극전갈이라는 말은 두 사람이 간직하고 있던 마지막 희망마저 걷어차 버린 것이다.
‘씨∼ 오극전갈이라니… 이젠 빠져나갈 구멍도 없구나.’
‘청인아, 청인아. 너는 어쩌다 이런 지독한 놈한테 걸린 것이더냐.’
제갈호와 교청인이 누구인가. 둘은 오극전갈의 독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주르륵 눈물을 흘리는 두 사람을 보며 표영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힘내, 앞으로 잘 될 거야. 내가 보기에 너희 둘은 훌륭한 거지가 될 것 같구나. 잘할 수 있겠지?”
이건 숫제 위로가 아니라 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어쨌든 표영은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믿고 혈도를 풀어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혈도만 풀리면 당장에라도 달려들려고 했지만 이젠 아무 생각도 없었다. 둘의 입장에선 한마디로 인생 종친 것이다.
“어허, 힘내래두. 자, 가자. 아참, 저리로 가거든 괜한 말을 꺼내지 말도록. 그럼 너희들의 신상에 결코 좋은 일이 없을 테니까.”
표영이 앞서 나가자 제갈호와 교청인이 아무 말도 없이 뒤따랐다.
사마복 등은 눈을 가늘게 뜨고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자세히 살폈다. 그들은 제갈호와 교청인이 축 늘어져 있음과 눈에서 눈물을 연신 흘리는 것을 보고 검을 뽑아 들고 표영의 목을 겨누었다.
“너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어허, 애들아. 설명 좀 해줘라.”
표영의 말에 제갈호가 흐느끼며 말했다.
“이분은 나의 방주님이시오. 흑흑흑……. 난 그의 수하로 영원히… 흑흑… 모실 거란 말이외다.”
제갈호는 급기야 소리 내어 꺼억꺼억대며 울어댔고 그 모습에 교청인도 울음을 터뜨렸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사마복 등은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엉거주춤 머뭇거렸다. 제갈호가 울먹이다가 간신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묻지 마시오. 사마 형, 남궁 형, 그리고 주 소저, 그동안 고마웠소. 혹시 우리 집안에서나 날 아는 사람이 내가 어디에 있냐고 묻거든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 주시구려. 난 이제 평생을…… 흑흑흑…….”
그는 다시 설움이 복받쳐 오는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어 교청인도 비슷한 말을 건넸다.
“집안에는 제가 따로 연락할 테니 오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이것이 저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복받으신 분들입니다. 흑흑흑…….”
눈물 콧물 빼는 모습을 보며 표영은 훠이훠이 손을 내저으며 다그쳤다.
“자자, 그만들 울고 어서 길을 떠나도록 하자. 어서어서.”
표영이 앞서자 제갈호와 교청인은 사슬에라도 묶인 듯 그 뒤를 졸졸 따랐다. 사마복과 남궁진창, 그리고 주약란은 한동안 멍하니 그들 모두가 사라진 뒤에도 발을 뗄 생각조차 못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제14장 저주의 섬
제갈호는 늘 생각하길 무공도 무공이지만 외모도 어느 누구에 비해 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었다. 거울을 들여다볼 때면 언제나 스스로 감탄사를 발하며 고개를 끄덕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의 몰골은 어느 누가 봐도 비 맞은 개꼴로밖에는 볼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실로 그런 변화는 참혹하다고밖에는 표현할 도리가 없는 지경이었다.
‘내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되게 되었단 말인가.’
고작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동안에 제갈호는 새사람으로 변하고 말았다. 새사람이 되었다라고 한다면 보통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하, 지난날의 과오를 씻고 선한 사람이 되었군요.’
혹은.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죠.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제갈호의 변화는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마음가짐이고 뭣이고 간에 오로지 거지 중의 상거지가 되기 위한 발악적인 변모라고밖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면 표영은 따뜻하게 다가와 이렇게 말해 주곤 했다.
“힘내라. 거지는 모름지기 거지다워야 하는 법. 조금만 참고 견디면 머리가 가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냄새도 조만간 향기롭게 느껴질 거다. 험험.”
표영은 태연하게 말하는 가운데서도 그나마 양심은 있는 건지, 아니면 제갈호의 비단옷이 단시간 내에 추접스러워진 게 미안한 건지 매번 헛기침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느덧 제갈호는 신속히 쌓여가는 때와 머리에서 눈처럼 쏟아지는 비듬을 바라보면서 점점 거지가 되어갔다. 물론 이제까지 함께 하면서 다른 마음을 품은 적이 없지만은 않았다.
몇 번이고 교청인과 상의하여 탈출을 기도했지만 그때마다 갈등에 휩싸여 머리만 쥐어뜯을 뿐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 달아나 봐야 해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제갈호의 슬픔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기실 교청인에 비하자면 아주아주 상태가 양호한 편에 속했다.
제갈호와 교청인이 비슷한 몰골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쨌든 교청인은 여자인 것이다. 성격이 괄괄하고 호기롭다고 해도 여자는 어쩔 수 없는 여자였다.
그녀는 이제껏 아름다운 미모와 무공으로 오만함에 휩싸여 뭇 남성들을 내려다보았지만 지금은 그녀도 한 명의 거지에 불과했다.
마음에 맞는 훌륭한 청년 무인을 만나 언젠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라는 기대는 산산이 부서져 버린 것이다. 어느 누가 거지 처녀를 사모할 것이며 성혼(成婚)하자고 따라다니겠는가. 이로 인해 그녀는 뒤따르는 내내 눈물을 쏟았다.
어디에서 그리도 많은 눈물이 나오는지 몰랐다. 눈물의 양이 너무도 많은 것을 신기하게 여긴 표영이 한마디 할 지경이었다.
“그러다 탈수증(脫水症) 걸리겠어. 어지간히 흘리라구. 무슨 우물물도 아닌데 자꾸 눈물을 흘리면 되겠어.”
그나마 여기까진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녀의 눈물샘을 아주 삽으로 파내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하긴 눈물을 흘리면 때가 더 견고하게 붙을 테니 그리 나쁜 것은 아니겠군. 교청인, 너는 그 대신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 알았지?”
여자의 눈물에 남자가 약하다고 어떤 놈이 말했던가. 교청인은 그저 하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울어도 표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표영에게 한 여자이기보다는 새로운 개방의 듬직한 수하일 뿐인 것이다.
도리어 늘 말로써 힘과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거지가 되는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하다. 험험, 허어, 경치 좋구나.”
물론 이 말로 힘과 용기를 얻었는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제갈호와 교청인이 비참함을 곱씹으며 서서히 거지로 변모해 갈 때 함께한 만첨과 노각은 반대로 신바람을 냈다.
자신들이야 원래 출신이 사파인지라 뭐 크게 손해날 것은 없었지만 명성이 자자한 칠옥삼봉 중 두 명이 거지가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가슴까지 울리는 기쁨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표영이 내놓은 말이 그들의 마음을 더욱 들뜨게 했으니 그 말은 이러했다.
“험험, 너희 둘이 먼저 들어왔으니 사형(師兄)이다. 제갈호와 교청인은 깍듯이 사형들을 모셔야 한다. 알겠지?”
제갈호와 교청인의 낯빛이 흙빛이 된 것은 당연지사였고 만첨과 노각은 하늘을 날듯 기뻐했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칠옥삼봉의 사형이 되다니. 게다가 저 예쁜 교청인이 날 사형이라 부른단 말이다. 흐흐흐… 난 사실 알고 보니 행운아였구나. 일찍 들어오길 정말 잘했어.’
‘앞으로 이렇게 되면 내 밑으로 대체 얼마나 많이 들어올까. 혹시 소림 장문인이라도 들어오게 되는 날엔 그도 내 사제가 되는 것이 아니냐. 오호∼’
물론 제갈호가 처음부터 호락호락 사형이라고 부를 리 만무했다. 하지만 가는 동안 제갈호가 만첨에게 반말로 지껄였다가 표영에게 호되게 얻어터지는 일이 생긴 뒤로는 꼬박꼬박 사형이라 해대니 만첨과 노각의 입은 귀까지 찢어졌다.